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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하나님의 나라의 心要性 : 世界와 人間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에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마가는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이와 같이 서술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14-15). 마태도 그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 누가는 예수께서 주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받은 자가 와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읽은 후에 “이 글이 오늘 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가르친 나사렛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눅4:18-21). 우리는 예수의 메시지와 기적들을 세계와 인간, 그리고 요청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을 정당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終末論的 二元論 구약의 예언자들은 죄악으로 물든 세계를 깨끗하게 하고 땅 위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구현시킬 주의 날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였다. 우리는 구약에서 사물(事物)들의 현재적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구속된 질서가 서로 대조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옛 질서와 새 질서의 차이점은 두질서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차이 정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술어들로 묘사되고 있다. 아모스(9:13-15)는 하나님의 나라를 아주 차세적(此世的)인 술어들로 서술하는 반면, 이사야는 새 질서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보고 있다(사65:17).
구속된 새 질서라는 개념은 후기 유대교 문헌들 속에서 다른 술어들로 묘사되고 있다. 때로 하나님의 나라는 새 질서가 마치 옛 질서의 완성에 불과한 것처럼 매우 세속적인 술어들로 묘사되기도 하고, 때로 하나님 나라는 옛 질서를 완전히 변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새 질서가 초월적인 언어로 묘사되기도 한다. 후기의 어떤 묵시문학을 보면, 먼저 현세적이며 지상적인 왕국이 존재하고 후에 새롭게 변화된 영원한 질서가 뒤따른다.
이렇게 역사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언제인가 이 세대와 오는 세대라는 새로운 관용어가 생겨났다. 우리는 이 관용어의 역사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그에 대한 최초의 증거는 에녹서71장15절인데, 이 구절은 아마도 히브리어의 올람 하바-오는 세대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오는 세상”을 지칭할 것이다. 이 관용어는 주후 제 1세기의 유대 문헌들인 제 4 에스라서와 바룩의 묵시룩에서 완전히 발전된 개념으로 나타난다.
두 새대라는 관용어는 퍼크 아봇(Pirke Aboth)과 더불어 시작되는 랍비문학에서 일반화되었는데, 이 랍비문학은 주전 제 3 세기로 소급되는 랍비들의 설화들을 담고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은 주전 1세기 후반보다 더 앞서는 것 같지 않다.
이 특별한 관용어의 발단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표현하는 개념은 현세계와 미래의 구속된 질서 사이를 대조시키는 구약적인 진술로 소급된다. 그것은 공관복음서에 의해 보도된 예수의 전체 메시지와 사역의 뼈대를 제공해 준다. 완전한 형태의 관용어는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나타난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곳의 관용어는 마태가 만든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 관용어는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묻는 어느 부자 청년의 질문에서도 나타난다. 제자들과 대화하는 동안에 예수는
“금세의” 제자들의 상태와 그들이 “내세에” 경험하게 될 영생과 대조시키고 있다(막10:30).
“금세”( )라는 관용어는 “현재”(롬8:18 참조, )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쿨만은 종말론적인 이 원론이 구속사의 기초가 된다는 견해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영원”에 해당하는 신약의 단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헬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을 시가과 다른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서에서 영원이라는 사상은 끝이 없는 시간이다. 헬레니즘에서는 사람들이 시간의 윤회(輪廻)로부터 무시간적인 저 세계로 해방되는 것을 갈망하였으나, 성서에서는 시간이 현재와 미래에 걸친 인간 존재의 영역이다. AV판이 계시록 10장 6절에서-“시간이 다시 없으리니”-주는 인상은 RSV판에서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로 교정되었다. 신약성서 전체는 영원의 개념을 영원히( )(막3:29), 또는 무궁히( )(눅1:33,55)라는 관용어로 표현하는데, 때로는 “세세토록”, 또는 “세세에 무궁토록”( )(갈1:5;벧전4:11;계1:18)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오는 세대와 하나님의 나라는 때때로 혼용되는 술어들이다.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묻는 부자 청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는 영생이란 오는 세대의 생명이라고 대답하였다(막10:30). 오는 세대는 항상 불의한 자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주시된다. “저 세상”, 즉 오는 세대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보존된 축복이다. 오는 세대는 죽은 자들의 부활로 시작될 것이며, 사망이 다시 없을 것이다. 저 세상에 들어가는 자들은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사들과 같을 것이다.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누리는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눅20:34-36). 따라서 부활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오는 세대의 생명-하나님 나라의 생명이다.
부활만이 이 세대로부터 오는 세대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 세대의 종말을 구획지을 것이다(마24:3). 인자(人子)는 권세와 큰 영광으로 올 것이며, 택한 자들을 땅의 사방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그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다(마24:30-31).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마태의 비유들은 이 세대의 종말에 대해서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지만(마13:39,40,49), 그 개념은 복음서들 전체에 걸쳐 시종 일관하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마13:36-43)이 세대의 상황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대조시킨다. 이 세대에서는 밀과 가라지가-왕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 악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의 분리는 추수 때-심판-가서야 있을 것이다. 그때는 죄의 모든 원인들과 악행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한편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 날 것이다”(마13:42-43).
이 세대의 성격은 오는 세대와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 정면으로 반대된다. 이것은 땅의 비유에서도 나타난다. 씨뿌리는 자가 “천국 말씀”(마13:19)의 씨를 뿌린다. 말씀은 여러 환경 속에서 뿌리를 내리지만 세상의 염려가(마4:19;마13:22)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세대 자체가 죄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소홀히 하고 이 세상의 염려들을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염려들은 죄가 된다.
바울은 보도된 예수의 말씀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악한 세대”(갈1:4)에 관하여 말한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전2:6).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는 새 능력을 힘입어 변화받을 것을 권면한다(롬12:2). 이 모든 사실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두 세대의 개념과 일치한다.
종말론적인 이러한 이원론에 있어서 예수와 바울은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것과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묵시론적인 역사관을 가리킨다. 어떤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역사 속에서 지상적인 왕국을 갈망하던 히브리인들의 열렬한 예언적 소망
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 에 관한 구약의 예언적 소망은 항상 하나님의 급작스러운 돌입(catastrophic inbreaking)을 내포하며, 옛 질서와의 연속성 또는 불연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보스는 유대교에서 발전된 이 종말론적 이월론이 신적인 계시에 의해서 신약 시대의 기자들에게로 들어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약의
예언적 소망과 다르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창조 때부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재림 심판 등의 술어로 지칭되는 주의 날까지에 걸친 이 세대는 연약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세대이며, 죄와 악과 사망의 세대이다. 오는 세대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의미하는 모든 것이 실현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상속받는 부활의 세대가 될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사실들은 오는 세대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지상적인 생명일 것을 지적하지만, 그 생명은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에 의해서 변화된 생명이며, 그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충만한 하나님의 축복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19:28).
따라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것은 적어도 죄와 악과 사망이 군림하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러한 세력들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히브리-유대적인 사상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새로운 세대를 기대하는 소망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소망은 이미 구약 예언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은 현세대의 모든 악을 인간적이며 지상적인 존재들로부터 완전히 제거할 것이다.
靈의 世界
사 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갔다(마4:1). 시험들 가운데 하나는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놓은 산으로(아마 상상의 산일 것이다) 올라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때에 마귀가 예수에게 이르기를,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했다(눅4:6). 공관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사탄은 귀신들이라고 불리어지는 보다 열등한 악령들의 우두머리로서 초자연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귀신의 왕”(막3:22)이라고도 한다.
이 개념의 배경은 구약에서 기원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준행하는 하늘 영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계신 분으로 묘사된다(시82:1;89:6;단7:10). 많은 학자들은 RSV판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번역한 신명기 32장 8절을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그에게 종속되어 있는 영적 존재들을 통해서 감독하신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욥기 1-2장에서 사탄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 욥을 비난하고 그에게 시험을 줄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던 “하나님의 아들들”중의 하나였다. 역대 하 21장 1절에서 사탄은 다윗을 충동하여 죄를 짓게 하였다.
중간사(中間史)시대의 유대교는 악령들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영들의 우두머리 보통 사탄으로 불리어지지 않고 대신 마스테마, 아사셀, 세야사, 벨리알, 그리고 아스모데우스 같은 이
름들이 나타난다. 벨리알은 쿰란 문헌들 속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술어이다. “귀신들”이란 술어는 나타나지 않지만, 영들의 우두머리에 속해 있는 일단의 악령들이 존재한다. 에녹서에서 이들 악령들은 “파수꾼들”로 불리는 타락한 천사들이 여인들과 결혼하여 낳은 후손
들로서 거인 영들이었다. 이들 악령들은 땅 위에 있는 모든 악들의 근원이다. 타락한 이들
천사들에 관해서는 에녹 6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세야사의 수하에 있는 18명의 지도급 천사들의 이름도 나온다. 그들은 여인들에게 정욕을 느껴 그들과 결혼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들 천사는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관습들을 가르쳤으며, 온 세상은 타락한 이들 천사들의 소행들로 인하여 부패되었는데, 모든 죄는 바로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에녹10:8). 때때로 에녹서에서는 악령들이 구약에서처럼 사람들을 고소하며(에녹40:7;65:6),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에녹69:4이하) 사탄들로 불리어진다. 단일 우두머리인 사탄은 두 번 언급된다(에녹54:3,6).
복음서에 나타난 사탄의 주요 기능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반대하는 것이다. 시험 설화에서 사탄은 세상에 대한 권세를 주장하였는데, 예수께서도 그것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사탄의 시험은 예수를 자기에게 굴복시키고 고난당하는 종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그의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동일한 생각이 사탄을 “이 세상 신”(고후4:4)이라고 부르는 바울에게서 한층 더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동일한 악의 나라의 신학이 유대교에서도 발견된다. 단의 언약(The Testament of Dan)은 현재를 “원수의 나라”(단의 언약6:4)로 묘사한다. 훈련지침서(The Manual of Discipline)는 전쟁 두루마리(The War Scroll)에서처럼(IQM14:19)이 세대를 “벨리알이 통치하는 때”(IQS1:17,23;2:19)라고 말한다. 동일한 생각이 예수께서 “강한 자의 집에”-이 세대- 들어가 그를 결박할 것을 말씀한 마태복음 12장29절에서도 반영된다.
유대교나 신약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이 악한 나라가 절대적인 이원론적 세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타락한 천사들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권세 앞에서 무력한 존재들이다. 신약에서는 이 모든 영적인 권세들이 하나님의 만드신 존재들이며, 따라서 그의 권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묵시문학에서는 그들이 심판 날에 파별을 당한다.
사탄과 귀신들의 교리는 신학적인 몇 가지 독특한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악은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것도 아니며, 맹목적인 악의 기회이거나 변덕스러운 운명도 아니다. 악은 인격속에 뿌리 박고 있다. 그러면서도 악은 인간들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다. 악은 인간의 의지(意志)를 굴복시킬 수 있지만 그것에 의해서 저지될 수도 있다. 악은 애니미즘에서처럼 조직되지 않은 혼란한 세력들의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는 데 목적을 둔 단일 의지의 지도를 받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 영적인 세력들이 창조된 존재들임을 보여주는 이론적 근거는 부족하지 않다. “언젠가 묵시적인 구조의 환상적이며 신화적인 장식물들이 제거된다면, 악의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들의 근거로서 중심적인 가정(假定)만 남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유를 위해서 치러져야만 할 댓가인 것이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사탄의 활동이 몇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한 가지 경우를 든다면, 18년 동안 불구자로 지낸 한 여인이 사탄에게 매인 자로 지칭되고 있다(눅13:16). 그러나 사탄의 활동은 주로 윤리적이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밀은 “천국의 아들들”인 반면 가라지는 “악한 자들의 아들들”로 묘사된다(마13:38). 여기서 사회는 두 반대 되는 계층들로 나
뉘어 있다: 즉 천국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들과 그것을 알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자들이 그들이다. 더구나 천국의 말씀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 바로 사탄의 목적이다(막4:15). 그는 예수를 시험함으로써 그가 맡은 그가 맡은 구속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으며, 고난당하여 죽는 것이 메시야의 역할일 수 없다는 사실을 베드로를 통하여 말하게 하였다(막8:33). 사탄은 유
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팔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눅 22:3). 그는 또한 베드로의 신앙이 별 것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를 사로 잡으려고 밀 까부르듯 하였다(눅22:31). 이 경우에 사탄의 목적은 예수의 기도로 말미암아 좌절되었다.
이러한 사탄적인 악의 배경은 예수의 사역과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위한 우주적 배경을 제공한다. 영적인 악한 인격의 존재에 대해서는 과학이든 철학이든 사실 할 말이 없다. 선한 영을-하나님의 존재-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인간 역사 속에 존재하는 악의 배후에 악한 영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이유도 없다. 우리의 목적은 우선 하나님 나라의 신학이 본질적으로 사탄의 나라와의 싸움과 정복에 관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가지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공관복음서나 나머지 신약 어디에서도 유대 묵시문학들처럼 사탄이나 귀신들에 대해서 사변적(思辨的)인 어떤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묵시문학에서 사탄을 지칭하는 여러 이름들이 나온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신약의 관심은 전혀 실천적이며 구속적이다. 신약은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을 인정하지만, 그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악의 세력들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있다.
鬼 神 들 공관복음서에서 사탄의 세력에 대한 가장 특징적 증거는 귀신들이 인간 인격의 중심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귀신들은 초자연적인 악령들로 표현된다. 가버나움에서 시작된 그이 사역 초기부터 예수는 귀신들의 세력과 직면하게 되었다. 귀신은 직관적인 통찰력을 통해서 예수를 곧 알아보고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라고 했다. 유대교에서는 사탄의 세력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될 세상 끝에 이르러서 괴멸당한다. 귀신은 지금 당장에 사탄의 세력을 파멸시킬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예수 안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귀신 들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때로 그것은 벙어리(마9:32), 소경이나 벙어리(마12:22), 간질(마17:15,18)등과 같이 다른 신체적인 질병들과 관련을 가진다. 귀신 들린 것을 정신적인 질병과 동일시하는 곳이 한 군데 있다. 무덤 속에 거하면서 초인간적인 힘을 행사하던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는 분명히 광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침을 받은 후에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졌다고 했다(막5:15). 이것은 그가 광인이었음을 시사하지만, 우리는 그의 질병이 단순한 정신이상이라고 결론내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광적인 상태는 외부적인 세력의 영향을 받는 인격 한가운데서 발생한다.
그러나 귀신 들린 것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정신이상 형태들에 대한 고대인들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정확한 진술이 아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흔히 귀신 들린 것을 다른 질병들과 구별 짓는다. 예수께서는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모두 고치셨다(막1:32). 귀신 들린 것은 간질이나 중풍병(마4:24), 또는 질병과 문둥병(마10:8)으로부터 구별된다. 그러나 귀신 축출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분명히 마술이나 주문(呪文)들을 행하며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귀신과 귀신 축출에 대한 신앙은 조잡한 마법(魔法)과 뒤섞여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의 사역에서 놀랄만한 요인(要因)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말의 능력이었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막1:27).
귀신 축출이 우리 주의 사역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현대 해석자들의 거침돌이었다. 성서신학은 우선적으로 서술적인 학문이지만, 우리의 우선적인 과제는 예수의 사역을 그 역사적인 환경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살펴볼 터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악령의 세계와의 근본적인 싸움과 정복을 포함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신학이 우리 시대에 대해서 가지는 타당성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께서 사탄과 귀신의 존재를 믿었던 것으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개념들을 적용한 것에 불과하며 결코 예수의 교훈의 내용이 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비록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교사로서의 예수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며, 그의 목적은 윤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개념들을 윤리적인 목적에 부합되는 상징들로 사용하였을 뿐이다. 그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활동과 그 존재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명은 전혀 부적절한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이와 비슷하다. 예수는 그의 시대의 어린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귀신에 관한 그의 신앙도 오류를 범한 것이다. 고대인들이 귀신 들렸다고 부른 것은 정신이상에 불과하며, 현대인들이라면 귀신 들린 현상을 정신적인 질병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맥카슬랜드(McCasland)는 예수의 지혜와 숭고한 성격을 계속 확증하려고 한다. 그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큰 권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예수가 귀신들에 관한 그의 신앙에서오류를 범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귀신 축출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주변적인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악한 세대 속으로 들어온다는 본질적인 목적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귀신 축출 속에서 영계(靈界)와의 실제적인 싸움, 다시 말해서 그의 메시야적 사명의 심장부에 놓여있는 싸움에 참여한다는 예수 편에서의 의식(意識)을 인정해야만 한다. “귀신들과 천사들은 예수의 복음에 비하면 그의 전체 교훈들 속에서 별로 하는 역할도 없는 불합리한 요소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서의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귀신들은 죄와, 인간들이 필요로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해석한 예수의 교훈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인격적인 힘에 굴종되어 있다. 인간들을 사탄의 굴레에서 구해내어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으로 옮겨가야 할 필요성은 우리 주님의 사역 한가운데 존재한다. 이 이하의 어떤 것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복음서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본질적으로 재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세 번째 해석은 앞의 두 견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견해는 귀신들에관한 성서의 사상속에서 본질적인 어떤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인간의 경험 속에는 귀신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가 역사를 관망할 때 주시하는 것은 흔히 비인격적이고 무의미한 것들 뿐만 아니라, 불합리하고 광기어린 것들이다. 우리가 보는 우리의 얼굴은 자주 광인에 가까운 것이다. 예수께서 인간들을 보셨을 때도 그들을 언제나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구성단위로서 또는 자제할 줄 아는 자율적인 영들로서 본 것은 아니다. 그는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의 성령
과 사탄의 두 우주적인 적대 세력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 또는 비극적인 결전장으로 보았다.”
귀신들과 마법을 믿는 교회의 역사는 수많은 악과 고난을 초래시킨 미신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이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개념이 남용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나 철학은 초인간적인 존재들, 또는 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거나 합리적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 선험적이며(a priori)합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만일 악령들의 세력의 존재를 믿
는 예수의 신앙을 거절한다면,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역시 왜 제거될
수 없으며, 또 그러한 제거 과정이 당대의 모든 문헌에 왜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기 곤란하다. 적응, 정신적인 질병, 강력한 인격의 영향들을 주장하는 이론들이 비록 설명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일종의 신비와 대답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이 남게 된다”
世 界 예수는 이 세대를 사탄의 영역으로 보는 일반적인 신약의 태도를 취한 반면, 창조된 세계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헬라의 이원론은 인간의 영혼이 속해 있는 본체계(本體界)와 인간의 신체를 포함한 현상계(現象界)와 대조시킨다. 현명한 자는 자신의 마음을 훈련시키며 자기의 육체적인 욕망들을 제어함으로써 영혼을 물질 세계의 세력들로부터 자유롭게 한 사람이다. 후기 영지주의 사상에서는 물질 세계 자체가 사실상(ipso facto)악의 영역이었다. 한편 히브리 사상은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며, 비록 그것이 악에 의해서 오염되기는 했어도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었다.
예수는 히브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창조자로 생각했으며, 인간과 세계를 그의 피조물로 간주하였다(막13:19;마19:4). 예수는 자연의 질서와 규칙성을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과 변하지 않는 그의 관심을 보여주는 증거로 생각하였으며, 그의 교훈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자연으로부터 수많은 예증들을 끌어왔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신다. 그는 들의 백합화들을 입히시며 까마귀들을 먹이신다(눅12:22이하). 그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새들 중의 하나인 참새들까지도 보살핀다(눅12:4-7).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마5:45). 그는 땅과 하늘의 주인이시다(눅10:21).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위 속에는 세계 부정이나 금욕주의 정신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경건치 않은 사람들과 더불어 음식을 먹는 그의 습관 때문에 당시의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마9:10;눅15:1-2). 그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서 연회나 잔치의 은유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는 심지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11:29)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사탄은 이 세대의 지배자이지만, 세계는 분명히 아직까지 하나님의 세계였다. 피조물 중에 어떤 것도 도덕적으로 악하지 않으며, 인간의 타락성은 그가 육체적인 소욕들을 가진 피조물이라는 사실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그들의 육적인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가르쳤다.
동시에 인간의 최고의 선은 피조물 수준에서 발견될 수 없다. 사람이 만일“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막8:36)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문맥에서 “천하”( )란
말은 물리적인 세계나 인간들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땅 위에서 경험하는 그 전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인간적인 수준에서 바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성취하는 일은 악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사람의 참된 생명을 위하지는 못한다. 그는 인간적인 수준에서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그의 참 생명은 잃어버린 것이다. 세상의 부(富)를 인생의 궁극적인 관심사로 삼고 하나님의 일들을 소홀히 할 때, 그 부는 죄와 사망의 도구가 될 수 있다(눅12:16-21,30). 부를 가진 사람이 그 부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나님의 일만이 하나님을 먼저 찾게 할 수 있으며, 세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자연적인 이런 인간의 소욕들을 극복할 수 있다(막10:27).
人 間 인간에 대한 구자유주의 해석은 신학자들과 목사들 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전체 복음은 성부 하나님, 섭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위치,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이러한 개념들의 결합 속에서 표현된다.” “가정에 속한 전체 개념은-아버지, 아들, 형제-인간성에 관한 그의 교리에서 통일을 이루는 요소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전체적인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결의들도 그것에 의해서 구분 짓고 시험해 보아야 한다.” 로빈슨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일시적이며 외부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을 구분하려고 했다. 종말론은 일시적인 요인들에 속하고 영구적인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부자 관계였다. 이 영구적인 핵의 주요 윤곽은 기본적인 네 가지 교훈들로 환원된다.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인간의 최대 가치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 생명은 유일하고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인간의 의무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를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세 번째 교훈은 인간은 서로 형제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보편적이다. 네 번째 교훈은 죄가 아들됨의 관계를 깨뜨리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손상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사역은 본래 인간에게 속해 있던 것을 회복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인간관을 잘못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후에 살필 것이지만,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예수의 신관(神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결코 하나님을 그의 제자들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로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하나님 나라의 선물이다.
실로 예수는 사람을 동물 세계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그는 공중의 새들이나 들의 백합화들보다 월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마6:26-30;10:31). 하나님은 인간들을 돌보시며 그들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마10:30).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를 섬겨야 한다. 그는 그의 주인되신 하나님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도 종으로서 그의 의무를 준행했을 뿐임을 인식해야 한다(눅17:7-10).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에게 완전히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는 자기의 머리털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고 그의 키를 더할 수도 없으며, 자기의 생명의 길이도 결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마5:36;6:27). 사람은 재산에서 안녕을 찾지만, 하나님은 부자 농부가 그 재산을 누리기 전에 그것을 빼앗아 가실 수 있는 분이시다(눅12:16-21). 하나님은 사람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으며(마10:28), 그의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마25:41이하).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제자가 될 것을 요청한 사실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인간 경험의 비극은 그 사람의 타락 정도에 비례해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들은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눅13:1-5). 심지어 언익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잃어버린 바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마10:6;15:24;눅19:10).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을 때(막2:17), 또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눅15:7), 사실 그는 실제로 의로운 자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그의 촉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견해를 반영했을 뿐이다. “구원에의 초청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의 음성을 청종하려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생각하는 그의 대적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를 대적하는 자의 실수는 예수께서 이들 ‘의인’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다고 전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의 타락상을 응시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사람이 그의 생명을 곡식 창고들과 가시적(可視的)인 위안거리들로 만족시킬 수 없음을 가르친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부요해야 한다(눅12:15-21). 온 천하를 얻고도 그의 참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참 생명은 오직 하나님과의 사귐에서만 실현된다(마16:26).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창조된 자들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기뻐하는 것은 그의 현재적인 신분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잃어버린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을 기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그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기뻐하는 때는 죄인이 회개할 때이다(눅15:17).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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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
현대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중심 메시지라는 견해에 일치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왔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4-15). 마태는 그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4:23). 누가의 서론적인 부분은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지 않지만, 그 대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확언(確言)을 진술해 준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
하나님 나라에 관한 解釋들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해석들은 세부적으로 상당히 다양하지만, 몇 가지 특징적인 형태들을 갖는다. 어거스틴으로부터 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인 견해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에서 교회와 동일시되고 있다. 이런 식의 견해는 현재 카톨릭 학자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되어질 수 없다.
구자유주의 견해는 하르낙의 저서 What is Christianity?에 의해서 대표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에 의해 가르쳐진 순수 예언적 종교-하나님의 부성(부성), 인간의 형제됨, 개별 영혼의 무한한 가치, 사랑의 윤리 등-로 이해한다. 예수의 교훈 속에 나타난 묵시론적 요소는 그의 실제적인 종교 메시지의 핵을 담고있는 껍질에 불과하다.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우선적으로 개인의 종교 체험-하나님께서 개별 연혼을 다스리심-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여 왔다.
1892년 바이스(Johannes Weiss)는 “The Preaching of Jesus About the Kingdom of God" 이란 소책자를 출판하였는데, 그는 거기서 예수의 왕국관(王國觀)이 유대 묵시론자들의 견해-철저하게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왕국-와 같다고 주장하였다. 사탄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이미 하늘에서 쟁취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땅 위에 도래한 것을 선포한 것이다. 왕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이며, 그것이 도래할 때 예수는 천상적인 인자(人子)가 될 것이다.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이러한 개념을 채택하여 예수의 전 사역을 왕국의 종말론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한 장래에 도래할 것으로-그는 이 해석을 “철저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으로 명명했다-기대하였다. 예수의 윤리 교훈은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고, 종말이 임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만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中間時代 倫理, interim ethics). 왕국은 오지 않았고, 예수는 절망과 환멸 속에서 죽었다. 쉬바이처에 있어서 이것이 바로 “역사적 예수”-환상적인 1세기 묵시론자-의 정체였다.
바이스와 쉬바이처 이래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묵시론적인 요소가 예수 교훈의 껍질이 아니라 핵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현대 학자들은 왕국을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히어스(Richaard Hiers)는 예외이다. 불트만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
는 사실을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해석으로 받아 들였으나, 그 실제 의미는 실존론적으로 -하나님의 가까우심과 그의 요구-이해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은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다. 도드는 하르낙처럼 묵시적인 언어를 단적으로 제거시키지 않고 그것을 인간 정신이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실재들의 상징으로 보았다. 묵시론적인 언어로 묘사된 하나님의 나라는 사실상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역사 속에 뚫고 들어온, 시공간(視空間)을 뛰어넘는 초월적 질서이다. 예수 안에서 전적 타자(全的 他者)가 역사 속에 들어온 것이다. 도드의 사상에 나타난 이 초월적 “전적 타자”는 성서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적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언자들이 대망하여 온 모든 사실들이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이다. 이것이 도드가 말하는 “실현된 종말론”이다.
도드는 왕국의 미래적 측면을 과소평가한 일 때문에 비판을 받았는데, 그는 최근에 와서 왕국이 아직 “역사를 초월한 완성”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예수의 교훈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왕국의 현재성(現在性)이라는 도드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대다수 학자들의 총의(總意)를 모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라는 사실이다. 큄멜(Kummel)은 왕국의 일차적 의미를 종말(the eschaton)로 -유대 묵시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새 세대-이해했다. 예수는 새세대가 가까왔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큄멜은 왕국이 현재적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 속에서만 그러함을 주장한다. 미래의 종말론 왕국은 이미 예수의 사역 속에서 시작되었다. 큄멜의 견해에 있어서 왕국이 어떻게 미래적 종말도 될 수 있고, 예수의 현재적 활동도 될 수 있는지 전혀 분명치 않다. 다른 학자들은 왕국이 전적으로 미래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이미 그 능력이 체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새벽이 일출을 앞서는 것같이 왕국의 표증(表證)들은 현재하지만, 왕국 자체는 현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도드가 왕국의 현재적 돌입을 강조함으로써 해석상 실제적 돌파구를 열어 놓은 일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왕국의 종말론적 측면을 과소평가한 일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대신에 예레미아스는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을 제의한다.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전 사역을 왕국이 실현된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는 심지어 세례 요한도 성취의 때에 속한 사람으로 본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고 구원의 때는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와 그의 귀신 축출 기적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 뚫고 들어왔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부활과 재림을 포함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기대하였다. 예레미아스는 예수가 그의 부활, 재림, 왕구의 완성을 하나님의 승리가 나타나는 단일 사건으로 간주하였다는 도드의 제의를 따른다. 부활의 모습들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재림(Parousia)을 경험하였다. 부활절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초대 교회는 재림과 부활을 분리시켰다. 예레미아스의 견해와 그가 비평한 도드의 견해 사이에 어떤 실질적인 차이점이 존재하는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미국과 영국의 어느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새로운 견해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구약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음이 분명하다는 전제(前提)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날카롭게 구분 짓는다. 후자는 지상에서의 천국(하나님)통치이며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지상적 신정 왕국을 우선적으로 지칭한다. 마태복음만이 왕국의 유대적 측면을 제공해 준다.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왔음을 선포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지상적인 신정 왕국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국의 제시를 거절했기 때문에 예수는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을 세우는 대신 믿는 자는 누구나 안식과 봉사를 제공받을 수 있으며, 인종적인 모든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신앙 가족을 형성할 새 메시지를 소개하였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천국 비유는 지상에서의 하나님 통치가 그리스도의 둘째 강림 사이에 취하게 될 형태로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 영역-기독교회-에 속한다. 누룩(마13:33)은 항상 악한 것을 나타낸다. 천국-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서는 참된 교훈이 거짓 교훈에 의해서 부패된다. 산상설교는 천국의 율법으로서 구약 신정왕국의 모세법을 그리스도께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이 거절한 천국은 이스라엘이 회심하고 다윗 왕국의 회복을 예언한 구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실편되어질 것이다. 이 신학의 기본적인 주장은 하나님의 두 백성들-이스라엘과 교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들 두 백성은 하나님의 두 계획 밑에서 두 가지 운명을 지니고 존재한다.
한 해에(1963-64년) 세 권의 책이 독립적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들 각 책은 왕국을 기본적으로 구속사(救贖史)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왕국은 두 가지 계기를 가진 하나님의 왕적 통치이다: 예수의 역사적인 사역 속에서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사실과 그 완성은 이 세대의 종말에 이르러 이루어지고 오는 세대가 시작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유대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용어는 구약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 개념은 예언서들 도처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왕권(王權)에 대해서는 이중적으로 강조된다. 그는 자주 이스라엘과(출15:18;민23:21;신33:5;사43:15) 온 세상의 왕으로(왕하19:15;사6:5;렘46:18;시29:10;99:1-4)언급된다. 하나님은 현재에도 왕이지만, 그가 장차 와이 되어 그의 백성들을 다스릴 날을 지칭하는 구절들도 있다(사24:23;33:22;52:7;습3:15;슥14:9이하).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왕이지만(is) 또한 왕이 되어야(become) 한다는, 다시 말해서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열방에게 그의 왕되심을 보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미래적 왕국의 형태는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서 다르게 표현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구약과 유대교에서 다른 두 종류의 소망이 있음을 발견한다. 히브리적이며 예언적인 소망은 왕국이 역사 밖에서 일어날 것이며,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통치될 지상적 나라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사9,11장). 이러한 소망이 포로귀환 후에 퇴색하자 유대인들은 역사 속에서 성취될 왕국의 소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대신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상적인 인자(人子)의 인격을 통해서 “역사를 뛰어넘는,” 완전히 초월적 왕국을 가지고 돌입하는 묵시론적 행위를 기대하였다(단7장). 필자는 어디선가 구약의 왕국 묘사에는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의 구속 목적이 완전히 실현되어지는 특징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주장한 적이 있다. 땅이 비록 악의 저주에서 구속되기는 하지만 왕국은 항상 지상적(地上的)인 소망이었다. 그러나 구약의 소망은 항상 윤리적인 것이지 사변적인 것
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역사를 통하여 지금 영기서 당면하는 문제는 미래의 빛으로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가 동시적인 것으로 연합된다. 하나님은 가까운 장래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거나 심판하시기 위해서 활동하실 것이지만, 그는 떠한 불확실한 장래에 종말론적인 소망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행위하실 것이다. 예언자들은 가까운 장래와 먼 장래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가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묵시론적 유대교 역시 다양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저술가들은 왕국의 지상적이며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에녹1-36장;솔로몬의 시편17-18편), 다른 저술가들은 보다 초월적인 측면들을 강조한다(에녹37-71장). 사실 유대 묵시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현재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생각을 상실하였다. 이 점에서 묵시론주의는 하나님게서 그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최후의 행위를 하실 것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가 역사적인 현재 속에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축복하시기 위해 행위하신다는 관점에서 비관주의가 되었다. 유대 묵시론자들은 역사가 악한 세력들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함으로써 역사를 포기해 버렸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오는 세대에 그의 왕국을 세우실 때까지 이 세대에서는 단지 고난과 핍박만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소망을 소유하고 있었다.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에 그들은 천사들이 내려와 그들과-“빛의 아들들”-그들의 원수들과의-“어둠의 아들들”-싸움에 참전하여 세속적인 유대인들이든 이방인들이든 상관없이 다른 모든 백성들에 대한 쿰란 신도들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랍비 문헌들은 이와 비슷한 종말론을 발전시켰으나 “천구”이란 술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그의 주권 행사-였다. 인간 역사의 전 과정에 걸쳐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통해서 그의 주권을 행사하였다. 율법에 복종하는 자는 누구나 그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 밑에 두는 자이다. 만일 이방인이 유대교에 개종하여 율법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로써 “하나님의 주권(나라)을 떠맡은 것이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지상적인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에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 나라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율법 속에 표현되어 있으며, 그것에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나라이다.
이 세대의 종말에 이를 때, 하나님은 온 세상에 그의 주권을 나타낼 것이다. 매우 오래전 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소원으로 끝을 맺는다:“그리고 그가(하나님) 그의 주권을 그대의 생전 그대의 사는 날 동안에 그리고 이스라엘 온 집의 생전에, (옳소이다) 빠르다면 가까운 장래에 곧 나타내시기를 원하나이다.” 모세의 승천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그리고 나서 그의 나라는 그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두루 나타날 것이다”(모세의 승천 10:1). 이 세대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율법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한정되어 있지만, 이 세대의 종말에 이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반항하는 모든 자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현재 속에서 경험하는 일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존하지만, 그것이 이 세대의 마지막에 이르러 나타날 때에는 “천상적인 인물이 그의 왕좌로부터 일어나”(모세의 승천10:3) 악한 자들을 징벌하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구속된 축복의 질서 속으로 모아 들일 것이다.
유대교 안에서의 또 다른 운동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열심당들(the Zealots)과 분명
히 관련이 있다. 주후 1세기 초엽에 로마를 대항하는 수많은 반란들이 열심당들에 의해 선동되어 일어났었다. 신약은 유다와 드다가 선동한 반란과(행5:36,37) 익명의 애굽인이 선동한 반란(행21:38)에 대하여 언급한다. 요세푸스는 신약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혁명 운동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이들 운동을 혁명이라고 칭하지는 않지만, 주후 132년에 있었던 최후의 반란에서 그 지도자격인 바르 코크바(Bar Kokhba)가 당대의 가장 유명한 랍비 아키바(Akiba)에 의해서 메시야로 호칭되었다. 열심당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성취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칼로 도래시키려고 하는 유대 급진주의자들이었다. 로마를 대항하는 일련의 전체 반란들은 메시야적인 운동들일 가능성이 많다. 다시 말해서, 이들 반란운동들은 단지 정치적이거나 민족적인 목적들만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재촉하려는 종교적인 목적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어느 경우든 간에 유대교 전체에 걸쳐 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스라엘의 악한 원수들을 궤멸시키고 승리적인 이스라엘을 한데 모아 약속된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통치만을 받게 할-아마 사람들을 대리인으로 사용할 것이다-그의 행위로 기대되었다.
바실레이아 투 데우의 意味 학자들 간에는 나라( )의 기본적인 의미에 대하여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나라( )가 종말( )-궁극적인 종말론적 질서-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 이러한 견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종말이 어뗳게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종말은 배타적으로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의미는 추상적인 동력, 통치, 지배, 또는 통치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145:11,13).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9시103:19). 후기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 또는 주권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복음서들을 이해할 수 잇는 최선의 출발점이 된다. RSA판은 나라( )를 몇 번에 걸쳐 “왕위” 또는 “왕적인 권세”(눅19:12;23:42;요18:36;계17:12)로 번역하고 있다. “통치” 또는 “지배”의 의미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분명하다.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기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다시 말해서 그의 l통치가 완전하게 실현됨을 의미한다(마6:10).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 맡기는 “나라”는(눅22:29) “왕의 서열(序列)”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미래적이면서도 현재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가 우선 종말-종말론적인 구원시대-이라면, 이 미래적인 영역이 어떻게 현재적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과 랍비적 유대교에서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그의 통치-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현재 왕이시지만(is), 그는 또한 왕이 되셔야만(become)한다. 이것은 복음서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역할을 한다.
天 國 “천국”이란 말은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이 용어가 34회나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이란 말은 마태복음에서 몇 번, 그리고 신약 나머지 부분에서는 도처에서 사용되고 있다. “천국”은 셈어 계통의 관용어로서 하늘은 보통 신명(神名)의 대용어로 쓰였다(눅15:18참조). 복음전승은 예수께서 “하나님”이란 말을 시종일관하게 기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천국”이 예수의 실제적인 언어 사용을 반영하기보다는 마태의 복
음 전승을 보존하고 있었던 유대-기독교적 환경에서 연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예수는 두 관용어를 다 사용하였을지도 모르며, 이방인 독자들에게 보내진 복음서들은 그들에게 무의미하게 셈어 계통의 관용어를 생략하였을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은 예수 이전 시대의 유대 문헌들 속에서 잘 사용되지 않았다. 예레미아스는 아직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을-예수의 교훈 속에는 “나라”에 관한 수많은 새로운 용어들이 나타나는데, 이 용어들은 예수 당대의 문헌들 속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강조한다.
終末論的 王國 우리는 예수의 사상의 기본적인 구조가 종말론적인 두 세대의 이원론이라는 사실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 세대가 종말을 고하고 오는 세대를 출발시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마6:10), 또는 그 출현(눅19:11)이다. 그러나 나라( )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의 출현 내지 도래,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종말론적인 영역을 모두 지칭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생을 상속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는 세대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부유한 젊은 관원이 예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상속할 수 있느냐고 문의했을 때, 그는 다니엘 12장2절의 종말론적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말하기를 자기를 좇기 위해 집과 가족을 떠난 자들은 오는 세대에서 영생을 상속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9막10:17-31).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마귀와 그의 사자(사자)들이 궁극적이며 완전한 파멸을 당하고(마25:41), 악에 물들지 않는 구속된 무리가 형성되며(마13:36-43) 메시야적인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눅13:28-29)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세대와 같은 뜻을 지닌다.
예수의 가르침을 유대교와 갈라 놓는 가장 특징적인 사실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보편화시킨 점이다. 구약이나 유대교에서 왕국은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묘사되었다. 구약에서 이방인들은 때로 이스라엘에 의해서 정복되어지며(암9:12;미5:9;사45:14-16;60:12,14), 개종되어진다(습3:9,20;2:2-4;슥8:20-23). 그러나 왕국은 항상 이스라엘적이다. 후기 유대교는 상당히 매타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정치적이며 국가적인 원수들을 지배할 수 있는 주권을 의미하였다: “오 너 이스라엘아! 그대는 행복할지어다. 그대는 독수리의 목과 날개 위에 올라 놓은 곳에서 그대의 원수들이 지옥에 있음을 내려다 보리라. 그대는 그 대의 원수들을 알아보고 기뻐할 것이다”(모세의 승천10:8-10).
우리는 세례 요한이 이러한 유대주의적 배타주의를 거부하고 가장 종교적인 유대인들 가지도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회개가 필요함을 주장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예수는 자기 자신의 인격과 메시지에 실존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 요인으로 삼았다. 사실 예수는 “나라의 본 자손들”인 이스라엘은 그 나라에서 쫓겨나고 대신에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마8:12). “나라의 본 자손들”인 예수의 인격에 응답하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이다(마13:38). 우리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현재적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막10:15).
現在的 王國 예수의 교훈 속에서 종말론적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예언서들에게로 소급되며 유대교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도드(C. H. Dod)는 복음 설화들 가운데서 가장 특징적이며 두드러진 점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도래라고 주장한 점에서 옳았다. 이러한 설화들은 당대의 유대인들의 교훈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는 그의 사역을 묵시적인 완성으로서가 아니라 구약 약속들의 역사적인 완성으로 보았다. 이것은 특별히 두 구절 속에서 분명하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는 장차 기름 부음받은 자가 와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할 것을 말하는 이사야 61장 1-2절의 메시야 예언을 읽고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주장하였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그가 과연 오실 자인가를 알아오게 했을 때, 예수는 이사야 35장 5-6절에 있는 메시야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요한에게 알게 하였다(마11:2-6). 공관복음서 전체에 걸쳐 보면, 예수의 사역은 계속해서 구약의 약속들의 성취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실재로 보는 구절들은 이런 배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장 강하게 언급된 곳은 마태복음 12장 28절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의 가장 특징적인 기적들 중의 하나는 귀신 축출 사건이다. 예수는 명령 한 마디로 사람들을 사탄의 굴레에서 단번에 구원시킴으로써 무리를 놀라게 하였다(막1:28). 사탄의 권세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에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대답했으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한 증거라고 했다. 헬라어로 “임하였다”( )는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어왔다. 많은 학자들은 이 단어가 실제적인 현존이 아니라 근접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다른 학자는 그 동사가 근접성이 아니라 실제적인 현존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현존하는 것은 종말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악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왕권이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12:29). 예수는 이러한 진술 속에서 사탄의 나나를 공격하고 강한 자를“결박하는” 것을 선포하였다.
이 두 구절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신학이 구체화되었다. 하나님의 왕권이 나타나서 사탄의 악을 파멸시킬 이 세대의 종말을 기다리는 대신, 예수는 하나님이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기 위해서 그의 왕적인 권세를 가지고 이미 행위하셨음을 선포한다. 즉 예수의 교훈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사탄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이미 결박당하였으며, 이 세대의 종말에 이르러 궤멸당할 것이다. 사탄의 궁극적인 파멸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그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결박한다”는 말은 물론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탄에 대한 승리를 나타내기 때문에 그의 권세는 결박당한 것이다. 관용어의 은유적인 성격은 때때로 인정되지 않고, 단지 사탄이 완전히 무력(無力)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그것을 가로채 가고 있다(마13:19). 사탄은 베드로를 통해 말할 수 있었으며(막8:33),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으며(눅22:3), 베드로는 사로잡으려고도 했다(눅22:31). 쿨만은 사탄이 결박당
하기는 했지만, 긴 끈으로 결박되었다는 좀 기묘한 표현을 사용한다. 사탄은 무력하지는 않지만, 그의 세력은 크게 상처를 받았다. 쿨만은 이것을 다시 군사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설명한다. 결정적인 전투는 승리하였으나 전쟁의 소문은 마지막 승리가 얻어질 때까지 떠돌아 다닐 것이다. 예수의 전체 사역은 그의 말씀, 행위, 죽음 그리고 부활을 포함해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와 쟁취를 확실하게 만든 사탄의 권세에 대한 첫 번째 승리였다. “예수께서 악한 영을 축출할 때마다 사탄은 자기의 권세가 빼앗길 때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예견하였다. 사탄의 하수인들에 대한 승리는 종말의 예조(豫兆)였다.”
학자들은 사탄이 결박당한 때에 관해서 논쟁을 하여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 때를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긴 특정 사건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소박한 설명은 귀신 축출 사건 자체가 마귀와 그의 나라에 대한 승리적인 전투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귀신이 몸에서 쫓겨날 때마다 그것은 사탄이 파멸되고 그의 소유를 늑탈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귀신을 축출 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패망을 보았던 것이다.”
사탄에 대한 동일한 승리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여 그들이 온 갈릴리로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을 때,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준 능력 속에서도 나타난다(눅10:9). 파송된 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귀신들까지 예수의 이름을 듣고 그들에게 항복하였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 때에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10:18). 예수께서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 날 때 본 모습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는 없다. 문맥은 예수께서 70인의 성공적인 사역을 통해서 사탄이 패배당한 증거를 보았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다시 다른 은유적인 관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관용어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결정적인 승리가 쟁취되었음을 확증해 준다. 사탄은 결박당하였고 그는 그의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멸망은 이 세대의 종말을 기다려야 한다.
신약신학 중에서 풀기 어려운 신비가 여기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공관복음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잘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원수들은 구약에서처럼 적대적이며 악한 열방들이 아니라, 영적인 악한 권세들로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영적인 세계에서의 승리이다: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 바울은 고린도 전서15장 25절에서 이와 동일한 진리를 확인해 준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흥미있는 질문은 이렇다: 신약은 왜 이 전쟁을 배타적인 영계(靈界)의 전쟁으로 묘사하지 않는가? 악에 대한 승리는 왜 역사의 지평에서만 쟁취될 수 있는가? 아무런 설명도 주어지지 않지만, 대답은 인간의 운명이 이 싸움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속에 존재한다. 예수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어떤 방식으로 악한 세력과 싸움을 하여 그들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였기 때문에, 이 세대의 마지막에 이르면, 이들 권세들은 궁극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궤멸당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을 유대교와 갈라 놓는다. 당대의 묵시론자들은 이 세대가 악이 권세 아래 처한 반면, 하나님은 인간 역사의 현장에서 떠난 것으로 보았다. 에녹서는 하나님께서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일을 단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사나운 짐승들에 둘러싸여 찢기고 삼킴을 당하게 하였다. 그는 “비록 그것을 목도하셨을지라도 잠잠히 계셨으며, 그들이 삼키움을 당하고 늑탈당하며, 모든 짐승들에 의하여 찢기움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다”(에녹89:58). 심판날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그들을 괴롭게 하던 자들은 징벌을 당할 것이지만,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고통 앞에서 초연히 계셨다.
예수의 메시지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 역사 가운데 들어오셨으며, 비록 궁극적인 구원이 이 세대의 마지막 있을지라도 악에 대한 승리는 쟁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현재성)은 누가복음 17장 20절에서 주장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묵시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될는지 문의하였을 때, 좀 불가사의하기는 하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기치 못한 형태로 이미 그들 가운데 임하였음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기대하였으며 그것 없이는 만족할 수 없었던 표적들과 외적인 현상들을 동반하지 않았다. ꡑ 이란 말은 “너희 안에”, 다시 말해서 너희 마음 속에 또는 “너희 가운데”를 의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 15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마음 속에 받아 들여져야 함을 분명히 한 반면,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한 것 같지는 않다. “너희 가운데”(in your midst)라는 번역은 예수의 교훈의 전체 맥락과도 잘 어울린다.
새로운 終末論的 構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교훈은 구속적인 시간관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구약과 유대교는 유일회적인 하루를 -하나님의 땅 위에서 그의 통치권을 확립하시기 위해 행위하실 주의 날 -기대하였다. 이것은 직선으로 표시될 수 있다:
쿨만은 그리스도께서 선적(선적)인 시간에 새로운 중심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유대교에서처럼 동일한 기본적 구조를 가지지만 중심이 옮겨갔다. 쿨만이 역사의 중간 지점을 너무 강조하다가 종말을 희생시킨 점에 대해서 비판받은 것은 정당한 일이다
오래 전에 보스(Geerhardus Vos)는 비슷하지만 좀더 나은 시간관을 제시하였다.
이 구조는 오는 세대가 이 세대보다 좀더 높은 수준으로 옮겨 간 점과 부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이 두 세대가 중복되는 시간임을 보여주는 점에서 잇점을 가진다. 교회는 “두 시간 사이에서” 존재한다: 옛 세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세대의 세력들이 옛 세대 가운데로 뚫고 들어왔다.
우리는 신약의 시간관을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약간의 수정을 가해야 할 것이다
신약에는 이중적인 이원론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졌으며, 그의 나라는 그 뜻을 땅위에 가져왔다. 오는 세대에서는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고, 역사적인 존재를 새로운 수준의 구속받은 생명으로 끌어 올린다9계21:2-3). 이것은 복음서들 속에서 체계화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힌트는 주어졌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눅20:35-36). 여기에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의 질서가 존재한다. 성(성)이나 가족과 같은 심리적이며 사회적인 결속이 없는 존재의 유비를 인간들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악을 정복하고 그의 백성들을 오는 세대의 축복으로 주어질 불멸의 영생에 들어가게 정복하고 그의 백성들을 오는 세대의 축복으로 주어질 불멸의 영생에 들어가게 하는 것-하나님의 뜻이다.
이 도표는 E한 하나님의 나라가 구약에서도 역사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출애굽이나 바벨론 포로와 같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거나 심판하기 위해서 왕적인 권세로 활동하셨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역사 속에 들어왔다.
參考 文獻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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救援의 새 時代
우리는 앞 자에서 바실레이아의 의미가 단순개념이 아니라, 몇 가지 측면을 가진 복합개념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바실레이아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내지 지배이다. 하나님께서 왕의 권세를 가지고 그의 원수들을 궤멸시키며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를 지칭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한데 모여 그의 통치의 축복을 영위하게 될 미래적인 구원의 영역을 지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세대와 대치되어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事役)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역사적인 현재 속으로 돌입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임으로써 들어가게 되는 구속적 축복의 새 영역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現在的 祝福의 領域으로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실재로서 말하는 본문들이 몇 군데 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진술하였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5).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은 한층 더 분명하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11:52). 또 다른 구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한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이와 같은 구절에 대해서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한 것은 현재적 상황에 속한다. “소외된 계층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외면적으로 존경할 만한 지도자들이 반응을 보인다는 증거는 없다. 버림받은 자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광경도 그들의 태도를 바꾸지 못하였다.”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난해한 설화는 마태복음 11장 11-13절이다. 세례 요한이 보낸 자들에게 답변하는 자리에서 예수는 그가 과연 메시야 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이사야 35장 5-6절의 메시야 예언을 효과있게 인용함으로써 이렇게 대답한다. 이제 이 예언은 성취되었고 메시야적 구원의 시대가 여기에 도래한 것이다(마11:2-6). 예수는 헤롯의 옥에 갇힌 세례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라”(마11;11-13).
이 구절은 세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내포한다: “ ”의 의미, “침노하는 자”, “천국
에서 극히 작은자.ꡓ
침노하다( )의 동사는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다”를 의미하는데, 성서본문에서 쓰인 형태는 수동태로서 “무력이나 폭력을 당하다‘를 뜻하거나, 아니면 중간태로서 ”무력을 행사하다“를 의미할 수 있다. 어디선가 우리는 이 단어에 대한 여섯 가지 다른 해석을 논의한 적이 있는데, 여기선 단지 우리의 결론만 제시하려고 한다. 이 동사를 중간태로 취한다면, 우리의 해석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활동하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로 간주하는 역동적 견해와 잘 어울린다. ”천국은 강력하게 도래하였다“(RSVmg).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어원론적인 비평은 없다. 하나님의 통치는 큰 세력으로 다가왔고 열심 있는 자들은 그것을 붙잡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러한 통치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예수의 사명은 강력한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제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능력은 그와 동일한 강한 반응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교훈과 랍비들의 교훈을 갈라 놓는다. 랍비들은 사람들이 그들 어깨 위에 왕국의 멍에를 짊어지고 율법을 신의지(神意志)의 규범으로 받아들일 것을 가르쳤다. 예수는 그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고 가르쳤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왕국의 역동적인 능력은 세상 한가운데 들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정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 예수는 때때로 이러한 반응을 국단적인 행위로써 묘사하였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리라“(막9:43,47).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요청되는 폭력들이다. 어디선가 예수는 그를 위해서 자기의 가족을 미워하라는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였다(눈14:26). 그는 또한 자신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했다(마10:34).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現在性)은 결정적인 반응을 요청한다.
누가도 이 구절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16:16).
여기서도 가 중간태로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두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동적 통치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자들이 들어가게 되는 현재적 축복의 영역이다. 예수는 세례 요한을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불렀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 그는 예언자들 중에 최후의 인물이었다. 요한의 때 이래로 새로운 것이 일어나고 새로운 상황이 형성됨에 따라 “요한이 비록 큰 인물일지라도 여명(黎明)이 밝아오는 그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큰 자이며, 요한과는 달리 개인적인 성취나 품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는 이미 그 나라 속에 있는 것이다.” 요한과 다른 백성들이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언자들의 옛 시대와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된 왕국의 새 시대가 대조를 이룬다.
現在的 膳物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만일 우리가 이 축복의 새 영역에 대해서 묻는다면, 우리는 나라( )가 하나님의 역동적 통치와 구원의 영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생명과 구원의 선물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예수의 교훈 가운데는 또다른 본질적 요소가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포괄적인 술어로소 메시야적 구원이 내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달만(G. Dalman)은 예수의 교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가 “추구되고 부여되며 소유되고 받아들여지도록 허락된 선”일 수 있음을 인정
했다.
종말론적 완성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자들이 상속받을 것이다(마25;34). 여기서 “나라”란 단어는 하나님의 통치나 오는 세대가 아니라 오는 세대에 있을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로서 생명의 축복을 가리킨다(마24:46). 영생을 상속하는 문제에 관하여 묻는 어느 청년의 질문에 답변하면서(막10:17),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10:23-24), 영생을 상속하는 일이(10:30) 마치 서로 동일한 개념인 것처럼 진술하고 있다. 왕국은 아버지께서 적은 무리의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기를 기뻐하는 선물이다(눅12:32).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그가 종말론적인 영광 중에서 통치권을 나타내실 때 그의 백성들에게 부여할 생명의 선물이라면, 또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인 완성이 있기 전에 역사를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통치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 속에서 예비적인 축복을 그의 백성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발견한 점이다. 왕국은 오는 세대에 속한 종말론적인 선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떠한 지나간 옛 세대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수많은 설화 속에서 반영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살 만한 보화나 값진 진주와 같다(마13:44-46). 그것은 지금 여기서 추구되어야 할 어떤 것이며(마6:33), 어린아이가 선물을 받듯이 받아야 할 무엇이다(마10:15=눅18:16-17).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통치를 가리키지만 또한 그의 통치의 선물도 포함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될 두려운 권세가 아니라 선물이다. 자녀들은 “그 나라의 자손들”에게 요구되는 신실성과 수용성(收容性)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겸손이 공적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그것을 선물로 받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 되었다‥‥‥[그것은] 신적인 통치의 선물이다.” 마태복음 19장 14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현지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 보는 점에서 동일한 사상을 보여준다. 찾는 자들이 찾고 구하는 자들이 얻게 된다는 약속은(마7:7)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것을 찾은 후에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채워질 것이다(눅12:31). 두드리는 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문이다.”
산상보훈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본다. 심령이 가난한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는 선물을 받는다(마5:3,10). 이 귀절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지 매래적인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산상보훈은 분명히 종말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땅을 유업으로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심판날에), 그리고 하나님을 보는 등의 일은 우선 종말론적이다. 그러나 산상보훈의 주된 목적은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에 누리게 될 축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적 축복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신의 영적인 궁핍 때문에 애통하는 자들에 대한 위로는 주린 자들이 배부르게 되는 일과 같이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이다(마5:4,6). 두 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선물은 아마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것을 다 내포하는 것 같다. 산상보훈은 다 종말론적인 구원과 현재적 축복을 모두 설명한다.
救援의 膳物 하나님의 선물인 그의 나라는 “구원”이란 단어를 연구함으로써 한층 더 밝혀질 수 있다. 복음서에서 “구원하다” 또는 “구원”이란 단어는 종말론적이면서도 현재적인 축복을 함께 지칭한다.
구원은 우선적으로 종말론적인 선물이다. 예수께서 영생을 묻는 한 젊은 부자 관원의 질
문에 대해서 답변하실 때, 구원은 영생 또는 오는 세대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막10:17-30). 이 종말론적 구원은 자신의 육체적 생명을 잃는 것과 대조되면서 단순히 자기의 (참) 생명을 구원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막8:35;마10:39;눅17:46).
이 종말론적 구원은 단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으로(막9:43;마25:46), 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으로(마25:21,23) 묘사될 수 있다.
이 미래적 구원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죽음에서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복음서들은 부활에 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지만, 누가복음 20장 34-39절(비교․막12:24-27)은 종말론적 구원이 전인(全人)을 다 포함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부활의 생명은 천사들과 공유하는 불멸성을 가질 것이다. 죽지 않는 이 부활의 생명은 오는 세대의 생명이다(눅20;35). 육체적인 허약, 질병, 죽음과 같은 악들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통해서 삼키움을 당할 것이다9마25:34,46).
종말론적인 구원은 몸의 구속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서 파괴당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의 회복도 또한 의미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며(마5;8),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마25:21,23). 종말론적인 이 완성은 보통 일상생활에서 유추된 모습을 가지고 묘사되곤 한다. 추수는 있을 것이며, 곡식은 곡간에 모아 들여질 것이다(마13;30,39;막4:29;비교․마3;12;계14:15). 양은 염소들과 분리되어 우리에 안전하게 들어갈 것이다(마25:32). 가장 평범한 묘사는 잔치나 상을 배설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다시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눅22;30). 사람들은 땅의 사방으로부터 와서 구약의 성도들과 함께 상에 앉을 것이다(마8:11-12;눅13:29). 완성의 대는 혼인 잔치나(마22:1-14;25:1-12) 큰 잔치로(눅14:16-24)비유된다. 이 모든 은유적 표현들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 회복을 묘사한다.
종말론적 구원의 종교적인 차원은 잃어버린다는 의미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아폴루미( )라는 헬라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파괴하거나 죽이다 또는 잃다(수동태:버림을 당하다, 죽다 또는 멸망하다). “파괴 당하다”와 “멸망하다”의 의미는 모두 종말론적인 파멸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 마7:13).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하고(마8;35;비교․마10;39;16:25;눅9;24;17:33), 자기의 생명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마8;36).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잃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눅9;25). 따라서 자기의 생명을 잃는 것은 멸망당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멸망은 지옥의 불(마10:28;막9:42-48), 영원한 불(마18;8;25:41) 그리고 어두움(마8:12;22:13;25;30)과 관련하여 묘사된다. 불과 어두움은 동질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중심되는 사실은 궁극적인 멸망의 형태가 아니라 종교적인 그 의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 속에서도 발견된다.“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눅13;27). 여기서 멸망의 의미는 그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과 즐거움에서 제외됨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려는 예수의 사역(事役)은(마10:6;15;24) 종말론적인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잃어버림”은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그들의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의 위기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잃어버린 아들은 사실상 죽은 자였다. 그의 “구원” 또는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일은 생명의 회복을 뜻하였다(눅15:24).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예수의 사역은 미래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현재적인
차원도 갖는다. 그가 죄인들을 찾는 것은 그들을 미래적인 파멸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현재적인 구원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함이었다. 회개한 삭개오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인자(人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9-10). 우리는 바우어(Bauer)를 따라서 누가복음 19장 10절의 “잃어버림”을 “영원한 죽음”의 의미로 생각한 아른트(Arndt)와 깅리히(Gingrich)의 결정을 이러한 “잃어버림”의 의미를 배경으로 해서 평가할 수 있다. 잃어버린 자는 구원되지 않는 한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멸망의 위기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약속하기를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리라”(겔34;16,22)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성취한 사역이었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가져다 준 구원은 비록 그 축복이 미래를 내다보고 있긴 하지만 현재적 축복이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현재적 구원을 묘사한다(눅15장). 잃어버린 아들이 아버지 집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은 예수께서 삭개오와 세리, 그리고 자기와 교제를 원했던 죄인들에게 가져다 준 현재적 구원의 축복을 예시해 준다. 큰 아들은 원했던 죄인들에게 가져다 준 현재적 구원의 축복을 예시해 준다. 큰 아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홀로 준행하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큰 아들도 자기 아버지의 집에 거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잃어버린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아버지와의 참된 교제도 아버지 집의 즐거움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완성을 내다보는 이러한 현재적 교제의 선물은 상을 베풀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의 비유에서 예시된 주제였다.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저녁 상에 동참한 일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였다(막2:15이하). 이것은 일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잔치였다. 유대인들은 일상적인 식사에 기대어 눕는 이방인들의 습관을 따르지 않고 상에 앉았다. 특별한 경우에-연회, 혼인잔치, 또는 왕의 잔치-한해서만, 유대인들은 기대어 누웠다. 잔치의 은유적 표현은 종말론적 구원을 나타내는 일상적인 유대인들의 묘사방법이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과의 교제는 종말론적인 왕국의 즐거움과 교제를 기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식사의 종교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진술 속에서 반영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그는 죄인들을 불러 모아 자기와 교제를 나누게 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야적 사역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고립된 경우가 아닌 것은 다른 두 설화 속에서도 나타난다. 누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비평한 주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은 사실에 있었음을 기록한다(눅15:1-2). 뒤따르는 세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죄인들을 되찾은 기쁨을 강조한다. 중심되는 진리는 회개한 죄인에 대한 하늘에서의 기쁨이다(눅15:17). 그러나 그것은 예수와 회개한 죄인들이 함께 상에 앉아 음식을 먹는 일을 통해서 예견되는즐거움이다.
예수의 비판자들이 그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하던 이 즐거운 교제는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전형적인 것이었다(마11:18). 동일한 정조(情操)를 가진 메시야적 즐거움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일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다는 비평에 답변할 때도 나타난다. 금식은 혼인할 때 하지 않는다. 신랑이 있을 대는 기뻐해야
할 때이지 금식할 때는 아니다9막2;18-19). 우리는 신랑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유대교에서 메시야에 적용된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혼인잔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7일간의 혼인 잔치 동안 신랑의 친구들과 손님들은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종교적 의무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예수는 자기가 제자들 가운데 있는 것을 혼인 잔치라는 메시야적 상징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구원의 날은 임하였고 혼인 노래는 울려 퍼지고 있다. 즐거움 외에 슬퍼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할 수 없었다.
메시야적 구원의 현재성(現在性)은 예수의 치유(治癒) 기적들 속에서도 나타나는데, “구원하다”란 헬라어 단어는 “치유하다‘란 단어와 대치되어 사용된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혈루증(막5;34), 소경(막10;52), 귀신 들림(눅8;36), 심지어는 죽음 자체에서의 구원을 뜻하였다(막5:23). 예수는 이러한 치유 사건들을 메시야적 구원의 현재성의 증거들로 주장하였다(마11:4-5). 치유 사건들은 종말론적인 왕국의 생명을 보증하는 증거들이며 궁극적으로는 몸의 불멸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전인(全人)의 구원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신체적인 치유사건들의 제약은 미래적인 왕국과는 대조적으로 현재적 왕국의 본질을 예시해 준다. 종말론적인 왕국에서는 “저 세상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모든 자들이(눅20;35) 불멸의 부활의 생명을 얻어 질병과 죽음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구원하는 이 능력은 왕국의 현재적 사역 속에서 단지 소수의 사람에게만 미친다. 복음서에서 생명을 되찾은 경우는 세 군데 기록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치유받기 위해서 예수나 그의 제자들과 직접 접촉해야만 했다(막6:56). 왕국의 구원의 능력은 아직 보편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그 능력은 예수와 그가 파송한 무리들 속에서만 역사하였다(마10;8;눅10:9).
그러나 예수를 만나 본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치유하는 왕국의 생명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신체적인 이 구원은 신앙의 반응을 요청한다. 그것은 자동적으로(ex opere operato)
임하는 것이 아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5:34;10:52). 영적인 반응은 신체적인 축복을 받는 데 필수적이다. 치유의 기적들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메시야적 구원의 최고선(最高善)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복음 11장 4-5절에 있는 구절의 배열에서도 예시된다. 소경과 앉은뱅이, 문둥이와 귀머거리, 심지어는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복음”은 예수 자신의 현존 자체이며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가져다 준 즐거움과 교제였다.
신체적 질병에서의 구원이 단지 영적인 구원의 외곽적인 측면에 불과한 것은 귀신 축출에 관한 설화에서 나타난다. 이 기적은 황국의 현재성을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마12;28), 그것은 하나님께서 빈 처소를 차지하기 위한 예비적 조처였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정돈이 잘 되어 있고 청소되어 있는 빈 집과 같다(마12;44=눅11:25). 하나님의 능력이 그 생명에 들어가지 않으면, 귀신은 다른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은 전보다 더 심해질 것이다. 치유와 귀신 축출 사건은 구원의 부정적인 측면이며, 긍정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의 도래이다.
신체적인 구원과 그 영적인 측면 사이의 연계점은 열 문둥이를 고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난다. 열 사람 모두 “깨끗해지고”. “치유함을 받았다”(눅17:14). 돌아와서 감사 표시한 사람
은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는 사마리아인었다. 예수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고 하였다. 이 구절은 다른 곳에서 치유(治癒)를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우리는 다른 아홉 사람이 실제로 고침을 못 받은 것이라고 생갈할 수 있는가?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이 분명치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동일한 구절이 “영적인” 구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살펴볼 때(눅7:50), 우리는 아홉 사람보다 한 명의 사마리아인에게 보다 큰 축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주석가들과 동의해야 할 것이다. 그의 “구원” 또는 온전함은 신체적인 치유 이상의 뜻을 갖는다. 그것은 온전한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현재적인 이 “구원”이 신체적이면서도 영적이라는 사실은 시몬의 집에 있었던 죄 범한 한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증명된다. 그녀의 눈물과 사랑의 표시는 그녀의 회개를 증명한다. 예수는 그녀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고 하셨다. 치유의 어떤 기적도 있지 않았다 그녀의 질병은 전적으로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이었다. 그녀의 “구원”의 의미는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눅7:48)는 말씀 속에 나타난다.
罪 容恕의 膳物 용서에 관한 이러한 진술은 메시야적 구원의 보다 깊은 의미를 지적한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와 서기관들 사이의 갈등은 예수께서 죄를 사한다고 주장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한 주장은 참람된 말에 불과하였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죄를 사할 권한을 가지셨기 때문이다(막2:7). 그들 자신의 전제(前提)에 근거한다면, 서기관들의 주장은 정당했다(시103:3;사43:25). 예언서들을 보면, 죄 용서는 메시야 시대의 축복들 중 하나였다. 심판자요 통치자요 왕이신 주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질병도 있지 않을 것이다. 주는 모든 불의를 용서하는 분이시다(사33:24). 구원받은 남은 자는 용서받고 구속받아 그들의 죄는 바다 깊은 데로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미7:18-20).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맺고 그의 율법을 마음 판에 새김으로써 자신과의 완전한 교제와 죄의 용서를 허락하실 것이다(렘31:31-34;비교․겔18:31;36:22-28). 샘물이 다윗의 집에 열려서 하나님의 백성을 씻고 그들의 모든 죄를 정결케 할 것이다(슥13:1).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이 기능이 하나님께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자신을 속죄물로 바칠 여호와의 종에 관한 예언이 하나 있다(사53:11-12). 그러나 유대교는 3세기 이후까지 이 예언을 메시야에 적용한 일이 없다. 메시야가 자기 자신의 권위로 죄 용서를 사람들에게 약속한 근거는 아직 우리에게 알려진 바 없다. 더욱이 하나님은 죄를 사하는 분으로 믿어지기는 했지만, 유대교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은혜 사이의 긴장으로 생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의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받은 자가 아니라, 자신의 공적이 그의 불의보다 많은 자를 가리켰다. 의는 심판날에 주어질 신적 면죄권(神的 免罪權)이지만, 이 종말론적인 면죄권은 공적의 이론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그의 선한 행실과 그의 불법한 행실 사이의 균형에 의해서 결정된다. 전자가 후자보다 많으면 그는 면죄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로 자유로운 죄용서의 권리를 주장하셨을 때, 서기관들 사이에서 있었던 놀라움과 당황을 곧 이해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죄 용서를 약속하였으나(막1:4), 예수는 이 약속을 성취하였다.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도 있음을”(막2:10) 보여주는 외적 증거였다. 인자는 다니엘 7장 13절을 보면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사람들을 심판할 지존자(至尊者)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천상적 인물이었다. 예수는 이 구절에서 자신이 바로 천상적
심판자라는 것과 땅에서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죄를 사하는 신적 권한을 행사하는 자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메시야적 구원이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죄 용서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죄 용서의 비유에서 나타난다(마18:23-35).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와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신의 용서는 사람의 용서에 선행(先行)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삼는다. 예레미아스는 심판의 종말론적인 요소를 강조한 반며, 그는 이 비유가 하나님의 자비를 우선적으로 가르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종말론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죄 용서의 선물을 우선적으로 경험한 일에 근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죄 용서의 선물은 사람들에게 용서의 정신을 가질 것을 또한 요구한다.
예수는 새로운 죄 용서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잃어버린 죄인들이 용서의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인도하였을 뿐이다. 그는 시몬의 집에 들어왔던 여인에게 하나님이 그녀를 용서하셨음을 말하지도 않았으며 구원얻는 길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선언하였다(눅7;48). 이것이 바로 그녀의 “구원”이었다. 예수는 그가 선포한 것을 행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은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예언자들이 종말론적 왕국 속에서 약속한 것을 예수의 인격 속에서 현재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였다.
義의 膳物 의는 죄 용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는 우선적으로 윤리적인 어떤 실질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이며 죄책으로부터의 신적 면죄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며(마6;33),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에 동반되는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대 사상에서 의는 인간적인 행위였다. 랍비들은 의를 율법에 순종하고 자비를 행하는 인간의 행위로 가르쳤다. 예수는 의가 하나님의 요구이며 그의 선물이라고 가르쳤다. 서기관들과 바라새인들 보다 나은 의가 종말론적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구되었다(마5:20). 이 의는 분노, 간음, 보복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다(마5;21-48). 만일 그러한 완벽한 의를 획득하는 일이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다면, 아무도 그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이 틀림없다.
여기에 예수의 윤리적 교훈의 핵심이 있다: 스스로 얻은 의를 포기하고 기꺼이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 서기관들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의 선물도 얻지 못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한(막2:17;눅18:9),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의 필요성을 알지 못한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세리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하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의로운 행실도 공적이 될 만한 행적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눅18:14). 분명히 그들의 의는 자기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십자가의 언급이 없는 것만 제외하면, 바울의 칭의관(稱義觀)과 동일하다.
산상설교에 나타난 의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배부를 것이라는 약속은(마5;6)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다. 공적을 가르치는 유대 사상과는 반대로, 의( )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로 간주된다.
따라서 예기치 못했던 종말론적인 구원의 현재성은 예수의 메시지와 사역의 여러 측면들 속에서 예시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실제적 술어를 초월하여 검토되어야 한다. 예수의 사역은 새로운 교훈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을 가져왔다. 그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구원의 현실적 전조(前兆)를 가져다 주었다. 예수는 죄 용서를 약속하지 않고 그것을 부여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교제를 확신시켜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 나라에 인도하여 들이는 자로서 자신과의 교제에 참여케 하였다. 그는 단지 심판 날에 그들을 위해 변호해 줄 것을 약속하지 않고, 그들에게 현재적인 의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신체적인 악에서 놓임을 받을 종말론적인 구원하며 하나님 나라의 구속 능력을 확증시켜 주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새 시대로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뜻하는 의미이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 들이고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시키는 것은 그 나라의 선물을 받고, 그 축복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취의 시대는 현재하지만, 완성의 대는 아직 오는 세대를 기다려야만 한다.
6
王國의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를 깊이 이해하려면, 먼저 술어 자체의 의미와 사용법에 관한 언어학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이러한 역동적 해석은 복음서의 신학, 엄격히 말해서 복음서의 신론(新論)에 의해서 한층 더 밝혀진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지 인간의 나라가 아니다: . 강조되는 것은 첫 번째 단어가 아니라 세 번째 단어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언제나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의 교훈에서 하나님의 개념이 왕국과 메시야의 개념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왕국이 만일 하나님의 통치라면, 왕국의 모든 측면들은 하나님의 성격과 행위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그의 현재적 행위의 성질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그 나라의 장래는 이 세대의 종말에 나타날 구속적인 그의 왕적 통치이다.
이것은 유대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였다. 그는 자신의 왕적인 섭리를 통해서 모든 존재를 감독하시는 분으로서 한 순간도 스스로 하나님 되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더욱이 하나님의 통치는 항상 그리고 어디서든지 율법을 통하여 알려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대 종말에 이르러 그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행위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역사 속에서 구속 활동을 하셨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그 내용에서 제거시키지 않는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활동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다시 이 세대의 종말에 이르러 그의 영광과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행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을 모두 나타낸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본질이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찾으시는 하나님 이 논제는 예수의 교훈 속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하나님 개념을 연구함으로써 지지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두드러진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새로운 요소가 존재하는데, 이 요소는 하나님에 관한 그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되는 새 요소와 평행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찾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이론적 진리를 전하려는 것이 예수의 의도였음을 시사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해져야 할 교훈이 아니라 체험되어야 할 인격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개념이 예수의 교훈과 가르침 속에 반영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배제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후기 유대교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 아니다. 예언자들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심판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셨다. 후기 유대교의 하나님은 악한 세계로부터 손을 떼고 더 이상 역사 가운데서 구속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남아 있는 궁극적 구속 행위는 이 세대의 종말에 있을 테지만,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역사를 뛰어넘어 초연히 계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행위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 다시 역사 속에서 구속 활동을 하시고 계심을 선포하였다. 사실 하나님은 어느 정도로 예언자들이 알지 못했던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들어왔다. 구약의 약속들은 성취되어고 메시야야적인 구원은 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다가왔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찾아 오셨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주도권을 잡고 죄인들을 찾으시며 잃어버린 자들을 그의 통치의 축복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셨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학자들은 율법의 역할이 예수의 종교적 체험으로 대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왕국관(王國觀)을 랍비들의 사상을 따라 해석한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 예수의 내적 체험이었다. 그의 사역은 이러한 경험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그의 통치는 사람들이 예수의 하나님 체험을 경험하게 될 때 그들에게 “임한다.” 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 경험을 가지게 될수록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하고 세상 끝까지 확대된다.
이 해석에는 염두에 둘 만한 중요한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 성격을 간과하기 때문에 적당치 못하다. 잃어버린 자를 찾는 하나님의 실제는 우리 주님의 메시지와 사역의 본질에 속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잃어버린 자의 죄악을 용서하기 위해서 기다리지 않으신다. 그는 죄인을 찾으신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의의 표준을 범하고 죄인들과 사귄 일로 비난받았을 때, 그는 죄인들을 섬기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대답했다(막2:15-17).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가 병든 것을 아는 자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된 구원의 소식을 죄인들에게 전해 주어야 했다. 그는 그들이 죄인임을 부정하거나 그들의 죄를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필요를 알게 하고 그것을 위해 섬긴 것이다.
죄인들을 찾는 하나님이라는 이 위대한 진리는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세 비유들을 통해서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이 비유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상을 같이한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잠잠케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는 길 잃은 양을 찾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으며,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방탕한 아들을 집으로 맞아 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비유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있다: 목자가 양을 찾으며, 여인이 동전을 찾기 위해 집안을 쓸며, 아버지가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방탕한 아들”의 비유에서 중심되는 특징은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이다. 이 비유가 우선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사람
의 타락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유대인 학자들은 죄인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것임을 인정한다. 아브라함스(Abrahams)는 바리새주의가 하나님께서 언제나 주도권을 잡으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주도권은 항상 죄인에게 있음을 인정한다. 몽테피오르(Montefiord)는 예수의 “위대성과 독창성”은 그가 죄인들을 피하기보다는 그들을 찾았다는 점에서 “죄와 죄인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음을 인정한다. 죄인들에 대한 이 관심은 유대교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며, 제 4 에스라서에 표현된 것과 같은 정조(情操)와 심한 대조를 이룬다 제 4 에스러서를 보면, 적은 수의 의인들을 위해 애곡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진술이 나온다: “진실로 나는 범죄한 자들의 풍습이나 그들의 죽음, 그들의 심판 또는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관심하지 않을 것이지만, 의인들의 창조와 그들의 생애,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기뻐할 것이다”(8:38이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한다는 사실이다.
초청하시는 하나님 찾으시는 하나님은 또한 초청하시는 하나님이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수많은 손님들이 초청되는 잔치 또는 연회라는 관점에서 묘사하였다(마22:1이하;눅14:16이하;비교․마8:11).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와 그를 좇는 자들 사이에 흔히 있엇던 식탁에서의 교제를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의 초청 내지 제시를 나타내는 비유로서 이해할 수도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탁의 교제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며, 그것은 예수의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막2:15).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로 분개했다(눅15:2). 그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11:19)라고 불리어졌다. “부르다”란 단어는 “초청하다”를 의미한다.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에 초청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주의 사역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 요청 역시 초청이었다. 사실 초청의 의미를 갖는 회개에의 요청은 유대주의적 교훈과 성질상 다르다. 회개의 교리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회개가 구원을 얻는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대개 율법과 관련해서 이해되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는 율법을 어긴 악한 행실과 범죄를 중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긍정적으로는 신의지(神意池)의 표현인 율법에의 순종을 뜻하였다. “율법의 멍에”는 또한 “회개의 멍에”로 불리어질 수 있었다. 사건의 순서를 따른다면,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신다. 인간의 행위는 신의 행위에 선행함이 틀림없다. “유대교의 교훈에 따르면, 죄의 용서는 중재자가 없기 때문에 죄인 달려 있다.
회개를 요청하는 예수의 요구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라는 부르심이며 이러한 초청을 조건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초청 자체는 하나님 나라의 선물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회개에의 요청을 세례 요한의 그것과 구분 짓는다. 요한은 임박한 심판의 날이라는 관점에서 사람들마다 자신의 죄를 버리라고 요청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의 초청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였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언어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그의 구속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시며 행위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으신다. 그는 그들을 초대하여 메시야적 축복에 참여케 하신다. 그는 죄인들이 그의 은혜로운 초청에 기꺼운 반응을 보일 것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새로운 예언자, 아니
예언자 이상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약속한 바로 그 축복을 가져다 주는 분이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으시며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그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그들을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아버지되심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존재한다. 이들 두 개념의 친화성이 종말론적인 배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종말론적인 구원이 베풀어질 때는 의인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이다(마13:43). 복 받을 자들을 위해서 이 종말론적인 왕국을 유업으로 준비하는 분은 아버지시다(마25:34). 예수의 제자들에게 왕국을 선물로 주실 분도 아버지시다(눅12:32). 최상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아버지되시는 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 날에 예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새로운 교제를 나눌 것이다(마26:29).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이렇게 기도할 것을 가르쳤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나라이 임하옵시며”(마6:9,10). 분명히 왕되심과 아버지되심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이다.
종말론적인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부성(父性)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혀 준다. 그것은 모든 자들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왕국에 들어가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요 관계라는 점이다. 아버지되심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의해서 한정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종말론적인 왕국에 들어가게 한 것은 아버지로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은 자연히 아버지되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하지 못한다.
아버지되심의 선물은 종말론적인 완성에 속할 뿐만 아니라 현재적 선물이기도 하다. 더욱이 왕국의 미래적 축복은 현재적 관계에 의존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적 관계에서 조차도 아버지되심은 왕국과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아는 자들은 삶의 최고선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로 삼는 자들이다(마6:32,33;눅12:30).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부성에 관한 예수의 교훈의 근원과 성격에 대해서 중요한 의문을 일으킨다. 부성의 개념은 구약에 그 뿌리를 두는데, 구약에서는 부성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언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다(출4:22). 따라서 하나님은 흔히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생각되었다(신32:6;사64:8;말2:10). 이것은 자연에 근거한 관계가 아니라, 신적(神的)인 주도권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이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 전체의 아버지이실지라도,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부성은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남은 자들-신실한 의인(義人)들-에게 제한되었다. 정경(正經)이후의 문헌들을 보면, 하나님의 부성(父性)이 특히 개인과 관련하여 강조되고 있다(벤시라23:1;솔로몬의 지혜2:16). 부성의 완전한 의미는 종말론적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솔로몬의 지혜17:30;요벨1:24). 랍비 문헌에서는 하나님의 부성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윤리적 관계를 뜻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자유주의의 견해는 예수의 교훈 속에서 이러한 부성의 개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결정적인 주제로 삼고 그것을 보편적인 술어로 해석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부성이라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채용하여 그것을 심화시키고 내용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시키는 것 같다. 하나님은 완전한 그의 사랑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
게 아버지가 되신다. 사랑은 하나님이 지닌 도덕적 완전의 총체(總體)이다. 하나님은 항상 당위적 존재(當爲的 存在)로 계시기 때문에 보편적 아버지시다.
최근의 비평은 “일반적으로 가정되기는 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부성과 사람의 형제됨’의 교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술어를 연구한 결과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났다. (a) 예수는 자신을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한 적이 없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타난 용례는 공관복음서보다 좀더 명시적일 뿐이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의 메시야적 아들됨은 그의 제자들의 아들됨과 다르다. (b) 예수는 아들됨의 범주를 그의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적용한 일이 없다. 사람들은 그의 메시야적 아들됨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父性)은 예수의 다음 진술 속에서도 나타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4이하). 이 구절은 하나님이 보편적인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며, 그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들로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이 해석은 이 구절의 의미를 잘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하나님은 예수의 제자들의 아버지로만 생각되었다. 비를 선인이나 악인 모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상기(上記)한 주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느니라”(마6;26). 하나님께서 새들을 돌보시는 것은 아버지로서 한 것이 아니며, 그가 자기의 자녀들이 아닌 자들에게 창조의 축복을 내리시는 것도 아버지로서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성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에 복종하는자들에게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는 것은 그가 그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방탕한 아들의 비유에서도 나타난다(눅15:11-24). 방탕한 아들은 모든 사람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가 속해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해석은 비유가 일상 생활에서 끌어낸 이야기이며 기본적인 진리를 드러내려는 것이 그 목적이지 세부사항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소홀히 취급한다. 이 비유는 어리석은 짐승이(눅15:1-7) 하나님의 자녀를 나타내는 것처럼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적당치 못한 주석이다. 세 비유 모두가 나타내는 중심 진리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이란 점이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며 잃어버린 동전을 찾으시며 방탕한 아들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 이 비유는 아들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아버지에 관한 비유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세 비유 모두가 나타내는 한가지 요소는 “속한다”는 사상이다. 잃어버린 양은 우리에 속하고 잃어버린 동전은 여인의 소유에 속하고,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집에 속한다. 사람의 제 위치는 아버지의 집이다.
이것은 분명히 현실적인 부성(父性)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잠재적인 부성을 가르치고 있다. 아들이 낯선 땅에 있는 동안 그의 아들됨은 내용이 없는 텅빈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
버지의 집에 속했다. 그래서 그는 “제정신을 차리고” 그가 속했던 것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나님은 제정신을 차리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모든 자들을 기꺼이, 그리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받아 들이며 복된 아버지의 즐거움에 동참케 하신다.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의미는 예레미아스에 의해서 연구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을 지칭할 때 “아바”라는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할 것을 가르쳤음이 분명하다. 이 아람어식 호칭 형태는 서신들 속에서 헬라어로 바뀌어 나타난다(롬8;15;갈4;6). “아바”란 단어는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애칭으로서 우리 말의 “아빠”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호칭할 때,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말이 너무 친근감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경하게 대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호칭했으며,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부를 것을 가르쳤다. 그는 일상 언어에서 “아바”란 말은 정중한 칭호로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마23:9). 그 말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아바”는 예수를 통해서 사람들이 누리게 된 친밀함과 신뢰의 새로운 관계를 나타낸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선물을 주시는 반면, 그는 은혜로운 제의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공의(公義)의 하나님으로 계신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비로운 그의 긍휼 때문에 신적인 거룩성을 해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의 사랑은 또한 거룩한 사랑이다. 그는 하늘의 아버지시다. 그의 이름은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마6:9). 따라서 그의 나라의 제시를 거절하는 자들은 그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랑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사람을 궁지에 빠뜨린다. 사람은 이 사랑의 제의에 응답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보다 큰 정죄가 그를 기다린다. 불트만은 하나님을 “요청자”로서 사람들에게 다가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예수의 인격과 대면할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결단을 내려야 한다. 결과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든지 아니면 심판일 것이다.
이러한 보응적 의의 특징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다시 나타난다. 세례 요한의 설교에서, 종말론적 왕국의 도래는 의인들에게는 구원이지만, 불의한 자들에게는 불의 심판을 의미하였다(마3:12). 예수게서도 동일한 것을 가르치셨다. 그 나라를 상속하지 못하는 자는 영원한 불의 심판을 당할 것이다(마25:34,4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에게(마23:13)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그 나라의 능력이 예수 안에서 현재하며 사람들을 악의 속박에서 구하기 위하여 지금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을 너그럽게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찾아서 바른 마음을 갖게 하신다. 어떤 사람이 어리석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마귀의 역사와 분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마귀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으며 영원한 죄에 처하게된다(마3:29).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자에게도 가공할 만한 운명이 기다린다(마18;6).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란 이 위대한 진리는 그의 의로우심과 공의(公義)를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구원과 심판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 종말론적인 심판은 원리상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결정되었다. 사람들이 예수와 그의 선포에 응답할 때, 그들의 종말론적인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막8;38;마10:32-33)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여러 성읍들을 방문하다가 거절당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심판을 비유적으로 나타냈다. 그들의 선포는-“그러나 이것을 알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약속이라기 보다도 일종의 경고였다. 가공할 심판이 그러한 성읍을 기다리고 있다.
예수께서도 그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표적도 행한 도시들에게-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심판을 선포하였다(마11:20-24;눅10:13-15). 가버나움에 선고된 심판의 성격은 전혀 분명치 않다. 누가는(10;14) 마태와 같이(11:22) 고라신과 벳새다에게 임할 심판을 종말론적인 술어로 묘사한다. 그러나 누가와(10;15) 마태는(11:23) 모두 가버나움의 심판을 비교적 종말론적이 아닌 술어들로 묘사함으로써 단순히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으며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들은 이 교만한 도시가 음부에까지 낮아질 것을 말할 뿐이다. 마태는 비록 종말론적인 주석을 덧붙였지만(마11:24), 그는 이 구절을 역사적인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가버나움 거리에서 행한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만일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 도시가 오늘날까지 남았을 것이라”(마11;23)고 부연했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의 심판에서 예수는 직접 인용은 비록 아닐지라도 이사야 14장 13-15절에 있는 바벨론을 지칭한 풍자적 노래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마태와 누가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 나라를 거절하는 데서 임하는 심판은 종말론적인 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일어난다. 세상적인 자만으로 높아진 가버나움은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에까지 낮아질 것이다. 가버나움은 바벨론처럼 폐허가 될 것이다. 예수는 예언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가버나움의 멸망은 하나님 나라의 심판일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심판을 역사적인 술어로 묘사한 유일한 경우가 아니다. 수많은 구절들이 제출된 메시야적 구원을 볼 수 없었던 예루살렘과 그 거민들의 우둔함과 실패에 대해서 심판을 선고하고 있다(마23:37-39;눅13:34-35). 암탉이 그 병아리를 모은다는 은유적 표현은 구약에서 끌어온 것이다(신32:11;시17;8;36;7). 이방인을 개종시킨 유대인은 그를 구름(하나님의 임재)의 날개 아래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한다는 의미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이러한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너희 집이 버림을 당하고 황무해질 것”을 의미한다. “너희 집이 성전을 가리키는지 유대 나라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그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성전과 유대 나라는 흥망성쇠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거절당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구속받은 세계의 수도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던 예루살렘과 하나밖에 없는 인류의 성소인 성전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황폐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누가복음 19장 41-44절에서 반복된다. 예수께서는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다. 권고( )라는 말 속에는 그의 백성을 권고하러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예언적 사상이 반영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평화를 가져오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은혜로써 찾아오셨다(권고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자비로써 이스라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비로운 제의를 거절하고 파멸의 길을 선택하였다. 큰 재앙은 사망과 파멸을 그 도시에 가져다 줄 역사적 심판이다.
우리는 예루살렘과(눅21:20-24;23:27-31) 성전에(막13:2;비교14:52;15:29) 임할 역사적 심판에 관하여 다른 검토할 필요가 없다. 와일더(Wilder)는 예수께서 미래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내다볼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 그는 다가오는 심판을 때로는
임박한 역사적 대파국으로, 때로는 묵시론적인 초월적 사건으로 묘사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역사 속에서 활동하셨다. 그는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왕국의 축복을 가져다 줌으로써 그들을 권고하셨다. 그러나 그 제의가 거절당할 때, 심판이 뒤따를 것이다: 역사적인 심판과 마지막 날에 있을 종말론적 심판.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나타내는 심판들이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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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나님 나라의 秘密
우리의 중심 논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통치를 사람들 가운데 건설하기 위하여 강하게 역사(役事)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이며, 이 세대의 종말에 묵시론적 행위로 나타날 이 왕국은 이미 악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그 권세에서 구원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큰 계기(契機)들을 내포한다: 역사 속에서의 성취와 역사의 종말에 있을 완성이 그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解釋의 基準들 현대의 비평적 연구가들은 비유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정확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 필요한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 번째 기준은 율리허(Julicher)에 의해서 제창되었는데, 그는 비유들이 우화(allegory)로써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본질적인 원리를 수립하였다. 우화는 일종의 교훈 수단이며 저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우화는 일종의 교훈 수단이며 저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우화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저자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모든 내용은 분명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도록 구성될 수 있다. 간단한 우화로는 열왕기 하 14장 9-10절에 있는 가시나무와 백향목의 이야기이다.
비유는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진리를 전달할 목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끌어낸 이야기이다. 저자는 그의 이야기를 조작하거나 세부적인 내용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용들은 흔히 그 이야기에 의해서 전달되는 진리에 비해서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 비유는 본질적으로 복잡한 진리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논증될 수 있다(눅16:1-13). 세부적인 내용을 강조한다면, 이 비유는 영리함이 정직보다 낫다는 교훈을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눅15:4)이라든지 열 드라크마(눅15:8)와 같은 세부사항들은 별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나 제사장 또는 레위인이 갖는 우화적인 의미, 기름과 포도주의 의미, 두 데나리온을 준 이유, 그리고 예루살렘, 여리고, 주막 등의 의미는 당나귀의 정체만큼이나 찾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각 비유들 가운데서 중심되는 진리를 찾아야 한다.
두 번째 비평의 기준은 비유들이 교회의 삶에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의 상역이 처해 있었던 역사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들을 세상에서의 복음 사역 또는 교회의 장래에 관한 예언들로 이해하는 것은 건전한 역사적 접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들은 팔레스틴에서의 예수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주석되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우리는 예수의 사역과 말씀의 역할 그리고 세상에서의 교회 사이에 유사점들이 존재한다고 할 때, 중요하고 심지어는 필연적이기도 한 비유들의 적용이 후대의 상황에도 수행될 수 있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비유들의 역사적인 의미를 예수의 사역 속에서 발견하려는 데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율리허의 방법은 그가 비유들 가운데서 일반적이며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종교적인 진리들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이 점에서 결점을 가진다. 최근의 신학계, 특히 도드(C. H. Dodd)의 저작은 비유들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였음을 보여 주었다. 예레미아스는 이 사실을 비유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은 역사적 비평의 돌파구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비유 해석에서 미래적인 내용을 없애고 종말론을 제거한 도드의 일방적인 강조를 비판한다. 예레미아스는 도드의 방법은 받아들이지만, 그의 결론들은 수정할 것을 제의한다. 그래서 그는 비유들의 원시적인 역사적 형태를 되찾음으로써 그것들의 본래적인 메시지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을 제의하였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시작된 종말론적인 과정은 그가 기대했던 대로 이제 곧 종말론적인 완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초대 교회는 이 단일 과정을 두 사건으로 구분 짓고 그렇게 함으로써 본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비유들을 재림( )에 적용시켰다.
그러나 예레미아스는 비유들의 본래적인 의미가 예수 당시의 유대인 청중들에게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할 때에만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주된 전제(前提)로 삼는 데 있어서 너무 지나쳐 갔다. 이것은 비유들의 “삶의 정황”이 예수의 교훈들이 아니라 유대교임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독창성을 제한시키려는 경향을 가진다. 우리는 그의 교훈들이 유대적인 사상들을 능가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비유들의 정당한 삶의 정황은 유대교가 아니라 예수의 교훈 자체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秘密 본래의 비유들은 예레미아스처럼 극단적인 변형을 가정하지 않고도 예수 자신이 처해 있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은 “비밀”이라는 간단한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마가는 천국 비유의 메시지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도함으로써 요약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의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막4:11-12)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그의 나라가 묵시론적으로 출현하기 전에 역사 속에 돌입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완성이 없는 성취”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13장에 보도된 몇몇 비유들을 통해서 예시된 간단한 진리이다. 비밀( )이란 말은 구약 다니엘서에 나오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비밀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사상은 구약에서 낯익은 개념이다. 이 단어의 신약적 용례의 배경은 다니엘서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느부깃네살 왕에게 한 꿈을 보여주셨다. 그는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영감 넘치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의 계시적 환상을 통해서 그 뜻을 알게 되었다. 그 꿈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뜻의 비밀과 관련이 있었다.
비밀(Raz)의 개념은 쿰란 문헌 속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은 의의 교사에게 그의 종 예언자들이 예언한 모든 비밀들을 알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의 교사에게 예언서들의 감추어져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특별한 조명을 주셨음을 의미한다. 이들 비밀은 쿰란 공동체가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였던 사건들과 “불가해(不可解)하며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들”에 대해서 관련을 갖는다.
구약과 유대 문헌 속에는 비밀 개념의 광범위한 배경이 놓여 있다. 비밀이란 술어가 신약에 와서 새로운 양상을 얻지만,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다니엘서의 개념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다. 바울은 “비밀들을” 계시된 비밀들, 다시 말해서 창세 전부터 사람들에게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로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해하였다(롬16:25-26). 비밀은 입문자에게만 알려지는 비의(秘義)가 아니다. 비밀은 “인간 이성(理性)이나 신적인 수준에 못 미치는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理性的 存在)들로부터 감추어진 비밀한 하나님의 생각들, 계획들, 경륜들을 지칭하며, 따라서 그것은 그린 것들을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만 계시되어짐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밀은 비록 그것이 믿는 자들에 의해서만 깨달아진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갖도록 요청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응답하는 자들만이 참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밀 해석은 이제까지 연구되어 온 하나님 나라의 견해를 강화시켜 준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통해서 가져 오기로 약속한 단순한 사실은 비밀잉 아니다: 실제로 묵시론적인 유대 저술가들은 그러한 기대를 이러 저러한 형태로 반영시키고 있다. 쉬바이처의 철저 종말론을 추종하는 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정당하게 다루는 데 완전히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묵시론적인 권능으로 임한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 정통 신학에 의해서도 확증된 것이다. 비밀은 그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지금 사람들에게 계시로 나타난 새로운 진리는 다니엘이 예견한 것처럼 마지막 날에 묵시론적인 권능으로 임할 그 나라가 이미 세상 속에 들어왔고, 보이지 않는 형태로 사람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네 種類의 땅 땅의 비유는 우화적인 요소를 내포하지만, 비유난 해석의 진정성(眞正性)은 그런 이유 때문에 부정될 수는 없다. 예수께서 우화적인 비유들을 채용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선천적인(a priori)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 비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내용들이 비유의 중심 교훈에 비해서 이차적인 중요성밖에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종류의 땅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 결실을 맺는 따이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적어도 땅의 종류가 둘이냐 셋이냐 아니면 여섯이냐 하는 문제 때문에 영향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 메시지는 또한 결실치 못하는 세 땅이 과연 본문에 나타난 것과 전혀 다른 이유들 때문에 결실칭 못했는가 하는 문제로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어떤 씨는 뜻하지 않은 폭우로 인해서 쓸려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잎이 연하게 돋아난 씨앗은 부주의한 행인의 발에 짓밟혔을지도 모른다. 상세한 이러한 내용들은 중심 메시지를 좌우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들어와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접을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 나라는 지금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고 있으며 이 성공도 사람들의 응답에 의존한다.
이 비유는 이전의 해석자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복음이 교회 시대 동안에 세상에서 적용될 방식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 비유가 지기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 비유의 삶의 정황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임했다는 예수의 선포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의 행사(行使)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경건치 못한 열방들을 궤멸시킬 것이다(단2:44). 사악한 지배자들의 권세는 무너질 것이며, 왕국은 지존자(至尊者)의 성도들에게 주어져서 모든 열방들이 그들을 섬기며 순복하게 될 것이다(단7:27). 예수께서는 당대의 묵시론적인 기대들 속에서 상세하게 발전된 구약의 약속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임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악을 궤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아직 묵시론적인 물가항력의 권세가 수반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적으로 활동하는 그 나라는 농부가 뿌린 씨앗과도 같다. 말씀은 길가에 뿌리운 씨앗과 같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할지도 모르며, 또는 피상적으로 받아 들여져서 끝내는 죽을지도 모르며, 하나님 나라와는 반대되는 이 세상의 염려들로 인해서 질식하여 죽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 중에서 조용히 그러나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나라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 나라는 기꺼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받아들여지는 곳에서는 그 나라의 말씀의 많은 열매를 맺게 되며, 하나님 나라의 말씀은 실질적으로 하나님 나라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 비유나 그 해석에 있어서 추수에 대한 강조는 없다. 강조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씨뿌리는 일의 본질-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활동에 대한 것이다.
가 라 지 가라지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 즉 세상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예기치 못했던 그 실제를 한층 더 밝혀 준다. 처음부터 가라지 비유의 해석 가운데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세부적인 내용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다. 원수가 씨를 뿌리고 가버린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는 것은 전혀 주변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들이 잔다는 사실도 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꾼들이 고된 하루를 끝내고 휴식하는 일일 뿐이다. 곡식을 모으기 전에 가라지를 먼저 모은다는 사실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구 신교 학자들을 지배했던 해석은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비유는 왕국교회에서 존재할 사실들의 상태를 묘하한다. 인자가 오면 그는 그의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낼 것이다”(마13;41). 이것은 교회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다 포함하고 있으며, 그 나라는 궁극적인 완성이 있기 전까지 세상에서 교회로 존재할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비유는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임을 말하고 있다(38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구약과 유대 묵시문헌에서 예언된 것처럼 악한 자들을 파멸시키고 인간 사회를 붕괴시킴으로써 이 세대를 끝내고 오는 세대를 출발시킬 것이다. 예수는 현 세
대 가운데서, 다시 말해서 인자(人子)가 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 중에서 출현하며, 오는 세대의 권능이 세상 속에 뚫고 들어와 “그 나라의 자손들”을 불러 모으고 그 능력과 축복을 누리게 하기 전까지 선인과 악인이 함께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 나라는 임했으나 사회는 근절되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이 해석이 지니고 있는 실제적인 난점은 다음과 같은 표현이다: “저의(천사들)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낼 것이라”(마13:41). 이런 식의 표현은 아들의 나라와 아버지의 나라를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악한 자들이 종말론적인 완성이 있기 전에 이미 왕국 가운데(아마 교회 가운데일 것이다)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는가? 이러한 견해는 보기엔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유일하다든가 확고한 해석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인자(人子)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는 것은 복음서에서나 신약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정당한 지지를 받지 못한다. 더욱이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와 동일시하도록 가르친 적이 없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닐 경우에는 여기서 그런 식으로 동일시(同一視)해서는 안 된다.
비유도 그 해석도 이런 식의 동일시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3장41절은 “그 나라에서” 거두어 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실제로 왕국 속에 있었다는 식의 의미로 강조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의인들과 분리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8장 12절에 의해서 지원을 받는데, 거기에 보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지만” 동서로부터 온 수많은 이방인들은 족장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것을 말하고 있다. “쫓겨난다”는 헬라어 단어는 역사와 언약에 의해서 “나라의 본 자손들”이 된 유대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일단 들어간 후에 그들이 다시 쫓겨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악한 자들을 “그 나라에서” 거두어 낼 것이라는 언급은 그들이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비유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그 나라는 세상 가운데 현재하지만 은밀하게 활동한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해석될 때 분명해진다. 그 나라는 사회를 붕괴시키지 않고 역사 속에 들어 왔다. 그 나라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그 축복에 참여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이 세대 속에 살며 악인들과 함께 섞여있다. 분리는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도래할 때에만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진리가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세상속에 들어와서 종말론적인 심판을 거치지 않고, 그 나라의 축복에 참여할 자손들을 형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분리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악한 자들은 거두어낼 것이고, 의로운 자들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겨 자 씨 겨자씨의 비유는 장차 큰 나무가 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세계 속에서 작고 보잘 것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예시해 준다. 많은 해석가들은 이 비유 속에서 교회가 앞으로 커다란 조직으로 성장하게 될 전조(前兆)를 보았다. 이 해석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이론에 기초한 것이며, 우리는 이미 이 이론이 부당한 것임을 주장한 적이 있다. 다른 해석가들은 이 비유를 교회에 적용시키지 않고 예수의 제자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는데, 그들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새로운 공동체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느리고 점진적인 성장이 본래적인 의도라면, 신속하게 성장하는 겨자씨 나무는 그를 위한 적절한 예증(例證)이라 할 수 없다. 도토리에서 성장하는 상수리 나무가 오히려 그러한
진리를 보다 더 잘 나타내 줄 것이다(암2:9).
현대 주석가들 대다수는 이 비유의 강조점이 처음에는 적게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창대해진 사실을 서로 대조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분명히 비유의 본질을 잘 파악한 것이다. 겨자씨는 물론 가장 작은 씨는 아니지만 작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격언적 표현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직면한 맹렬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사역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운동 속에서 현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열방들이 피난처로 삼을 만한 큰 나무일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통치의 출현과 분리시켜서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어떻게 가난하고 적은 예수의 제자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세리와 죄인들에게 환영을 받은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다 주는 자라기보다 착각에 빠진 환상가같이 보였다.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에는 적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 비록 적고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은밀한 현재성(現在性)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누 룩 누룩의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처럼 기본적으로 동일한 진리를 나타내 준다: 장차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는 은밀한 형태로 세상에 들어왔다.
이 비유는 전연 다른 사실들을 증명하는데 쓰이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요한다. 많은 해서가들은 느리지만 지속적인 침투 과정 속에서 중심되는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보여준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의 모든 사회 속에 스며들어 감으로써 온 세상은 마침내 느리지만, 점진적이며 내면적인 침투 과정을 통해서 변화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 해석가들 중에 어떤 사람은 누룩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성질을 묵시론적인 견해와 대조시키면서 후자를 손상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에는 이른바 세대주의적 해석이 존재하는데, 세대주의는 누룩을 타락한 기독교회에 스며들어 오는 악한 교훈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히브리와 유대 사상에 있어서 누룩은 언제나 악의 상징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느리지만 점진적인 침투 과정을 통해서 변화시키는 하나의 능력으로 보는 사상은 진보와 진화의 개념에 익숙한 세계 속에서는 매력적인 사상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예수의 정신과 유대 사상에 있어서 생소한 것이었다.
예수의 역사적 환경에 어울리는 해석은 아주 적은 양의 누룩이 두 말 이상이나 되는 큰 양으로 부풀게 된 사실 속에서 중심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강조점은 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한 사실에 있지 적은 양의 누룩에 있지 않다. 여기서 누룩은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겨자씨의 비유는 장차 커다란 나무처럼 될 하나님 나라의 출현이 지금은 적은 씨앗과 같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세력을 얻어 그와 견줄 만한 다른 세력이 없을 것임을 가르쳐 준다. 가루 반죽 전체는 누룩이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의 사역이 처해 있던 삶의 정황을 통해서 해석될 때에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힘있고 불가항력적인 종말론적 왕국의 성격은 모든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국의 도래는 사물의 질서에 있어서 완전한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현 세계와 현 사회의 악한 질서는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완전히 대치될 것이다. 문제는 예수의 사역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설교했지만, 세계는
전과 다름없이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설교한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는가?
예수의 대답은 적은 양의 누룩을 일정한 양의 가루 속에 넣을 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누룩은 가루 반죽에 의해서 아주 삼키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과는 가루 반죽의 완전한 변화이다. 강조점은 어떻게 해서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계를 점진적인 침투와 내면적인 변화를 통해서 정복한다는 생각은 유대 사상에서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가 의도했던 의미였다면, 그는 인자가 죽어야 한다는 금시 초문의 진리에서처럼 이 진리도 되풀이해서 반복했을 것이 분명하다. 점진성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인 세계의 변화를 통해서라기 보다 오히려 악에 대한 묵시론적인 심판과 분리를 통해서 임할 것을 가르쳐 주는 가라지와 그물의 비유와 모순된다.
이 비유의 강조점은 새로운 질서가 도래한 후에 있게 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이며 완전한 승리와 지금 세상에 들어와 있는 현재적이며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 사이의 대조에 있다. 사람들은 예수와 적은 수의 그의 제자들이 장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현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것은 그 나라에 관한 비밀이요 새로운 진리이다. 미래적인 왕국이 언제 또는 어떻게 임할는지는 비유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寶貨와 進走 우리는 보화와 진주의 비유에 대해서 시간을 오래 끌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나 밭의 정체 또는 보화를 우연하게 벌견한 것과 장사꾼이 의도적으로 보화를 찾은 것 사이의 대조 등은 비유가 나타내려 하는 메시지의 일부가 아니라 주변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우리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어느 정도 격렬한 행동을 나타내긴 하지만, 그것은 비유 형태가 지니는 생생한 성격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사람들도 이와 같은 일들을 한다. 우리는 두 비유에서 보화와 진주가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론(異論)을 제기 할 수 없다.
두 비유에서 생각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한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다른 소유보다 귀하다는 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다 지불해야 한다면, 그는 그 나라를 위해서 아주 적은 댓가를 지불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진술되긴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없다면, 예수는 여기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말한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였다. 이 비유들의 요점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중에 예기치 못한 형태로, 다시 말해서 간과되기 쉽고 무시당하기 쉬운 형태로 임했다는 사실이다. “그 나라의 멍에”를 받아 들이고 율법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무리에 동참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크게 자랑스러울 만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로마와 투쟁하는 것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것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어떻게 그러한 사귐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을 맺을 수 있겠는가?
이들 비유는 피상적인 모든 평가와는 달리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중점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면적인 표시나 가시적인 영광은 없지만,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현재한다. 따라서 그 나라는 다른 모든 소유보다 값진 보화이며, 가치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진주인 것이다. 사람들은 어
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 나라를 소유하여야 한다.
그 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타내는 마지막 비유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들을 건지는 그물의 비유다. 잡은 것을 골라낼 때, 좋은 고기는 그대로 두고 나쁜 고기는 버리게 된다.
예전의 해석은 이 비유에서 교회에 관한 예언을 발견했다. 왕국-교회에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혼합하여 함께 살아가지만, 심판 날에는 이들이 분리될 것이다. 다른 해석가들은 이 비유를 교회에 관한 예언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공존하는 사회와 동일시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견해는 이 비유가 예수의 사역 속에서 역사적인 정황을 정당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약점을 가진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입장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입장은 분명한 주석학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 비유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요소를 덧붙이고 있다. 두 비유들은 모두 예수의 사역이 처해 있는 삶의 정황과 관련해서, 즉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분리를 경험하지 않고, 이미 세상에 들어왔으며 혼합된 사회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물의 비유는 이 사실을 하나님 나라의 활동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까지도 종말론적인 분리가 있을 때까지 순전한 공동체일 수 없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역사적으로 이 비유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낯선 성격에 관한 의문을 답변해 준다.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반적인 세상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다음과 같은 표현 속에서 잘 나타난다: 메시야는 “그의 입의 말씀으로 경건치 못한 열방들을 멸망시킬 거이며‥‥‥그 마음에 품은 생가들을 인해서 죄인들을 책망하실 것이다.” 그는 “거룩한 백성들을 한데 모아 그들을 의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는 모든 사람이 다 거룩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 중에 다시 불의가 없을 것이다”(솔로몬의 시편17:28,36). 예수는 거룩한 백성들을 한데 모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노라”(막2:17)고 말씀했다. 메시야의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은 오히려 거절당하고 그 자리를 사거리에서 배회하는 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마22:1-10).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 일과 관련될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의 기능을 정의한다면, 그 나라는 모든 죄인들을 멸하고 죄 없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의 어는 날 완전한 공동체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는 예기치 못했던 모습으로 나타나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건져내는 그물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초청은 모든 사람들에게 했으나 응답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받아 들여질 것이다. 완전하고 거룩한 공동체는 마지막 날을 기다려야 한다. 이 비유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로서 혼합된 백성인 교회에 적용되지만, 일차적으로는 예수의 사역이 처해 있던 실제 상화에 적용된다.
스스로 자라나는 씨 마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빠뜨린 한 비유를 보도하고 있는데,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초자연적인 성격을 예시해 준다(막4:26-29). 우리는 비유들이 우화가 아니라는 것과 세부적인 내용들은 비유의 중심 메시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씨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정체(正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비유가
나타내 주는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의 활동과 관계가 있지, 씨뿌리는 자의 정체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씨를 뿌린다는 것은 단순히 씨가 뿌려진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씨뿌리는 자가 자고 깨는 것은 사람이 씨의 생명과 성장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성장이라는 요소는 흔히 이 비유의 중심되는 진리로 취급되었고, 큰 의의(意義)가 성장의 단계에-씨, 싹, 이삭, 그리고 충실한 곡식-주어졌다. 이것은 자연 세계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유사점을 예시해 준다. 자연 속에 성장의 법칙들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도 복음의 작은 씨앗이 큰 추수를 가져올 때까지 거쳐야 할 영적인 성장 법칙들이 존재한다. 점진적 성장이라는 해석은 여러 가지 신학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대표적 인물들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세 가지 사실이 이 해석을 반대한다. 예수는 비유가 아닌 다른 교훈에서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 성장이라는 개념을 나타내신 적이 없다. 만일 그것이 그의 교훈의 본질적 요소였다면, 그는 그것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성장한다는 사상은,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씨를 뿌리고 심는다는 사상은 기독교와 유대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긴 하지만, 점진성이라든지 발전을 예시해 주기 위해서 사용되지는 않았다. 셋째로 씨를 뿌리고 거둔다는 은유적 표현은 기독교 문현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예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핵심 사상은 종말론 학파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물론 우리는 철저 종말론적 해석이 예수의 메시지가 나타내는 전체적인 맥락과 어울리기 위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적인 모든 노력과 절대 무관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생각된다. 바이스(J. Weiss)는 이 비유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견할 수 없었고,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져올 수 있었다. 사람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많은 해석가들은 종말론적인 미래의 추수가 인간적인 모든 행위와 완전히 무관하다는 사실에서 이 비유가 나타내는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필요 불가결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실현된 종말론의 해석처럼 일방적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은 예수의 메시지에 있어서 유일하며 중심 되는 요소를-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사역 속에서 현재 한다는 사실-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해석은 예수의 사역을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해 주는 역할 정도로 보는 데서 그치고 그것과 연결시켜 주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철저한 미래적 해석이 지니고 있는 가장 분명한 난점은 그것이 무미 건조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유대인도 종말론적인 왕국의 완성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들어 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행위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
씨 뿌리는 것과 추수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유를 우화화(寓話化)시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의 사역은 장차 추수하게 될 그 나라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었다. 씨는 뿌려졌고, 언젠가 추수 때는 임할 것이다. 씨와 추수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표현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은닉성과 모호성은 영광스러운 그 나라의 출현에 의해서 대치될 것이다.”
여기에 이 비유가 나타내는 중심 진리가 있다. 씨 뿌리는 시기와 추수 때는 모두 하나님의 사역이다. 두 시기는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이다.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씨는 땅 속
에 있는 힘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 힘은 사람이 준 것도 아니며,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완전히 초월한다. 사람은 씨를 뿌릴 수 있지만 그 나라 자체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현재적인 왕국의 초자연적 성격은 그것과 관련이 있는 구절들에 의해서 확인된다. 많은 동사들이 하나님 나라를 주어로 삼고 사용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올 수 있다(마3:2;4:17;막1:15등). 그 나라는 임할 수 있고(마6:10;눅17:20등), 도달할 수 있으며(마12:28), 나타날 수 잇고(눅19:11), 활동할 수 있다(마11:12).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주실 수 있지만(마21:43;눅12:32), 사람들은 그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주지 못한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사람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으나(마21:43),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있을지라도 그들에게서 그의 나라를 빼앗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나(마5:20;7:21;막9:47;10:23등), 그들이 천국을 세우거나 건설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 수 있고(막10:15;눅18:17), 상속할 수 있으며(마25:34), 소유할 수 있지만(마5:4), 그들은 그 나라를 세우지 못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받기를 거절할 수 있고(눅10;11), 들어가기를 거절할 수 있으나(마23:13), 그들은 그 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릴 수 있고(눅23;51) 임하기를 기도할 수 있으며(마6:10), 구할 수 있지만(마26:33;눅12:31), 그 나라를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사람들은 천국에 있을 수 있지만(마5:19;8:11;눅13:29등), 우리는 그 나라가 성장한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천국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할 수 있지만(마19:12;눅18:29), 천국 자체를 좌우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천국을 전파할 수 있으나(마10:7;눅10:9),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다(눅12:32).
이러한 표현들 속에 반영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요한 복음서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서 잘 요약되었다: “내 나라( )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RSV판은 를 “왕권”(Kingship)으로 잘 변역하고 있다. 예수의 나라의 근원과 성격은 이 세계보다 놓은 질서에 속한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구현시킬 것이며,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으며,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사람들에게 예속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는 요청의 근거는 예수를 통해서 천국이 역사 속에 들어 왔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셨다. 그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메시야적인 구원을 가져다 줌으로써 그들을 권고하셨다. 하나님의 행위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행위로 남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반응을 요구한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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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B. Bornkamm, ꡒMysterion," TDNT Ⅳ, 813-24; O. Piper, ꡒ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Int 1 (1947), 813-200; C. E. B. Cranfield, ꡒSt. Mark 4: 1-34," SJTh 4 (1951), 398-414; 5 (1952), 49-66; N. A. Dahl, ꡒThe Parables of Growth," StTh 5 (1051), 132-66; A. M. Hunter, Interpreting the Parables (1960); M. Black, ꡒThe Parables as Allegory," BJRL 42 (1960), 273-87; H. N. Ridderbos, The Coming of the Kingdom (1963); pp. 121-35; R. Schnackenburg, God's Rule and Kingdom (1963) pp. 143-59; I. H. Marshall, Eschatology and the Parables (1963); J. Jeremias, The Parables of the Kingdom (1963; rev. ed.); G. E. Ladd, Jesus and the Kingdom (1964), pp. 214-38; D. O. Via, The Parables (1967); R. E. Brown, The Semitic Background of the Term Mystery in the NT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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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敎會
하나님 나라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의미에서 교회와 동일시될 수 있는가? 동일시될 수 없다면, 과연 관계가 있는가? 처음 3세기 동안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생각하였다. 일찍이 제2세기에 사용된 한 기도문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여, 주의 교회를 기억하사 거룩함으로 그들을 사방에서 모으시고 주께서 예비하신 나라로 인도하소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와 동일시하였는데, 그의 견해는 카톨릭의 교의(敎義)를 통해서 계승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쉬나켄버그(Schnackenburg)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속사적으로 파악하려는 새로운 카톨릭 사상이 주장되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어는 정도 동일시하려는 견해는 수정된 형태이긴 하지만, 개혁주의 전통을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들 두 개념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교회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로아지(Alfred Loisy)는 이 견해를 고전적으로 표현한 인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하였으나 그것은 후에 생긴 교회였다.
놀랍게도 이와 유사한 견해가 세대주의자들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상적(地上的)인 (천년완국) 다윗 왕국을 제공하였으나 거절되자 그는 새로운 계획을-교회를 세우는 일-제시하였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의 여러 측면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주장한 대로, 예수의 사역이 만일 종말론적 완성이 있기 전에 성취의 때를 도래시키는 것이라면,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했던 형태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만일 그의 사역을 통해서 역사 속에 들어왔다면,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종말론적인 왕국을 상속할 백성들일 뿐만 아니라, 현재적인 왕국의 백성, 따라서 어
떤 의미에서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뒤따른다. 우리는 먼저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제자의 개념 그리고 이스라엘과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 등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배경을 두고 교회 설립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토의해야 할 것이다.
예수와 이스라엘 이렇게 검토하는 데는 몇 가지 사실들이 중요하다. 첫째로 예수는 이스라엘 안에서나 밖에서 새로운 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 백성들에게 왔다. 그는 구약의 권위를 인정했으며, 성전 규례들을 준수하였고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평생 유대인으로 살았다. 그는 이따금 유대 지역 밖으로 여행하기는 했지만, 그의 사역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15:24)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이스라엘에서만 전파하도록 명함으로써(마10:5-6) 그들의 사역이 이방인의 길로 나가지 않도록 지도하였다. 예수의 사역은 구약의 언약과 예언자들의 약속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는 언약과 약속을 전수받은 이스라엘을 “나라의 본 자손들”로 인정하였다(마8:12).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 관한 말씀은 이방인들 역시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그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약속들을 성취하고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려 놓기 위해서 행위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성취의 시대는 온 세상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약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메시지를 거절 했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끝까지 호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스라엘에 의해서 받아 들여지고 도덕이나 의로움에 있어서 로마를 정복할 만한 나라를 세울 것으로 기대한 것 같지는 않다. 이스라엘의 거절에 대한 예수의 실망과 비애의 실재(마23:37이하), 그리고 이스라엘 멸망의 예언은(눅19:42이하) 예수께서 사역 초기에 이스라엘의 거절의 실재와 비타협적인 태도를 깨닫지 못했다는 결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복음서들의 성격 때문에 예수께서 거절당한 모든 단계들을 추적한다든지 사건들의 정확한 진행을 재구성할 수는 없을지라도, 거절당한 사실이 그가 초기에 경험한 계기들 중에 하나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누가는 나사렛에서 거절당한 경험을 조심스럽게 그의 복음서 초두에 둠으로써(눅4:16-30;참조․막6:1-6) 메시야적 성취와 이스라엘의 거절이 예수의 사역 초기에 있었음을 알린다. 마가는 갈등과 거절의 경험을 처음부터 서술하는데, 그는 예측했던 예수의 사역의 종말이 급작스럽게 다가 올 것을 암시하는 한 구절을 보도한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2:20).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절한 이유는 복잡하지만, 로빈슨(J. M. Robinson)은 예수와 유대 당국자들간의 갈등 한가운데는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선포한 나라와 그 선포가 요청하는 회개에의 요구를 거절한 사실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에의 요청은 예수의 사역 초기부터 특징을 이룬 것이며, 따라서 반대가 초기부터 일어났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정당한 것이다. 예수에 대한 반대는 그가 죽을 때까지 더욱 격렬해져다.
세 번째 사실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께서 제시한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하기는 했지만, 진지한 사람들은 신앙으로 응답하였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유대 랍비들의 제자가 되는 것과 다르다. 랍비는 그의 제자들을
자신이 아니라 토라에 묶어 두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지신에 묶어 두었다. 랍비들은 그들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제시하였으나, 예수는 자신만을 제시하였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그의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제자들이 되고 종들( )이 된다(마10:24이하;24:45이하;눅12:35이하,42이하). 이런 식의 관계는 유대교에서 평행될 만한 것이 없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를 좇는다는 것 이사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그와 그의 메시지에 인격적으로 완전히 헌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인격과 메시지 속에서 현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안에서 하나님 자신과 대면한다.
예수가 만일 메시야적인 구원을 선포했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운명을 성취했다면, 이 운명은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 속에서 실제로 성취된 것이다. 메시야적인 구원을 받아들인 자들은 참 이스라엘,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자들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란 말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적용된 적은 없지만, 술어 자체는 아닐지라도 그러한 개념은 존재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메시야적인 구원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 참 이스라엘이다.
남은 者 예수의 제자들을 참 이스라엘로 보는 사상은 구약의 “남은 자”의 개념을 배경으로 할 때 이해될 수 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보고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운명에 처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거역하는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믿는 자들의 남은 무리가 있었다. 하나님의 참 백성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진 남은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남은 자의 개념을 드러나게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적은 무리”(“적은 양떼”-역자주)로 지칭한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초장의 양으로-지금은 예수의 제자들 속에서 구체화되었다-부른 구약적 개념을 직접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사40:11). 이것은 단적으로 믿음을 가진 남은 자의 무리를 시사하지 않는가? 이것은 별다른 양 무리가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하나님의 양 무리이다(마10:6;15:24).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양떼, “잃어버린 양”인 것이다. 예수는 목자로서(막14:27;참조․요10:11)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눅19:10;겔34:15이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구하여 그들을 메시야적 구원의 우리에 인도해 들이기 위해서 왔다. 이스라엘 전체는 목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나, 목자의 소리를 듣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의 양떼, 적은 무리, 참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양 무리와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가 주는 인상 사이에는 직접적이며 분명한 연결점이 있다.
누가복음 12장 32절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측면을 강조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지금 그의 적은 양의 무리이기 때문에 그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 집으로 돌아왔다(눅15:3-7).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종말론적인 왕국을 주시는 것은 그들이 이미 진정한 양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그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른 것은 그의 제자들과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열 둘이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종말론적인 역할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열 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19:28;눅22:30). 이 구절의 의미가 열 두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심판으로 결정한다는 것을 말하든, 아니면 그들을 다스린다는 것을 말하든 상관없이 그들은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도록 정해져 있다.
열 두 제자가 참 이스라엘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12란 숫자가 백성 전체를 예수의 카할( )로 불렀다는 주장을 포함한다는 견해를 배제하지 않는다. 상징적인 숫자인 열 둘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내다본다. 과거의 옛 이스라엘과 미래의 종말론적 이스라엘.
열 두 제자들은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들로 정해져 있지만, 그들은 이미 종말론적인 왕국의 축복과 권세를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 주어진 메시야적 구원을 받아 들이는 자들을 대표한다. 열두 제자를 선택함으로써 예수는 그가 그의 메시지를 거절한 이스라엘을 대치할 만한 새로운 회중을 모으고 있음을 가르친 것이다.
마태福音 16장:18-19 제자의 개념과 그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갖는 관계를 배경으로 할 때, 마태복음 16장 18절 이하는 예수의 전체 교훈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이 구절은 예수의 전 사역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밑에 깔려 있는 기본 개념을 분명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은 조직이나 기구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않으며,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로서의 교회( )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지도 않는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한 구약적인 개념을 배경으로 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백성을 “세운다”는 개념은 구약적인 개념이다. 더구나 “교회”는 이스라엘을 야웨의 회중으로 지칭하는 성서적 개념으로서, 히브리어의 카할( )과 같은 뜻을 가진다. 예수께서 카할( )이나 에다( )란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두 용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되었다. 쉬미트(K. L. Schmidt)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참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특별 회중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후대의 술어인 케니쉬타( )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별다른 회중을 세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참 이스라엘인 그의 제자들의 교제를 거역하는 백성들 가운데서 바라볼 수 잇었으나, 분리주의자라든지 “폐쇄된” 교제로서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예배 방식, 새로운 종교, 또는 새로운 기구를 세우지 않았다. 그의 설교와 교훈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관습의 전체 맥락 속에서 수행되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려는 뜻을 나타낸 것은 이미 우리가 제자의 개념을 연구함으로써 발견한 사실, 즉 예수를 통해서 세워진 교제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나타낸다. 독특한 것은 이 에클레시아가 특별히 예수의 에클레시아란 사실이다. “내 에클레시아” 다시 말해서, 참 이스라엘은 이제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특별한 자기 신분을 얻는다.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에 의해 선포된 메시야적 구원을 거절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하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
우리는 새로운 이 백성이 세워지게 될 반석의 의미에 대해서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다. 헬라어 본문의 배경이 되는 셈어 계통의 용례(用例)를 살펴보면 우리는 베드로( )와 반석( )이란 두 헬라어 단어에 별로 큰 역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는 게바( )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게바”는 아람어이다. 당시 예수는 아람어를 사용하였다-역자주). 많은 신교 해석자들은 베드로를 반석으로 봄으로써 그가 공식적인 권위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는 로마 교회의 견해에 크게 반대하고, 반석을 그리스도 자신으로(루터)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으로(칼빈) 해석하였다. 그러나 쿨만은 반석이 베드로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
게 주장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반석이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어떤 공식적인 권위나 개인적인 자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열두 제자들의 대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석은 신앙고백자인 베드로이다. 예수는 베드로가 지도력을 발휘하게 될 그의 제자들의 경험 속에서 새로운 단계를 기대하였다. 이것이 베드로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겨 줄 공식적인 지도권인지는 문맥에 나타나 있지 않다. 반석인 베드로는 다음 구절들이 보여주는 대로 곧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될 수 있다.
교회 설립에 관한 구절은 예수의 전체 교훈과도 일치하는데, 이 구절은 그가 그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자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새 백성이 취하게 될 형태에 관해서는 암시되어 있지 않다. “교회”의 제자들에 관한 구절은(마18:17) 제자들을 유대교 회중과 유사한 것으로 보지만, 새로운 교제가 취하게 될 형태나 조직에 대해서는 별로 밝혀 주지 않는다.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와 자체의 조직과 의식(儀式)을 가진 몸으로서의 교회는 역사적으로 후기에 발전된 형태이다. 그러나 교회는 메시야적인 구원을 받은 참 이스라엘로서 거역하는 백성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참 하나님의 백성이며, 예수에 의해서 시작된 새로운 교제의 역사적 구현(具現)이다.
하나님 나라와 敎會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을 아직 성숙한 교회는 아닐지라도 어린 교회로 받아 들일 때, 교회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이제 검토해야 한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 개념이 옳은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교회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 내지 왕적인 지배이며, 파생적으로는 그 통치가 체험되는 영역이다. 성서의 관용어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백성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통치 밑에서 살며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공동체이며 하나님 나라 자체는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그들에게 속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교회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한 사회다.
敎會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이 관계는 다섯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신약은 신자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최초의 선교사들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다(행8;12;19:8;20:25;23,31). 이들 구절에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대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을 나라( )로 지칭한 유일한 구절들은 계시록 1장 6절과 5장 10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렇게 지칭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계5:10). 이들 구절에서 “나라”는 “왕들”과 동의어이지 하나님이 통치를 받는 사람들과 동의어는 아니다.
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한 구절들이 없다. 그렇게 동일시한 구절은 가라지의 비유에서 자주 나타난다. 인자(人子)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 전에(마13:43) “그 나라에서”(마13:41)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을 거두어 낼 것이라는 진술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나라와 동일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유 자체는 받을 교회와 동일시하지 않고 세상과 동일시한다(마13:38). 이 비유가 나타내는 메시지는 교회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 없고, 단지 하나님의 나라는 현 사회 구조(構造)를 붕괴시키지 않고, 역사
가운데 뚫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가르칠 뿐이다. 선과 악은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을지라도 종말론적인 완성이 있기까지 세상에서 함께 존재한다. 악을 그 나라에서 거두어 낸다는 말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 본 진술이다.
마태복음 16장 18-19절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 역시 잘못된 거이다. 보스는 이 구절의 첫 번째 부분이 집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두 번째 부분은 문과 열쇠를 완전히 갖추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은유적인 표현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집은 첫 번째 진술과 두 번째 진술에서 각각 별개의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쉽게 배제된다.” 따라서 보스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확언한다.
그러나 유동성을 갖는 것이 바로 은유적 표현의 본질이다. 이 구절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불가분의 관계를 밝혀 주지만, 그들의 동일성을 말하지는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말하는 수많은 구절들은 교회에 들어가는 것과 동등하게 표시되지 않는다. “교회를 예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취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형태라”고 진술하는 것 역시 혼란스럽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인 그이 나라와 교회는 모두 사람들이 들어가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두 개념 사이에는 유사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 영역으로서 그의 나라는 불가시적(不可視的)이며, 이 세상의 현상이 아닌 반면, 교회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조직이다. 브라이트(John Bright)는 가시적(可視的)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출산하는지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지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라든지, 아니면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에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까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敎會를 창조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예수의 사역 속에서 현재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는 사람들에게 응답할 것을 도전함으로써 그들을 새로운 교제 속으로 이끌어 들인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現在性)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구약의 메시야적 소망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가 그러한 제시를 거절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이제는 새로운 하나님 백성, 그 나라의 자손들, 참 이스라엘, 그리고 맹아적(萌芽的)인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결과이다.”
그물의 비유는 교회의 성격과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여 가지는 관계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 나라는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좋은 고기뿐 아니라 나쁜 고기도 잡는다. 그물을 해변에 끌어 올린 후 고기는 가려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서 취하게 될 행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순수한 교제를 완성시키지 않았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 중에도 배반자가 있을 수 있었다. 이 비유는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하지만, 추론되어진 원리는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서 취하게 될 행위는 혼합된 교제를 처음에는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교회를 통해서 산출하게 된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회 일반(가라지)과 교회(그물을 내림)에 대해서 심판을 의미할 것이다. 그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활동을 통해서 생겨진 교제는 그 나라의 참 아들들이 아닌 사람들도 포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시적인 교회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지만, 아직 이상적인 백성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실제 하나님 나라의 자손들이 아닌 자들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교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 반드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지는 않다.
敎會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셋 째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도 없고 될 수도 없지만, 그 나라에 대해서-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와 미래에 걸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속(救贖) 행위들에 대해서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마10장) 70인을(눅10장) 파송할 때 주신 말씀 속에서 예시되었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선포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이들 두 사건에서 파송된 사람들의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열두 사도의 선택이 참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숫자 속에 예수께서 그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의도한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70인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인 유대 전승에 따르면, 세상에는 70개의 나라가 있으며 토라가 70개의 언어로 모든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질 것이기 때문에, 70인을 파송한 것은 예수의 메시지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을 암묵적(暗黙的)으로 주장한 것이다.
이방인들을 하나님 나라를 받을 자로 묘사한 다른 구절들이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사실이 확고하게 되었을 때, 예수는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의 자리를 합당하다고 인정받은 다른 사람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준엄하게 밝혔다(막12:1-9). 이 구절을 마태는 이런 의미로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예레미아스는 이 비유의 원래 의미가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사실의 변호라고 생각한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메시지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리는 복음을 듣고 응답하는 가난한 자들에 의해서 차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마태의 해석은 정당하며 이 비유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그들의 자리는 그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다른 백성들이 차지할 것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사상이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마태복음 8장 11-12절에서 나타난다. 여기에 보면 나라의 본 자손들-이스라엘-은 쫓겨나고 그들의 자리를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메시야적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동서로부터 몰려 올 수많은 이방인들이 차지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방인들의 구원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문제는 감람산 설화에 나오는 한 구절에 의해서 시사되었다. 종말이 오기 전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막13:10). 예레미야스가 보다 오래된 형태라고 생각한 마태의 번역은 이것이 바로 예수 자신이 전파한(마4:23;9:35) 하나님 나라의 복음임을 분명히 해준다(마24:14). 최근의 비평은 이 구절의 진정성(眞正性)을 부정하든지 또는 이 구절을 천사들의 종말론적인 선포를 통해서 이방인들의 구원이 종국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크랜필드(Cranfield)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케류세인( ) 동사가 항상 인간적인 사역을 지칭하며 따라서 마가복음 13장 10절에 나오는 케룩데나이( )가 신약의 특징적인 의미를 가질
개연성이 더 많다고 지적한다. 종말이 오기 전에 만국이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가지는 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 끝가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자 신학의 연장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증거자가 아니며 교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스키즈가드(K. E. Skydsgaard)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기독교의 선교역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만일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교제를 받아들인 자들이며 이 생명이 종말론적인 왕국의 선취라면, 거기에는 교회의 주요 과제들 중의 하나가 이 악한 현 세대에는 오는 세대의 생명과 교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른다. 교회는 두 세대에 속하는 이중적 성격을 가진다. 교회는 오는 세대의 백성이지만, 아직 이 세대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교회가 이 세대 가운데서 완전을 달성하지 못할지라도 완전한 질서인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견해에 대한 주석학적인 지원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용서와 겸손을 크게 강조한 사실에서 암시된다.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관심은 이 세대에는 자연스럽지만,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대해서는 모순이 된다(막10:35이하).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자들은 이기적인 태도보다는 남을 봉사하려는 겸손으로 그 나라의 생명을 보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악의(惡意)와 혐오(嫌惡)에 흔들리지 않는 교제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용서에 관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게 된 이유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용서는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사람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가르쳤다(마6:12,14). 용서에 관한 비유는 사람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마18:23-35). 이 비유의 요점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선물들 가운데 하나인 그의 무조건적이며 풍성한 죄 용서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사소한 죄를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본질에 모순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기적이며 교만하여 증오에 찬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 나라와 오는 세대의 생명과 교제를 나타내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이렇게 나타내는 것은 교회의 하나님의 나라 증거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敎會는 하나님 나라의 道具이다 넷째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現在性)에 관한 복된 소식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예수 자신을 통해서 수행된 것처럼 그들을 통해서도 수행된다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그들이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을 때, 그들 역시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었다(마10:8;눅10;17). 비록 그들의 능력이 위임된 능력이었지만, 예수를 통해서 역사한 하나님 나라의 그 능력은 그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였다. 표적들이 자신들 속에 있는 능력에 의해서 생기지 않았다는 그들의 인식은 그들이 결코 표적들을 경쟁적이거나 자긍하는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70인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사람들처럼 사심 없이 완전히 헌신하는 마음으로 보고하였다.
진리는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진술 속에 암시되어 있다(마16:18). 음부의 문이라는 이미지는 셈 계통의 친숙한 사상이다.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은 분명하지 않
다. 죽은 자들 뒤에서 닫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음부의 문은 이제 더 이상 죽은 자들을 붙잡아 둘 수 없고, 교회를 통해서 행사되는 하나님 나라의 권능 앞에서 힘있게 열려질 것이다. 교회는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망의 통치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용된 동사를 살펴보면, 사망의 영역은 교회를 공격하는 침입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사람들이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들어가면, 사망의 문이 아무리 그들을 삼키려고 해도 이길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교회를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권능 앞에서 사망은 사람들에 대한 권능을 잃고 궁극적인 승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예레미아스처럼 이러한 사실을 최후의 종말론적 투쟁과 관련시킬 필요는 없다. 교회와 음부의 싸움에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예수의 제자들도 이미 이 싸움에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 그들은 사람들이 질병과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되는 것을 보았다(마10:8). 사망 권세와의 이 메시야적 투쟁은 예수께서 경험하고 제자들에 의해서 동참되는 투쟁으로서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교회는 이 투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敎會:하나님 나라의 管理者 다섯째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이다. 랍비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브라함 안에서 땅 위에서 시작되었고 율법을 통해서 위임된 하나님의 통치였다. 하나님의 통치는 율법의 관리자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였다.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개종하고 율법을 받아들일 때, 그는 그로써 스스로 하늘의 주권, 하나님의 나라를 떠맡은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중개되었다. 그들만이 “그 나라의 자손들”이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새로운 구속 사건을 통하여 나타났고 역사 속에서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종말론적인 왕국의 권능을 드러냈다. 이스라엘 전체는 이러한 구속 사건의 선포를 거절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참 자손들이 되며, 그 나라의 축복과 능력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그의 교회( )는 이제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이스라엘에게서 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예수의 -주실 것이다(막12:9).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이 세대 가운데 나타내는 도구들이며 관리자이다.
이 사실은 열쇠에 관한 구절에서도 표현되었다. 예수는 천국의 열쇠를 그의 교회에 주실 것이며, 땅에서 매거나 푸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거나 풀 것이다(마16:19). 매고 푼다는 관용어는 랍비들의 용어로써 어떤 행위들을 금하거나 허락하는 것을 지칭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자주 교회의 행정적 통제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개념의 배경은 하나님께서 엘리야김에게 다윗 집의 열쇠를 맡길 것을 보도하는 이사야 22장 22절에서 발견되는데, 열쇠를 맡기는 행위는 온 집의 행정권을 포함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베드로에게 교회의 행위를 결정하여 감독할 권한을 주었다고 한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자유로운 교제를 위해서 유대인들의 의식적 규례(意識的 規例)들을 거절했을 때, 그는 이 행정권을 행사한 것이다(행10-11장).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긴 하지만, 또 다른 해석이 보다 가까이에 있다.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기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였다(눅11:52). 동일한 사상이 마태복음에 나타
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라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 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성서의 관용어로서 지식은 지적인 개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식은 “계시에 근거한 영적인 소유”이다. 베드로에게 위임된 권한은 계시, 즉 열두 제자와 함께 가지고 있는 영적인 지식에 근거한다. 천국의 열쇠는 그러므로 “베드로가 자신이 통과한 계시의 문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인도해 들일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다. 매고 푸는 권한은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받아들이거나 금지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예수께서 메시야 되심을 하나님의 계시로 아는 자들과 베드로 위에 세울 것이다. 사람들을 그 나라의 축복에 들어가게 하든지, 아니면 금지시키는 방법도 동일한 이 계시에 의해서 그들에게 위임될 것이다.
이 해석은 랍비들의 언어 사용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 왜냐하면 매고 푸는 것은 금지와 허용을 지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는 형제에게 범죄한 사실을 뉘우치지 않는 회중의 일원을 교제로부터 내보낼 것을 지시하는 마태복음 18장 18절에 암시되어 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진리가 부활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그들의 미래 사역을 위하여 성령을 약속한 요한복음의 한 구절에서 발견된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이 구절은 임의적인 권한 행사로 이해될 수 없다. 죄 용서의 권한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함에 있어서 불가피한 문제이다. 더욱이 그것은 베드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제자들-교회-에 의해서 행사될 권한이다.
사실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을 때 매고 푸는 이 권한을 이미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평안이 그 집에 머물지만, 거절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 집에 임할 것이다(마10:14,15). 그들은 죄를 용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들은 또한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였다. 그들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천국 문을 열거나 또는 그들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그 문을 닫을 수 있는 실제적인 결과를 가졌다.
이 진리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나타난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참조․막9:37). 양과 염소의 심판에 관한 극적인 묘사도 동일한 것을 말해준다(마25:31-46). 이 설화는 종말론적인 완성의 프로그램으로써가 아니라 삶의 궁극적인 문제들을 극적인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그의 “형제들”)(비교․마12:48-50)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로서 세상에 보내야 했다. 그들의 사역과 설교의 성격은 마태복음 10장 9-14절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서 받는 환대는 사람들이 그들의 메시지에 응답했음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증거였다. 그들이 어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지치고 병들고 굶주리며 목마를 수 있으며, 때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힐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며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것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자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거절할 것이다. “의인들의 행실은 우연한 자선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을 돕는 행위이며, 행위자들이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하고 때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행위이다.” 이 비유를, 자선 행위를 한 사람들이 예수의 사역과 메
시지에 상관없이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비유의 역사적인 상황을 전연 고려치 않은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천국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 그들 사이에 있었던 연대성(連帶性)을 밝혀 준다. 사람들의 궁극적인 운명은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그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들을 보낸 주를 영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공식적인 기능은 아닐지라도, 예수의 제자들-그의 교회-은 사실상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함으로써 누가 종말론적인 왕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가가 결정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자들의 교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며 교회에 의해서 세상에 전파된다. 교회-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자들-없이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두 개의 구별되는 개념으로 남는다. 하나님의 통치와 사람들의 교제가 그것이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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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倫理
예수의 교훈 대부분은 인간의 행위와 관련이 있다. 산상보훈, 황금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등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윤리문학의 단편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윤리 교훈
과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 사시의 관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석의 배경으로서 우리는 몇 가지 보다 중요한 해석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問題의 檢討 많은 학자들은 예수의 신학은 찬성하지 않지만, 그의 윤리적인 교훈을 높이 사며 거기에서 영구적인 의의를 발견하려고 한다. 피바디(F. G. Peabody)에 의하면, 예수의 우선적인 요구는 정통적인 교훈이나 환상적인 종교 체험이 아니라 도덕이었다. 유대인 학자인 클라우스너(Klausner)는 인자를 신격화하려는 기적들과 신비적인 교훈들을 생략하고 윤리적인 개념들과 비유들만 보존함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윤리교훈들을 정선(精選)하고 싶어 한다. “만일 때가 성숙하여 윤리적인 본질을 덮고 있는 기적들과 신비주의가 제거될 수 있다면, 예수의 윤리책은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정선된 귀중한 문헌의 하나가 될 것이다.”
구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진리를 인간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범주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였다. 묵시론적인 요소는 예수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교훈의 핵을 둘러싼 껍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의 교훈의 본질과 상관없는 이 요소는 제거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윤리는 행위의 이상적인 표준으로서 모든 상황과 모든 시대에 걸친 타당성을 지니며 안의 인증(認證)과 당위성(當爲性)을 가진다.
구 자유주의적 해석은 동일한 관점이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고전적인 관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예수의 윤리에 관한 마샬(Marshall)의 최근 분석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만큼 종말론을 더 강조하지 않았다. 마샬은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들을 정의하고 분류하려는 노력에 회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개념과 윤리 사이의 관계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표준적인 구절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개인 영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라고 가르친다. 마샬은 이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서 하르낙(Harnack)에게 호소한다. 그는 예수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에 대해서 자주 말했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마샬의 연구에 있어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사회 속에 현재적으로 실현될 때에만 임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된 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른다. “예수의 모든 윤리 교훈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 통치를 받게 될 때 반드시 처신해야 할 행위에 관한 해설일 뿐이다.”
도드(C. H. Dodd)의 견해로써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 실현된 종말론은 종말론적인 언어를 구사하긴 하지만 동일한 종류의 해석에 도달한다. 예수의 교훈은 세상의 종말을 기대하는 자들을 위한 윤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경험한 자들을 위한 윤리이다. 예수의 윤리는 절대적인 술어로 주어지고 기본적이며 영원한 종교적 원칙들에 기초한 도덕 사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세계가 시간 속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쉬바이처(W. Schweitzer)가 도드의 견해와 계속적이며 창조적인 하나님의 행위내지 섭리 신앙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결국 윤리는 최후 수단으로서 종말론을 제거할 수 있고, 실제로 필요한 것은 구약의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판과 은총의 교리인 것처럼 보인다.
알베르트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중간시대 윤리”는 이러한 비종말론적 해석들과 정면으로 반대된다. 쉬바이처는 하나님의 나라가 선과 악의 구별을 초월하는 초윤리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예수가 미래적인 왕국의 윤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가 오기까지의 짧은 기간만을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주로 회개와 도덕적 갱신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윤리 운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출현을 재촉한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윤리는 윤리적 종말론으로 변하여 영구적인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알베르트 쉬바이처의 종말론적 해석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학자들도 그의 중간시대 윤리는 채용하지 않는다. 빈디쉬(Hans Windisch)는 산상설교를 쉬바이처의 견해에 따라 재검토한 결과 거기에는 두 종류의 윤리 교훈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는 종말론적 윤리와 철저하게 비종말론적인 지혜 윤리가 그것이다. 빈디쉬는 역사적인 주석은 이들 두 종류의 윤리가 서로 이질적이라는 실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수의 주도적인 윤리는 종말론적인 것이며, 본질적으로 지혜 윤리와 다르다. 이들 윤리는 새로운 입법, 다시 말해서 종말론적인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법률들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완전하게 지켜져야 한다. 이들 윤리의 급진적인 성격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臨迫性)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意志)의 조건이 된다. 이들 윤리적인 요구들이 실천적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의지는 실천적인 고려 사항들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그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이 구원 얻는 것은 순종에 달려 있다. 산상설교에 나타난 종교는 주로 행위의 종교였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이 윤리는 예수 자신도 지킬 수 없었던 극단적이고 영웅적이며 비정상적인 윤리였다.
예수서 종말론적인 왕국을 선포했다고 믿는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같은 학자들은 그의 윤리를 하나님께서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주신 순수하고도 무조건적이며 어떤 타협도 불허하는 신의지(神意志)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악한 세상에서 그것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완전한 타당성을 얻을 것이다.
「예수의 교훈에 있어서 종말론과 윤리」(Eschatology and Ethics in the Teaching of Jesus)라는 와일디(A. N. Wilder)의 연구는 최근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분석들 가운데 하나이다. 와일더의 해석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그가 종말론의 중요성을 인정한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예수는 그의 윤리를 임박한 종말론 왕국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요구들로 생각하고 보상이나 징벌의 시행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와일더는 묵시론적인 요소는 본질적으로 신화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믿었다. 신성한 것을 상상적인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이 바로 묵시론적 방법이다. 예수는 역산적인 큰 위기를 기대하였는데, 그는 그것을 시적(詩的)이며 묵시적인 언어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수의 윤리의 종말론적인 요소는 형식적이며 이차적이다. 묵시론적 왕국과 그 종말론적 성격 이외에, 예수는 세례 요한과 자신과 더불어 새로운 상황이 시작됐음을 가르쳤다. 이 새로운 상황의 윤리는 종말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의해서 결정된다. 미래의 종말론 왕국과 현 시대의 구원 사이의 관계는 단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볼투만은 철저 종말론을 받아들였으나 예수의 메시지의 의미를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까우심이라는 압도적인 감각에서 찾는다. 볼트만은 예수의 윤리를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공로적 조건으로서 순종되어야 할 규칙들이나 규정들이 아니다. 예수의 윤리 내용은 단순한 요구이다. 하나님 나라는 임박했고 하나님은 가까우
시기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이 요구되고 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최후의 시간에 있어서의 결단이다. 이렇게 해서 볼트만은 예수의 윤리를 실존적인 결단의 요청으로 해석하였다. 예수는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윤리 교사가 아니다. 그는 행위의 절대적인 원리들이나 규칙들을 가르치거나 설정하지 않았다.
세대주의는 연기된 다윗 왕국의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산상설교에 나타난 윤리를 은혜의 복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다윗 왕국과 관련이 있는 새로운 율법주의로 해석한다.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덕적으로 적용되기는 하지만 일차적이며 문자적인 그 내용은 크리스천 생활이 아니라 미래의 지상 왕국에서 적용될 것이다. 산상설교의 윤리는 천년왕국 시대에 세워질 의로운 지상 왕국의 헌법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용납될 수 있는가를 말해 주지 않고, 그 나라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자들을 나타내 준다. 산상설교는 성격적으로 율법적이며 최고의 수준에까지 승화된 모세의 율법이다.” “왕국이 개인에게 약속한 것은 모두 인간의 공적에 기초한다‥‥‥그것은 행위 언약일 뿐이며 강조되는 단어는 ‘하라’이다‥‥‥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그도 용서받을 것이다.” “산상설교는 생활 규칙으로서 십자가 앞에 있던 유대인들과 임박한 왕국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한 것인데 지금은 효력이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는, 사람의 행위로 얻어진 이 의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주어질 ‘의의 선물’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공적을 초월하는 요구 체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지위와 영원한 안전에 속한 고귀한 것들이 생략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최근의 세대주의 저술들은 표현에 있어서 상당히 신중해졌고 지상왕국의 율법을-산상설교-지혜와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산상설교는 사람들이 은혜를 통해서만 지킬 수 있는 왕국의 율법적 요구들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산상설교를 오해한 것이다.
이 개관은 예수의 윤리적 교훈과 천국관이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우리는 예수의 윤리가 이미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타나났고, 종말론적인 시간에 이르러 완성될 역동적인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가장 잘 해석될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예수의 律法 예수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어느 정도 유사한 관계를 율법에 대해서도 가진다. 그는 약속된 메시야적 구원의 성취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하였으나, 그들이 거절하자 그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참 백성을 발견하였다. 구약의 소망은 그들을 통해서 성취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는 연속과 불연속의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는 구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였으며 율법을 하나님의 주신 생활 규칙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명령들을 순종하였고(마17:27;23:23;막14:12), 구약을 본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처럼 비평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의 사역은 율법의 참된 내용을 성취시키는 것이었다(마5:17). 따라서 구약은 영구적인 타당성을 갖는다(마5:17-18).
이런 식의 성취는 율법의 역할을 영구적인 타당성을 갖는다(마5;17-18).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까지이며 요한 뒤에는 메시야적 구원의 시대가 도래한다(마11:13=눅16:16). 새로운 이 질서 속에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관계는 더 이상 율법을 통해서 중개되지 않고, 예수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중개되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를 통해서 뚫고 들어왔다. 예수는 구약의 전체 흐름을 하나님이 지도하시며 자
신을 통해서 그 목표에 도달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메시야적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現在性)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성취였다.
따라서 예수는 구약과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설교의 성격은 선배들의 권위에 의존하는 랍비들의 방법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그의 설교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와 같은 예언자들의 서술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메시지는 자신의 권위에 뿌리 박고 있으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와 같은 표현들이 되풀이해서 사용된다. 수많은 구절들 속에서 반복하여 자주 사용되는 진실( )로라는 말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와 같은 구약적 표현의 지의(眞義)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권위로 율법의 일부로 간주된 서기관들의 율법 해석들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안식일과(막2:23-28;3:1-6;눅13:10-21;14:1-24), 금식(막2:18-22), 정결 의식(마15:11-30;막7;1-23;눅11:37-54), 그리고 “의인”과 “죄인”의 구분(막2:15-17;눅15:1-32)등과 같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포함한다. 더욱이 그는 율법의 역할을 메시야적 구원의 새 시대와 관련하여 재해석하였다. 예수께서 사람이 음식으로 부정해질 수 없다고 선언하였을 때(막7:15), 그는 그로써 마가가 설명한 것처럼(7:19) 모든 음식이 정함을 밝힌 것이며, 의식적으로 지켜지던 모든 전통들을 원칙적으로 무효화시킨 것이다. 자신의 권위에 근거해서 예수는 모세법에 나타난 정결의식의 원칙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가 더 이상 율법에 의해서 중개 되지 않고 예언자들에 의핸서 예견되었으나, 지금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실현 과정에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행위(救贖行爲)에 의해서 중개되어진다.
神의 統治의 倫理 우리는 이제 예수의 윤리 교훈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메시지 사의 긍정적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 빈디쉬의 저술이 이루어 놓은 가장 중요한 공헌들의 하나는 역사적 주석과 신학적 주석 사이의 구별이다. 역사적 주석은 산상설교를 구약과 유대적 범주들을 따라서 엄격하게 해석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는 “메시야적 구원의 거룩한 처소,” 즉 오는 세대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철저 종말론이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윤리는 누가 종말론적인 왕국에 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원칙들이다. 역사적인 이러한 해석은 현대인들에게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묵시적인 왕국을 기대하지 않으며, 예수의 종말론적 윤리는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하고 성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신학적 주석에 호소해야 하는데, 신학적 주석은 “탈무드에서 예수가 사용하였음이 분명한 한 단어가( ”말쿠트“) 거의 항상 하나님의 주되심 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때마다 확립되는 그의 통치를 의미한다”는 역사적 주석의 중요한 발견을 이용한 것이다.
빈디쉬의 이러한 구분법은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의미를 모호하게 하기 때문에, 필자에게는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만일 역사적 주석이 랍비 사상에 나타난 말쿠트( )이란 단어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면, 그리고 랍비 사상이 예수의 역사적 환경에서 중요한 사실이라면, 이것은 역사적으로 예수의 교훈에 나타난 본 술어의 기본적인 의미가 될 가능성은 없는가? 빈디쉬는 종말론적 왕국의 임박성(臨迫性)이 중심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중심 요소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였다는 사실을 주장할 것이다. 더욱이 두 종류의 윤리는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른바 지혜 윤리는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빈디쉬는 산상설교가 제자들을 위해서, 즉 “이미 개종한 자들과 이스라엘의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빈디쉬가 “또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해서”하고 덧붙였을 때, 그는 본문이 시사하는 것보다 휠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 셈이다. 복음서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산물임을 인정하더라도, 산상설교는 중생(重生) 또는 성령의 내주(內住),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명에 관해서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 다만 미래적이며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만 전제한다. 예레미아스가 지적한 것처럼, 산상설교가 어떤 것을-하나님 나라의 선포-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산상설교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그의 요구에 선행(先行)한다. 빈디쉬가 말한 대로 내적인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현재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을 찾아오시고, 죄 용서와 교제의 메시야적 구원을 그들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이다. 지혜 윤리와 종말론적 윤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종말론적인 완성에 들어갈 사람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자들이다. 빈디쉬가 산상보훈 속에서 감지한 “다른 구원론”은 실제에 있어서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예수의 사역과 메시지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하나님이 지금 이 땅 위에서 그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면, 산상설교는 지나친 이상론이거나 아니면 병적이며 자멸적인 광신(狂信)에 불과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최근의 연구는 빈디쉬와는 상당히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빈디쉬와 같이 와일더는 종말론적인 윤리와 현재적 구원을 말하는 비종말론적 윤리를 발견하였다. 와일더는 종말론적인 요소는 단순히 형식적이며 이차적인 반면, 일차적인 요소는 신 의지(神 意志)라고 주장함으로써 빈디쉬와 견해를 달리한다. 우리가 살핀 대로, 이것은 어떤 비평가들로 하여금 와일더가 종말론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전적으로 제거시키려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그러한 표현들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래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라는 와일더의 주장에 동의한다. 이것은 미래에 관한 비묵시론적인 진술들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예수는 부활시에 구속받은 존재가 현 질서와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에는 성(性)이 다시 필요치 않을 것이며 “저 세상의 자녀들”은 천사들과 동등이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막12:25=눅20:35). 누가 인간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성과 관련이 없는 미래적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도 가정,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관계가 없는 사회를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질서는 실로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세계이다.
종말론적 언어의 상징적 성격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종말론적 요소가 실제로 형식적이며 이차적일 뿐이라는 결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언어는 비록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지라도 실제적인 미래를 묘사하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한편에서는 불못 또는 바깥 어두운데,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메시야적 잔치와 같은 종말론적 특징을 갖는 표현들이 형식적이며 이차적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거기에는 종말론적 특징 자체가 이차적이라는 사실이 뒤따르지는 않는다. 종말론적인 표현의 핵심은 마지막 날에 사람들은 하나님과 대면할 것이며, 그의 심판이 아니면 구원을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형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성서 종교의 한가운데 있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와일더는 예수가 묵시적인 언어를 장차 있게 될 역사적이며 차세적(此世的)인 위기의 상징적 표
현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두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역사적인 위기를 뛰어넘어 종말론적인 한 사건을 내다보았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와일더가 종말론적인 차원을 완전히 제거시키려 하였다고 비평하는 자들이 그를 올바로 해석하지 못했음을 결론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종말론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묵시적인 언어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래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상징적 언어일지라도, 하나님의 미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미래이다. 와일더가 잘 지적한 대로 예수의 윤리가 지닌 일차적인 요소는 그의 사역으로 인해서 생겨진 새로운 상황 때문에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현재적 의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구원 시대의 특징을 이룰 만하다. 그렇다면 종말론적인 특징도 일차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종말론적인 완성은 현재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통치와 뜻이 궁극적이며 완전하게 구현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며 하나님의 통치의 윤리이다. 그것을 예수의 메시지와 사역의 전체 맥락과 분리시킬 수 없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자들에게만 타당성이 있다. 예수의 윤리 교훈들의 대부분이 유대적 교훈들과 평해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대적 교훈들 가운데 어떤 것도 예수의 윤리만큼 청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미쉬나의 한 구절을 읽는 것과 산상설교를 읽는 것은 별다른 경험이다. 예수의 교훈에 있어서 독특한 요소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인격을 통해서 인간 역사 속에 뚫고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윤리적 요구 밑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함으로써 의(義)의 새로운 차원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絶對的 倫理 예수의 윤리가 만일 하나님의 통치의 윤리라면, 그 윤리는 절대적 윤리일 것이다. 디벨리우스는 옳았다: 예수는 하나님이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주신 순수하고 무조건적이며 어떤 타협도 불허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다. 그러한 행위는 모든 악이 추방될 오는 세대에서만 실천이 가능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현 세대에서 실천할 것을 기대하였다는 것은 산상설교에서 아주 분명하다. 달리 해석하면, 세상의 빛이나 세상의 소금에 관한 구절들이 무의미해진다(마5;13-14). 예수의 윤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는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요구할 만한 의(義)의 표준을 제시해 준다.
예수의 윤리가 실천 가능한가 하는 어려운 문제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생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실천 불가능하고 성취하기 어려운 윤리이다. 만일 산상설교가 미래적인 왕국에 들어갈 자를 결정하는 법률이라면, 빈디쉬가 인정한 대로 모든 사람들은 거절될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덧붙인다면, 예수 자신까지도 거절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빈디쉬는 예수가 그의 영웅적인 윤리를 성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그의 비난은 사랑의 표현으로 보이지 않으며(마23장), 안나스 앞에서 그는 다른 쪽 뺨을 돌리지 않았다(요18:22이하). 예수는 분노가 죄이며 정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음욕은 죄이며,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죄를 범한 자이다. 예수는 절대적인 정직을 요구하였다. 그는 너무나 절대적인 정직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단지 옳다와 아니라는 말만이 허용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였다. 만일 예수가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율법적인 순종만을 요구하였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절망의 절벽을 세워놓은 셈이다. 그러나 산상보훈은 율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토치가 사람들의 생활을 통해서 절대적으로 실현되는 이상(理想)을 그린다. 디벨리우스가 말한 대로, 이의는 종말론적인 하나
님의 나라에서만 완전하게 경험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는 하나님의 통치가 현실적으로 경험되는 한, 현세대에서 어느 정도 성취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세대 가운데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완전한 경험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은혜에 관한 예수의 교훈과 분리하여 대댭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출현과 그 의를 성취하는 것 사이에는 유사점(유사점)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적 구원의 성취로서 옛 세대 가운데 임하였으나 종말론적인 완성은 오는 세대를 기다려야 한다. 그 나라는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방법으로 현존하다. 그 나라는 역사 속에 들어왔으나 역사를 변혁시키지 않았고, 사회 속에서 현존하되 사회를 완전히 순화시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통치의 의(義)는 현세대 가운데에서도 현실적이며 실질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의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악한 세대 가운데 들어와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왕국의 축복을 부분적이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미리 경험하게 하였을 때, 그 나라의 의는 완전한 것은 아닐지라도 현 질서 속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 윤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현재적 실현과 미래의 종말론적 완성 사이의 긴장 관계에 있다.
內面 生活의 倫理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마음의 의를 새롭게 강조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천국에 들어가는 데 필수적이다(마5:20). 이러한 원리가 나타내 주는 것은 랍비들에 의해서 일상적으로 해석된 구약과 대조된다. 일차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외적인 행위 밑에 놓여 있는 내면적인 성품이다. 율법은 살인을 정죄한다. 예수는 분노를 죄로 정죄하였다(마5:21-26). 이것이 어떻게 율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법은 통제될 수 있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 분노는 외적인 행위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내면적인 태도와 성품에 속한다. 율법은 간음을 정죄한다. 예수는 음욕을 정죄하였다. 음욕은 율법에 의해서 통제될 수 없다. 보복에 관한 규정들도 의지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예시(例示)해 주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외적인 표준에 율법적으로 순종하여 실제로 다른 뺨을 돌려댈 수 있을지라도, 아직 격분을 풀지 않을 수도 있고, 또는 마음 속으로 보복하려는 뜻을 독처럼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외면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친절보다도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하려는 자의 안녕을 충심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소원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과 성품 속에 있는 가장 깊은 비밀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직 이것만이 사랑이다. 그것은 성품이며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이다.
맨슨(T. W. Manson)은 예수의 윤리와 랍비들의 윤리의 차이점이 행위의 내면적 근원과 외면적 행위 사이의 차이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유대교가 내면적인 동기를 전적으로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열두 족장의 언약에 나타난 윤리 교훈은 내면적인 의를 강하게 요구한다.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범죄하면, 그에게 평화적으로 말하고 악의(悪意)를 품지 말라. 그가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치면 그를 용서하라. 그러나 그가 뉘우치지 않을지라도 그에게 분노하지 말지니라…”(갈6:3).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는 음행한 목적으로 여인을 바라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머물므로 그의 마음 속에 부정함이 없기 때문이다.”(베냐민8:2).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이 아니다. 미쉬나에서 가장 흔한게 발견되는 구절은 랍비 윤리의 중심이 율법을 문자 그대로 순종하는 외면적 행위에 있음을 분명히 해준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는 내면적인 완전한 의를 요구하였다. 와일더는 예수의 윤리를 “분노, 보복하려는 마음,
미움 등을 버리고 마음을 완전히 순수하게 가지는 것ꡓ으로 요약하였다. 분노, 탐심, 미움 등은 사람의 내면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의 행위들을 유발시키는 의도이다. 예수의 일차적인 요구는 의로운 성품이다.
이러한 요구는 예수의 교훈 도처에서 나타난다. 선한 사람은 그의 선한 마음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의 악한 마음에서 악한 것을 낸다. 행위는 성품의 표현이다(눅6:45). 심판 날에 사람들은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그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다(마12:36). 조심성 없이 한 무익한 말에서 마음의 본 성품과 기질이 나타난다. 궁극적인 용서와 정죄는 사람의 외적인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그의 내면적 본질을 나타내는 행위에 달려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적인 의는 그것이 마음의 의이기 때문에, 양적이 아니라 질적으로 실제 성취될 수 있다. 그것의 완전한 성취는 종말론적인 왕국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지금 여기서 그리고 바로 이 세대 가운데서 실현될 수 있다.
義의 成就 하나님 나라의 의는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빈디쉬는 예수의 윤리가 계명들을 순종함으로써 결정되는 의, 다시 말해서 율법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또한 예수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교훈들을 성취시킬 수 있게 하는 내적인 갱신을 전제하였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내적 갱신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 의해서 이미 경험된 것이든지, 아니면 예수는 자신의 교훈이 그의 청중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심어 넣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예수의 선포에 의해서 점화(點火)된 하나님 나라의 신앙은 따라서 새로운 이들 왕국 계명들을 순종하려는 자발적인 마음과 능력을 제공해 주는 특별한 태도이다.” “능력은 하나님 나라를 신앙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성품을 소유하는 것의 상호관계를 논증함으로써 그는 실제로 그의 경건한 청중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성품을 심은 것으로 확신하였다.” 문제는 빈디쉬가 이러한 새로운 성품과 의지의 활동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철저 종말론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의 종말론적인 구원 영역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적 구속 행위라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래적인 왕국은 현 질서 속에 뚫고 들어와 오는 세대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 종말론적인 완성을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현재적 실재가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의는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에 의해서 체험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였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새로운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수납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가 달성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능력에 의해서이다. 구트브로드(Gutbrod)는 예수께서 율법을 하나님의 변호를 받기 위해서 사람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새로운 이 상황을 요약한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이 전제되는데, 이 신분은 예수와의 교제를 통해서 생긴 것이며 이렇게 해서 부여된 죄 용서 속에서 그 존재를 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의는 성취될 수 있기도 하고 성취될 수 없기도 한다. 그것은 완전하지도 않지만 성취될 수는 있다. 길무어(S. M. Gilmour)는 이 개념을 후기 기독교적 전망으로부터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그리스도인의 교회의 일부인 한‥‥‥예수의 윤리는 실천 가능한 윤리이다. 그가 세계의 일부인한 예수의 윤리는 타당성은 있지만 실천 불가능한
윤리이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요청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가 근본적이며 무조건적인 결단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지원을 받는다. 사람들은 다른 모든 관계들을 끊을 만큼 전격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 결단은 자기의 가정을 버릴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눅9:58). 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정상적인 인간의 의무들을 뛰어넘는 최상권(最上權)을 가져야 한다(눅9:60). 그것은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 관계의 불화를 포함할 수도 있다(눅9:61). 사실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이 다른 충성심들과 대립될 때, 비록 그것들이 삶의 가장 소중한 관계들을 포함할지라도 이차적인 충성심은 포기되어야 한다. 제자가 된다는 사실은 때때로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될 것을 의미하며,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마10:34-39).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에 대해서 가지는 애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비교할 때 오히려 미움으로 묘사된다(눅14:26).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를 위해서 결단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인연이나 인간 애정도 끊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부자 청년이 그의 재산을 처분한 후에 제자가 될 것을 명한 이유이다. 예수는 그 청년이 특별히 사랑하는 대상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제자가 되기 전에 포기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결단할 때, 사랑하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눅14:33). 이런 식의 포기를 가장 전격적으로 나타낸 형태는 자기 생명의 포기다(눅14:26). 분명히 이것은 모든 제자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산다. 그 나라의 장래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다음 구절의 의미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이것은 금욕, 즉 얼마간의 삶의 향락과 즐거움들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금욕은 이기적인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금욕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들의 이기적인 이익을 갈구한다. 그러나 자기 부정은 정반대이다. 자기 부정은 하나님의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떤 짐을 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죽이는 도구이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자신과 개인적인 야망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뜻의 죽음을 의미한다. 아무리 이타적이고 고매한 자기 성취일지라도 우리는 그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만을 소원해야 한다.
인간의 운명은 이러한 결단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고 죽이기 위해 전격적인 결단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상실했을 때, 그는 재림의 날에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인자(人子)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대면한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결단하는 사람은 미래적인 왕국에 들어 갈 것이지만, 누구든지 예수와 그의 나라를 거절하는 사람은 그 나라에서 거절당할 것이다(마10:32-33). 이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경험하는 자들은 오는 세대의 종말론적인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결단의 자연적인 귀결은 자신의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막12:28이하;마22;10). 예수는 다른 모든 계명들이 그리로 수렴(收斂)되고 거기서 모든 의의 규범을 발견하게 되는 배타적인 사랑을 요구하였다. 사랑은 의지와 행위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에다 근거지우고 그를 완전히 신뢰하며 그에게 모든 염려와 궁극적인 책임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재물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배제한다. 명예와 개인의 신분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눅11:43).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유대교 역시 이웃사랑을 가르쳤으나, 그러한 사랑은 대부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한다. 레위기 19장 18절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계명은 분명히 야웨의 언약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빛의 모든 자녀들”을-공동체의 일원들-사랑하고 “어두움의 모든 자녀들”을-공동체 밖에 있는 자들-미워하라는 쿰란 공동체의 이상(理想)은 두드러진다(IQS1:9-10). 예수는 이웃 사랑의 의미를 재정의하였다: 이웃 사랑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눅10:29이하), 특별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마5:44). 이것은 예수께서 시작한 새 시대의 새 요구이다. 예수는 사랑의 율법이 구약의 모든 윤리 교훈들을 집약시킨 것이라고 말했다(마22:40). 이 사랑의 법은 예수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며, 그의 모든 윤리 교훈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다.
報償과 恩惠 예수의 교훈들 중에서 여러 구절들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보상임을 시사하고 있다. 당대의 유대 사상은 공적과 보상의 교리를 상당히 중요시하였고, 일견(一見) 이것은 예수의 교훈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장차 핍박에 대한 상과(마5:12), 원수 사랑의 상(마5;46), 순전한 마음으로 구제한 상(마6:4), 그리고 금식에 대한 상(마6:18)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주인과 품꾼 또는 종의 관계이다(마20:1-16;24:45-51;25:14-30). 상은 때때로 행한 대로 엄격하게 시행되는 것 같고(마5:7;10:32,41이하;25:29), 보상도 잃은 것이나 자기를 희생한 것만큼 시행된다(마10:29;눅14:8-11). 상은 때때로 의무를 수행한 정도에 따라서 약속되며(마5:19;18:1-4;막9:41;눅19:17,19), 벌도 이와 마찬가지로 측정된다(마10:15;11:22,24;눅12:49이하). 이와 같은 구절들 속에서 예수의 교훈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공적 개념과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대적인 개념에 의하면, 상은 양적으로 지불되는 보수였다.
그러나 보상에 관한 교훈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밝혀 주는 구절들이 있다. 예수는 상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공적의 윤리를 주장한 적은 없다. 신실함은 상 받을 것을 생각하고 실천되어서는 안 된다. 상 자체는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다. 상에 대행서 언급하는 비유들은 결국 모든 상은 은혜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신실성을 실천하였을지라도, 그는 아무것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의무를 행했을 뿐이기 때문이다(눅17:7-10). 일한 결과와는 상관없이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도 있다(마25:21,23). 보상은 천국 자체이다(마5:3,10). 천국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자들에게 주실 것이다(마20:23;25:34). 심지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들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다(마25:14이하). 따라서 상은 공적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에, 봉사의 정도에 비례하지 않는다(마19:29;24:47;25:21,23;눅7:48;12:37).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갈구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눅12:31,32).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변호에 의한 것이지, 그의 경건한 행위 때문이 아니다(눅18:9-14).
관대한 이 은혜의 선물은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의해서 예시(例示)된다(마11:5). 포도원에서 일하는
품꾼의 비유는 보상에 대한 신적(神的) 표준이 인간의 표준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순전히 은혜의 문제였다(마20:1-16). 하루 종일 일한 품꾼들도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받아야 할 품삯이다. 열 한 시에 포도원에 들어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다른 품꾼들도 하루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품꾼들과 같이 동일한 댓가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은혜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선물로 주는 것. 사람의 계산 방법은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는 것이다. 전자는 공적과 보상이지만, 후자는 은혜이다.
이들 교훈과 관련하여 볼 때, 우리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교훈에 순종한 댓가로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선물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내 맡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현재적인 선물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주어질 것이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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