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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나라 참세상 참사람 모임회(참나세 사모회) 원문보기 글쓴이: 박옥태래진
- 수필 - 대나무 밭 -박옥태래진- 대나무밭은 나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집을 감싼 뒤뜰 언덕이 모두 대나무 밭이었다 큰 감나무가 우거져 지붕을 내려다보고 아람드리 팽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있었고 대밭 깊숙이에는 부모님도 모른 초산의 암탉과 뒷산 꿩들이 가끔씩 내려와 알을 낳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짜릿한 횡재를 가끔씩 하곤 했었다 여름이면 팽나무에 올라가 판자로 집을 짓고 팽을 따서 딱총을 만들어 쏘거나 누렇게 익은 팽을 따서 호주머니에 가득 채워 먹기도 했다 집 세 채를 감싼 대나무밭은 넓어서 어린 나에게는 신기하기도 무섭기도 한 곳이었지만 그곳은 나의 정원이요 나만의 개척지이기도 했었다 홍시감이며 상수리와 팽과 으름열매들이 모두 내 것이요 비둘기와 까마귀 떼들과 이름 모를 새들 대나무 숲 위에 올라앉으면 몰래 대밭에 올라가 밑에서 대를 흔들어대면 후두둑 떨어지는 날짐승들 혼내고 놀던 개구쟁이 서바이벌 놀이터였다 가끔 형들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생솔가지를 꺾어오면 대밭에 깊숙이 숨기고 마르기를 기다린다 그 때는 내 가슴도 콩닥대고 산지기에게 들킬까 봐 나도 함께 도둑가슴이 되곤 했었다 봄에 죽순이 올라올 때가 되면 대밭은 금지구역이 된다 새 죽순이 오를 때 밟으면 부러지기에 아버님께서 엄한 경계령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큰 대나무밭을 가지고 있었지만 죽순 나물을 먹어본 적이 없다 가까운 바다에 김양식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나무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재였던 것이다 또한 대나무는 농어촌에서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았다 하루는 동리형들이 나를 꼬드겼다 바다낚시를 갈려는데 첨대(낚시대)가 없으니까 첨대감을 몇 개 잘라주면 바다에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날 나는 부모님 몰래 그 형들 따라 갔다가 무서운 밤바다의 파도에 쓸려가 죽을 뻔 했었다 집을 나서면 대밭 옆으로 뒷동산을 오르는 길이 있다 그길 따라 뒷동산에는 큰 묘역이 있는데 진디가 잘 자라서 비탈진 잔디에서 잔디썰매를 나는 자주타고 놀았다 지금은 대밭 뒤로 아버님이 심은 감나무 밭이 있고 그 위로는 어머님 묘소가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동산이지만 나 어릴 적은 큰 산이었었다
군대 입대전날 밤이었다. 친구들이 송별회를 한다고 모여들었다 15명 정도였는데 남녀 반반 이었을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다 보니 모두 내게 한 잔씩 권하는 바람에 난 금새 취하고 말았다 그 때만해도 난 미소년이었으나 군대를 지원했었다 여자 친구들은 모두 날 좋아 했기에 슬픈 날이기도 했는데 나는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 그 밤 정신을 잃고 기억이 나는 것은 뒷동산을 오르는 대밭오솔길에서 누구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은 뒷동산 썰매 타던 묘지 앞에서 한 여자가 날 분명 강간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가물가물 조금씩 떠오르는 기억 조각들이었다 기억도 없이 술 취해 있었어도 혈기왕성한 총각 때는 그 일이 성사 된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아침에 잠이 깨니 내 방이었고 친구들은 모두 가고 없었다 어머님께서 야단을 치셨다 송별회 도중에 내가 사라져서 친구들이 기다리다 헤어졌다고 그리고 늦게야 순이가 날 업고 들어 왔었다 하셨다 그 때 나는 나의 강간범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못생긴 아이가 아니던가? 날 짝사랑 하던 그녀 어찌 날 납치할 용기가 있었던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그녀의 최후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총각동정을 강간당하고 군에를 입대했었다
대나무 밭은 나에게 있어 추억이 많다 난 호기심이 많았고 자장궂은 아이였다 원숭이처럼 팽나무 감나무 상수리나무를 오르락 거리니 아버님께서 10미터나 되는 장대를 들고서 나무에 올라가 있는 나를 장대로 쑤시면서 내려오라고 하면 나는 더욱 높은 꼭대기로 올라가곤 했다 그러면 아버님은 떨어질 까봐 더욱 가슴을 조이셨다 감나무를 흔들어 가지 끝에 열린 홍시를 떨어트려서 먹고 멀쩡한 감을 몰래 꼭지 비틀어 놓고 홍시가 되면 따 먹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오니 대나무들이 모두 꽃이 피었다 대나무는 일생에 한 번의 꽃을 피운다고 했다 그리고 꽃을 피우고 나면 모두 죽고 만다 그 해에 측간 옆에 고목처럼 자라던 오동나무도 죽고 말았다 비가 올 때면 커다란 오동잎을 따서 머리에 쓰고 빗속을 달려 다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좋았었는데 말이다 그 해에는 우리 집에 봉황이 왔었나 보다 했었다 봉황은 암수 자웅으로 봉은 숫컷이요 황은 암컷이랬다 그리고 봉황은 백년에 한 번 세상에 내려오는데 봉은 대나무밭에만 앉아 대꽃을 먹으며 황은 오동나무에만 앉으며 오동을 먹는다고 했다 어쨌든 나는 그런 전설 따위는 의미가 없었고 나의 어린 꿈이 자라던 무성하고 푸르른 대나무들이 모두 말라 죽는 것을 보자니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웠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다시 서울생활을 하게 되었었다 음악공부를 하고 작곡을 계속 하려던 것을 접고 글을 쓰려고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가 먼저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에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도 잘되었고 글도 써서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입선도 했다 그리고 소설과 수필을 써서 신문에 발표를 했다 그때 내 나이 총각 26세로서 작가요 사업가가 되었다 지금은 내 나이 60이 되었으니 세월도 많이 흘렀다 고향의 대나무 밭은 10년 전부터 다시 대나무가 자라났다 그러나 고향집은 아무도 살지 않은 외로운 집이 되었다 보모님도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대밭 뒤 동산에서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을 내려다보며 지킬 뿐이다 그런데 대밭과 어머님 묘소 사이엔 우리 텃밭이었기에 아버님 살아계실 때 먼저 돌아가신 어머님 산소를 꾸미 실려고 감나무를 그밭에다 수십 그루 심고 돌보시며 날마다 어머님 산소에 자라는 잡풀을 뽑으시고 어머님을 만나시며 산소 곁을 지키셨다 어머님에 대한 아버님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이상한 소문이 동리에 떠돌기도 했었다 묘지 위에 올라가서 잡풀을 뽑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마누라를 사랑했으면 죽은 마누라 위에 날마다 올라타 계신다고 농질을 하였다 그런데 이젠 형님도 돌아가시고 형제와 조카까지 모두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으니 아무도 고향집을 돌보지 않는다 대밭은 뿌리를 뻗고 뻗어서 이제는 감나무 밭도 점령을 했다 얼마 후면 어머님 산소에 까지 올라올 판이 된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생가는 주인을 기다리며 비어 있고 감나무와 팽나무와 상수리나무들도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탐스런 유자들이 가득 열려서 허리들이 굽은 유자나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여전히 푸르른 대나무가 자라서 왕성하게 옛집을 감싸고 있는데 어찌해야 하는가? 멈출 줄 모르는 대나무들의 번성 어머님 산소를 침범하려 하는 대밭을 또 없애야 하는가? 따 먹을 사람도 없이 끝없이 열리는 수십 그루의 감나무도 모두 함께 배어야할 판이 아니던가? 아! 내 어린추억이 살아 있는 고향 대나무 밭이여!
12운룡 승천 /사진촬영-박옥태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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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