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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도심 달린 서울마라톤, 일상회복의 봄 활짝 열다
남녀 모두 국내개최 대회 최고기록
17일 열린 2022 서울마라톤 겸 제92회 동아마라톤에 참가한 100여 명의 국내외 엘리트 선수들이 출발 지점인 서울 광화문 앞을 힘차게 달려 나가고 있다. 서울마라톤이 광화문을 출발해 잠실종합운동장에 이르는도심 코스에서 진행된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2019년 이후 3년 만이다. 홍진환 기자
2022 서울마라톤 겸 제92회 동아마라톤에서 남녀 모두 국내 개최 대회 최고기록이 나왔다. 17일 서울 광화문을 출발해 잠실종합운동장으로 골인하는 42.195km 레이스에서 모시네트 게레메우 바이(30·에티오피아)가 2시간4분43초의 기록으로 국제부문 남자부 정상에 올랐다. 케냐 출신 오주한(34·청양군청)이 한국으로 귀화하기 전인 2016년 이 대회에서 세운 국내 개최 대회 최고기록 2시간5분13초를 30초 앞당겼다. 2위를 한 헤르파사 네가사 키테사(29·에티오피아)가 2시간4분49초에 완주하는 등 1∼3위가 종전 최고기록보다 빠른 ‘기록 잔치’의 대회였다.
국제부문 여자부에서도 새 기록이 나왔다. 조앤첼리모 멜리(32·루마니아)는 2시간18분04초로 가장 먼저 들어와 국내 개최 대회 최고기록을 16년 만에 갈아 치웠다. 종전 기록은 2006년 저우춘슈(중국)가 같은 대회에서 세운 2시간19분51초. 2만 명의 마스터스 참가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해 16, 17일 이틀간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앱을 이용해 각자 원하는 장소를 달리는 비대면 버추얼 레이스를 벌였다.
강홍구 기자, 강동웅 기자
한국서 2시간4분43초… 실력+코스+날씨 ‘찰떡 3박자’
[2022 서울마라톤 겸 제92회 동아마라톤]
1∼3위 바이-키테사-나시멘투… 세계 마라톤 주름잡는 철각들
페이스메이커 없이 기록 경쟁… 평탄한 ‘명품 코스’서 제 기량
바람 없는 최적 기온도 도우미
17일 열린 2022 서울마라톤 국제 남녀부에서 5개의 대회 최고기록이 쏟아진 원동력은 최고의 선수와 코스, 최적의 날씨 등 ‘3박자’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은 개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환경도 중요하다. 개최 도시의 코스와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훈련을 잘 소화한 선수라도 좋은 기록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마라톤 사무국은 2016년 작성된 국내 개최 대회 최고기록(2시간5분13초)을 깨기 위해 세계 최고의 건각들을 초청했다. 이날 2시간4분43초로 남자부 우승을 차지한 모시네트 게레메우 바이(30·에티오피아)는 2019 런던마라톤에서 2시간2분55초를 기록한 철각. 당시 남자 세계 최고기록(2시간1분39초) 보유자로 2시간2분37초를 기록한 엘리우드 킵초게(38·케냐)에 밀려 2위를 했지만 역대 남자 마라톤 랭킹 4위로 세계 마라톤의 복병으로 떠올랐다. 이날 2위를 한 헤르파사 네가사 키테사(29·에티오피아)도 2019년 두바이마라톤에서 2시간3분40초를 기록했다. 3위 다니에우 페레이라 두 나시멘투(24·브라질)는 개인 최고기록이 2시간6분11초로 다소 밀렸지만 이들과 경쟁하며 기록을 크게 단축했다. 2시간4분51초로 자신의 브라질기록은 물론 남미기록(2시간6분5초·1998년 호날두 다 코스타)까지 갈아 치운 것이다.
2시간2∼6분대의 아프리카 철각들은 이날 20km까지 20명이, 30km까지 9명이 함께 달리는 등 서로 자극제가 됐다. 특히 이번 대회는 30km나 35km까지 끌어주는 페이스메이커가 없었지만 1∼3위 3명이 41km를 넘을 때까지 경쟁하며 기록을 단축했다. 여자부에서도 2시간20∼23분대 선수들이 끝까지 경쟁하며 신기록을 작성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서울 도심을 달리는 서울마라톤 코스도 ‘최고’로 평가받는다. 남자 마라톤 한국 최고기록(2시간7분20초) 보유자 이봉주(52)는 현역 시절 “세계적으로 봐도 전혀 손색없는 코스다.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는 오르막이 없고 평탄하다”고 평가했다. 보스턴마라톤(2001년 우승) 등 세계적인 마라톤대회를 섭렵한 이봉주는 은퇴 직전인 2007년 서울마라톤에서 2시간8분4초로 우승했다.
날씨도 좋았다. 이날 출발할 때인 오전 7시 30분엔 기온이 8.6도였고 레이스를 마친 오전 9시 30분쯤엔 12도였다. 마라톤 레이스 최적의 기온은 9도다. ‘기록 단축의 최대 적’ 바람도 남서풍과 북동풍이 초속 1m 정도로 부는 등 거의 없었다.
서울마라톤은 2019년 세계육상연맹이 세계육상 문화유산으로 선정한 데 이어 최고 등급인 ‘플래티넘 라벨’로 인증한 ‘명품’ 대회다.
오세훈 시장-임대기 회장 등 격려
출발선엔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 임대기 대한육상연맹 회장, 최재형 국회의원, 박원하 서울시체육회장, 피터 곽 아디다스코리아 대표이사 등이 참석해 선수들을 격려했다.
양종구 기자
“2500m 고지 하루 30km씩 달렸지만 긴장돼 잠 설쳐”
[2022 서울마라톤 겸 제92회 동아마라톤]
대회 최고기록 30초나 당긴 바이
우승-기록상금 합쳐 2억4000만원
에티오피아의 모시네트 게레메우 바이가 17일 서울 광화문을 출발해 잠실종합운동장으로 골인하는 42.195km 레이스 국제 남자부에서 2시간4분43초를 기록하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바이는 2016년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오주한으로 개명)가 세운 대회 최고기록(2시간5분13초)을 30초 경신했다. 송은석 기자
에티오피아의 모시네트 게레메우 바이(30)는 2022 서울마라톤 결승선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통과했다. 2시간4분43초로 1위. 대회 최고기록을 6년 만에 30초 앞당겼지만 바이는 숨 한번 헐떡이지 않았다.
바이의 평온한 숨소리는 수없이 흘린 땀방울의 결과였다. 바이는 “한국에 오기 전 에티오피아의 고산지대인 아디스아바바에서 훈련했다. 해발 평균이 약 2500m 정도 되는데 여기서 1주일에 180km를 뛰었다”고 말했다. 평지에서 생활하는 스포츠 선수도 10초 이상 뛰면 숨이 가빠지는 고산지대에서 휴식일인 일요일을 빼고 6일 동안 매일 30km씩을 달린 셈이다.
혹독한 훈련으로 무장한 바이도 유서 깊은 서울마라톤의 긴장감을 떨치긴 쉽지 않았다. 바이는 “어제는 대회 때문에 걱정이 돼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오늘 오전 5시 알람을 못 듣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빵 한 조각만 먹고 와서 급하게 뛰었다”며 웃었다. 이날 대회 우승 상금(10만 달러)과 기록 상금(10만 달러)을 합쳐 20만 달러(약 2억4000만 원)를 받은 바이는 ‘어디에 쓸 거냐’는 질문에 “일반 사람들처럼 쓰겠다”는 덤덤한 답이 돌아왔다.
바이는 18세 때 크로스컨트리 선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장거리 달리기에 익숙해졌다. 도로에서 뛰는 게 좋아 5년 전 마라톤으로 완전히 전향했다는 바이는 조국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영웅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49) 같은 선수가 되는 게 꿈이다. 게브르셀라시에는 2008년 10월 베를린 마라톤에서 사상 최초로 2시간 4분대의 벽을 허물고 2시간3분59초를 기록한 인물이다. 바이는 “게브르셀라시에의 업적을 함부로 흉내 낼 수는 없겠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하다 보면 나도 그만큼 존경받는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강동웅 기자
“BTS의 나라서 우승… 상금은 학대여성 돕기에”
[2022 서울마라톤 겸 제92회 동아마라톤]
국제 여자부 1위 멜리
“처음 와 본 도시이자 방탄소년단(BTS)의 나라에서 대회기록과 개인 최고기록을 동시에 세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2022 서울마라톤 국제 여자부에서 2시간18분04초를 기록하며 16년 만에 대회기록(2시19분51초·저우춘슈)을 1분 47초 앞당긴 조앤첼리모 멜리(32·루마니아·사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우승 상금(10만 달러)과 기록 상금(15만 달러)을 합쳐 25만 달러(약 3억 원)를 받은 멜리는 뜻깊은 곳에 이 상금을 사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케냐에서 귀화한 멜리는 모국 여성들이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멜리는 “함께 마라톤 선수를 하던 친구가 자신의 남편에게 살해를 당한 적이 있다”며 “이 때문에 저와 친구들이 기부단체를 이미 만들었고, 상금을 이곳에 사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멜리는 ‘티롭의 천사들’이란 단체를 설립해 폭력에 노출돼 있는 여성들을 돕고 있다.
멜리는 이번 대회를 포함해 42.195km 풀코스 레이스를 단 4차례밖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이날 자신의 개인 최고기록(2시간20분57초·2020 발렌시아 마라톤)도 2분 53초나 앞당기는 등 인생 최고의 레이스를 펼쳤다. 멜리는 풀코스 입문 이전 10년간 하프마라톤 등 중장거리 선수로 활약했다. 멜리는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해 2019년 도쿄마라톤부터 풀코스 레이스 선수로 변신했다. 멜리는 “모든 러너들의 꿈은 풀코스 레이스 완주다. 늘 꿈을 꾸고 있었다”며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데 보스턴마라톤 등 전 세계 유명 도시의 대회에 모두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정훈 기자
“한국마라톤 살아있음을 보여주겠다”
[2022 서울마라톤 겸 제92회 동아마라톤]
2시간11분43초 국내 2위 박민호
개인기록 1년 만에 2분이나 당겨
최경선은 부상 이기고 여자 1위
“오주한(34·청양군청)은 많은 업적을 이룬 선수지만 내년이면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022 서울마라톤에서 개인 최고기록(2시간11분43초)으로 국내 남자부 2위를 한 박민호(23·코오롱)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박민호는 지난해 4월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세웠던 개인 최고기록(2시간13분43초)을 1년 만에 2분 앞당겼다.
국내와 케냐 이원화로 치러진 지난해 대회에서 2시간14분34초로 국내 남자부 우승을 한 데 이어 올해에는 개인 최고기록을 새로 쓰며 서울마라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갔다.
박민호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아시아경기 출전권을 두고) 기록보다 순위 우선의 경기 운영을 하면서 페이스가 오히려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박민호는 “2시간10분 이내로 들어오는 것이 목표다. 한국 마라톤이 침체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전까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2시간11분16초로 국내 남자부 1위를 한 오주한을 조만간 따라잡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2019년 10월 경주마라톤 이후 2년 6개월 만에 풀코스를 소화한 오주한은 “컨디션은 아주 좋다. 앞으로 훈련에 100%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2시간30분42초로 국내 여자부에서 우승한 최경선(30·제천시청)은 결승선을 통과하며 눈물을 쏟았다. 한국 기록 보유자인 김도연(29·삼성전자)에 3분49초 차이로 크게 앞서며 1위를 했지만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던 2020년 3월 무릎을 다친 뒤 달리기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탓이다. 최경선은 “오늘 대회를 스스로 복귀전이라고 생각했는데 국내 여자부 우승을 하게 돼 다시 태어난 날 같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컨디션이 70%가량 올라왔는데, 남은 기간 몸을 완벽히 회복해 항저우 아시아경기에서는 반드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고 다짐했다.
대한육상연맹은 이달 말까지 나온 기록과 메달 획득 가능성 등으로 항저우 아시아경기 국가대표를 선발한다. 오주한과 박민호, 최경선은 올 시즌 각 부문에서 기록이 좋아 대표티켓을 사실상 획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홍구 기자, 김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