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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프롬Erich Fromm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에 따르면 사랑은 의지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먼저, 보호Care입니다. 사랑하면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면 기쁜 마음으로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꽃을 사랑하면 한 번이라도 더 물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또 책임Responsibility입니다. 사랑하면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임은 언제 어디서나 대상을 위해 반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든, 성숙을 위해서 돕는 일이든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존경Respect입니다. 사랑하면 존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기 위해서 대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깁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또 지식Knowledge입니다. 사랑에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면 피상적인 지식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본질을 꿰뚫는 지식을 얻기 위해 다가갑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가장 탁월한 사랑이십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크고, 높고, 깊고, 넓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사람들을 돌봐 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꿰뚫어보십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세상κόσμον”은 긍정적으로는 “어울리며 조화로운 배치 또는 구조, 질서, 통치” 등의 뜻을 갖습니다.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모든 인간, 세상의 헛된 모든 재산, 부, 이익, 즐거움, 만족” 등의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상태, 악한 상태, 사랑할 수 없는 상태, 사랑 받을 수 없는 상태, 사랑을 요구할 수 없는 상태”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 악한 세상, 죄의 흔적이 너무나 많이 묻어 있는 세상, 죄로 가득 찬 세상, 그래서 도무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세상을 사랑하셨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영원한 죽음과 저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분명한 증거를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성령께서 보증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도는 또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8:29-30)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이를 당신의 사람들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미리 아시고 정한 그들에게 성령을 물을 붓듯 부어주셨습니다. 마음을 감동시켜 주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불러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모든 허물과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말소해 주셨습니다.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온전히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영화롭게 해 주셨습니다. 거룩하신 당신의 아들과 딸로서, 금생과 내생에 당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넘치는 당신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요6:37)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영혼은 단 한명이라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대속의 사랑을 통해 구원해 주신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을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시겠다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크고 놀라운 사랑에 힘입은 사도는 당당하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대적 사망일지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생명도 곧 사는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인생은 고해와 같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산다는 것은 환난과 재앙, 유혹과 시험, 때로는 가난과 질병을 의미합니다. 흔히 말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생들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밖에 없는 네 가지 고통입니다. “사死” 외에는 다 살아서 당하는 고통들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그러나 이 생명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천사, 권세들, 능력”은 선한 하나님의 천사와 타락한 천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현재 곧 오늘 당하고 있는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시인처럼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시23:4)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당하게 될지 모를 장래의 일까지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장래 일은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6:34)라는 주님의 약속대로, 사랑의 주님의 손에 맡겨드리면 됩니다. “높음과 깊음”은 대공간입니다. 신비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도 계십니다.”(시139:7b-8)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음 속에도 계십니다. 깊음 속에도 계십니다. 높음이나 깊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만 의지하십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환호성을 지를 수 있겠습니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5:9)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러면οὖν”은 “확실히, 따라서,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등의 뜻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연결해 주는 접속사입니다. 앞의 논리를 한층 더 발전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시의 적절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롬5:6)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했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구원에 관한한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또 경건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창1:26a)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판박이로 지어주셨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지어주셨습니다. 모든 경우 당신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도록 지어주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고 놀라운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롬3:23)라는 지적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범죄 했습니다. 동시에 지성, 이해, 이성, 능력,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지위 등 우리에게 주어졌던 거의 대부분의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습니다.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말로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도는 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5:7)라고 지적했습니다. 의인은 정직합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계명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각종 규칙과 법률에 순종합니다. 행동에 있어서 바릅니다. 선인은 의인처럼 모든 일에 바릅니다. 의인이상입니다. 의인일 뿐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통제받습니다.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 쪽 뺨까지 돌려댑니다.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줍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함께 십리를 갑니다. 매사에 바를 뿐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한 피아노 연주자가 있습니다. 정확한 음을 칩니다. 박자를 완벽하게 맞춥니다. 빈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바르게 친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의인입니다. 또 한 명의 다른 연주자에게도 똑같은 악보가 주어졌습니다. 역시 음이 정확합니다. 박자도 완벽합니다. 거기다 자신의 연주에 생명력까지 불어넣습니다. 청중들은 이 연주자의 연주를 통해 감동을 받습니다. 선인입니다. 의인은 탁월한 연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인은 탁월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인은 아주 옳았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묘한 생명력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의인과 선인의 차이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생명력입니다. 사람들은 의인이 매사에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의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는 않습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 감동을 선사한 선인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까지 고백합니다. 물론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선인을 위해서 죽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외침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라고 이어집니다. 이는 우리가 의인도 선인도 아니었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사를 완벽하게 행하는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매사를 완벽하게 행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까지 선사하는 선인도 아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이었습니다. 가해자였습니다. 표적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습니다. 의는 그림자초자 찾을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철저히 배도했습니다. 낭패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범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철저히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좋아, 난 그 반대로 말할 거야! 이것이 그 계명인가? 난 그것을 깨뜨려 버릴 거야! 하나님은 나에게 탐내지 말라고 하지만, 난 이것을 원하는데! 난 그것을 가지고 싶단 말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고, 반역했고, 공격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미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습니다. 율법의 송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책감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전에는 여러분이 세상의 악한 길을 따르고 하늘 아래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들과 같이 우리 육체의 욕심대로 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래부터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엡2:2a,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었고 불순종하였고 속았으며 온갖 정욕과 쾌락의 종이 되었고 악한 생각과 시기하는 마음으로 서로 미워하며 살았습니다.”(딛3:3)라고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던 자요, 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하는 죄인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구역질나는 피조물이요, 추하고 어리석고 비열하고 야비하고 절망적인 죄인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고, 괴상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역겨운 물건에 불과한 죄인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랬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진노, 심판,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했습니다. 경건치 않았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구원을 탄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내놓을 무엇도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반목할 수밖에 없는 것들뿐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치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어주신)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엡2:4b-5),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엡2:8b-9)라고 외쳤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부터 나왔다고 외쳤습니다. 우리의 공로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고, 우리와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외쳤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거듭난 이후에도 연약합니다. 경건을 유지하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의인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킬만한 선인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으로서의 각종 특징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8:24)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어떤 의미에서라도, 어떤 면에서라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순간 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기초를 둔 크고, 놀랍고, 풍성하고, 기름지고,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확증할 수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변할 수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라고 외치는 이유입니다.
제대로 잘 박힌 못의 튀어나온 끝부분을 인정사정없이 구부려버린 이유입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께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바리새인의 집에 가셔서 식사 자리에 앉으셨습니다.”(눅7:36)라는 말씀에 따르면, 그날 예수께서는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죄인이었던 한 여인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향유가 가득 든 병을 가지고 예수께서 계시다는 집으로 갔습니다. 주님의 뒤쪽으로 갔습니다. 발 곁에 섰습니다. 동시에 감사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습니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여인에게 당신의 발을 맡기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습니다. 자신은 왜 그런 죄인인 여인과 상종해야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못마땅하다는 투로 “만일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지금 자신을 만지는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눅7:39b)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동시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천박한 여인에게 당신을 맡기는 것으로 볼 때, 예수께서 선지자가 아니라는 자신의 생각이 적중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토라를 누구보다 잘 꿰고 있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자칭 가장 거룩하다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무지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신 예수께서는 “어떤 채권자에게 두 사람의 채무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수 없어서 채권자가 모두 빚을 없던 것으로 해 주었다. 그러면 둘 중에 누가 더 채권자를 고맙게 여기겠느냐?”(눅7:41-42)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여인과 바리새인을 빚진 자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날 그 사건에 적용하셨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여인은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주님에게 진 빚을 깨달았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드린다 할지라도 지나칠 수 없다고, 다 갚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눈물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은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주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해 놓고도, 가장 기본적인 접대인 발 씻을 물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무례였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했습니다. 자신은 자칭 가장 거룩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빚짐과 궁핍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외침을 충분히, 정확하게, 확실하게 깨닫고 인식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하게 구해야할 이유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힘과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확신이요,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사도의 위대한 논리를 얼마나 깨달으셨습니까? 정확하게 인식하셨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경건치 못한 사람인지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의인도, 선인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끔찍하고, 역겹고, 혐오할 수밖에 없는 흉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신에게 하나님의 크고, 놀랍고, 풍성하고, 탁월한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부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 사무엘 데이비즈Samuel Davies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위대하고 놀라움의 하나님
주의 모든 길은 무쌍無雙하고
신성한 길
그러나 주의 은혜의 찬란한 영광은
더욱 거룩하고 무쌍하게 비치네
주와 같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누구리오?
그처럼 넘치고 값없는 은혜를 가진 자가 누구오리오?
용서하기에 너무 큰 범죄들
자비를 베풀기에 너무 큰 죄행을
범한 무례한 벌레
이것은 당신의 장엄한 특권
아무도 그 영예 나눌 수 없으리
떨리는 기쁨으로 감격에 젖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죄에 대한 용서
예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용서를 받네
오, 이 이상하고 견줄 데 없는 은혜
이 거룩한 사랑의 이적異蹟
광활한 땅을 감사의 찬양으로 채우시오
위에 있는 모든 천군천사 함께 찬양드리오
주와 같은 용서의 하나님이 누구리오?
그처럼 넘치고 값없는 은혜를 가진 자 누구오리오?
위대하고, 놀랍고, 무쌍無雙하고(유일무이하고), 신성하고, 찬란하고, 거룩하고, 무엇과도 견줄 데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용서하기에 너무나 큰 범죄를 저지른, 자비를 베풀기에는 너무나 큰 죄를 범한 무례한 벌레들에게 주어졌다고 노래했습니다. 당신의 장엄한 특권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영광을 베풀어 주셨다고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거룩한 보혈로 사신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노래했습니다. 떨리는 기쁨으로, 감격에 젖어서 받을 수밖에 없다고, 끝없이 광활한 땅을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다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은혜와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무상으로 받았다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아니 용서라는 단어 자체를 꺼낼 수 없는 죄를 저지른 흉악한 죄인이요 무례한 벌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경건치 않은 죄인에 불과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죄인인, 비열한, 저주받아 마땅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들어가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아무리 어렵고 견디기 힘든 환난과 시험 속에도 “주와 같은 용서의 하나님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처럼 값없이 넘치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 또 누구겠습니까?”라고 외칠 수 있는 복된 삶,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환희와 기쁨과 즐거움과 영광스러움까지 누리는 복된 삶,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