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7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만송 이기붕은 1896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6대 손이었으나, 왕족의 대우는 13대조에서 끝났다. 그뒤 자손들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전성군 이대는 그의 12대조였다.
그의 증조부 이회정(李會正)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흥선대원군의 수하에서 활약하다가 임오군란에 연루, 명성황후의 민씨 정권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한다.
이후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어렵게 지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할아버지도 20세에 사망하고 아버지 마저 오래 산다는게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버지를 여읠 때 그의 나이 10세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과부인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가난한 환경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였고 밥을 굶기를 예사로 하여 몸이 병약하였다 한다. 그가 소학교에 다닐 때는 며칠 안있어 죽을 아이를 무엇하러 학교에 보내나 하고 손가락질 하는 동리 어른들이 있었다고 한다. 소학교에 다닐 때는 노래를 잘 불러서 여기 저기 뽑혀다니기도 하였다.
학창 시절
어려운 환경에서 고학으로 지내던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만나 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주시경 외에 최린 등을 은사로 만났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이승만(李承晩)을 만나 알게 되었다.
학생으로는 허정, 김도연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기도 했다. 그러나 보성중학교 재학 당시 그의 가정 환경은 어려워져 경성부를 떠나 경기도 수원 매향교 다리 근처로 이사하여 지내게 되었다. 집안에 식량이 부족하고 양식을 구할수 없어 생식을 1년간 하기도 했다. 몸이 병약하여 통학이 어려웠던 그의 어려운 환경을 들은 보성중학교 당시 교장 최린(崔麟)의 주선으로 동창 김찬(金燦)이 자신의 집에서 하숙하도록 도와주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다시 친구인 최승만의 집으로 옮겨가서 하숙하며 중학교를 마쳤다. 또한 최린 교장은 그에게 몸이 약한 사람은 생식을 하면 위험하다며 생식을 그만두게 하였다.
체력이 약했던 그는 운동회에 상을 타는 것을 부러워하여 매일 새벽에 남산을 뛰어갔다 오는 연습을 4개월간 반복하여 하다가 운동회에 500m 경주에서 2등으로 입상하기도 했다. 보성중학교 재학 중 사생대회에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한글번역본 책표지의 장발장 그림을 모사하여 출품하고 제목을 귀향노인이라는 이름으로 제출하였다. 당시 최남선은 어느 잡지에 보성중학교의 이군의 귀향노인이라는 작품은 장발장을 연상케 한다는 논평을 낸 것을 이기붕은 후일 우연히 발견하였다. 보성중학교의 이사장이었던 손병희는 직접 학생들에게 여비를 주고 도보여행으로 경상북도 경주시까지 수학여행을 갔다. 그러나 그의 체력이 병약하여 학교 이사장인 손병희는 그를 경주여행에 데려가는 것을 주저하였으나 울면서 애걸하여 경주에 같이 가게 되었다. 대구까지 기차로 여행한 뒤 대구에서 내려 경주까지 도보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키가 크고 나이 많은 학생들은 발이 붓고 터지고 병이 나고 하였다. 안데리고 가겠다는 것을 떼를 써서 가게 된 그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고 따라갔다 한다.
이후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했고 1915년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한다.[3] 중학교 졸업 직후 중국인 교회에 다녔고, 남궁억과 함께 교회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했고, 악기 연주도 하였다. 중학교 졸업 직후 일시적으로 서양인의 통역으로 취직하기도 했다.
도미 유학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이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중퇴 후 막일을 전전하던 중, 선교사 J.R.무스의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통역 당시 성경 번역에 쓰던 훈민정음체를 사용하지 않고, 주시경의 한글체(현대한글체)를 사용한 것이 문제되어 무스 선교사와 갈등하였고, 결국 무스와 싸운 뒤 통역을 그만두었다.
그후 미국 유학을 결심, 도미하였다. 옷이 없던 그는 당시 중앙학교에 근무하던 은사인 남상협(南相協)에게서 입던 헌 양복을 빌려입고 출국, 그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미하였다. 길을 잘못찾아 상하이로 건너갔던 그는 미국으로 가는 길을 몰라 상하이로 온 백낙춘을 만났다.
백낙춘은 그에게 배삯을 주는 대신 미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조건을 달았다. 그에게 미국으로 인도하는 조건으로 여비를 부담하였다. 배가 일본 요코하마를 경유, 당시 한국인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일본경찰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중국인 승객들이 노름하는 곳에 끼어 위기를 모면하고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삯이 없어 한국인 교포의 주선으로 심부름꾼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남부 캘리포니아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LA근교 헌팅턴의 호텔에 종업원으로 취직하였다. 아이오와주 데이버주립 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하였고, 스스로 고학과 노동으로 학비를 조달했다. 1923년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주립 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했다[3] 데이버 대학 졸업 직후 뉴욕으로 건너가서 노동을 하였다. 뉴욕에서 노동을 하던 중 크리스마스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뉴욕에 모여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를 할 때, 성탄절 기념 연극 '동방박사와 세사람'의 남자 주인공을 맡게 되었다. 같은 연극의 여자 주인공을 맡게 된 유학생 박마리아를 알게 되어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
미국에서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고, 이승만의 동지회에 가담, 장덕수·윤치영·허정과 함께 '삼일신문'을 발간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부터 이승만의 측근이 되었다. 허정이 귀국하면서 그는 삼일신보를 인수, 운영하였으나 곧 경영난과 재정난으로 문닫게 되었다. 귀국후 허정과 다시 광산업을 동업하였다.
이후 주시경에게서 배운 필적이 문제되어 한때 일경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다. 박마리아는 이화여자대학교[4]에 재학중이었고 3년 후 1935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하여 결혼하였다. 결혼 당시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일로 장모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아내 박마리아를 통해 어렵게 결혼 승락을 얻어냈다.
1934년 귀국 후 이기붕은 북촌 일대에서 가회상회를 운영했지만 실패했고, 1935년 결혼 이후에는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 지배인을 지냈다. 이 무렵 부인 박마리아와의 사이에 이강희, 이강석(李康石), 이강욱(李康旭) 자녀들이 있었는데, 장녀 이강희는 이화여중 재학중 사망했기에 자녀들은 두아들만 남았다.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 사무소 개설등 잡다한 일을 거쳐 일제 강점기 말기엔 허정(許政)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사업수완이 없어서인지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창씨개명 령이 떨어졌으나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광산업과 상점 경영에 몰두하였다. 1945년 초 일제가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성부 도봉으로 은신, 숨어 지내다가 8월 광복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