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폐소생술
얼마 전, 지역 민방위 훈련 통지서를 받았다. 예비군 시절은 가고 민방위 대원으로 편입된 것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시간에 맞춰 구 문화예술회관으로 갔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의 리웅평 대위가 몰고 온 미그기 한 대 때문에 온 국민이 라면을 사재기하던 시절도 아니고, 통반장들이 완장을 차고 다니며 “307호 불 꺼!”를 외치는 시절도 아닌, 요즘 같은 때의 민방위 교육이란 과연 어떨까, 호기심이 생겼다.
첫 번째 강사는 근엄하게 양복을 빼입은 분이었는데, 최근의 북한 동향에 대해 한 시간 가량 브리핑을 했다. ‘북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북한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서도 안 된다. 남북화해의 시대에 발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결코 경계의 눈초리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다소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민방위 교육이 없어지면 실업자가 되는 분이 최근의 정치 상황에 맞춰 개발해 낸 새롭고 혼란스런 논리인 것 같았다.
그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구청의 민방위 교육 담당자가 올라와 민방위 교육 제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용을 간추리자면 민방위 교육을 받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게 되니 반드시 받으라는 것이었다. 결혼하러 온 신랑과 신부에게 결혼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주례 선생의 말씀 같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였다. 그 얘기 못 들었다고 결혼을 안 할 것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올라 온 강사는 만면에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껏 자기 강의에는 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준비해 온 슬라이드를 침착하게 환등기에 넣고 전원을 넣었다. 야구장을 배경으로 임수혁 선수와 최희섭 선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사는 말했다. 심폐소생술을 즉각 시행한 메이저리그의 최희섭 선수는 즉각 복귀하여 홈런을 날렸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임수혁 선수는 그러질 못했다며, 심폐소생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니나다를까, 지루함에 몸을 꼬던 민방위 대원들의 눈동자들이 번쩍 불을 뿜었다. 그의 청산유수 같은 달변을 듣고 있노라니 지금껏 심폐소생술을 모르고 살아왔던 인생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한 시간의 강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쐬자마자 그 모든 말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민방위 대원들은 수료증을 챙겨 각자의 일터로 뿔뿔이 흩어졌다.
말, 말, 말로 가득한 세상. 오래 살아남는 말은 과연 어떤 것일까, 어때야 하는 것일까. 민방위 대원들이 떠난 예식장에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김영하 안토니오·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