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로 했던 건물이 가까워 질때마다 이따금씩 주변에서 섬광이 일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서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거기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더구나 도시 중앙으로 갈수록 거리에 파괴된 전차나 무기, 건물들이 슬슬 늘어나고 여태까지 주위를 지배하던 정적이 깨졌다. 희미하게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 단맛이 좀 덜한 것 같아."
물을 좀 어디서 구했어야 하는데. 입맛이 영 텁텁했다.
"그러니까 마눌님 원하는 거 잘 갖다바치셔야지. 애 키울 때는 잘 먹어야 하는 법이야."
넉살좋게 대답하는 걸 보니 제느는 멀쩡한 모양이다. 예나도 애라면 애지.
제느의 허리를 더 단단히 끌어안고 앞에 보이는 30층 정도 되는 건물로 뛰어 올라갔다. 전에 있던 7층짜리 건물의 옥상에서 구른 단 한번의 도움닫기로 몸이 마치 중력을 무시한 것처럼 쭉쭉 위로 솟구쳤다.
"야, 근데 지금은 괜찮아?"
"응?"
"아까는 왜 그렇게 떨었던 거야?"
"으, 응. 그, 조금 무서웠던 것 같아. 아무래도 분신이다 보니까 힘도 많이 떨어져서…."
왠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제느는 내가 다시 옥상을 박차고 뛰어 오르자 목을 꼭 끌어안았다. 바람을 따라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기분좋게 다가왔다.
"지금은 무섭지 않아?"
"우응. 우리 남편 품에 폭 안겨 있으니까 좋아."
"말은 정말 잘해."
"그럼 말해야 알지. 마음으로 알길 바래주는 거야? 여자는 사랑하단거 다 알아도 사랑해 한마디에 감동받는 법이야."
"그러냐?"
"흥. 나처럼 정말 친절하고 자상한 여자도 없을 거야. 보통은 이런 말 안해준다구."
"푸훗."
"왜 웃어?"
볼멘 목소리를 들으니 제느가 볼을 부풀리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하기사 이렇게 솔직한 여자도 없지. 말을 빙빙 돌리기를 하나, 끌려다니지도 않고 다소곳하게 기다려주지도 않고 말야. 조금만 몸이 닿으면 좋아서 헤실헤실 웃어대고.
"그래.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다. 우리 이쁜이."
"그거 빈말이지? 다 알아봤어?"
"너도 참 의심 많다."
이름모를 삼각형 건물 옥상을 타넘으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제느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항의는 가볍게 무시하고 물탱크 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멈췄다.
"와…."
"뭐야?"
"아니, 저런 큰 게 하늘에 떠 있는 건 처음 봐서."
꽤 멀리 떠 있음에도 웅장할 정도로 거대한 건물 옆으로 치열한 함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배들도 건물 못지 않게 커서 현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그런 배들이 대략 30여척 정도 모여 상처를 입은 채 불꽃을 토해내고 있고 포탄에 맞았는지 검은 연기에 휩싸인 채 천천히 추락하고 있는 배도 보였다.
"좀 대규모네. 여태까지 본 것 중 젤 많다. 외계인 것들 이 대충 14, 이곳 종족 것이 18정도. 좀 불리해 보이는 걸?"
"어휴. 근데 저길 어떻게 가?"
"원래 저런 난전 중에는 감시 같은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어느 전쟁이든 마찬가지지. 지상 병력만 주의하면 우리 둘쯤 숨어 들어가는 거야 식은 죽 먹기야."
"잘못하다 파편 같은 거에 맞을까봐 무섭다. 너 잘못 되면 난 어떻게 하라구."
"자기는 그게 문제라니까. 나 아끼는 건 좋은데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당신 놔두고 죽을까봐? 어차피 지금 이건 내 분신일 뿐이야. 불의의 타격을 받으면 당신한테 들러붙어서 돌아가면 돼. 걱정할 거 없어."
말은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하지만 여전히 불만이다. 어젯밤에도 금방 죽을 사람처럼 골골하더니 지금도 매한가지면서.
"정말 너 말 잘한다. 몸도 이렇게 비실비실하면서."
허리를 팔로 감아 안으니 가벼운 몸이 그대로 휘청거렸다.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는 건지, 짜장면 곱배기는 앉은자리에서 해치우면서 다리는 왜 후들후들 떨리나?
"어떻게 할거야? 저렇게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중요한 건물이야. 자기가 가자고 했으니까 왔지만 정말 우리한테 필요한 용도가 아닐지도 모르지. 어쩌면 도서관 같은 걸지도 몰라."
"도서관? 그런걸 저렇게 목숨 걸고 지킨단 말야?"
"그럴 수도 있지 뭐. 자기도 뭔가 찔리는 거 없어?"
"내가 뭘?"
제느가 입술을 비틀더니 뭐라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외면한다. 아니, 내가 뭘 어쨌기에 저런 반응이 나와? 그리고 거기서 내가 어떻게 연결 되는거지?
"왜 그래? 꼭 한심하다는 투 같다?"
"한심해서 그래."
"나 참, 만날 어디가 그렇게 한심해?"
"몰라. 그걸 꼭 말해줘야 알아? 자기도 가끔은 땅 짚고 헤엄치기 해봐."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저렇게 뱅뱅돌려 말하면 여자들끼리 뭐가 뭔지 알기나 할까?
"에휴. 하여튼 여기서 쉬었다 가자. 저기를 어떻게 지나갈 거나 생각해봐."
"흥."
파이프 위에 털썩 주저앉자 제느도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매달려 오느라 힘들었는지 군말 없이 앉았다. 갑자기 번쩍하더니 건물에서 먼 쪽에 떠 있던 파란색 전함의 앞부분이 폭발하며 파편을 흩날렸다. 몇초 뒤에 폭음이 들렸다.
"하아."
제느는 눈을 감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기는 분명 운명을 건 일대 결전이겠지?"
"뭐, 그렇겠지,"
허탈할 정도로 한가한 대화를 나누며 관전하는 가운데 또 다른 우주선 하나가 집중포화를 얻어맞더니 그대로 용골이 부러져 반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멀리 있음에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정말 강력하다. 나는 괜찮았는데 제느는 팔로 얼굴을 가리더니 내 뒤로 숨어 들었다.
"우왓!"
"또 터졌네. 귀 막어."
"응? 뭐?"
내가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하자 제느가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거대한 화구가 공중에 피어난 가운데 뭔가 흐릿한 것이 몰려온다. 기세가 자못 대단했다. 곧 이어 땅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굉음이 귀를 짓눌렀다. 이걸 말하는 거였어?
"으아악! 이게 뭐야!"
"온다! 피해 자기야!"
한 마디만 하더니 제느가 파이프 위에서 뛰어내렸다. 혼자만 도망치면 난 어떻게 하라구? 그러나 머뭇대는 순간 강렬한 열기가 느껴져 허겁지겁 뛰어내리자 머리 위로 거센 돌풍이 불기 시작하며 온갖 파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좀 빨리 알려줘! 이게 뭐야!"
"으휴! 이거 당연한거 몰라?"
냉장고만한 돌덩어리가 앞에 있던 건물에 틀어박히는 걸보고 더 이상 제느를 책망할 수가 없었다. 저런거에 찍혔다간 무사하지 못할 거다. 혹시라도 몰라 제느를 품에 끌어당기고 폭풍이 잠잠해지기만 기다렸다.
"이게 도대체 뭐야?"
"여태 학교에서 뭘 배운 거야? 핵폭발이 일어나서 후폭풍이 닥치는 거잖아."
등을 기댄 파이프에 묵직한 것들이 부딪힐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 한데도 제느는 산들바람이라도 부는 듯 태평하다. 아, 어쩌면 이렇게 멀쩡할까?
"윽. 뭐야."
"긴장감을 좀 가져 주세요."
이런 상황에 마누라 코를 잡고 흔드는 나도 참 태평하긴 하다만 그래도 나는 상식있는 정상인이다.
"바람이 안 멈추네."
"그러게."
웅크리고 앉은 지도 꽤 지난 것 같은데 먼지 섞인 바람이 그칠 줄 몰랐다. 커다란 건물 파편이나 자동차가 날아다닐 정도로 거센 것은 아니었으나 날아다니는 파편들은 아직 상당했다. 앞에 보이는 빌딩은 파편을 얻어맞고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다.
"나 무릎에 앉혀 줘. 엉덩이가 차가워."
"차가워?"
제느가 칭얼대며 옷자락을 끌었다. 콘크리트 바닥이라 조금 차갑긴 하지만 앉을만 했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제느를 보니 치맛자락이 찢어져 있고 스타킹의 올이 나가서 구멍이 뚫려있다. 소매 하나 더러워지지 않은 나와는 정말 대조적이다.
"이거 입어."
정말 오지에서 몇 일 고생한 사람같네. 불쌍해서 도대체 어떻게 봐. 교복 자켓을 벗어 어깨에 걸쳐주니 훨씬 낫다. 내친김에 벌어진 셔츠 단추도 잠궈 주니 제느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야, 도대체 셔츠를 얼마나 작게 입으면 단추가 뜯어지려고 하냐?"
빤히 바라보는 것에 무안해서 얼버무렸더니 한층 더 시선이 강해졌다. 이거 꼭 장난치자고 보채는 것 같네?
"왜? 풀어 줘?"
이번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자켓 자락을 손으로 여몄다. 그러더니 음흉하게 웃으며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후흥."
"이번엔 무슨 장난이야?"
"이번엔 무슨 장난이야?"
"나 참."
"나아, 참"
갑자기 웬 장난일까? 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그 이상의 말을 멈춘 제느가 입술을 고양이처럼 오무렸다. 그때서야 내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란 걸 깨달았다. 얼굴 여기저기를 자세히 훑어보는 시선에 절로 부끄러워졌지만 가만히 있으니 제느는 만족한 듯 얼굴에 웃음을 띄운다. 하얀 얼굴에 검댕과 먼지가 묻어 지저분했지만 여전히 이뻤다. 이 콩깍지 어떻게 하나?
"아, 햇볕이다."
"바람도 줄었어. 이제 괜찮은가?"
먼지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는 것이 보이니 어느 정도 폭풍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바람이 슬슬 잦아지고 나서 보니 온 몸에 먼지가 앉아 하얗다. 털어내니 그림자가 진 곳에서 가루들이 반짝 반짝 빛난다. 여태 몰랐는데 파이프나 바닥, 건물들도 온통 희끄므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공기 중에도 하얗게 빛나는 것들이 수 없이 떠다닌다.
"에잇. 더러워. 어디가서 씻을 데 없나?"
"설마 이거 방사능 낙진이야?"
"응. 맞아. 우리한테는 별 해가 안되니까 걱정 마."
방사능 낙진이 괜찮은 거라. 몸에 별 이상은 느껴지지 않지만 왠지 무서워 옷소매를 조였다. 보기에는 보석처럼 예쁘게 빛나는데 실상은 죽음의 재라.
"뭐야? 자기 혹시 이 먼지 빛나는 거 보여?"
"응? 하얗게 빛나는데? 반사되는건 아냐."
제느가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다 말고 손을 내밀었다. 손에 묻은 먼지가 하얗게 빛난다.
"정말이야? 방사능이 보여? 감마선은? 다른 건 보여?"
"어, 이게 하얗게 빛나는 게 방사능이라고?"
"응. 이제 보이는 구나. 그동안 걱정했어. 그런거 보여야하거든."
보여야 하는 건가? 제느는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째 좀 찜찜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이게 빛나는 게 방사능이란 말이지? 파이프 위로 고개를 내밀고 슬쩍 동향을 살피니 전함이 폭발한 장소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라있고 폭발 때문에 밀려난 우주선들이 몸체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며 간신히 떠있었다.
길다란 제느의 머리카락을 털자 먼지가 한가득 퍼졌다. 여기저기 검댕이 묻고 스타킹도 이리저리 줄가고 옷은 엉망인데도 머리카락만 반짝반짝 빛난다. 이리보니까 정말 한 몇 달 고생한 것 같다. 되게 불쌍해보이네.
"쿨럭! 털지마! 먼지 나잖아! 정말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거야."
"다 먼지투성인데 뭘 그래?"
"이래서 남자들이란. 털어도 좀 바람이 부는데서 털란 말야. 먼지가 도로 다 붙잖아."
아니 나는 그냥 먼지 털었을 뿐인데 이게 웬 날벼락? 제느는 갑자기 히스테리라도 터진 듯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다가 다시 깜짝 놀랐다.
"아! 읏.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 미안해 자기야. 맘 상했어?"
"잠깐만, 우리 너무 날카로워진 모양이다."
불만은 있지만 별 내색을 안 했다. 하긴 저렇게 엉망이 되어 가지고 좀 스트레스가 쌓였을까. 그 여신님 몰골이 지금 말이 아니고 가진바 능력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니 오죽 답답하겠어. 내가 다 받아들여줘야지.
"히잉."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제느는 금새 울먹거리며 눈물방울을 매달고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나랑 둘이 있으니까 좋지?"
"그게 무슨 태평한 말이야. 이럴 때가 좋은 기회니까 빨리 가. 나 본신 죽으면 얼마 못 살아. 눈앞에서 내가 말라 죽는거 좋아?"
누가 말라 죽는거 보고 싶댔나? 안 그래도 출발하려고 했건만. 채근하는 제느의 허리를 다시 안고 파이프 위로 올라갔다.
"너 허리 진짜 높다. 힐 좀 벗어봐. 발 아프지도 않아?"
"흥. 여신님은 이런거 신어도 말짱해요. 내 다리 예쁘지? 그렇지?"
제느는 언제나 칭찬이 듣고 싶은가보다. 하기사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니까 해서 나쁠건 없지.
"그래. 보기만 해도 숨막힌다. 정말 예뻐."
"어머 빈말. 마음이 하나도 안 느껴져. 다시 말해봐."
별로 성의가 없었는지 제느가 턱을 치켜들고 응수했다. 얘는 뭐 이리 강력한거야? 다른 사람들은 빈말로 해줘도 좋아라 하더니만. 슬쩍 엉덩이를 만졌더니 대번 입술을 삐죽이며 뺨을 붙잡혔다.
"뭐야? 제대로 해줘. 그 전엔 허락 못해."
"먼저 달려들 때는 언제고. 그런데 지금 이럴 시간 없는거 알아?"
"흥 칫 핏."
자기가 보채놓고 시간 끌고 있다는 건 아는지 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우주선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핵폭발 뒤로 양측 우주선들은 서로 무기를 집어넣은 채 천천히 건물에게서 멀어져갔다. 아무래도 양쪽 다 싸움의 의지는 멀어진 모양이다.
"와우. 건물은 상처하나 없는데?"
"괜찮은 것 같아?"
"유리창 하나 깨지지 않았어. 안 보이는 보호막 같은 게 있나봐."
"그럼 더 좋지. 빨리 가자."
지붕을 뛰어 건물로 접근할수록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시계가 불투명해졌다. 사방에 온통 먼지와 잔해, 불꽃뿐이다. 도시의 곳곳에서 거세게 화재가 타오르고 있었다.
제느는 그런 상황에서도 앞에 있을 건물을 정확히 가려냈다. 나는 주변이 온통 희뿌연하게 빛나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는데 먼지 속을 알아보고 일일이 예고해주는 것이다.
"다음 번, 30m 앞에 70층 짜리 빌딩!"
"응!"
먼지 구름 속에서 갑자기 건물이 튀어나왔다. 유리로 된 외장이 전부 박살나고 파괴된 내부 골조가 앙상하게 남아 있는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이었다. 적당히 접근한 순간 부서진 벽을 밟고 위로 뛰어 올랐는데 그순간 건물 자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힘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다음 건물은 어디야!"
"이봐 아저씨. 재미없게 자꾸 비명이나 꽥꽥 지를래요? 안 뛰어도 날 수 있잖아. 뭘 기겁하고 그래?"
이렇게 천하태평 하다니! 한가할 정도로 멀쩡한 목소리에 속이 끓어올랐지만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위험에 대응해야 했다. 머리 위에서 무너진 건물 파편들이 떨어지는데 워낙 시야가 나빠서 피하기에 급급했다. 더구나 등에 업은 제느가 행여나 맞지나 않을지 너무 불안하다.
"위에 파편 하나 떨어져! 피해!"
"빨리 좀 말해 줘!"
눈앞으로 달려드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이를 가리키는 제느에게 이를 갈며 옆에 떨어지는 작은 돌 조각을 발로 찼다. 힘 받을 데 없는 공중이지만 이렇게 차 날리면 나도 반대로 힘을 받고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돌덩이를 피했다. 자동차만한 콘크리트 더미가 웅 하고 공기 울리는 소리를 내며 지나쳐가자 더 이상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
"나도 저거 다 보려면 눈 아파! 이 먼지통 속에서 어떻게 하라구!"
제느가 거칠게 항의하며 팔로 목을 조른다. 숨이 막혔지만 떨굴 수도 없고 밀칠 수도 없고 진퇴양난.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냥 냅다 던지고 가는 건데 마누라라 어쩔 수가 없다.
"아, 눈 아파. 먼지 들어 갔나봐. 히잉."
"흥. 쌤통이다."
계속 떠오르던 몸이 점점 느려진다 싶더니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무너진 후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자욱히 피어올랐던 먼지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금방 주변이 환해지며 앞이 분간이 가기 시작했다. 아래를 보니 6층 정도 되는 건물 옥상이 순식간에 닥쳐왔다.
"꽉 잡아!"
착지를 위해 자세를 잡고 다섯까지 세자 바닥에 발이 닿았다. 순간 무너지거나 엄청난 충격이 느껴질 줄 알고 지레 움츠렸는데 힘이 남아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간 것 빼고는 아무렇지가 않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 일 없으니 다행이다.
"저것 봐! 공격하고 있어!"
제느가 팔을 뻗어 가리키는 곳에 흰 연기 무리가 건물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미사일 무리가 날아가다가 허공에서 막혀 폭발하자 건물의 주위로 붉은색 척력장이 번져나가고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건물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던 은색 우주선들이 보이지 않았다.
"탈출 작전이 끝났나? 방어하던 쪽이 모두 도망갔어."
"으엑? 근성 없는 놈들! 빨리 가야겠다."
"방어장이 간당간당한 것 같아. 빨리 가!"
우주선들에서 다시 흰색 꼬리를 끌며 미사일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시퍼런 화염들도 발사돼서 온 하늘을 하얗게 물들였다. 과격하기 그지없는 공격에 건물을 방어하는 붉은색 장막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근거리에서 터진 핵폭발에서도 무사했는데 공격이 집중되자 약해지려 하는 것이다.
"저기! 입구야! 저기로 가! 자기야!"
"어?"
제느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 화염 사이로 기차를 위한 선로 같은 것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부서진 전차 같은 것과 돌덩이들로 엉망이긴 했지만 입구 쪽은 방어장의 영향인지 때때로 붉게 빛나는데 무너지지 않고 아직 괜찮은 것 같았다.
"꽉 잡아!"
허리에 걸쳐진 다리를 끌어안고 옥상 끝까지 달려가 뛰었다. 거리가 발 밑으로 휙휙 지나가고 봐두었던 착지 장소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방어장이 사라지려고 해!"
"으음!"
불타는 전차 옆 조그마한 자리에 착지하고서 정황을 보자 3번째 미사일 무리가 폭발하면서 방어장이 아주 크게 물결치고 온갖 파편이 밑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런 형체도 모습도 없는 것이 바다에 일어난 파도처럼 물결치는데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쏟아지는 파편부터 피하는 것이 급선무다. 어디 날카로운 금속 조각에라도 스쳤다간 성치 못할 거다.
"이리로 들어가!"
희미하게 불이 밝혀진 커다란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벼락같은 굉음을 내며 들어온 입구가 어두워지고 매캐한 연기가 코와 눈을 찔렀다. 거기다가 불꽃까지 넘실거려서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으윽. 눈 뜰 수가 없어."
연기가 가득 차도 금방 괜찮아진 나와는 달리 제느가 손을 이리저리 헤메다가 내 팔을 붙잡고선 손을 꼭 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꽉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뒷골이 갑자기 섬뜩했다. 제느가 정말로 이렇게 약해졌다. 보통 사람과 반응이 별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가만히 있다 싶더니 숨을 쉬지 못하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큭. 으윽. 빨리 들어가. 숨 막혀."
"응. 알았어."
터널 안은 꽤나 넓었는데 여기저기 전차나 외계인 시체 같은 것이 불타고 있어 온갖 이상한 냄새가 났다. 정말로 치열한 전투였는지 곳곳이 파괴되어 있어 발걸음 하나 옮기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밖에서도 자욱한 먼지가 밀려오는데도 안쪽으로 어느 정도 가자 공기가 맑아졌다.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걸 보면 아직 건물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야. 눈 괜찮아?"
"비비면 안 돼. 먼지 들어간 거니까 조금 있으면 괜찮을 거야."
연기가 없는 한쪽 구석으로 제느를 데려가 얼굴을 만지자 제느가 손을 밀쳐냈다. 눈물이 계속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참을성이 정말 대단하다. 나는 뭐 들어가면 눈 비비기에 바쁜데 전혀 그러질 않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니 그제사 얼굴에 미소를 띄운다.
"고마워."
"뭘. 이 건물 용도가 뭔지 알겠어?"
한참 감았던 눈을 뜨니 눈이 빨갰다. 그걸 보니 정말 안타깝고 불쌍해서 눈물이 다 나온다. 얼굴에 묻은 검댕이 눈물 때문에 번져서 밉상이라 손수건으로 계속 닦았다.
"아까 보니까 궤도권까지 솟아있는 것 같았어. 아마 궤도엘리베이터일거야. 그렇다면 분명 공항이나 기차를 위한 시설이 집중되어 있겠지. 그러면 호환터널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을 거야. 일단 올라갈 수 있는 통로부터 찾아야해."
그때 터널 내의 조명의 일제히 꺼지더니 건물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가 불길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불타는 차에서 일어난 불빛에 드러난 제느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붕괴되는 소리야. 어서 빨리 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손전등을 하나 만들어 달라해서 손에 든 제느가 앞장섰다. 손을 마주 잡고 파편과 잔해를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터널은 넓어서 양측 모두 주요 격전지가 되었는지 장해물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상한 건 외계인 시체는 많이 보였지만 이곳 종족의 시체 같은 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건 성공적으로 탈출했다는 걸까, 아니면 모두 포로로 잡히거나 시체를 수거해간 것일까?
"괜찮을까?"
"걱정 마. 설사 무너지더라도 자기 능력이면 충분히 탈출해."
제느는 한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 자신에 찬 목소리다.
이번엔 천장이 우르릉거리며 울리더니 기분 나쁜 소음이 반복되었다. 어둠에 휩싸인 터널 안이 갑자기 음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제느는 그런 일이 있거나 말거나 앞을 가는 걸음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여기가 지옥 속의 전장터가 아니라 한가한 산보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높디높은 하이힐을 신고도 잘 걸어간다.
그래서 그 조그마한 몸이 더 애처로워 보였다.
흙먼지에도 장애를 일으킬 만큼 약해지고 지녔던 능력을 대부분 쓸 수 없게 되었는데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게 되어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에도 강인한 인내력으로 꾹 참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감탄했겠지만 지금 앞에 있는 것은 내 여인이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저 가느다란 몸과 허리를 보고 있자면 온갖 걱정이 다 든다.
"이런데서 그런 힐 신고 다니면 위험해. 차라리 업혀."
손을 당겨 멈춰 세우고 말을 하자 제느는 검댕이 묻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이거 신고 다닌지 700년이야. 이제는 이거 신고 100미터 달리기도 할 수 있어."
"너 만날 말만 번드르르 하더라? 그거야 몸이 괜찮을 때 이야기고, 얼른 업혀. 아니면 들고 간다?"
"흐응. 어쩔 수가 없네."
이럴 때는 좀 순순히 업혀줄 것이지. 몇 번 더 말을 건네서야 마지 못하는 듯 제느가 업혔다. 등을 누르는 체중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사람 하나 업었는데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지 참.
터널 곳곳에 온갓 것이 파괴된 채 널려 있는데도 공기는 차고 맑았다. 정말로 아직은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금방 터널 안이 뭔가 무너지는 소리로 울리더니 곳곳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크게 일어났다.
제느는 그걸 듣더니 긴장하며 말했다.
"파괴되는 소리야. 방어장이 깨졌나봐."
"그거 위험한 거 아냐?"
"진짜배기는 엄청 튼튼한 걸로 지어서 괜찮을 거야. 우리가 밖에서 본건 외장에 불과해."
정말인가? 자세한 설명은 일부러 안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불안하다. 뭘 숨기는 건 아니겠지만 자세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것도 좋은 것 같은데 말을 안 해주니까 그냥 믿고 달리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여기는 아직 괜찮아서 위기감이 들지 않는다.
"저기다!"
제느가 손전등을 비추자 눈에 많이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수십개의 선로가 갈라져 플랫폼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양, 기차역이었다.
"계단으로 올라가자. 위로 가면 궤도 엘리베이터나 공항으로 가는 선로 같은 것이 있을 거야."
"응!"
선로에서 플랫폼 위로 올라가 전등을 이리저리 비추자 금방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서울에서 많이 본 전철 역사와 다름이 없는 구조다. 비록 전쟁터가 되어 전력이 끊어지고 피폐해지긴 했지만 이용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으윽!"
하지만 역 광장에 오르자 그런 안이한 생각 따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곳에 최후 방어선이었던 듯 온갖 잡동사니로 쌓은 바리케이트가 쳐 있고 여기저기 수없이 많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거기서 그만 발이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처음 보는 이곳 사람들은 건물이나 차 같은 것처럼 사람과 흡사하게 생겼다. 그러나 감탄하기 이전에 전투라기 보다는 학살에 가까운 광경에 숨이 막혔다. 공중에는 온갖 이상한 냄새가 떠돌아 다녔고 발 밑은 기분나쁜 액체로 치적거렸다. 불빛에 드러나는 사람들의 복장은 너무나 다양해서 이들이 군인들이 아닌 민간인 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이게 뭐야?"
"빨리 가. 신경 쓸 시간 없어."
어깨를 두드리는 제느의 재촉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르벤. 보지마. 보지말고 가."
"이게 도대체 뭐야?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어있어?"
"신경 쓰지마.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너? 생명의 여신이라면서 아무렇지도 않아?"
평소와 다름이 전혀 없는 제느의 말소리에 등골이 싸늘해져 돌아보니 제느가 내려달라는 듯 다리를 움직였다.
내려와서 앞으로 온 제느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마주쳤다.
"나는 생명의 여신이야. 이런건 볼 때마다 괴로워. 하지만 나는 생명 그 자체이고 모든 우주에 생명이 발전한다면 이런 정도는 상관없어. 그리고 당신은 이제 신이야. 누누이 말했지만 우리는 어디서든 이방인이라고. 초월자가 이런 것에 일일이 개입하면 뭐가 될 것 같아? 신경 쓰지마. 당장 우리도 급해. 빨리 가지 않으면 여기 갇힐지도 모른다고."
침착한 표정을 짓고 단호하게 말하는 제느가 무서웠다. 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천장에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모여 맴돌고 있는데 제느는 저걸 알고서도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저들은 이제 죽어서도 여기 이 자리에 못 박혀서 누군가가 구원해 주기 전에는 영원히 새 삶을 얻지 못할텐데 그 정도도 해줄 수 없는 것일까?
"지금 저들을 살려낸다 치더라도 이곳이 붕괴되는 건 시간 문제야. 결국 다시 죽는 것 밖에 없어. 빨리 가자. 지체할 시간 없어. 여기가 무너지면 우리는 어떻게 할건데?"
제느의 말은 너무나 당연하고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미련하고 소용없는 일인걸 알지만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냥 이렇게 지나치는 것이 옳은 걸까?
다시 제느를 보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절대 공평하지 않고 세상은 절대 다정하지 않아. 그걸 알아줘."
어쩔 수 없이 떠나 왔지만 너무 끔찍한 광경이라 뇌리에서 잊혀질 것 같지가 않다. 처음 맡아보는 지독한 피비린내에 아무렇지도 않은 게 오히려 무서웠다. 짧지만 악마들도 보고 끔찍한 광경도 보긴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지 모르겠다.
"아르벤."
하지만 옆에서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찬 제느의 표정을 보니 억지로라도 힘을 내야겠다. 검댕과 때가 묻어 지저분해진 제느의 몰골을 보니 내 고민은 그저 이상일 뿐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당장 제느만 해도 험난한 여행에 지쳐 얼굴이 말이 아닌데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을 도와주기란….
"미안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제느의 허리를 끌어안고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놀랐다가 붉게 홍조가 피어오르며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얼굴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뒤에는 말로 못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도사리고 건물은 폭격에 흔들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그 더러워진 얼굴이 너무나 예쁘다.
"아니야. 괜찮아. 자기가 사과할 거 없어. 빨리 가자."
다시 앞장 선 제느를 따라 길을 걸어갔다.
벽과 천장에는 수많은 안내문과 표지판, 전광판들이 붙어 평범한 전철역이나 공항을 연상케 했지만 지금은 어둠에 잠긴 그것들에 잔해나 피 같은 것이 들러붙어 너무나 음산하게 보였다. 공포영화 속 폐허가 된 도시처럼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저 쪽에서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폭격에 불안하게 울려대는 건물 전체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여기다. 환승 통로래."
"어, 저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반파된 표지판 아래쪽에 뭔가 검은 형상이 웅크려 있었다. 빛을 비추자 처참할 정도로 파괴된 형상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기계덩이가 누워있었다.
주위 벽과 바닥이 심하게 부서져 있고 금속조각들이 여기저기 반짝였다.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보라색 액체도 있었다.
"이거, 꼭 로봇 같다."
"음. 로봇이야."
"우와. 진짜?"
"감탄할 때가 아냐."
"아야야!"
제느가 귀를 붙잡더니 잡아끌었다.
"빨리 가! 무너져서 몇 백년 동안 껴안고 있을래?"
"으윽. 너 두고보자."
"흥. 두고보자는 사람은 안 무서워요."
"쳇."
기나긴 복도와 계단들로 이뤄진 환승통로를 타고 올라가자 수많은 엘리베이터들이 있는 광장으로 이어졌다. 대합실 비슷한 건가 본데 전원이 끊겨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없어보였다.
"아응. 진짜. 이래서 전기 쓰는 데는 짜증난다니까."
제느는 한껏 열을 내더니 발목이 꺾어질 것처럼 굽이 높은 힐을 벗고 입혀줬던 교복과 자켓도 벗어 내려놓았다. 찢어진 스타킹도 다 벗어서 버리더니 허리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훌쩍 컸던 키가 줄으니 순식간에 몸도 작아진 것 같다. 그나저나 저 가느다란 몸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좀 깬다.
"야, 근데 좀, 너무 큰거 아냐?"
정말 크다니까. 옆에서 보고 있으면 보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시선이 간다. 몸에 딱 붙는 셔츠 때문에 정말 커 보이는데 새삼 저렇게나 컸나 하고 아리송해진다. 도저히 저 체격에 나올 수 없는 사이즈다.
제느는 눈을 가늘게 치뜨고 뚱하게 날 노려보았다.
"만질 때는 좋아라 하면서 내숭은. 그리고 난 아기 젖 주는 엄마란 말야. 마누라가 젖먹이 데리고 있으면 그런 상식쯤 알아둬."
"그러냐?"
떨떠름하게 들렸는지 셔츠 단추를 풀던 제느가 노려본다.
"예나는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라고. 아직 실감이 없나본데 분명한 우리 딸이니까 똑똑히 새겨둬.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제느는 셔츠도 밖으로 빼내고 단추도 네 개쯤 끄른다음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아니, 너. 땀 흘리잖아?"
손으로 이마를 쓸어 내리니 식은땀이 축축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흘린 거야? 여태 업고 와서 뛰지도 않았는 데.
"이제 알았어?"
말투가 뾰족했다.
"너 띈것도 아니잖아. 여기도 그렇게 더운 것 같지 않은데?"
"여기 더워. 한참 전에 공조시설도 멈췄어.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게 용하다고."
그런가? 그래도 이런 반응이라니. 완전히 보통 사람과 똑같잖아? 약해져도 너무 약해졌다. 대체 얼마나 작은 분신인거야?
"공기도 탁해지고 있어. 빨리 어디로든 가야해."
"그래."
이번에는 내가 손을 이끌었다. 괜히 호기롭게 앞장서다 천장이라도 무너지면 어떻게 해.
엘리베이터들에 다가가니 개별적인 탑승구역으로 나뉘어진 것이 보였다. 마치 공항 출국장 같이 구역이 나 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할까?"
"궤도 엘리베이터 열차 15번홈이라. 남은 열차가 있을지 몰라. 비상전력은 있겠지."
제느가 이리저리 전등을 비추자 곳곳에 총알 자국과 불에 그슬린 자국들이 보였다. 무너진 통로 밑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보여 눈을 피했다. 그때 건물 전체가 우르릉 울리더니 플랫폼 중 한곳에서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가까워. 엘리베이터 샤프트는 무사해야 할텐데. 12번으로 가자."
옆에 있는 플랫폼을 비춰본 제느가 결정하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잰걸음으로 서두르는 동안 건물이 계속 울리며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걸 느낀 제느는 더 서둘렀다.
"상층부가 붕괴되고 있는 것 같아."
뛰어가는 와중 간간이 제느가 말을 걸었지만 온 사방을 울리는 진동과 소음 때문에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꼭 고래뱃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숨은 위험해지는데 출구는 멀고 보이지 않는다.
"하아! 하아! 저기! 저기 인 것 같아."
좁은 통로를 지나 나온 플랫폼 한중간에 희끄므레한 빛이 보였다. 터널에서 조명이 끊어진 후 처음 보는 인공조명이었다.
"맞아?"
"하아. 응! 비상전력이, 아직 있나봐!"
제느가 확답하자 두고 볼 것 없이 앞에서 뛰어가는 가느다란 몸을 안아들고 한번에 뛰었다. 숨이 잔뜩 차 올라서 뛰기도 힘든데 여태 잘도 뛰었다.
"꺄아아!"
천장에 닿을 정도로 날아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새된 비명이 이어졌다. 나는 벙쪄서 하마터면 잘못 착지할 뻔했다.
"으악! 뭐야? 비명은 지르고 그래?"
착지하고 나서 보니 제느가 눈을 꼭 감은 채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살짝 한쪽 눈을 뜨더니 왈칵 화를 냈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있어!"
"겨우 뛰었다고 그러는 네가 더 놀랍다. 그렇게 무서워?"
"누가 무섭다고 그래?"
제느는 하얀 차체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비상 개폐장치를 찾아내서 문을 열었다. 발밑이 덜덜 떨리며 흔들리는데도 열차 안은 환했다.
"저기야!"
안으로 들어간 제느는 곧장 한쪽 끝으로 달려갔다. 나는 문을 닫고 뒤따라갔다.
"읏. 잠겼어. 이것 좀 열어봐."
"비켜봐."
열차의 한쪽 끝에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만한 문이 하나 있었는데 제느가 아무리 용을 써도 열리질 않는다. 그런데 내가 주먹으로 한대 때리자 그대로 구멍이 생겼다.
"잘했어. 들어가자."
제느가 힐끔 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칭찬이긴 한데 저런 표정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꼭 좋은 일을 했는데 손가락질 받는 상황?
"아직 살아있어. 출발할게."
자리에 앉은 제느가 용도를 알 수 없는 레버를 건드리자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우."
다행이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다. 이 건물이 뭘로 만들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잘 버텨주는데 마음이 놓인다.
운전석은 두명이 타게 되어 있어 옆자리에 앉으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땅 꺼지겠다. 자기."
"안 그럼 온갖 것들 다 봤는데 안 나오겠냐?"
"에휴. 우리도 참 어쩌다가 이런 곳에 떨어져선."
"그러게."
몸이 그래도 피로가 있었는지 긴장이 풀리자 옷이 갑갑했다. 소매와 카라의 단추를 풀고 좌석에 기댔다. 운전석이라 그런지 자리가 편안하지 않고 조금 불편하다.
"아직 긴장 풀지마. 공격받는 구간도 안 지났고 속도도 충분치 않아."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잖아. 안 그래?"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얼굴에 배어 나온 땀을 닦아주니 제느는 별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거 타면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아마도…정거장이나 우주항 같은 데로 연결되겠지."
어두컴컴한 플랫폼을 떠난 기차는 천천히 각도를 더해 상승하더니 수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밖으로 보이는 레일도 그렇고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지만 마냥 그렇지 않았다.
"준비해. 이상하다."
제느는 내내 굳은 표정을 유지하며 화면이며 버튼들을 만지작거리다가 뭔가 느꼈는지 몸을 움츠렸다. 얘가 이러니 괜히 무섭네.
"뭐야?"
"가만히 느껴봐. 잘못하면 올라가지 못할 수 있어."
뭔가 있어 저러는거겠지 싶어 잠자코 있었더니 묘하게 느껴지는 진동이 있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운행하는 열차가 이렇게 진동이 있다는 건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소리다. 말마따나 제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직도 공격이 계속되고 있어."
멀리로 시선을 돌려서 전체적으로 보자 열차의 터널과 궤도가 너울너울 흔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너울너울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폭이 까마득한 길이에 비해 너무 작아서 눈 앞이 그냥 울렁거리는 느낌이 나는데 열차가 위로 올라갈 수록 점점 더 확실해졌다. 아무런 소음 없이 주행하던 열차가 끼익끼익거리며 쇠가 닿는 듯한 마찰음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윽? 이, 이거! 말도 안 돼!"
"속력을 최대로 올릴게."
제느는 그 위험천만한 광경을 보고도 침착하게 말하며 좌석에 붙은 계기판을 조작했다. 그러자 가속이 느껴지며 몸이 밀린다. 이럴 때는 멈추고 상황이 진정대기만 기다려야 하는 거 아냐?
"으, 이거 정말 탈출할 수 있는 거야?"
속력이 빨라지자 끼익 거리며 접촉하는 소리가 쓰윽하는 마찰하는 소리로 바뀐다. 더불어 열차가 위태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이건 자기 살던 곳과는 차원이 틀린 물건이라고."
말로는 누구든 그렇게 못하나? 제느가 이것저것 조작하다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대책도 없는 거냐!
아니,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뒤에 껴드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거기다가 진심인지 내 등을 껴안고 바싹 달라붙었다.
"너 진짜."
등뒤에 숨은 제느가 얄미웠지만 그 말이 맞는 거니 일단 참아두기로 했다. 지금 아무런 힘도 하나 없이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는 제느가 파편 하나라도 잘못 맞았다간 그대로 죽는다. 아무리 분신이라고 하지만 제느인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아무런 힘도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불편할 줄은 몰랐다.
"더 빨라진다. 꽉 잡아."
열차는 점점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밖에 아직 공기가 있는지 열차 벽이 웅웅거리며 울리고 그 사이로 무언가 폭음이 틀리기 시작하며 차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레일과 열차가 부딪히는 소리는 도를 넘어서더니 쇠를 쇠로 깎을 때 나는 소리처럼 신경이 곤두서는 소리가 온몸을 통해 전해졌다.
"으윽!"
"아르벤! 조심…!"
일순간 귀청을 찢는 폭음이 들리며 위에서 화염이 쏟아져 들어왔다.
삽시간에 주변이 화염으로 가득 차 눈앞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무작정 만져지는데로 제느를 감싸고 웅크린 순간 유리 같은 것이 힘없이 깨지는 소리가 나며 등뒤가 말할 수 없이 뜨거워졌다.
"아르벤!"
"말하지마!"
주변에 가득 찬 뜨거운 화염에 휘날리는 제느의 머리카락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반짝이는 은빛 실들이 나풀거리는 것에 정신이 팔린 순간 등을 온갖 것이 할퀴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크윽!"
폭발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이 어찌나 흉흉한지 등이 따가웠다. 아니, 등이 따가운 것만으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의지하고 있는 의자의 시트가 까맣게 타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흔들흔들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느야! 붙잡아!"
"꺄아!"
등을 무언가 묵직한 것이 때리자 의자가 더 버티지 못하고 박살났다. 눈앞에서 제느가 튕겨나가 유리 파편을 온 몸에 맞더니 옷이 갈가리 찢겨졌다. 어찌나 상처가 깊은지 순식간에 핏방울들이 배어 나온다.
"크흑!"
한순간 숨이 턱 막혀왔지만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날렸다. 운전실 벽에 부딪힌 제느의 몸이 한번 퉁기더니 구석으로 날렸다. 가까스로 손을 잡아 끌어당겨 안으니 유리조각들이 날카롭게 몸을 찔렀다.
"으윽. 제느야. 제느야?"
바닥에 퉁길 때 정신을 잃은 제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위를 보니 계기판은 살아있었지만 열차는 더 빨라지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 깨져버린 앞 유리창과 구멍이 난 벽을 따라 칼날 같은 바람이 들이쳤다.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이 최대한 제느를 몸으로 가리고 웅크렸다.
유리파편이 박힌 제느의 이마에서부터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으윽. 흐윽. 아르벤. 하아앙."
"윽? 어?"
깨어나니 머리가 무척 아팠다.
"아야야."
"흑. 아르벤. 으윽. 아르벤."
얼마동안 울었는지 모를 만큼 눈이 퉁퉁 부은 제느가 아직도 울고 있었다. 중간에 무언가 묵직한 것에 맞아 정신을 잃었는데 등뒤로 엄청난 무게가 느껴졌다. 거기다 운전실 벽이 무너진 건지 아래쪽이 난장판이다.
"아, 제느야."
"아르벤. 흐윽."
제느는 피가 흐르고 먼지를 뒤집어썼긴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우는 걸 보니 아직 괜찮은 모양이다. 등에 짊어진 무게가 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한팔로도 어찌 감당이 되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니 대충 괜찮았다.
"너 어디 안 다쳤지? 괜찮아?"
"윽. 아르벤. 여, 옆에."
"응?"
제느가 몸을 더듬었다.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더니 내 배를 잡았다.
"여기, 여기가, 으윽."
갑자기 핏기 없는 살결이 눈에 들어왔다. 제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째서 이제야 눈치 챈 건지, 무언가 철로 만들어진 것 같은 커다란 파편이 내 몸을 관통해서 제느의 배에 박혀 있었다. 순간 머리에서부터 피가 쭉 빠지는 것처럼 아찔해지는데 더 이상 뭘 생각할 수 없었다.
"으윽! 으악!"
팔에 힘을 줘 몸을 일으키자 등에 느껴지는 엄청난 무게에도 불구하고 아주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주위로 파편들이 쏟아졌다.
"제느야!"
배에 박혀있는 파편을 뽑아내자 피가 튀었다. 강렬한 피비린내가 느껴지자 속에서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아까 그런 처참한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제느의 배에 난 구멍을 본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식은땀을 잔뜩 흘리는 제느의 눈동자가 풀리는 것이 보였다. 위험했다.
"조금만 버텨!"
파편을 버티고 서서 제느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힘을 다해 쥐어짰다.
"제느야! 제느야!"
손에 하얗게 빛이 모여들어 몸 안으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대로 죽어 가는 몸 상태가 느껴진다. 이래서야 보통사람이랑 다를 게 없잖아? 도대체 얼마나 작은 분신이기에 이렇게나 힘이 떨어진 걸까?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던 피가 빛에 닿자 하얗게 빛을 내면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배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들어가더니 주변의 피가 상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도 아직 약빨이 들으니 다행이다.
"으윽."
회복의 징후가 느껴졌지만 힘을 넣는걸 늦추지는 않았다. 팔이 아프다 못해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올 때까지 멈출 수가 없었다.
"으윽. 아파. 그만 주물러."
"쳇."
땀이 줄줄 흐르고 몸이 덜덜 떨릴 때가 되어서야 제느가 눈을 뜨고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지금 죽지 않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데 그런 눈으로 보다니, 너무한거 아냐?
"입은 살았나 보네. 읏차!"
몸을 일으켜 잔해더미를 헤쳤다. 녹아버린 쇳덩이와 부서진 플라스틱 따위를 수십 개 던져버리고 주변을 정리해서야 서있을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열차 안은 완전히 부서져서 추락한 비행기를 연상케 했고 곳곳에 찢어져 구멍이 난 벽은 금속이 정말 맞는지 의심하게 했다.
"어떻게 된 거지?"
"으윽. 배 아파."
윗몸을 일으킨 제느가 상처 났던 배를 붙잡고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가슴에 빨갛게 난 손자국이 좀 걸렸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흥. 쌤통이다."
"우와. 진짜 너무해. 자기 나 방금 죽을 뻔했어."
"죽을 뻔한 건 죽을 뻔한 거고."
찢겨진 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아래에서부터 희미하게 빛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터널 내부의 전등 같은 조명은 죄다 꺼져서 어둡기 그지없는데 새파란 빛이 올라오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사단이 난 듯 싶다. 하기사 벌써 났긴 하지.
"후우. 어찌됐든 살긴 살았네."
"살기만 했지."
제느가 입이 부루퉁하게 튀어 나와서 옷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있었다.
"아, 미안해. 나도 하도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럼 어떻게 하냐? 당장 너 죽는데."
"뭐, 그거야, 아야. 멍들었잖아."
자기도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는지 별 말 없이 수긍했지만 가슴을 만져보더니 시선이 다시 뾰족하게 변한다. 아무래도 저게 되게 억울한 모양이다. 나도 정말 어쩔 수 없었는데. 억울하긴 하지만 저렇게 쥐어짠 것도 잘못이니 좀 달래줘야겠다. 근데 사실 나도 어떻게 쥐어짰는지 힘을 뽑아내느라 알지도 못한다.
"됐어. 바깥이 어떻게 됐는 지나 알아봐."
"너 정말."
다가가려고 하자 제느가 잔뜩 삐친 목소리를 내며 손사레를 친다. 그러다가 문득 눈이 맞았다. 서글서글한 은색 눈동자를 보자 갑자기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다.
"제느야!"
"아르벤!"
제느도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커다란 눈을 일그러트리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단히 끌어안았다.
"후우. 후우."
"하아. 하아."
팔 다리 몸통 할 것 없이 얼싸 안고 깊은 키스를 한동안 나누어서야 가슴속을 채우던 격정이 사그러 드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떼고 제느의 머리카락을 만지자 불쑥 재난 영화 속 주인공들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죽음의 위기를 헤쳐나오고 안전한 장소에 도달했을 때 그 기분이란 정말 이럴 때 아니면 못 느낄 거다.
"아르벤!"
머리카락만 만지며 가만히 보고만 있자 제느가 입을 샐쭉하게 부풀리더니 가볍게 힐난했다. 정말 그새를 못 참고, 어째서 남자인 내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거지?
"이 다음 걸 하자고?"
제느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가씨는 정말 시궁창에서 굴러도 둘이만 있으면 좋다는 기세다. 그게 나도 이렇게 안고 있으면 하고 싶긴 하지만 허공에 매달린 부서진 열차보다는 아무래 도 어디 으슥한 곳이 훨씬 낫지 않나?
"아 정말 여긴 아니다. 일단 일어나. 여기서 나가서 밖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야지."
"히잉."
제느를 적당히 떼어낸 다음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위를 보자 아직 살아있는 계기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열차가 완전히 대파되버린 상황에서도 화면들이 살아서 깜박이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깜박이는 걸 보니 아직 작동이 가능한가 본데, 저거 정말 대단한데?
"아야."
그 상처의 여파가 큰지 제느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유리파편 등에 맞고 화염에 타버린 옷도 입느니만 못한 꼴이 되었다. 나를 보니 온갖 것에 찍히고 탔는데도 소매까지 깨끗하다. 분명히 맞기는 더 많이 맞았다.
"옷이 다 찢어져 버렸어."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자기의 옷을 내려다본 제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옷을 추슬렀다.
"그거 어떻게 못 고쳐?"
너덜거리는 셔츠 사이로 검은색 속옷과 맨 살결이 보였다. 짧디짧은 치마도 한쪽으로 죽 찢어져 엉덩이가 훤했다. 다행히 허리에 감은 자켓은 무사한 듯 보였지만 그것도 풀어내리자 내 것이고 자기 것이고 다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저렇게 낭패한 몰골인데도 그것이 패션처럼 여겨질 정도로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것이 거적데기를 입혀놔도 미모가 가려지지 않고 빛난다. 뭐 저렇게 잘났을까? 내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히잉. 어떻해. 이런 꼴로 돌아다닐 순 없어."
"일단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가자. 이 위에 올라가면 혹시나 옷가게 같은 것이 있을지 모르니까 한번 찾아 봐."
제느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미고 남은 옷자락을 정리해서 묶은 다음 자켓을 걸쳤다.
"그것도 보기 좋은데 뭘?"
한마디 했다고 홱 노려본다.
허리를 끌어안고 주변의 파편에 발을 디뎌 뛰어오르자 가볍게 몸이 날아올랐다. 열차의 창 밖으로 나와 밑을 보니 동체에 가려진 사이로 환하게 빛이 비치고 있었다.
"어어? 이거 괜찮은 거 맞아?"
"괜찮게 보이지 않는데? 열차 위로 올라가 봐."
제느의 지시에 따라 열차 위로 올라가 보니 절대 정상 적으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나타났다.
"어? 어, 이거 뭔가."
부서진 파편이 보이는 동그란 구멍 아래로 파랗게 산과 강이 보였다. 무딘 칼로 찢어낸 듯한 자국이 터널 곳곳에 보였다. 열차는 뒷칸 두량 정도가 떨어져 없어지고 하얗던 동체가 까맣게 타고 찌그러져 있었다."궤도엘리베이터가 끊어졌어. 아무래도 궤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잘하면 이웃 행성의 중력권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대로 추락할 가능성이 커. 일단 계속 올라가. 구명정이라든가 비상용 우주선이 있을 거야."
"에휴. 어째 가는 곳마다 고생길이냐."
위로는 아직 끝도 안보일 정도로 머나먼 터널이 어둠 잠겨 있었다. 이제부터는 자력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제느를 등뒤로 돌려 업고 열차 위에서 터널 벽면으로 건넌 다음 본격적으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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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좀 괜찮을 분량까지 쓰려고 보니 이만큼.....
ㅌㅌㅌ
첫댓글 조회수 2 일때 감상하는 이 기분 ㅎㅎ 감상 고맙습니다
후 연제다~
와우 엄청난 내용이네요 완전 흥미진진 ㅋㅋ
앗;;; 이번엔 조금 늦었다;;
선리플 후감상의 대표적인 저 ㅋㅋ
오랜만에온~
흐음... 208에서 부터 내용이 뭔가 안 맞는듯 한데;;; 빨리 연재해 주세요~~~
감사함니다 ㅎㅎ 잘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