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출신 여배우 니콜 키드먼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이 있다. 영화 속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주변 현실과 고통스런 마찰을 빚을 때에만 빛을 발한다. 예컨대 어지간히 애를 써 화려한 춤과 노래를 과시한 영화 ‘물랑루즈’에서, 나는 그녀가 전혀 예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저 향기 없는 꽃처럼 느껴졌다. 반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최근 영화 ‘도그빌’을 보자. 인간의 속 깊은 추악함으로 표상되는 도그빌 마을 사람들과의 지속되는 마찰은 키드먼 (신기하게도 주인공의 이름은 그레이스, 디 아더스의 주인공과 동일하다)의 모습을 마치 싱그런 사과처럼 아름답게 만들었다. 다만 영국식 고전적 연극의 향기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할리우드 식 갱 영화로 반전해 버린 마지막 장면이 아쉬울 뿐이다.
|
‘디 아더스’, 강박적 의심이 만드는 공포
내 생각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어둡고 숨 막히는 공포 영화 ‘디 아더스’에서 가장 처연하게 빛난다. 무대는 영국 외딴 섬의 고즈넉한 저택. 주변에 숲이 무성하고 안개가 자주 낀다. 이곳에는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독실한 기독교도 그레이스(니콜 키드먼 역)가 그녀의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아이들은 빛 알레르기가 심해 언제가 컴컴한 곳에 살아야 한다. 따라서 커튼은 항상 쳐져 있고 문은 잠겨 있어야 한다. 그레이스는 방을 지나갈 때 마다 일일이 열쇠를 잠그고 이를 확인하며 다닌다. 이러한 밀폐된 공간, 그리고 그레이스의 강박적, 비타협적 (그녀는 걸핏하면 소총을 든다) 행동은 타인에 대한 의심과 공포로 특징 지워지는 우리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듯 하다.
어느 날 집안일을 돌보던 하인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예전에 이 저택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세 명의 하인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저택에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피아노가 갑자기 연주되고, 닫아 두었던 피아노 뚜껑이 저절로 열린다. 딸 앤은 이상한 남자아이와 할머니가 이 집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를 반복하며 이들을 도화지에 그려 보이기도 한다. 마치 라벨의 음악 볼레로처럼 서서히, 그러나 꼼짝달싹 못하게 관객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치밀함이 돋보인다.
여주인공 그레이스의 편두통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와 별개로 의사인 내 머리 속 한 귀퉁이에는 영화에 나타난 몇 가지 질병에 대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레이스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흔한 신경과 질환을 가지고 있다. 바로 편두통이다. 주로 여자에게 많은 편두통은 보통 한 달에 한두 번씩 환자를 괴롭힌다.1)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상인으로 살아가지만 두통 발작이 오는 날은 몇 시간 혹은 며칠을 머리를 싸매야 한다. 흔히 구토 증세도 동반하며 발작 직전에 눈앞에 캄캄해지거나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는 전조증세가 환자의 1/5 정도에서 나타난다.
편두통의 원인은 아직도 모른다. 한 때 뉴욕 대학의 울프Wolf 박사의 주장, 즉 뇌 혈관이 주기적으로 수축했다가 확장할 때 두통이 발생한다는 혈관 수축 확장설이 우세했지만 요즘은 좀 더 복잡한 이론인 혈관 염증설이 각광을 받고 있다 (하바드의 Moskowitz 박사가 주장). 아무튼 어떠한 유전적인 소질이 있는 환자에게 주기적으로 두통 발작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편두통 소질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편두통 발작은 저절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흔히 여러 주변 상황에 의해 유발된다.2) 영화에서 그레이스는 천정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자 하녀 리디아에게 주의를 준다. 그 이유는 시끄러운 소리가 그녀의 편두통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실은 소리를 낸 것은 리디아가 아닌 ‘the others’의 발소리였지만). 또한 그레이스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타인 (the others)에 대해 몹시 예민하게 반응한다. 타인의 존재에 의한 스트레스는 분명 그녀의 편두통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실제로 편두통 환자들 중에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 예컨대 백화점 같은 곳에 가면 편두통이 유발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월경은 편두통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3). 이런 점에서 편두통은 여성의 병이며, 감독이 의도했던 아니든 편두통으로 신경이 날카로와진 그레이스의 모습은 그녀의 성적 매력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실어증과 햇빛 알레르기
이 영화에서는 그레이스 이외에 그녀에게 오해를 산 어린 하녀 리디아도 신경학적 이상 소견을 보인다. 그녀는 사지와 얼굴이 멀쩡한데도 말을 하지 못한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하지만 하인들은 그녀가 어렸을 때는 괜찮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즉 리디아는 선천적인 귀머거리나 벙어리는 아니며 아마도 뇌 손상으로 인한 후천성 언어장애, 즉 실어증 증세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우리가 배워온 언어는 왼쪽 뇌에 있는 언어 중추에 간직되며, 이 부분이 손상되면 실어증을 갖게 된다. 리디아의 뇌 손상 원인은 당시 유행했다는 결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뇌는 정상인데도 단지 매우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 즉 ‘심인성 실어증’일 수도 있으므로 그녀의 진단은 보류해 두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그레이스의 두 아이가 시달리는 병은 ‘햇빛 알레르기’이다. 햇빛을 오래 쪼이면 피부에 발적이나 소양감에 생기는 이 질환은 결코 드물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아이들처럼 늘 창문을 닫고 살아야 할 정도로 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두 아이는 포르피리아 같은 선천성 유전 질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들의 정확한 병명을 추리할 만한 증거는 영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햇빛 알레르기 환자뿐 아니라 편두통 환자들도 발작 중에는 햇빛을 싫어하게 된다. 빛이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두통 환자들은 두통 발작 당시 흔히 어두운 골방에 혼자 누워 지내곤 한다.
관계 단절이 가져오는 심리적 질병들
두려움이 점점 그 무게를 더해갈 무렵, 마침내 그레이스는 그들을 위협하는 공포의 실체를 깨닫는다. 그레이스 자신, 그리고 그녀의 두 아이가 바로 유령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독일군의 공격 당시 원통하게 죽어버린 영혼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공포의 유령이라 생각했던 자들, 즉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the others’가 이 저택에 이사 온 현세인으로 밝혀진다. 결국 타인들은 저택을 떠나고, 그제야 그레이스는 두텁게 닫혀있던 커튼을 열어 젖힌다. 컴컴하던 실내에 드디어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 때 관객이 받는 감동은 마치 영화 ‘위대한 유산’ (1946 년, 데이빗 린 감독) 에서 장성해 돌아온 핍 (존 밀스 역)이 해비샘 저택의 우중충한 커튼을 열어젖힐 때, 혹은 ‘남아있는 나날’ (1993 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에서 충직하지만 답답한 하인 스티븐스가 (안소니 홉킨스 역) 방안에 갇힌 비둘기를 잡아 푸른 하늘로 날려 보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 환한 햇살과 더불어 두 아이의 질병은 나은 것으로 설명된다. 해설은 없었지만 아마 그레이스를 괴롭힌 편두통도 나았을 것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충돌해 온 그레이스와 딸 앤과의 관계도 회복된다.
겉보기에 공포영화를 표방하고 있는 이 영화는 사실은 언제나 갈등이 존재하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백인과 유색인, 교육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 서로를 공존할 수 없는, 혹은 공포스러운 타자로 바라보는 지구촌의 갈등 -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오직 서로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게 됨으로써 풀리게 됨을 역설한다. 이 영화에 나온 소재 - 육지와 격리된 외딴 섬, 육중한 문으로 외부와 차단된 저택, 바깥 세상을 가리는 짙은 안개 - 이 모든 것들은 타인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리디아의 실어증, 아이들의 햇빛 알레르기, 타인의 존재나 소음에 의해 악화되는 그레이스의 편두통 이러한 질병들 역시 은근하게 이런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사실 편두통이나 알레르기는 완치 방법이 없는 병이다. 편두통 환자는 통증이 찾아올 때 마다 이를 완화시키는 진통제 혹은 세로토닌계 약제를 복용하면서 지내야 한다. 편두통을 미워하지 말고 그저 간혹 찾아오는 심술궂은 친구라 생각하고 함께 지내는 도리 밖에 없다. 만일 두통 발작이 지나치게 잦다면 발작의 빈도를 줄여주는 프로프라놀롤 같은 약제를 매일 복용할 수도 있다. 투약 이상으로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유발요인, 즉 스트레스, 피로, 유발 음식 등을 피하는 것이다. 알레르기 역시 증상이 심할 때는 투약을 해야 하지만 증세를 유발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두통이든 알레르기든 복잡한 세상 속에 타인과 비벼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들의 갈등이 병을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인 점은 동일하다. 많은 경우 이러한 스트레스는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가 건전하게 회복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 이 영화를 본 느낌이 개운한 이유는 이러한 노력이 서로의 이해 부족에 기인한 공포스러운 인간관계를 해결해 줄 가능성을 보여준 때문이지만, 덩달아 고질병인 편두통과 알레르기까지 함께 치유된 기분이 들어서이다.
글│김종성 jongskim@amc.seoul.kr 울산대의대 서울 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
첫댓글 호오.. 이렇게 보니 새롭네요~
저 이 영화 끝부분에서 진짜 소름끼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