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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40길 46 왜고개(瓦峴)이다.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일곱 분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두 분의 순교자가 43년간 묻혔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이다.
왜고개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왜고개에 묻혔던 열 분의 순교자 중 여덟 분을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왜고개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군종교구는 2013년 12월 15일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 순례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순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를 확장하여 새로 단장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새로 단장된 성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과 기도처 등이 마련되었다.
왜고개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순교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되었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Manbant, 1803-1839년)
샤스탕(Chastan, 1803-1839년) 신부와 앵베르(Imbert,1796-1839년)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었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바오로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 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암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몰래 유해를 거둔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삼성동)으로 세 성직자들의 시체를 옮겨 안장하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박순집 또한 부친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 볼리외 · 도리 ·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왜고개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이곳에 모셨다.
박해가 끝난 후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Blanc, 1844-1890년)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자기 집안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법정에서 증언하였다.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으로 총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순집의 도움으로 1899년 10월 30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왜고개에 묻혀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잠시 모셨다가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삼성산에 모셨던 세 성직자의 유해 또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
같은 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모셨다. 1909년 5월 28일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가
발굴되어 역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朴順集, 1830~1911, 베드로)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와 우세영 알렉시오 등이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군인으로서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몇몇 신자들이 함께 3월 28일(음)에 시신을 찾아내 새남터 부근에 임시로 묻었다가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또 박순집은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7일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일명 승연, 1811~1866,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1795~1866,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박순집의 왜고개 암장 사실을 오기선 신부는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66년 3월 7일 병인박해로 장 시메온 주교(張敬一), 유스토 마리아 백(白) 신부 그리고 루도비꼬
서(徐沒禮) 신부 세 분이 순교 후 군문효시하여 시체를 물샐 틈 없이 수직하는 통에 모래톱에 방치한 지 40일 후
즉 1866년 5월 28일에 무인(武人) 박순집 베드로는 다른 교우 여섯을 데리고 암암 칠야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 무시무시한 새남터 모래사장을 두 패로 나누어 암호를 정해 가지고 땅으로 두더쥐처럼 조금씩 조금씩
기어들어 가면서 한편에서 "예"하면 얼마 간격을 두고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수"한다. 합치면 "예수"란 낱말이 된다.
그래서 자기 동지인 줄 알고 마음 놓아가며 세 순교자 시체 절도사건을 벌인 것이다. 장사이요 억척이던 박 베드로가
세 시체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예"와 "수"가 일초 간에 마주쳤으니 일행 거룩한 일곱 도적이 이 세 시체 앞에 모였다는 증거다.
박 베드로가 장 주교, 백 신부, 서 신부의 수염을 함께 합쳐 입에 물고(그러니 세목이 박 베드로 턱 아래 흔들거렸다)
두 시체는 양쪽 옆구리에 끼고 시체 하나는 업고 암암 칠야 극비밀의 어둠을 갈라가며 탈출했다.
이 왜고개라고 불리우는 와서(瓦署) 자리에 고이고이 암매장을 하고 동서남북으로 발로 걸음을 재고
사면에 암호 표식을 하고 구름과 같이 사라졌다.
그 일곱 분 중의 한분 김 요한(흥민, 興敏)의 계씨를 오기선 신부가 중림동(약현) 교회 보좌신부로
1933년 1월 10일 부임 당시 면담한 일이 있고 이 역사담을 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후 20여년이 흘러 민 주교님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시체 찾기 운동을 벌이고 계셨기 때문에
1890년 인천으로 내려 간지 4년이 되던 해에 박 베드로를 유일한 고증인으로 불러 올렸다. 1894년 5월 22일에
박 베드로는 민 주교님을 위시하여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과 이 왜고개로 갔다. 어느새 이 왜고개는 북망산처럼
수많은 무덤들이 즐비하게 누웠다. 동리 사람들이 몰려나와 남의 묘소를 마구 도굴하니 관가에 고소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청천백일에 느닷없이 먹장 같은 구름이 꽉 끼고 뇌성벽력으로 소나기가 빗발치듯하니
동리 사람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다. 그 틈에 박 베드로가 28년 전 암호 표시했던 무덤을 파헤쳐
그전에 자기가 순교자 성명, 연월일을 먹으로 쓴 사기대접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견됨과 동시에 다시 일기는 구름 한 점 없는 청천백일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고 직접 그 일을
같이 한 김 요한 흥민 할아버지는 신기한 듯 오기선 신부에게 일러주고 또 일러주었다.
박 베드로의 딸 박 사베리오 수녀도 똑같은 회고담을 이 왜고개에 대해서 들려 주셨다. 세분 순교자 유해를
용산 성직자 묘소에 임시로 모셨다가 1898년 5월 29일 명동 성당이 낙성된 후 그 지하실 순교자 유해 안치소로
민 주교님이 옮기셨다."-(경향잡지 1971년 11월호, pp40~42)에서
기와고개 와현(瓦峴)이다.
조선시대 기와와 벽돌을 구워내는 기구 와서(瓦署)가 있던 곳이다.
이 일대에 왜새마을이 있었다. 기왓굴 물주들이 사는 왜새안말도 있었다.
왜새는 왜서가 잘못 전달도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이곳은 한성부 남부 둔지방(屯之坊) 와서계(瓦署契)였다.
이곳 토질은 서울 그 어느 곳보다 기와와 벽돌을 만들기 좋았다고 한다.
흙이 풍부하고 한강물을 끌어 쓰기가 편리한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초기 와서가 설치되었다.
조선왕족실록은 태종 6년 1월 28일 기미 5번째기사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별와요(別瓦窯)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이응(李膺)을
제조(提調)로, 전 전서(典書) 이사영(李士穎)과 김광보(金光寶)를 부제조(副提調)로 삼고,
중 해선(海宣)을 화주(化主)로 삼았다. 해선이 일찍이 나라에 말하기를,
"신도(新都)의 대소 인가(大小人家)가 모두 띠[茅]로 집을 덮어서, 중국(中國) 사신이 왕래할 때에
보기가 아름답지 못하고 또 화재(火災)가 두렵습니다. 만약 별요(別窯)를 설치하고, 나에게 기와 굽는 일을
맡게 하여, 사람마다 값을 내고 이를 사가도록 허락한다면, 10년이 차지 아니하여, 성안의 여염(閭閻)이
모두 기와집[瓦屋]이 될 것입니다"하니, 나라에서 그렇게 여겨, 여러 도(道)에서 승·장(僧匠)을 차등 있게
징발해서 그 역(役)에 나아가도록 하였는데, 충청도·강원도에서 각각 중[僧] 50명과 와장(瓦匠) 6명이요, 경
상도에서 중 80명과 와장(瓦匠) 10명이요, 경기도·풍해도에서 각각 중 30명과 와장(瓦匠) 5명이요, 전라도에서
중 30명과 와장(瓦匠) 8명이었다.
이 와서 설치 3년째 되던 해에 큰 흉년이 들었다. 별와요은 폐지되고 와서만 남는다.
와서는 500여년간 존속되다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그 후 민간들이 이 곳에서 기와와 벽돌을 구워냈다.
특히 조선후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 일본인들이 소규모의 공장을 세우고 벽돌과 기와를 만들었다.
한국의 순교자들이 묻혀있던 곳의 흙으로 명동성당 건축 때 붉은 벽돌을 이곳에서 구웠다고 전한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명동성당의 벽돌을 구운 곳이 외고개(와현리)라는 한국 순교자들이 32년간이나
묻혀계셨던 곳입니다. 30여년 가까이 묻혀계셨던 분들이 다 탈골이 되었더라면 그 분들의 살과 피는
외고개 땅과 흙에 스며들어 있었을텐데, 그 흙으로 명동성당의 벽돌을 구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분들의 피와 살,DNA가 깃든 흙으로 이 명동성당이 지어졌다고 말입니다."
-고 찬근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