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두레박
전에 제가 쓴 글 중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새로 쓴 게 있습니다.
최근에 다시 업데이트하였습니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있었구요,
이 나무꾼이 하는 거라곤 골방에 앉아 자기 땀과 피를 모아 옷을 짜는 거였는데 그것을 날개옷이라고 이름지었지요.
하늘을 접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담은 옷이었겠지요.
어느 날 나무꾼은 산길을 가다가 어떤 여인을 만났어요.
나무꾼에겐 여자라곤 처음인 여인이었지요.
그러니 흔쾌히 따라온 그 여자와 같이 살면서 얼마나 기뻤겠어요.
애기도 낳고, 소꿉놀이같은 살림도 같이 했는데 무식한 나뭇꾼은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지요.
그저 자기식대로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쳐다보고 나무하고 농사짓고 그랬겠지요.
애기를 더 낳으니까 이 나무꾼은 이제 미치는 겁니다.
어떻게든 자기의 기쁨을,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골방에 쳐박아 놓았던, 제가 짰던 그 옷을 꺼내어 여인에게 입힌거지요.
지극한 사랑이 그 옷에 마법을 불어넣은 건지 진짜로 그 옷을 입은 여인은 선녀가 되었어요.
선녀가 되어 두 아이와 함께 하늘로 날아 간거예요.
가장 사랑하는 순간에 그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그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리고 말지요.
그래, 내가 만든 날개옷을 주었든,
원래 이야기처럼 진짜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었다 주었든,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날아가서 헤어지면 그것으로 그냥 슬픈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 나무꾼은 그 헤어짐을 인정않고 밤낮으로 여인을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하늘에서 내려오는 두레박의 존재를 알게됩니다.
그 두레박을 타고가면 하늘로 갈 수 있다는 거지요.
옛날 이야기와는 달리, 그러나 나무꾼은 두레박을 탈 수가 없습니다.
지상에 있는 노모가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과연 두레박을 타고 하늘에 간다고 그 여인을 만나 다시 예전처럼 행복해질까 하는 겁니다.
이미 하늘나라의 좋은 것을 맛보았을 여인이 다시 힘들었던 땅위로 내려오려 할까?
아니, 날개옷을 감춘 나무꾼이 원망스러워 나무꾼과 눈을 마주치려나할까?
그리고 이미 하늘의 수준에 눈이 맞춰졌는데 무지랭이 나무꾼이 자기 눈에나 찰까?
죄가 많은(땅위에서 산다는 게 다 죄가 많은 거니까) 자신을 알아나 볼까? 알아나 줄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나무꾼은 두레박을 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레박은 나무꾼에게 여인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을 주면서도 다시 또 한번의 이별을 안기는 안타까움을 주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자신만의 고유한 어떤 가치와의 이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 두레박이 내려온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더 큰 슬픔은,
이 이 두레박이 결코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도
두레박이 내려 온다는 것으로도 더 큰 절망에 빠진다는 거지요.
아예 두레박이 없다면 말 그대로 파국이지만,
그래서 깨끗이 잊고 망각하고 슬픔의 비석을 세울 수가 있지만,
두레박이 있으면서도 타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이나 자괴감, 소심함, 비겁함 같은 것 때문일 겁니다.
그래 여기엔, 하늘이 과연 두레박의 물 대신에 나를 받아줄까 하는 염려도 있겠고
혹시 올라가면서 두레박에 매단 동아줄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을 겁니다.
물을 긷는 두레박에 무거운 자신의 몸을 얹었으니 하늘이 어찌 모를까 말이지요.
(옛날 호랑이가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면서 저를 살리시려거든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십시오 하며 잘못 소원을 빌었듯이
자기가 못된 호랑이는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니까 말이예요.)
슬퍼하면서도 그 슬픔을 아무에게도 표현하지 못하는 그 심리적 폐쇄감은
사람을 사랑하고 이별하여 슬퍼하는 이인칭적인,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나에게 날카로운 칼이 꽂히는 자기모멸이나 비하감을 유발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살 거라는 하늘의 가치와 비교해져서
이제는 지상의 어느 상황도 비교가 안되는 겁니다.
어찌 땅위의 가치가 하늘에 비교되겠어요.
자연히 땅위에서의 삶은 시시해지고 가치없어지고 부질없고 허망해지고 쓸데없어지는 거지요.
그래, 그때 죽음을 생각하는 겁니다.
두레박을 타지 않고서도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 말이에요.
그 죽음은 자신의 여인과도 대등하게 비교할 수 있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게 해줍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하늘에 오른다고 그 여인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여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믿음도 없겠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그 여인과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산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와 사랑한다는 것이고 자기 주위의 어떤 시간과 공간을 사랑하고 같이하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한 두 번씩은 사랑하는 자신과 이별하고
자신에게 주어준 기회와 이별하고
자신을 돌봐주는 시간과 사람과 이별합니다.
그런데도 그 이별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겁니다.
행복의 시작일 수 있고 비극의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겠지요.
어느 것을 선택하든 행복과 비극을 다같이 씹겠지만요.
매달 보름달이 환한 날에 내려오는 두레박 때문에 나무꾼은 희망과 절망의 극단적인 갈등을 겪습니다.
아예 안 내려오면 지상의 여인과 다시 결혼하여 그 가치에 적응하고 수용하고 타협할텐데,
그래서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슬플 건데,
그 놈의 두레박은 양 극단의 가치를 늘 눈앞에서 출렁이게 합니다.
그 놈의 두레박이 내려오는 보름날이면,
갖가지 생각과 감정이 삶의 가치를 퍼올리는 두레박 주위를 맴돌면서
나무꾼을 엉뚱하게도 늑대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결국은 그 두레박에 몸을 싣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 이야기와 마음이라는 그냥 물만 길어올려 보내게 됩니다.
하늘의 선녀, 옛날의 자신의 아내였을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에게 바쳐지는 삶의 푸념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찰랑찰랑 넘치도록 두레박에 담지만 하늘에 닿을 때쯤 다 쏟길지도 모르겠지만요.
아주 오랜후 어느날 나무꾼은 기억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내가 나의 땀과 눈물로 선녀옷을 만들었으며
나로 인해 아내는 선녀가 되어 날아갔음을 말입니다.
나무꾼은 깨닫습니다.
하늘로 가버린 아내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는데
자신의 생각과 기억만이 남아서 헤어진 선녀를 만들고 있음을 말입니다.
하늘두레박은 원래 없었고
그 안에서 넘치는 물이라는 것도
오직 놓고싶지 않았던 집착과 고통의 단물이었습니다.
산 속에서 여인이 헤매고 있을 리 없고
그 여인을 선녀로 만든 선녀옷이라는 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게 그저 한바탕 꿈이고
깨고 나면 사라지는 나를 기억하는 건
또다시 그 꿈을 꾸는 나라는 걸 말입니다.
내가 선녀를 보낸 것이 아니라 선녀가 나를 땅위에 남겨두었음을
그래서 이 세상이 나로 인해 살아나고
세상은 나와 더불어 사는 것이며
생생한 체험은 더 생생하게 이 세상을 꿈꾸는 것임을 말입니다.
나무꾼은 비로소 선녀를 보내고 자유롭게 됩니다.
집착과 고통이 없이 신나게 살게됩니다.
꿈은 꾸어지니까 그저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