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에서 창사 40주년 특집기획드라마로 100만부 이상 팔린 소설가 최인호의 2001년도 최대의 베스트 셀러 [商道]를 드라마로 제작중이며 10월초부터 방영한다고 예고하고 있다.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林尙沃)은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약(景若), 호는 가포(稼圃)로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하여 1796년(정조20)부터 상업을 시작, 1810년(순조10)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의 정치적 배경을 이용하여 한국 최초로 국경지대에서 인삼무역권을 독점하는 천재적인 상업수완을 발휘하였다. 1821년 변무사(辨誣使;청나라에 조선의 曲解를 자세히 알리려고 파견하는 사절)를 수행, 청나라에 갔을 때는 베이징[北京] 상인의 불매동맹(不買同盟)을 교묘하게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에 파는 등 이재에 능하여 조선후기 최대의 갑부가 된다. 그는 벌어들인 재화로 기민(飢民) 및 수재민을 구제하였고 그 공으로 1832년인 순조 32년에 곽산군수(郭山郡守)로 1835년 구성부사(龜城府使)에 발탁되어 봉직하다가 비변사(備邊司;군사문제를 협의하는 문무합의기구)의 논척(論斥)을 받자 사퇴하였다. 그후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내며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역사적 인물이다. 인생 후반기에는 시(詩)로도 이름을 떨쳤으며, 저서에 《가포집》 《적중일기(寂中日記)》가 있으며, '계영배'라는 넘치지 않는 술잔과 임종직전 유언이 유명하여 오늘날 전해지고 있으며 소설 상도에서도 전개부분의 화두(話頭)이기도 하다.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같다)"라고.... 네티즌에 권하고 싶은 역사소설이다
인삼(人蔘)은 원래 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모후산(母后山)일대가 재배 인삼의 발상지였으나 이 동복삼(同福蔘)은 개성상인에 의해 개성으로 도입되어 개성이 재배인삼의 중심지가 된다. 고려시대부터 인삼의 찌거나 烹熟하여 만드는 홍삼의 제조법이 있다고는 하나 문헌으로는 <정조실록>에 박유철(朴有哲)이란 사람이 백삼의 효능을 높이고 약효를 더해주는 홍삼을 만드는 법을 창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장지연의 '위암문고'기록)
중국에서는 인삼을 귀개(鬼蓋), 인함(人銜), 신초(神草), 토정(土精), 옥정(玉精), 혈삼(血蔘), 인미(人微), 황삼(黃蔘), 추면환단(皺面還丹), 인신(人身), 활인초(活人草), 지정(地精)등으로 불린다.
강릉의 인삼에 관한 기록을 보면 임영지 세부(稅賦;부과되는 세금)편에서는 삼세(蔘稅)의 근거가 있으며, 기사(記事;사실을 적은 글)편에는 강릉지방에 인삼이 많이나 나라에 바치는 양이 다른 군보다 많아 정기적인 삼세이외에가을에 바치는(현물로 내는 세금) 삼이 60량3전7푼7리였다고.... 이런 이유로 관내에서 나는 삼의 양이 적어 서울 등지에서 반입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총화(叢話;전하는 말을 모음)편에는 고려 충선왕의 총애를 받던 대신 김승명(金承命)이 인삼을 구하기 위하여 강릉을 왕래했고, 연산군(1495~1506)때에 임사홍(任士洪;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가 폐비(廢妃)·사사(賜死)된 내력을 연산군에게 밀고,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으로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추살(推殺)되었고 후일 부관참시된 인물)이 영동지방의 기생을 뽑아 올리는 업무(採紅使)로 강릉에 왔었는데 인근 부자들이 인삼을 천여근 모아주자 한양으로 올라간 임사홍은 임금께 아뢰기를 "강릉에는 잘 생긴 기생이 없어 뽑아 바칠 수 없습니다. 대신 많은 인삼을 거두어 바치오니 맑은 기운이 일고 상서로움을 맞이하옵소서"라고 하니 연산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강릉지방은 인삼이 많이 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 채홍사(採紅使) : 원래는 채홍준사(採紅駿使)라고 하며 조선 전기 연산군이 미녀와 준마(駿馬)를 궁중에 모아들이기 위해 지방에 파견하였던 벼슬아치를 지칭한다. ‘홍(紅)’은 여자, ‘준(駿)’은 말을 가리키며 황음(荒淫)에 빠져 있던 연산군은 서울의 기녀 ·미녀로써는 성이 차지 않아 1505년(연산군 11) 우찬성(右贊成) 이계동(李季仝)을 전라도에,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임숭재(任崇載;임사홍의 아들)를 충청 ·경상도에 채홍사로 파견하여 미녀와 준마를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 그 뒤 연산군은 특히 백마가 양기에 좋다고 말고기를 즐겨 좋은 백마를 구해 오게 하였고, 시집가지 않은 여자들을 청녀(靑女)라 해서 사족(士族)의 미혼처녀들을 뽑기 위해 채청사(採靑女使:採靑使)라는 벼슬자리를 만들어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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