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손석희 / 진행 :
우리나라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이시고 국악 작곡가인 황병기 선생의 연주 가야금 산조를 듣고 계십니다. 조금 더 들어봤으면 좋겠는데요. 참 제가 끼어들기가 민망합니다. 제 목소리가 혹시 소음처럼 들리시진 않으시는지요. 너무나 좋습니다. 가야금 소리, 이렇게 이른 아침에 들으니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운치가 더 있고요. 여러분들께서 듣기에 아마 저하고 같은 느낌이 드실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황병기 선생님 우리나라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이고 국악 작곡가이시죠. 우리나이로 일흔여섯이 되셨습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하시면서 무대에 직접 올라서 가야금 연주도 하십니다. 지금도 현역이신 거죠. 아주 왕성한 활동력을 갖고 계신 분, 우리 시대 거장 가야금의 명인인 황병기 선생을 오늘 <토요일에 만난 사람>으로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 황병기 :
네, 안녕하십니까?
◎ 손석희 / 진행 :
반갑습니다.
◎ 황병기 :
네, 반갑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선생님을 알게 된 건 저도 굉장히 오래 됐는데 직접 뵙는 건 오늘에 처음이네요.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가끔씩 제가 <토요일에 만난 사람> 앞에 잠깐 나가는 코드음악에 정말 어울리는 분이다 하고 소개해드리는 분들이 계신데 오늘 황병기 선생님이야말로 꼭 거기에 맞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약력 소개를 조금 해드려야 되는데요. 워낙 많은 일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약력 소개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좀 짤막하게 줄여서 해보겠습니다. 1936년에 나셨습니다. 올해 나이 일흔여섯 되셨습니다. 195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셨네요.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그때도 경기고등학교는 제일 좋은 학교였나요?
◎ 황병기 :
그때야말로 제일 좋은 학교였었죠.
◎ 손석희 / 진행 :
그렇죠. 전쟁 직후에 이렇게 졸업하신 셈이 됐는데 그러면 입학하셨을 때는 전쟁통이었나요?
◎ 황병기 :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6.25 전쟁이 났죠. 1950년.
◎ 손석희 / 진행 :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들어가셨던 것은 전쟁통이었네요.
◎ 황병기 :
그렇죠. 전쟁 중에.
◎ 손석희 / 진행 :
그리고 1957년에 KBS 주최 전국국악콩쿠르 1위를 하셨습니다. 이때는 대학생 때셨겠네요.
◎ 황병기 :
제가 대학은 서울 법대를 들어갔는데 법대학생 시절에 3학년 때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KBS 주최 전국콩쿠르에서 1등을 했죠.
◎ 손석희 / 진행 :
1959년에 그래서 법대를 졸업하셨습니다.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법대와 국악은 어찌 보면 안 어울리는데 그 얘기는 조금 이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졸업하신 다음에 예를 들면 고시를 봐서 판검사로 가신 것이 아니고 졸업하자마자 4년 동안 서울대 국악과 강사를 하셨습니다.
◎ 황병기 :
네, 제가 졸업한 것이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59년인데 그때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처음으로 국악과가 생긴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처음으로.
◎ 손석희 / 진행 :
그래서 첫 생긴 처음으로 생긴 국악과에 강사로 들어가셨군요.
◎ 황병기 :
강사로 나갔어요.
◎ 손석희 / 진행 :
4년 동안.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그리고 조금 건너뛰자면 1974년부터 2001년부터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를 지내셨습니다. 2001년 이후에는 이제 이화여대 명예교수로 계시고요. 정년퇴임 하신 다음에 명예교수로 계신 거죠.
◎ 황병기 :
예.
◎ 손석희 / 진행 :
2006년에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그리고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으로 지금 계신데요. 뭐 상도 너무 많이 받으셔가지고요. 저한테 넘어와 있는 자료를 보니까 상 받으신 것만 거의 한 페이지 되는데 비교적 최근에 받으신 것만 말씀드리자면 2004년에 호암상 예술상을 받으셨고요. 2006년에 제51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음악부문에 상을 받으셨습니다. 2010년, 그러니까 작년이네요.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문화대상을 또 역시 받으셨고요. 1985년부터 1986년까지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객원교수로 계셨습니다. 이때가 이화여대에 계실 때네요.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하버드대 객원교수로 계시면서는 거기서는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까?
◎ 황병기 :
거기서 제가 특강을 여러 번 했고요. 물론 거기에 민족음악학 수업에 쭉 참석을 해서 제가 발표도 하고
◎ 손석희 / 진행 :
그해 86년에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여시게 됐군요.
◎ 황병기 :
거기 간 김에 카네기홀에서도 독주회를 하고 거의 미국 전역에서 독주회를 했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예. 다른 분들은 평생 걸려서 카네기홀 한 번 서는데 그냥 가신 김에 한 번 하셨군요.
◎ 황병기 :
예.
◎ 손석희 / 진행 :
(웃음) 작품은 너무나 많으십니다. 1962년에 <숲>이라는 작품이 나왔고 1974년에 그 유명한 <침향무>가 나왔습니다. <침향무>가 갖고 있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고 들었는데 그건 조금 이따가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유명한 그 다음해에 1975년에 <미궁>이라는 작품이 나왔습니다. 77년에 <비단길>, 1996년에 <달하노피곰> 도다샤가 뒤에 생략된 거죠?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시조, 그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있으십니다.
◎ 황병기 :
잠깐요. 시조가 아니라 백제시대 때 가요입니다.
◎ 손석희 / 진행 :
예,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했습니다. 제가 명색이 학부 전공이 국문학인데 그걸 헷갈리다니 죄송합니다. 워낙 저도 오래 됐으니까 잊어버렸군요. 밤 11시면 어김없이 가야금을 잡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어젯밤에도 잡으셨는지요?
◎ 황병기 :
어젯밤에도 연습했죠.
◎ 손석희 / 진행 :
왜 밤 11시일까요?
◎ 황병기 :
딱 밤 11시는 아니지만 저는 영어로 나잇버드라고 합니다만 밤에 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밤에 가야금 연습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 손석희 / 진행 :
가야금 소리가 물론 크거나 그러진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밤 11시에 하시면 주변 다른 동네 분들이 더 좋아하실까요? 혹시.
◎ 황병기 :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집을 고를 적에 제일 중요시 하는 것이 조용한 집을 고르거든요. 그래서 저희 집은 사방으로 다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집이.
◎ 손석희 / 진행 :
그런가요?
◎ 황병기 :
네, 그래서 밤에 문 닫으면 거의 절간처럼 조용하죠.
◎ 손석희 / 진행 :
사시는 곳이 어디,
◎ 황병기 :
북아현동 꼭대기에 살고 있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북아현동이면 시골도 아니라서 주변에 집들이 들어섰을 법도 한데 그렇질 않았던 모양이군요. 꽤 오랫동안 여기 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황병기 :
전부 사방이 그러니까 북쪽하고 동쪽하고는 길로 떨어져 있고 남쪽은 축대로 떨어져 있고 서쪽은 정원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집이 붙은 데가 한 군데도 없어요.
◎ 손석희 / 진행 :
입지를 다 면밀하게 보시고 들어가신 거군요.
◎ 황병기 :
그냥 조용할 것 같은 집을 들어갔죠.
◎ 손석희 / 진행 :
11시에 아직까지도 연습하신단 말씀이시잖아요. 그죠?
◎ 황병기 :
예.
◎ 손석희 / 진행 :
하루도 빼놓지 않고.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연습해야 될 게 아직도 많이 있으십니까?
◎ 황병기 :
연습이라고 하는 건 끝이 없는 거죠. 아무리 좋은 소리를 내도 그것보다 더 좋은 소리가 있으니까. 그냥 그것도 그렇지만 모든 악기의 연주자는 매일 연습을 해야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이 특수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연주라고 하는 것은 육체행위예요. 그래서 예를 들자면 김연아 같은 선수도 아마 한 달만 스케이트를 안 타면 못 탈 거예요. 근육이 풀려가지고 안 되겠죠.
◎ 손석희 / 진행 :
그렇겠죠.
◎ 황병기 :
가야금도 손가락 근육이 풀릴 뿐만 아니라 손끝에 군살도 빠져가지고 아파서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매일 해야죠.
◎ 손석희 / 진행 :
그러면 황병기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내는 가야금 소리가 아직 최상의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더 나은 소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시겠네요?
◎ 황병기 :
저는 끝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 손석희 / 진행 :
예, 그런데 일흔여섯이신데요. 뭔가 좀 젊었을 때 하고는 좀 다를 것 아니겠습니까? 기력도 예전만은 못하시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면 점점 더 아쉬움 같은 것들도 드시진 않으시나요?
◎ 황병기 :
저는 원래 아쉬움이라는 건 없어요. 그때 상황에 맞게 마음을 비우고 사는 거죠. 근데 연주라고 하는 것은 신체행위이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힘이 좋아서 더 기교적으로 잘 탈 수가 있고 그 대신 나이 먹을수록 음악에 대한 영적인 세계는 깊어진다고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좋아지는 점도 있고 점점 더 무르녹는 점도 있고 힘이 빠지는 점도 있고 그렇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사실 뭐 체력이 아니라 연륜이 중요한 그런 경우도 많이 있으니까요.
◎ 황병기 :
서양악기에 비해서 동양악기는 신체적인 기교라든가 힘에 의존하는 것이 서양악기가 더 심하고요. 동양악기는 영적인 것에 의존하는 포션이 더 많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그렇군요. 그런데 가끔 가야금 연주하시는 분들 보면 왜 그걸 어떻게 속주라고 하나요? 굉장히 빨리 그건 정말 힘들겠더라고요. 보니까.
◎ 황병기 :
그런 것은 아무래도 속도감 같은 것은 나이가 먹으면 떨어지겠죠.
◎ 손석희 / 진행 :
그러나
◎ 황병기 :
아무리 빠른 곡을 연주해도 가야금의 소리 하나하나를 수제비 빚듯이 빚어서 내야 되거든요. 그래서 빨리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죠.
◎ 손석희 / 진행 :
굉장히 인상적인 표현이십니다. 수제비 빚듯이 음을 하나하나 만들어 낸다는 것이.
◎ 황병기 :
특히 가야금에서는 그렇죠.
◎ 손석희 / 진행 :
경기중학교 3학년 때 아까 가야금을 처음 잡으셨다고 하셨던가요?
◎ 황병기 :
중학교 3학년이요.
◎ 손석희 / 진행 :
중학교 3학년 때. 그럼 그때는 사실 전쟁통이어서 가야금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고,
◎ 황병기 :
그때는 전쟁통이니까 배우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만 둘 때죠. 그 무렵에. 그리고 그때 우리가 정말 점점 밀리고 있어서 부산까지 함락될지 모른다, 그러면 밀선 타고 일본으로 도망가야 된다, 이런 말들이 돌 때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밀선을 알아보러 다니고 또 일본말 공부들을 하고 이럴 판입니다. 그때 저는 가야금을 시작했어요.
◎ 손석희 / 진행 :
그렇게 좋으셨습니까, 가야금이?
◎ 황병기 :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은 것이 피난학교 근처에 있는 고전무용연구소에 세 들어 사는 노인을 만나서 들은 건데 그때 가야금을 처음 듣고 물론 가야금이란 악기도 처음 봤어요. 거기서 보자마자 그냥 완전히 반해버렸죠.
◎ 손석희 / 진행 :
요즘 흔히 젊은이들이 하는 말로 꽂힌다고 합니다.
◎ 황병기 :
필이 꽂힌다.
◎ 손석희 / 진행 :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네요.
◎ 황병기 :
네, 그렇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일단 그렇게 되면 사실 벗어나기가 어려운 거죠.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주변에서 특히 가족들이 말리거나 그러진 않던가요?
◎ 황병기 :
아버지, 어머니가 굉장히 반대하셨죠. 학생이 학교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무슨 가야금 같은 악기를 배워서 괜히 신세 망치려고 그러느냐, 반대를 하셨죠.
◎ 손석희 / 진행 :
그래서 그 반대를 혹시 무마하기 위해서 서울 법대를 가셨습니까?
◎ 황병기 :
그래서 제가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아인슈타인 얘기를 예를 들었죠. 아인슈타인은 저희 부모님도 다 알고 계셨거든요. 그런 위대한 과학자가 바이올린을 거의 프로급으로 연주했거든요.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바이올린을 배운 것이 무슨 자기 과학 공부 하는데 지장이 있었느냐 나는 가야금을 배우면 학교 공부를 더 잘 할 것이다 그러고서 공부를 썩 잘한 것은 아니지만 괜찮게 해서 그리고 그때도 서울 법대가 상당히 어려운 학교인데
◎ 손석희 / 진행 :
그렇겠죠.
◎ 황병기 :
거기 무난히 그냥 들어가니까 부모님들이 더 적극적으로 반대를 못하셨죠.
◎ 손석희 / 진행 :
부모님들께서 하실 말씀이 없게 만드셨네요. 그러니까.
◎ 황병기 :
(웃음)
◎ 손석희 / 진행 :
법대 다니는 동안에 죄송하지만 학점은 어떠셨습니까?
◎ 황병기 :
그냥 뭐 제 생각인데 한 보통은 됐을 겁니다.
◎ 손석희 / 진행 :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가야금을 여전히 하셨고
◎ 황병기 :
학교 공부가 끝나면 국립국악원에 가서 가야금을 배우고 집에 오는 것이 거의 일과였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결국은 그렇다면 법대를 졸업하고 나서도 법을 하는 사람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 황 선생님 본인도 생각을 하셨을 것 같고,
◎ 황병기 :
예.
◎ 손석희 / 진행 :
또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 황병기 :
저희 아버님이요. 평생을 사업에 미치신 분이에요. 사업가인데. 꼭 돈 벌려고 하는 것보다도 사업 자체를 즐기신 분인데 저도 사업가 자기 후계를 삼으려고 하셨겠죠.
◎ 손석희 / 진행 :
그러면 실망도 크셨겠네요.
◎ 황병기 :
싫어하셨죠. 제가 가야금 하는 걸. 하지만 나중엔 좋아하셨어요.
◎ 손석희 / 진행 :
언제쯤 그렇게 되셨습니까?
◎ 황병기 :
그게 1965년인데
◎ 손석희 / 진행 :
한참 뒤네요.
◎ 황병기 :
네, 65년에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음반도 내고 저의 첫 음반이 한국에서 나온 게 아니라 미국에서 나온 겁니다. 또 한 6개월간 있으면서 순회 독주회를 미국에서 하고 또 워싱턴대학에서 한국음악 강의도 하고 하면서 우리나라 신문에 대서특필이 됐었거든요. 각 신문에.
◎ 손석희 / 진행 :
그게 그러니까 대학 졸업하시고 6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던 일들이잖아요.
◎ 황병기 :
65년이죠. 중반.
◎ 손석희 / 진행 :
중반까지.
◎ 황병기 :
그러니까 이제 아버지한테서 제가 워싱턴대학에 있을 적에 편지가 왔는데 내가 너를 여태까지 가야금 하는 것을 미워한 것에 대해서 자기가 말하자면 후회한다, 나는 지금 너를 장하게 생각한다, 그런 편지를 제가 받았는데
◎ 손석희 / 진행 :
얼마나 좋으셨겠습니까?
◎ 황병기 :
그 편지를 받으니까 좋은 마음보다도 굉장히 죄송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저희 아버님이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자인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불효를 한 것 같은 기분이어서 죄송스러운 기분이 들었죠. 물론 기쁜 마음도 있었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예, 그렇겠죠. 그래서 74년에 역시 신설된 이화여대 음대 국악과 교수로 가십니다.
◎ 황병기 :
그때서부터 74년이면 제 나이가 38살인데 그때 이화대학에서 전임으로 들어와서 국악과 과장까지 맡아 달라, 그런 제안을 받고 지금부터는 죽을 때까지 음악 한 가지만 하겠다 라고 하는 그 프로의식을 그때 가진 거죠.
◎ 손석희 / 진행 :
그러면서 바로 그 해에 나온 <침향무>, 이것이 이제 선생님의 대표작이시기도 하고 선생님께서 절대 잊으실 수 없는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 황병기 :
예.
◎ 손석희 / 진행 :
요 <침향무>는요. 죄송하지만 광고 듣고 나서 바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 황병기 :
예.
- <침향무> -
◎ 손석희 / 진행 :
<침향무>를 지금 듣고 있는데요.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평소에 국악을 저는 자주 듣진 못합니다. 그런데 가끔씩 이렇게 들으면 정말 빠져드는 게 있군요. 그리고 예전에 왜 저 어렸을 때는 텔레비전에서 국악프로도 꽤 있어서 그때마다 이렇게 좀 어린 마음에도 듣고 좋다 하고 느꼈던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다시 들으면 그때 생각도 나고요. 대표작이신 <침향무>를 지금 듣고 있습니다. 1974년에. 그러면 이 곡은 이화여대 교수로 가시면서 작곡한 곡인가요?
◎ 황병기 :
74년이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것은 이화대학에 들어가면서 제가 가야금만 하면서 사는 가야금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프로의식을 가졌고 또 하나는 그해 가을에 74년 가을에 유럽에서 순회 독주회를 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제가 뭔가 이렇게 아주 획기적으로 새로운 곡을 쓰고 싶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침향무>를 작곡해서 이 침향무는 국내에서 초연된 게 아니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됐습니다. 그래서 유럽 각국에서 연주를 하고 마지막에 파리에서 끝났죠.
◎ 손석희 / 진행 :
그전까지 만드셨던 작품과 어떤 면에서 다르고 왜 대표작이라고 꼽는 걸까요?
◎ 황병기 :
저는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창작하는 사람도 뭔가 새로운 것을 항상 찾고 있거든요. 그런데 새롭기만 하면 작품이 허망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전통에 매달리면 고루해지고, 그래서 딜레마인데 그 딜레마 속에서 창작이 이루어지는 건데 우리의 전통음악이라는 것은 조선조의 음악이에요. 그래서 조선의 틀을 깨고 나오려고 생각을 했는데 저는 신라로 돌아가려고 그랬죠. 그래서 신라 사람들이 저한테 춤곡을 하나 의뢰했다면 어떤 곡을 쓸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서 신라의 음악을 생각하면서 쓴 곡이 <침향무>고 또 신라의 문화라고 하는 것은 외국 문화를 받아들여서 국제, 요새 식으로 표현하자면 국제적 경쟁력 있는 그런 수준 높은 문화를 이뤘는데 그것을 침향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의 향기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인도 서역의 향기가 서린 속에서 추는 춤, 왜냐하면 신라의 불상이라든가 여러 가지 문화재들이 남아 있지만 그것에서 서역적인 영향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서양문화를 무조건 추종만 한 게 아니라 우리의 독창성 있는 문화를 이루는데 신라문화의 가치가 있는 건데 글쎄 저는 <침향무>를 쓸 적에 꼭 한국이라기보다는 범아시아적인 아시아 전체 음악으로 생각하고 쓴 것이죠.
◎ 손석희 / 진행 :
선생님 설명을 듣고 보니까 달리 아무튼 또 생각이 드는데요. 아까 너무 흘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침향무>가 바깥에서 준비되면 잠깐만 다시한번 들어봐야 될 것 같습니다.
◎ 황병기 :
그 다음 트랙을 한번 들어보시면.
◎ 손석희 / 진행 :
<침향무>의 다음 트랙이요?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아까 것이 첫 번째 트랙이었다면 두 번째 트랙을 잠깐 좀 들어볼까요?
- <침향무> -
◎ 손석희 / 진행 :
<침향무>의 중간부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오니까 정말 색다르네요. 아까 처음에 들었던 것하고
◎ 황병기 :
처음에 들었던 가야금산조하고 전혀 다르죠.
◎ 손석희 / 진행 :
그러게요. 그때까지 들었던 가야금하고는 정말 달랐을 것 같습니다. 이게 74년도에 나온 곡이네요.
◎ 황병기 :
네, 그런데 이 곡이 곡도요. 모든 곡은 제 자식 같은데 다 각자 팔자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침향무>는 무슨 팔자를 타고 났는지 제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이에요.
◎ 손석희 / 진행 :
좋은 팔자네요. 그런데 별로 안 좋은 팔자인 곡도 하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궁>,
◎ 황병기 :
그건 좀 험난한 팔자죠.
◎ 손석희 / 진행 :
<미궁>이 나온 것이 바로 다음 해 1975년인데요. 이 곡은 많은 분들이 어떻게 알고 계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대표작으로 꼽히는 곡이면서도 귀신을 부르는 주문이다, 이런 루머가 퍼져서요. 전 세계적으로 3천 명이 죽었다, 이런 허황된 루머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황병기 :
그렇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들어보셨겠죠. 물론.
◎ 황병기 :
저한테 엄청나게 이메일이 많이 왔었죠. 그래서
◎ 손석희 / 진행 :
뭐라고 답변해주셨습니까?
◎ 황병기 :
세 번 들으면 죽는다는 말이 굉장히 유행했어요. <미궁>을 세 번 들으면 죽는다. 어떤 학생은 저한테 자기가 지금까지 미궁을 두 번 들었는데 ‘한 번 더 들으면 죽습니까?’ 라는 질문을 보내왔더라고요. 그래서 너는 틀림없이 죽는다 그랬죠. 60년 후에 죽을 거다.
◎ 손석희 / 진행 :
왜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요. 이 곡은?
◎ 황병기 :
그 곡은 사람 목소리하고 가야금하고 이중주로 나가는 건데 사람 목소리는 보통 성악인 경우니까 아름다운 소프라노라나 이렇게 생각했겠지만 여기서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신문 낭독하는 소리 신음하는 소리 이런 일상적인 문화이전의 인간의 소리를 많이 썼고 가야금도 첼로 활로도 연주하고요. 장구채로도 연주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전통적인 가야금 소리는 전혀 쓰질 않았어요.
◎ 손석희 / 진행 :
상당히 전의적인 곡이군요.
◎ 황병기 :
전의적이죠. 새로운 곡인데 사람들이 전혀 새로운 것을 보면 항상 공포감을 느껴요.
◎ 손석희 / 진행 :
그렇겠죠. 아무래도. 특히 분위기가 밝다거나 이런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하신 대로 웃고 울고 비명도 지르고 신음소리도 나오고 새로우면서도 뭔가 공포스러운 그것 때문에 이런 루머가 생긴 모양이군요.
◎ 황병기 :
그렇겠죠. 그렇지만 맨 처음에는 혼을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주에 있는 어떤 혼을 불러서 탄생시키는 것이 인간의 탄생이라고 저는 봤죠. 그리고서 맨 마지막에는 저세상으로 가는 것, 거기는 <반야심경>의 마지막 주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그것을 성가로 부르는데 중동지방에 무슨 조로아스터교라든가 배화교 같은 거 그런 이단적인 세계의 성가 그 풍으로 이제 부르죠.
◎ 손석희 / 진행 :
이렇게까지 얘기를 나눴는데 안 들어볼 순 없을 것 같아서 잠깐 들을 텐데요. 혹시 지금까지 미궁을 두 번 들으셨던 분들께서는 한 10초 동안 귀를 막아주셔야겠습니다. 불안하시다면. 아니면 나는 한 번도 듣고 싶지 않아 하시는 분들도 귀를 막아주시면 되겠습니다. 한 10초 정도만 들어보겠습니다. 10초 정도면 될까요?
◎ 황병기 :
예.
◎ 손석희 / 진행 :
들어보겠습니다.
- <미궁> -
◎ 황병기 :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 손석희 / 진행 :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습니다. 들어봤는데, 이러면서 점점 더 격렬해지고 그러나보죠. 뒤로 갈수록.
◎ 황병기 :
이게 끝나고 나면 느닷없이 여자 웃음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를 듣다가 보면 그게 웃음소리가 아니고 우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웃음하고 우는 것은 반대인 줄 알지만 사실은 또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 손석희 / 진행 :
오늘 한 두세 곡만 들어봤는데도 선생님 작품세계가 굉장히 독특하고 황병기 선생님만의 어떤 음악이라는 것은 충분히 저희가 알 수가 있겠네요. 지금도 공연을 하고 계시다가 아까 말씀드렸고 혹시 앞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공연 계획이 있으시죠?
◎ 황병기 :
7월 13일에 LG아트센터에서 ‘명인 황병기 가야금 콘서트 달 항아리’
◎ 손석희 / 진행 :
달 항아리
◎ 황병기 :
그런 타이틀로 공연을 하는데 거기서 바로 <미궁>도 제가 직접 연주하고
◎ 손석희 / 진행 :
직접 하세요?
◎ 황병기 :
<침향무>도 제가 직접 연주할 겁니다.
◎ 손석희 / 진행 :
그건 아주 귀중한 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 7월 13일 하루만 하시나요?
◎ 황병기 :
네, 그날 하루만 합니다.
◎ 손석희 / 진행 :
몇 시에 하십니까?
◎ 황병기 :
LG아트센터는 항상 8시인 것 같아요.
◎ 손석희 / 진행 :
저녁 8시에.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아마 오늘 방송 들으신 분들께서 한번 가서 직접 들어봐야지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많이 계실 것 같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되신바 있는 소설가 한말숙 선생이 부인이십니다. 5살 연상이시라고 들었습니다. 한 선생님께서.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그 당시에는 사실 연상커플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결혼도 그렇게 쉽지 않으셨으리라는 생각이 얼핏 드는데 어떠셨습니까?
◎ 황병기 :
저는 결혼은 쉽게 했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어떻게 해서 만났느냐 하면 저희 집 사람도 국립국악원에 가야금을 배우러 왔었어요. 그래서 이제 쉽게 만나게 돼서 오래 만나다가 같이 살게 됐는데 저희 부모님들은 뭐 연상의 며느리를 좋아하는 조건은 아니지만 구태여 반대도 안 하셨어요. 니가 좋으면 그냥 해라.
◎ 손석희 / 진행 :
어찌 보면 부모님들께서 굉장히 트이신 분들 같습니다.
◎ 황병기 :
네, 그런 면에서 상당히 그 당시 용어로는 신식이었죠.
◎ 손석희 / 진행 :
한말숙 선생께서 미리 쓰는 유언장을 통해서 ‘내가 죽더라도 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 된다’ 이런 유언을 미리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 황병기 :
네.
◎ 손석희 / 진행 :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 황병기 :
저는 고맙게 생각하죠. 그만큼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그러나 고마운 얘기이긴 하지만 그건 저희 집 사람 얘기고 저는 저대로 또 자유가 있죠.
◎ 손석희 / 진행 :
(웃음)
◎ 황병기 :
그러니까 어떻게 될는지는 전혀 모를 일이죠.
◎ 손석희 / 진행 :
지금 이 말씀하신 걸 들으시면 한말숙 선생께서 좀 많이 서운해 하시지 않을까요?
◎ 황병기 :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처음으로 하는 얘기도 아니고.
◎ 손석희 / 진행 :
그런가요?
◎ 황병기 :
네. 자기는 자기 식으로 살고 저는 저 식으로 사는 거죠.
◎ 손석희 / 진행 :
교분관계가 굉장히 넓으신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백남준 선생하고도 각별한 사이셨다고 했고 또 지금 첼리스트 장한나양, 나이차이가 마흔여섯 살이나 된다고, 역시 각별한 친구사이시라면서요.
◎ 황병기 :
그렇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친구사이라고 얘기해도 되나요?
◎ 황병기 :
제가 먼저 친구라는 얘기를 했죠. 왜냐하면 장한나는 저보다 워낙 어리니까 감히 친구란 소리를 못했는데 내가 친구라는 게 별거냐 지금도 뭐 서로 이메일 교환하고 있고 또 한국에 나오면 아무리 바빠도 저하고 같이 식사도 하고
◎ 손석희 / 진행 :
어떤 얘기들을 나누십니까? 그렇게 마흔여섯 살 차이면
◎ 황병기 :
주로 음악얘기 많이 나누고 장한나하고 저하고 공통점 중에 하나는 장한나도 음악대학을 가지 않았거든요.
◎ 손석희 / 진행 :
그렇죠.
◎ 황병기 :
하버드대학의 철학과를 갔죠. 그런 점에서 통하는 점도 있고 또 제가 처음으로 장한나를 만났을 땐 장한나는 10대였어요. 처음으로 만났는데 물론 서울에서 만났는데 제 음악을 다 들었고 음반으로. 또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제 음반을. 그러니까 제가 친해질 수밖에 없죠.
◎ 손석희 / 진행 :
두 분이 합동공연을 한다든가 이런 건 불가능할까요?
◎ 황병기 :
딱 한 번 제가 서양오케스트라하고 가야금하고 협주하는 곡을 쓴 게 있어요. <새봄>이라고. 그걸 장한나가 지휘했죠.
◎ 손석희 / 진행 :
그렇군요.
◎ 황병기 :
포스코센터에서 한 번 연주한 일이 있죠.
◎ 손석희 / 진행 :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황병기 :
장한나가 제가 작곡한 가야금곡이 아니라 거문고곡에 <소엽삼방>이라는 게 있는데 그 <소엽삼방>이 7월 13일에 또 연주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장한나가 굉장히 좋아해서 그 곡을 그대로 자기가 첼로로 무반주 독주를 하겠다고 그럽니다.
◎ 손석희 / 진행 :
예전에 친하셨던 故 백남준 선생도 첼리스트하고 같이 합동작업을 하고 그게 굉장히 유명한
◎ 황병기 :
굉장히 친밀하게 그렇게 했죠.
◎ 손석희 / 진행 :
서로 근원을 따지다 보면 사실 예술이라는 것이 서로 달리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하여간 좋은 작업이 앞으로도 좀있었으면 좋겠네요. 두 분 사이에. 국악인생 60년 후회되는 부분은 없으십니까?
◎ 황병기 :
저는 모든 면에서 후회라는 건 안 하는 사람입니다. (웃음) 여태까지 산 걸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후회가 어디 있습니까?
◎ 손석희 / 진행 :
질문 드린 사람이 굉장히 면구스럽습니다.
◎ 황병기 :
(웃음)
◎ 손석희 / 진행 :
앞으로도 늘 후회 없는 연주자 또 작곡자 우리 국악계의 거목으로서의 삶을 이어 나가시리라고 믿고 늘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황병기 :
감사합니다.
◎ 손석희 / 진행 :
오늘 이렇게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황병기 선생님과의 <토요일에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첫댓글 예술이란 수도계의 가치를 이해하기 좋을 듯해서 올립니다. 황병기 선생님은 제가 좋아하는 예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