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공지영, 창비, 2009.6.-
소중한 사람
자음과 모음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내용의 십 퍼쎈트도 안된다는 기초적인 상식이 떠올랐다.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언어는 그 말을 할 때의 뉘앙스와 앞뒤 맥락과 화자의 태도로 그 의미를 온전히 채운다...p52
모든 진실한 것들이 그러하듯 그것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p94~95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p133
언제나처럼 폭행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버림받고 고립되었다는 느낌,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을 거라는 절망, 그런데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닌 것이다...p148
진실은 말이야,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 거야...p211
어른이 되면 그 대답을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야...p227
우리의 삶이 그냥 먹고 싸는 것, 돈을 모으고 옷을 사고 하는 그 너머의 무엇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p227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p246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p246~247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p257
더불어 함께하기 위해 싸울 때 내가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안 거야...p281
홀로 서고 더불어 산다...p289
삶과 현실은 언제나 그 참담함에 있어서나 거룩함에 있어서나 우리의 그럴듯한 상상을 넘어선다...p293
미화된 언어나 진주를 꿴 듯 아름답게 포장된 ‘말’처럼 가증스러운 것은 없다. 진정한 시에는 가식이 없고, 거짓 구원도 없다. 무지갯빛 눈물도 없다. 진정한 시는 이 세상에 모래사막과 진창이 있다는 것을 안다. 왁스를 칠한 마루와 헝클어진 머리와 거친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 뻔뻔스러운 희생자도 있고, 불행한 영웅도 있으며 훌륭한 바보도 있다는 것을 안다. 강아지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걸레도 있으며, 들에 피는 꽃도 있고, 무덤 위에 피는 꽃도 있다는 것을 안다. 삶 속에 시가 있다...엘뤼아르...p294
*******삶 속에 있는 글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몇 달 동안 옷 한 벌로만 버틴 듯 소매 끝단은 때에 쩔다 못해 번들거리기까지 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한 곳으로 초점이 모아지던 눈.
“샘! 좀 더 있다 들어가세요!”
교무실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젊은 여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왜요?”
입구를 들어서자 이유를 듣기도 전에 냄새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거무튀튀한 자루 한 가득 칫솔과 방향제가 들어있었다. 남자는 꼬깃꼬깃한 종이와 칫솔 뭉치를 내 코 앞에 들이밀었다.
‘저는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해 말을 할 수……칫솔은 만 원입니다.……고맙습니다.’
몇 년 전에 한 번 보았던 사람이다. 그 때는 “전에 한 번 사 드렸어요.”라 거짓말을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솔직히 무서웠고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단지 생김새가 나와 조금 다를 뿐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그가 진짜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안쓰럽다는 마음과 함께 시원한 음료수를 냉장고에서 꺼내어드렸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약간의 거리감은 여전히 존재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쓸 날이 오겠지 하며 칫솔 다발을 책상 서랍 속에 넣었다. 쾌쾌한 냄새는 몇 시간동안 교무실에 여운으로 남았다.
졸지에 생겨버린 칫솔 12개. 케이스에는 금 나노가 들어있다고 쓰여 있다. 방학이 되어 칫솔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방학 다음 날 하나를 뜯어 써 보았다. 좀 부드럽다 싶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파헤쳐진 풀숲처럼 벌어진다. 예상대로였지만 그리 속이 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장애인을 마주 한 경험이 금 나노보다 더 소중하게 묻어나오는지도 모르니까. 소통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우습지만 장애인을 좀 더 자연스럽게 대했던 최초의 날이었다. 장애인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지금은 그를 다시 본다면 아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칫솔질을 하면서 10여 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 S를 떠올렸다.
시험지를 복사기 앞에 서둘러 놓았다. B4용지로 인쇄된 시험지를 A3로 확대해야한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에이! 시험지도 검토해봐야 하고 바쁜 데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시험지를 앞뒤로 복사하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선천적인 시각 장애를 가졌던 S는 교과서를 볼 때면 늘 코를 박고 보아야 했다. 아이의 어머니가 일반 학교를 고집했기에 특수 학급도 없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수업을 받았던 것이다. 담임으로서 나는 시험을 볼 때마다 모든 과목의 시험지를 확대 복사해야했다. 교직에 들어선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때는 아이들보다 교과서 연구에 더 골몰해있을 때였고, 학교의 아이들보다 갓 태어난 내 아이에게 더 눈이 가던 때였다. 생각해보니 S에 대하여 특별히 배려를 한 기억이 없다. 다만 교탁 앞자리에 앉았기에 수업 시간마다 S에게 샤프를 빌렸던 기억만 있다. 그 때 나는 S를 ‘샤프걸’이라 불렀다. S는 1년 뒤 졸업을 했고, 나는 S를 한동안 잊고 있었다.
졸업 후 한참이 지나 S가 같은 반이었던 다른 아이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중학교 시절 얘기를 했고, ‘샤프걸’얘기를 하며 즐겁게 대화했다. S는 오히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준 나를 좋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가끔 번거로워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래서 S가 가고 난 뒤에 한동안 미안했다. 대학 졸업 후 임용 고시 준비를 한다는 소문을 얼마 전에 듣게 되었다.
몸 속에 있는 장기가 뒤죽박죽이 되어 태어나는 ‘무비증후군’이란 병이 있다. 그 병에 걸린 6세의 영국 여자 아이에 관한 인터넷 뉴스 기사를 수업 시간에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심장이 등 쪽에 있기 때문에 운동을 하면 등이 뛴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번의 수술로 희망적인 전망을 가진다며 글이 마무리 되었지만, 그 기사를 접한 아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등 쪽에 심장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아이, 불쌍하다는 아이, 징그럽다는 아이, 나중에 의사가 되면 고쳐주고 싶다는 아이, 정상적으로 태어난 몸에 감사하다는 반응들이 있었다.
긴 팔과 긴 다리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심장병으로 죽을 위험이 높은 ‘마판 증후군’이라는 병도 있다. 거미처럼 손과 발이 길어 ‘거미손가락증’이라고도 불리며 농구 선수나 음악가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환자들의 사진이 올려져있는 사이트를 접속해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거미를 본 듯 징그럽기만 한 팔다리를 자연스럽게 펼치고 있는 그들은 한결 같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들이 지닌 질병보다 그들의 표정이 더욱 놀랍기만 했다. 그 미소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정상인의 것이었다.
아이들이 장애인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도록 이끌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에 장애가 있다고 마음까지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멀쩡한 몸을 가지고도 온갖 거짓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야말로 ‘마음의 장애인’인 것이다. 멀쩡한 몸을 가진 나는 마음까지 멀쩡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본다.
소설‘도가니’에는 장애인이 나온다. 장애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정상인의 마음과 정상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장애인의 마음이 있다. 그들의 진실과 거짓이 도가니에 함께 뒤섞여 상처를 입힌다.
한 편의 시사 다큐 프로그램을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너무나 생생한 묘사가 사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설마 설마하며 인터넷으로 문제의 사건을 찾아보았다. 몇 년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사건이 그려진 뉴스 기사도 소설 속의 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그동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장애인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했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소설 속에서 특히 매력을 느낀 부분은 마지막 부분이었다. 주인공이 멋지게 현장에 나갔더라면 현실감이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오히려 갈등 끝에 상황을 외면한 채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을 선택해버린 주인공에게서 현실의 우리와 닮아있는 공감대가 느껴졌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아팠다고 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아팠다. 밤부터 새벽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다. 중간에 호흡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이 시큰했다. 밤을 새워버린 피곤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가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것은 고스란히 존재하는 현실의 아픔이었다. 아픔으로 쓴 글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진실이 주는 힘이란 이런 것일까? 진실을 향해 몸을 던진 글에는 힘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그려내는 글,
그 속의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글,
그러기에 진실의 힘이 있는 글,
엘뤼아르의 말처럼 삶 속에 있는 글이다.
책 표지의 풀밭 위에 선명하게 찍힌 연두빛 점들처럼,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색깔이 선명한 점이 되어 마음 속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