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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섬여행-진도 둘러보기 글/사진: 이종원
남해도와 진도 작년에 남해안에서 가볼 만한 곳을 문의하면 남해도와 진도를 가장 많이 추천했던 것 같다. 두 섬은 모양새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닮은 점이 참 많다. 이순신의 노량대첩이 있으면 진도엔 명랑대첩이 있고,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지족해협이 있다면 진도의 울돌목은 '소리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란 뜻인 명량해협이 센 물살을 자랑하고있다. 그 물살에서 잡아 올린 죽방멸치가 전국 최고라면 간재미의 고소한 맛은 진도를 따라갈 수 없다. 겨울철 남해도가 마늘밭으로 초록빛을 발산하면 겨울 진도엔 파밭이 그 푸르름을 더해준다. 늘씬한 남해대교가 육지로 이어지고 있다면 예쁜 진도대교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 내고 있다. 서포 김만중과 자암 김구등 유배문학이 남해에 꽃을 피웠다면 진도엔 남도화 대가 소치 허련이 있지 않는가? 진도 역시 유배자가 하도 많아 진도사람조차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굶어죽을 판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건의할 정도로 남도의 유배 1번지다. 거친 남해 뱃사람들의 속을 부드러운 유자동동주가 달래준다면 넉넉한 진도사람에게는 화끈한 홍주가 진도아리랑을 흥얼거리게 만든다.
뭐니뭐니해도 삼별초를 빼고 진도를 얘기할 수 없다. 고려조정이 백기를 들고 투항했건만 삼별초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비굴하게 사느니 의연하게 칼을 받는 것이 이들에게는 훨씬 잘 어울렸다. 그 아나키스트 정신은 독특한 섬문화로 이어진다. 진도아리랑의 한 맺힌 소리는 죽어가는 삼별초의 비명처럼 들렸고 씻김굿은 님을 위한 진혼곡처럼 들려 슬며시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풍경화같은 자연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아픔이 묻어 있기 때문에 남해도와 진도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신비한 바닷길 주한 프랑스대사 피에르랑디씨는 지난 75년 진도개 사육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진도군을 방문했다가 바닷길이 열리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랬다. 귀국 후 " 한국의 진도에서 현대판 모세의 기적현상을 목격했다."라고 프랑스신문에 소개하면서 진도의 바닷길은 일약 세계적 관광지가 된 것이다. 진도사람들은 피에르랑디의 공로에 고마움을 느끼고 신비의 바다길이 갈라지는 언덕에 '피에르랑디 기념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3층짜리 전망대가 놓여있어 가장 바닷길이 잘 보이는 곳이며 일출 감상 포인트 역도 하고 있다. 운 좋으면 한라산도 시야에 들어온다고 하니 꼭 가보길 바란다. 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신비의 바닷길은 모세의 기적으로 각인되었지 뽕할머니의 전설은 애써 들을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꼭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이 곳이 남해바다지 홍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뽕할머니의 전설 서기1480년경 손동지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유배도중 풍랑으로 표류하여 지금의 진도군 회동 마을에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호랑이가 어찌나 많았던지 마을 이름조차 호동(虎洞)이라 불렀을 정도다. 호랑이에 물려가는 사람이 많아지자 마을 사람들은 급히이 뗏목을 타고 바다 건너 '모도'라는 섬마을로 피하게 되었다. 너무 급히 바다를 건너는 바람에 뽕할머니를 호동마을에 남기고 말았다. 혼자 남겨진 뽕할머니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매일 용왕님께 기도하였다. 어느 날 꿈속에 용왕님이 나타나 '내일 무지개를 내릴 터이니 바다를 건너가거라' 잠에 깨어나 모도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에 나가 기도하고 있던 중 갑자기 무지개길이 나타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 길을 넘어와 뽕할머니를 찾기 위해 징과 꽹과리를 치며 호동에 도착해보니 할머니는 "나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다"라는 유언만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를 본 주민들은 뽕할머니의 영이 등천하였다하여 '영등살'이라 칭하고 이곳에서 매년 '영등제'라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때 호동마을로 사람들이 돌아왔다고 하여 마을이름도 '回洞'으로 바꾼 것이다. 그 후 자식이 없는 사람,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이 곳에서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2.8km의 바다가 조수간만의 차로 해저의 사구가 40㎝쪽으로 물 위로 드러나 바닷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과학의 잣대로 전설을 읽는 것 처럼 재미없는 일도 없다. 바다가 갈라질 만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뽕할머니를 통해 느껴본다. 바닷길을 바라보고 있는 뽕할머니와 호랑이 석상이 너무 무거워 진도대교를 통과하지 못하고 배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운림산방 가끔 'TV 진품명품'에 등장한 소치선생의 서화는 늘 최고가를 자랑한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명품중에 명품이다. 남도 화단에서 소치선생만큼 영향을 미친 사람이 또 있을까? 소치 허련선생은 1809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를 보이다 28세부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30대 초반 그의 소개로 서울로 가 추사 김정희에게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아 남화의 대가로 성장했다.왕실의 그림을 그리고 두루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추사 김정희가 죽자 더 이상 한양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고향인 진도에 내려와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그림에 몰두했다. 허련의 3남 미산 허형과 손자인 남농 허건이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고, 한 집안 사람인 의재 허백련까지 그림을 익혔으니 한국 남화의 성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운림산방'은 허련이 말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 이름이다. 첨찰산 서쪽, 쌍계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ㄷ'자 기와집인 운림산방이 자리잡고 있다.운림산방 앞 오각으로 만들어진 연못에는 흰 수련이 피고 연못 가운데 직경 6미터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에는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운림산방 뒤편에는 초가로 된 살림채가 복원되어 있다. 남도의 민가답게 꾸밈이 없고 소박하다.
雲林山房이란 이름은 첨찰산을 지붕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치 기념관에는 운림산방 3대의 작품과 수석,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미산 허형, 남동 허건, 임전 허문, 임인 허림 등 대대로 이어온 허씨 집안의 손재주에 허우적 거려보자. 진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대물릴 정도로 예술혼을 자극했고 그 이면엔 땅이 기름져 '한해 농사로 삼년을 먹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진도엔 부자들이 많았다. 그 풍류가들의 수요가 있었기에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토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진도역사관은 지난 11월 초에 개관한 명소다. 삼별초실, 유배문화실,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진도의 역사를 한 곳에 모아 두었다. 왕온의 묘 진도읍에서 운림산방으로 향하다 보면 '왕온의 묘'라 전해지는 무덤을 만나게 된다. 올라가는 계단 양편에 피빛으로 영글어진 동백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적의 칼에 목이 날라간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마지막 자존심이 허망하게 꺾엿던 것이 분했기에 오늘날까지 피눈물이 흘리고 있는지 모른다. 왕온은 고려 삼별초가 몽골군과 대적할 당시 왕으로 추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왕무덤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하며 지금의 묘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몽고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서는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 삼별초군을 그냥 내 버려 둘 수 없는 노릇이다. 무시무시한 화포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몽고군의 공격에 삼별초는 허망하게 무너졌고 그들이 궁궐로 사용했던 용장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패주하던 왕온은 왕무덤재를 이르러 적에게 잡혀 한 칼에 쓰러져야만 했다. 왕온의 무덤 앞엔 왕이 탔던 말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 외롭게 서 있는 석물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형태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졌다. 지난날의 아픔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게지.
첨찰산과 진도기상대 진도 기상대만큼 시원한 눈맛을 보장 받는 곳은 없다. 이 높은 곳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으며 장부에 인적사항만 기재하면 기상대 벤치에 앉아 편안히 다도해의 신비한 자태를 가음 속에 담을 수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진돗개가 유난히 늠름해 보인다. 기상대 바로 앞에 첨찰산 정상이 자리잡고 있어 은근 슬쩍 올라가서 정상의 기쁨을 만끽 할 수 있다. 정상엔 봉수대가 놓여 있다.
첨찰산 정상에서 향동리 가는 고갯길이 나온다. 길 자체가 진도아리랑의 휘몰아치는 가락이다. 진도아리랑 전망대가 왜 고개마루에 서 있는지 펼쳐진 풍광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구불구불 곡선길과 파릇한 파밭 , 시퍼런 바다 그리고 점점히 늘어선 섬들이 장엄한 심포니 연주 같다. 몽고군에 쫒긴 삼별초군이 이 고개를 넘으며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쏟아 냈을까?
진도 아리랑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청천 하늘에 간다간다 내 돌아가요
돌아온 백구마을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고갯길을 넘어갔다. 해안도로 한 편 상큼하게 펼쳐진 바다가 그나마 나를 위로해 준다. 의신면에 들어섰을 때 의리와 신의를 저버리지 않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진돗개 백구였다. 93년 3월 대전으로 팔려간 진돗개가 300km나 떨어진 대전에서 7개월동안 낯선 곳을 헤메면서 진도의 옛주인인 박복단 할머니 품으로 안긴 것이다. 진돗개가 영민하고 충직하고 후각, 청각이 발달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전-전주-광주-해남-진도의 고단한 길을 거닐며 백구는 희망을 잃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컴퓨터 제조회사인 세진컴퓨터 CF에 출연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고 박복단 할머님의 따님이 백혈병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회사가 치료비까지 전액 부담하여 따님의 목숨까지 구했던 것이다. 2000년 아쉽게도 백구는 저 세상으로 가 버렸고 백구의 자식들이 외롭게 할머니 집을 지키고 있었다. 백구 동상과 고인돌 무덤이 마을 어귀에 자리 잡고 있다. '1988.3-2000.2. 돌아온 백구 이곳에 고이 잠들다.'
의신 5일장 시골장터만큼이나 살가운 정을 느낄 만한 곳이 또 어디 있으랴? 특히 문명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난 장터풍경이야말로 살아있는 문화재다.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매생이죽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 좌판에 뭉텅이로 팔고 있는 메생이를 보고 그저 침만 꿀꺽 삼켰다. 서남해 지방의 청정해역에서만 자라는 매생이는 파래와 비슷하지만 발이 가늘고 부드러운 해초류이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임금님께 진상되었던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주로 겨울철에 즐기는 매생이 요리가 최고이며 정월 보름이면 집집마다 빼 놓을 수 없는 향토음식이다.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으며 보관 및 운반 과정도 쉽지 않아 대부분 그 지방에서 소비되어 서울에서는 여간해서 맛볼 수 없는 귀한 음식이다. 장터에는 간재미를 4마리에 만원에 팔고 있었고 갓 잡아온 횟감이 애타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도의 온갖 채소가 좌판에 그득하고 소복히 과일이 쌓여 있건만 예전의 흥겨운 장터분위기는 영 보이지 않는다. 드럼통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파는 이나 사는 이나 옹기종기 모여앉아 세상사는 이야기만 나눌 뿐이다. 배가 고파 식당에 들어갔더니 밥이 다 떨어졌다고 한다. 새벽에 장터 사람들이 몰려와 다 먹었다고 한다. 하루종일 추위에 떨어야 하는 장터 사람들에게 따끈한 한 끼 식사를 양보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진도에서 만난 호떡집은 서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다. 쪼그려 앉아 전을 부치듯 호떡을 지져대고 있다. "천원에 몇 개예요?" "천원에 4개여요." "무지 싸네. 2천원 어치 주세요." 기름을 쩍쩍 발라가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호떡 8개를 금방 만들어 냈다. 우리 일행이 3명인 것을 보고 호떡 하나를 더 만들더니 "똑같이 나누어 먹어야 안싸우재" 넉넉한 고향인심이 묻어 있어 맛도 그만이다. 흑설탕처럼 뚝뚝 묻어나는 정이 오래 오래 진도땅을 지키길 바라며 의신장터를 떠났다.
바다에서 솟아난 샘물-강계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는 장똘배기처럼 여행작가도 여기저기 흘러다니며 아름다운 풍경과 따뜻한 인정을 사러 다닌다. 그걸 잘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팔고 있으니 장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늘 떠돌아 다니면서 나만의 특종만을 꿈꾼다. 해변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강계다. 1799년 마을사람들이 식수를 구하던 중 바닷가 모래밭에서 물이 솟아 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물맛을 보니 기가 막힌 약수였다. 그들은 구멍을 내고 샘을 만들어냈다. 바다물이 빠지면 짠물을 퍼내 조금만 기다리면 약수가 철철 넘친다. 식수를 바닷물로 씻어먹는 유일무이한 샘이기에 1960년대까지 마을주민의 알뜰한 식수로 사용되었다. '江界'라는 지명도 육지물과 바닷물의 경계이기 때문이 얻어진 이름이다.
강계는 굴구이로 유명하다. 해변 한 편에 천막이 늘어서 있다. 집집마다 특수제작한 굴 구이통과 전선을 감았던 나무통이 놓여 있다. "굴구이통이 어떻게 집집마다 다 똑같습니까?" "군청에서 굴 팔라고 천막과 통을 마련해 주었지요."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면 앞바다에서 캐온 자연산 굴을 실컷 맛 볼 수 있다. 진도 홍주를 마시고 있는 옆테이블 사람들에게 애걸복걸했다. "저...진도홍주 한잔 주시면 안될까요?" "어휴..진도와서 홍주 한잔 마시지 않고 돌아가면 안되지라." '캬... 술 맛 좋다.'진도 사람들은 붉은 홍주를 '술 깨는 술'이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홍주는 취하지 않는 것처럼 취하게 만드는 술이다. 마시다보면 자연스레 가락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홍주는 성냥을 그어 대면 불이 붙을 정도로 독주다.
그림같은 죽림리
대파의 슬픔 엄동설한 1월이지만 진도에는 겨울이 없다.차곡차곡 쌓아올린 고랑마다 푸른 파밭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전봇대는 골프장의 깃대처럼 보였다. 진도 대파는 맛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밑둥의 흰 부분이 길고 굵으며 이 흰 밑둥을 날로 씹어보면 향기로운 액즙이 많이 들어 있어 고깃집에서 가장 선호 한다고 한다. 국에 넣으면 다른 지방 파는 가라앉는 반면 진도산은 떠오를 정도로 가볍다. 이렇게 훌륭한 진도 파가 금년엔 애물단지롤 변했다. 전국의 파값이 폭락하여 파값을 끌어 올리기 위해 농민들은 트랙터를 이용하여 애써 가꾼 대파밭을 갈아 엎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자식같은 대파밭을 갈아 엎는 농민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중국산 파 수입과 경기침체 그리고 과잉생산이 뒤엉켜 진도농민은 우울한 겨울을 맞고 있다. 진도읍내 사거리에 내걸린 현수막이 을씨년스럽게 흩날리고 있다 "대파 가격폭락에 예상되오니 대파 물량을 빨리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진도군청"
남도국악원 문화의 보고 진도땅에서 국악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곳이다. 역시 그 문화는 그 지역에서 들어야 제 맛이 난다. 시간: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장소: 국립남도국악원
대극장 첫째주는 진도의 민속예술을 비롯한 남도예술의 진수를 둘째주, 넷째주는 국립남도국악원 남도국악단이 보여주는 정악부터 사물놀이, 창작음악까지 즐길 수 있는 전통음악의 향연이 셋째주에 는 기악/무용/성악 명인들의 깊은 예술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명인들의 예술세계가 펼쳐진다.
배중손장군 사당 남도석성가는데 배중손선생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들어가는 출입문도 한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게 만들었다. 진도의 울돌목처럼 좁다. 주먹을 쳐들고 적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장군의 기개가 느껴진다. 용장산성에서 쫒겨온 배중손장군은 이곳 굴포까지 퇴각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장군이 죽으면 끝날 줄 알았던 삼별초항쟁은 김통정장군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가 2년동안 빛나는 투쟁을 벌인다. 전쟁의 후유증은 진도 민초들의 몫이다. 전쟁에 패한후 진도에서만 1만명의 남녀가 포로로 잡혀들어 갔다.
남도석성 남도석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종 4품을 배치하여 다도해해역을 관찰하고자 세운 성이다. 성의 길이는 610m, 높이 5.1m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성안에는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성을 건너기 위한 쌍교와 홍교는 편마암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기 드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진도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남도석성에서 서쪽 해안으로 놓여진 길은 말그대로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조도, 관매도를 이어주는 팽목항이 아스라이 자리잡고 있고 바다를 향해 동석산이 우뚝 솟아 있다.서남쪽 조도에서 바라보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산을 빙 둘러가면 진도 최고의 시닉 드라이브 코스가 이어진다. 어느 곳에 차를 대도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세방낙조 우리나라 최고의 일몰을 볼 수 있는 세방낙조 전망대가 나온다. 붉은 빛이 올망졸망 떠 있는 섬과 바다를 비추고 있을 때 그 감동은 극에 달한다. 붉디 붉은 진도홍주는 바로 이 낙조를 병에 담아 만든 것이 아닐까?
손가락섬, 발가락섬, 사자섬등 전설속에 나오는 형상들이 온통 바위로 굳어졌다. 전 세계 어느곳을 가도 진도 서쪽 해안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나는 여태 보지 못했다.
군내호 백조도래지 겨울 진도의 진수는 역시 백조를 볼 수 있는 군내호수다. 날개를 쭉 펴며 비행하는 모습은 장엄 그 자체다. 항공사 마크처럼 우아하게 날고 있다. 길조로 알려진 고니(白鳥)는 진도군 군내면 해안 일대와 다도해 해안에서 12월과 2월 사이에 월동한다.
고니는 꼭 가족과 함께 움직인다. 유심히 관찰하면 발레 '백조의 호수' 가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고니는 서조(瑞鳥)로 알려져 있어 많이 날아오는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하며, 사람에게 가까이 하는 것을 좋아해 구미지역과 일본에서는 백조가 먹이를 달라고 접근해 오기도 한다.
고니의 가족들이 물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고 있다. 연속 슬라이드의 모습같다.
'까마귀 검다하여 백로야 우지마라.' 그 백로다. 우아한 백조를 보다가 목이 구부러진 백로를 보니 그다지 애착이 가지 않는다.
하늘을 수놓은 기러기 떼는 히치콕 영화 '새'가 생각난다.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집단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가미카제의 모습이 연상된다.
군내호의 갈대
진도읍 뒷산인 철마산에 올랐다. 이곳에서 바라본 산세가 일품이다.
산과 물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다.
(맛집안내) 1.진도 사랑방 진도의 명사들이 주로 찾는 집이다. 바지락회와 간재미 회가 전문이다. 딸려 나온 상도 한정식상을 받는 것처럼 푸짐하다. 간재미회/바지락회 2만5천원 전화 061-544-4117 진도 읍내 소재
2. 제진관 30년역사의 진도 맛집.간재미 찜으로 유명하다. 요리를 시키고 밥만 추가하면 근사한 한정식 상이 나온다. 간재미회/간재미찜/간재미탕 2만원 061-544-2419 진도교육청 뒷편
3. 제일음식점 한우를 푹 고아 만든 진한 곰탕국물이 일품이다. 정육점을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좋은 재료를 사용한 것이 맛이 비결이다. 딸려 나온 반찬도 정갈하다. 곰탕 5천원 054-543-4107 의신면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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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도 함 가볼까....
16일 해남 대흥사를 거쳐 진도에 갔는데....대교만 보고 그냥왔어요. 이 정보를 알았으면 둘러보고 올것을....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우와~~ 진도 정보 끝내주네요.. 남농 선생 그림 한 점, 친정 아버지께 물려받았는데...우리 대장님 너무 열성적이어 흰 머리 생길까봐 걱정되네요. 글고 '매생이'를 아시다니...? 바다 청정지역에서만 생산되는데, 굴 넣고 끓이면 남편은 대접으로 마신다니깐요...
진도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저희는 백동 마을까지만 휑하니 갔다가 오기 바빴습니다. 저희는 그냥 놓치고 마는 풍경도 대장님의 렌즈에 걸리면 하나의 풍경화가 되는군요. 감사히 잘 봤습니다.
잘 봤습니다...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