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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시절 |
1936 베를린 올림픽 출전 당시 모습 |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다.
일단 올림픽 선수 출전 인원은 3명이였기에 모두를 탈락시킬 수는 없었다지만,
일본 국내 최종 선발전의 1등 기록이 2시간 35분이라는 평균보다 저조한 성적 때문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들어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3위 후보 스즈키 히로시게에 더해 4위를 한 후보 시와쿠 타마오를 예비 후보로 선발시켜 현지에 보낸 이후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를 열었다.
당시 멀리뛰기 대표였던 어느 일본 선수가 일본 육상팀이
조선인 둘 중 하나를 떨어트리려고 하고 있다라는 풍문을 둘에게 전해 주는 등
어느 정도의 수작이 개입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꼼수를 부리고도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가는 반칙까지 저질렀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노하며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고 달렸다고 한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다.
여담으로 지름길로 왔으면서도 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에게
남승룡은 뺨따귀까지 날리며 격분했다고.
시원시원하고 활발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했을 정도면 화가 얼마나 났을지 짐작할 수가 있다.
어쨋건 2차 예선에서 현지 적응에 실패하여 컨디션 난조를 보인 스즈키가 기권하며
1936년 일본 대표팀 마라톤 출전선수 손기정, 남승룡, 시와쿠 타마오 3인으로 결정되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 둘이서 별 말 없이 실력으로 찍어내려 주니 그런 의견은 쏙 들어갔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출발 사진. 맨 왼쪽에서 달리는 382번 선수가 손기정이다. |
이후 8월 9일 열린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2'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사실, 손기정의 금메달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남승룡도 막판에 스퍼트를 내면서 무려 30명을 추월하여 3위로 골인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대표팀으로 함께 출전한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시와쿠는
현지 트레이닝 도중 생긴 물집으로 인해 완주에 실패하였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전 대회 우승자)가
1시간11분29초의 기록으로 선두를 찍었다.
하지만 오버페이스였다. 그는 결국 30km 지점서 레이스를 포기했다.
4위로 달리던 손기정이 1위로 나섰다.
골인 지점까지 그를 앞선 선수는 없었다.
모두 그의 등 뒤에서 뛰었다.
골인 직후 모습 |
손기정이 받은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등록문화재 제489호)[19] |
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당시 한글 표기로는 '슬푸다')라는 석 자가 쓰여 있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상식 사진을 보면 1위와 3위로 각각 단상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손기정은 묘목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남승룡은 어떻게 해서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려 일장기를 가리고자 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할 날에 오히려 슬픔에 사무친 나라 잃은 두 청년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콧날이 시큰해질만한 사진이다.
은메달을 수상한 뒤의 영국 하프 선수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이다.
동메달을 차지했던 남승룡은 훗날,
"기정이가 우승해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실어서 동아일보가 정간당한 일장기 말소사건도 유명하다.
이런 판국이니 조선총독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와 감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이 탓에 올림픽 영웅에 걸맞은 환영 인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기정이 정말로 찬밥 대우를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손기정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암묵적으로
큰 인기와 존경을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식의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본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 아낙들도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찬양하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시의 전문은 심훈 문서에 있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심훈은 이 시를 지은 후 일본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손기정은 스포츠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된 사건 때문에 떳떳이 활동할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아무 죄 없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본에서 우승 소감을 녹음한 내용이 레코드로 남아 있는데, 들어보면 손기정의 고향인 신의주 억양이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내용은 손기정의 자발적인 발언이 아닌 일본에 의해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에 불과했기에, 손기정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기테이(SON, Kitei)'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명백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송환되어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다. 혹시라도 은퇴 전에 독립해서 독립국 선수로 나오는 경우도, 독립 전후의 국적을 다르게 기록할 뿐이다.[28][29] 민족, 출신지, 정체성, 올림픽 이후의 활동 다 필요 없고 오직 대회 당시 소속 하나만 보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공식 인정할 경우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다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각국은 외국 대표 선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나라와 관련이 있는 선수는 자기 나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럴 경우 국적 분류가 완전히 흔들리기 때문이다.[30][31] 한 번 기록되면 평생 정도가 아니라 영원토록 남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 IOC에서는 공식적으로 'Kitei Son, Japan'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 약력에는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한국 이름 손기정이 명시되어 있으며, 창씨개명을 강요받아 일본 이름으로 출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시상식에서의 침묵, 후일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 해방 후 첫 올림픽인 1948 런던 올림픽의 선수단 기수와 조국의 첫 올림픽인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성화 봉송 주자를 맡은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 2011년 12월 9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손기정의 '대한민국' 국적은 인정했지만, 역사 왜곡(Historical Distortion)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력에 있는 국적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한편 공식적이진 않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주 컬버시티에 있는 역대 마라톤 우승자 기념비에 새겨진 손기정의 이름은 1986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국적이 수정되었다. 당사자였던 손기정 또한 기념식에 참석하여 조금이나마 한을 풀 수 있었다.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은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그는 이 순간을 "160cm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고 회고했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손기정은 한민족 인물 중에서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대면한 유일한 인물이다.
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과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약한 것은 죄악이라는 사고방식과 '강한 인간(위버멘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 히틀러 특유의 사상을 고려하면
올림픽에서도 가장 근본있는 하이라이트 종목인 마라톤에서 전세계의 유명한 육상 선수들을 누르고 우승한 손기정에게 느꼈을 호감은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대회의 100m 종목에서 우승한 미국의 흑인 선수 제시 오언스에게도
히틀러가 열렬히 손을 흔들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대계 운동선수들에게는 절대로 축하나 인사를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출전 소속만 일본으로 되어 있을 뿐
손기정이 한국인(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동맹인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맹국이란 것만 알고 있으면 나오는 오류로, 올림픽 당시에는 독일에겐 일본은 적성국이었다.
당시 독일은 중화민국에 주재무관 파견과 88mm 대공포 등 무기를 공급하며
일본에게 빅엿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1차 대전의 일본 제국은 승전국 포지션으로 이것저것 뜯어갔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일본을 견제한다고 중국 국민혁명군을 정예화시켜놓은 게 독일이다.
특히 장개석 산하 직할의 국민혁명군은 독일제 총기와 심지어 작업모까지도
독일 특유의 회색 군복과 단추 두 개 작업모를 그대로 썼다.
이 군사적 지원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에 질질 끌리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니 말 다한 셈이다. 일본이 독일의 동맹이 된 건 베를린 올림픽으로부터 3개월 뒤인
1936년 11월 25일, 방공 협정이 조인된 이후부터였다.
손기정은
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해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했다.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 육상부를 대표해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성전문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 대회 중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7개 팀 중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했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다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 우승을 달성했다.
이렇듯 손기정이 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했다.
당시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전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한국어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학교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보전에는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이 보전에 다니는 것을 꺼렸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관헌은 손기정을 주야로 감시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손기정은 1937년 2학기에
반강제로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편입했다.
그런데 도쿄에서도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 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다.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 관헌이 공중 앞에서 손기정이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결국 손기정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41]에서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2.4. 지도자·체육 행정가로서의 활약
태극기를 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손기정 |
해방 이후 10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손기정은 기수를 맡게 되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서 슬픈 우승을 해야했던 손기정은 개막식에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겨워 마냥 눈물을 흘렸다.
손기정은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감독으로서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훈련시켰다.
1983년에는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발간하고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손기정의 인생 후반부에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장면은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뛴 것을 들수 있다.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봉송 주자가 아닌 성화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손기정이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극비에 부쳐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다.[결국, 손기정이 경기장으로 성화를 들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고 이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스타덤에 오른 육상선수 임춘애가 넘겨받은 뒤 최종적으로 1명의 체육인과 2명의 일반인이[44] 성화를 점화했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의 회고에 따르면 손기정은 본인이 당연하게 최종 성화 점화자로 선택될 거라 생각했는데 대회 직전에 이게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지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성화봉송 때 자신이 있었고 멋있게 달리기 위해 1년이나 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손기정은 결국 자신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시 영상을 보면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 문양의 1988 서울 올림픽 엠블럼을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공교롭게도 황영조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과
손기정이 우승한 날은 8월 9일로 똑같다.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시상이 끝난 직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손기정이 황영조를 만나 격려하는 장면도 유명하다.
이때 황영조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손기정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은메달이 일본, 동메달이 독일 선수라 폐막식 때 태극기 양 옆으로 일장기와 독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는데, 이걸 보고 손기정은 "56년 전 그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3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다"고 감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