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李?, 1407~1454)은 조선 태종의 7남이다. 신령궁주이며 증직으로 신빈(信嬪)이 주어진 영월신씨의 소생이다. 전주이씨 온령군(溫寧君)파의 파조이다. 이정은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다. 스스로를 겸양하여 낮추는 미덕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조가 높아 부귀에 쉽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묘는 양주 미사리에 있다. 이정이 타계하였을 때 3일 동안 조정과 시장이 문을 닫았으며, 나라에서는 마포 40필, 저포 3필, 미곡과 콩 100석, 종이 200권, 석곽을 보내 장례에 쓰게 하였으며, 금표 지역 안에 예장할 수 있게 하였다. 시호는 양혜(良惠)로 주어졌다. 이정은 아들이 없어서 어머니가 같은 아우 근령군(謹寧君) 이농(李?)의 2남 이종(李踵)을 양자로 받아들여 후사를 이었다. 양자인 이종은 우산군이다. 자는 계이(繼而), 호는 정재(靜齋)이며, 승헌대부에 이르렀다.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유학에 이름이 높았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의 당인으로 이름이 올랐으며, 1504년(연산군 10)에는 죄가 더해져서 2남 무풍군(茂豊君) 이총은 적소에서 먼저 사사되었고, 이종은 전 집안이 절도로 유배되었다. 1506년에 적소에서 다섯 아들과 함께 화를 입었는데,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주고받으면서 죽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여겼다. 당시의 뜻있는 선비들은 이종의 인격을 흠모하여 그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이 해 중종이 등극하자 신원을 하여 주고 예장을 하게 하였다. 1705년(숙종 31)에 정려가 내려지고 시호가 정민(貞愍)으로 주어졌다. 이종의 장자는 용성군(龍城君) 이원(李援)이다. 이원은 자가 문연(文淵), 처음에 부정(副正)으로 제수되었으며, 승헌대부가 증직으로 주어졌다. 무오년에 사화에 연루되었으며, 1506년(연산군 12) 적소에서 화를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에 군호가 주어졌으며, 1705년(숙종 31)에 정려가 내리고, 1901년(순종 5)에 정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묘는 고양에 있고, 배위는 평산신씨이다. 이종의 2남은 이총(李摠)이다. 자는 백원(百源),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 또는 구로주인(鷗鷺主人)이다. 자질이 뛰어나고 충성과 효성이 뛰어났으며 맑고 깨끗한 인격과 절조를 갖추었다. 시재가 뛰어나고 음률에 뛰어나 당시 선비들 중 교유하는 자가 많았다. 양화나루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 하나를 띄워 놓고 어망을 비치해 놓고 마음에 맞는 선비들과 노닐었다. 속된 선비가 만나러 오면 손수 배를 몰아 도피하여 만나지 않았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유하였다.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이다. 연산군 무오년에 사화에 연루되어 장형을 받고 거제로 유배되었다. 단천역에 이르렀을 때 현감 용재 이종준(李宗準)과 더불어 송나라 이사중(李師仲)이 당개(唐介)에게 준 시를 벽에 썼는데, 이것을 도백인 이승건이 연산에게 장계로 알렸다. 1504년(연산군 10)에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묘지가 내려지고 도정(都正)으로 증직되었다. 정암 조광조가 경연에서 7부자의 벼슬을 올리고 정려를 내려 줄 것을 주청하였다. 숙종 때 정려가 내려지고, 영조 때 군호가 주어졌으며, 정조 때 소민(昭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시호에 이총의 덕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하여 순종 때 논의를 거쳐 충민(忠愍)으로 시호가 바뀌어 내려졌다. 묘는 벽제에 있으며, 배위는 정부인 평양조씨, 후 배위는 정부인 의령남씨이다. 이종의 3남 이정은 한산군이다. 자는 이직(而直),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이다. 1471년(성종 2) 생인데, 증직으로 자헌대부가 주어졌다. 호기롭고 영준하며 음률에 밝았다. 양화나루에 집을 지어놓고 마음에 맞는 선비들과 교유하며 시를 주고 받기를 즐겨하였다. 이종의 장남 용성군 이원, 2남 무풍군 이총, 3남 한산군 이정, 4남 화원군 이간(李揀), 5남 금천군 이변(李?), 6남 청양군 이건(李?)이 모두 다 당시 선비들이 알아주던 재사였지만, 이총이 특히 뛰어났다. 당시 이종 자제들의 성가는 연산군이 우려할 정도로 높았다. 무오년에 이종과 여섯 아들은 차례로 사화에 연루되는데, 사사될 때 한산군 이정은 36세였다. 무풍군 이총은 먼저 사사되고, 1506년(연산군 12)에 같은 날 6부자가 차례로 사사되었을 때, 좌랑 이장곤은 6왕손이 태연자약하게 담소하며 죽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인물을 아까워하였다. 중종반정 후 한산군 이정에게도 묘지가 주어지고, 도정 벼슬이 주어졌으며, 1540년(중종 34)에는 군호가 주어졌다. 시호는 민절(愍節)이고, 묘는 양주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평양조씨이다. 전주이씨 영모당은 이 한산군 계열에 속한다. 다시 말해 전주이씨 영모당 계열은 온령군파이면서 그 안에서 다시 한산군파로 구분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