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로에 꽃잎처럼)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의 노래를 아시나요?
이곡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78년 6월인데요 Michel Polnareff의
원곡을 박인희씨가 편집해서 음반을 냈는데 그 때는 그다지 주목을 못 받았고
5.18 이 발생한 후로 어느 무명의 편곡자에 의해 다시 가사가 붙여지면서
5월의 노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가끔식 역사의 한 켠에 서 있는 나에 대한 인식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희비가 엇갈리면서 떠오르는 두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2002'월드컵 4강의 감격이고 다른 하나는 80년 5.18 입니다.
대학때 시작된 5.18의 질긴 끄나플이 84년 수경사 헌병대 근무로 이어질줄 누가
알았겠습니까만 제가 5공시절 전통 경호경비를 나갔었고 장세동씨 전역식까지
참석 했다는것 아닙니까,
한번은 고참병과 함께 밀걸래로 아스팔트 연병장에 있는 물기를 닦은적이 있는데
그날 전통이 방문한 날 입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저는 방공방첩 포스터와 조기청소때 새벽종이 울렸네를
불러댔던 386세대 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좌경용공적인 색깔이 내 몸 구석진
곳에 피해의식으로 남아 있는것 같습니다.
난동-사태-의거,민중항쟁으로 명칭이 변천해온 5월의 그 날 무렵, 저는 전남
담양의 D고교에 다녔습니다.
전남대 학생시위를 돌파구로 해서 시작된 광주시민의 시위는 다음날인 19일,
2만여 명 이상의 가두시위로 발전하였는데 그 당시의 주요 요구사항은
`계엄령 해제,전두환 퇴진,김대중씨 석방`등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타오르기 시작한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난데없이 공수부대가 투입
되었는데 무차별로 주검이 되어 나가는 부모 형제를 빤히 보고서 혈기가 많지 않은
사람이라도 눈이 뒤집어 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무등산 타잔(박흥순)을 적어도 이해는 합나다,
제가 5월19일경 하복을 찾아 가지고 오다가 시민군이 탄 대형버스(아세아자동차)와
처음으로 만났었는데 머리띠에 붙어있는 구호가 전두환 퇴진 이었습니다.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들은 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광주 시민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으며 전남일대(나주,장성,담양등)를 제압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기한 휴업에 철없이 기뻐하기도 했지만 광주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의 생생한
진술은 지금도 내가 이따금식 미친놈 처럼 5월가를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때가 딸기 철이었는데 광주로 출하하지 못 한 극상품 딸기를 한 상자에1500원에
사서 먹었고 광주에서는 배추 한폭에 3000원에 거래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금남로에서 충장로(도청)까지는 약 2km정도가 되는 거리인데 주말이며 인산인해를
이루는 명동거리 같은 곳입니다.
저는 종종 사복을 하고 나가서 삼양백화점 앞 우체국 까지 순찰을 했고
그무렵 겨울엔 어머니의 삯바느질 감을 딜리버리 하느라고 주중에도
곧 잘 갔었던 곳 입니다.
아,이제와서 어쩌란 말입니까,
수없이 떨어진 꽃잎들은,
"왜 쏘았지(총) 왜 찔렀지(칼)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망월동에 부릎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리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붉은 피피피"
/헷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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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날짜보고 가슴이 찡해 왔었습니다. 정말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일이겠지요. 다시 한 번 그 날 희생된 동지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