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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로시카 신부님의 사순 제4주일 성경묵상 (2010.3.14.)
사랑의 표지 읽기
루카복음 15장은 신약의 “분실 회수 모음”이라고 자주 일컬어집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 시작하여(1-7절),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8-10절)로 이어지고, 탕자의 비유 (11-32절)로 최고조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탕자이야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모든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드문 보석 중의 하나입니다. 그 비유는 루카의 이야기꾼의 재능을 말해줍니다. 그 재능은 장면을 너무 생생하고 인간관계에 아주 민감하게 “색칠하기” 때문에 각자의 산 체험에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 삶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맹목적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지나치게 관대한 부모의 역할, 죄와 교만 때문에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자비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은 아들의 역할, 그리고 책임감 있고 지나치게 질책하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쇠약함과 죄를 관대와 관용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는 큰아들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위의 각각의 성격이 어느 정도씩 있습니다. 루카의 독자적이고 놀라운 탕자의 비유는 원래 예수님의 고상한 동시대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시는 것에 대하여 분개하였습니다. 화해에 관한 시노드 직후에 발표된 1984년의 사도적 권고 “화해와 회개”에서 교항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께 돌아오는 아들에게 온전한 화해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버지 자비의 재발견을 통해, 그리고 형제자매들 안의 적대와 오해의 극복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크게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세 성격의 묘사
옛날 유대 세계에서 “장자 상속권” (한 가족의 첫 번째 아들)은 장자가 아버지의 상속의 두 몫을 받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과 소유물의 대략 1/3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상속을 요구하는 그 행위는 (12절) 아버지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버지가 “너무 오래 산다,” 그래서 늙은이가 죽기까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은 이방인 나라에 (13절) 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자존감을 가진 유대인 농부는, 정결하지 않다고 여겨진 동물, 돼지를 키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분명 자기 고향에서 찾지 못한 행복과 자극을 다른 나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상상하며 아주 먼 길을 여행했을 것입니다. 결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는 계약 노예로 전락하고, 부정한 동물을 돌보게 되고, 잘 먹지 못하여, 서서이 굶어 죽어갑니다 (17절).
작은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였다”고 (13절) 합니다. 재산은 분명 그리스어 명사인 ousia 의 한 가지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뜻합니다. 젊은이는 무모하게 자신의 재산과 돈을 포기했을 뿐 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제 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17절). 아마도 젊은이가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깨닫고 “제정신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회개자체가 아니더라도 회개의 전조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아버지
“기대하는 아버지”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에서, 이 농장의 늙은 주인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들이 천천이, 어색하게,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며 걸어오는 것(20절)을 알아봅니다. 제멋대로인 아들이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오고 있는 아들에게 만나러 뛰어나가는 행동을 취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행동은 매우 부적절하고 수치의 원인으로 생각되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사랑, 동정심, 그리고 부드러움의 넘침입니다. 그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의 자유와 가족 안에서의 신분의 상징인 가장 좋은 옷, 신발, 반지를 갖다 주도록 명합니다(22절). 이 아버지는, 아들의 매우 모욕적인 행동과 가족에게 끼친 수치를 근거로, 자신이 가진 권한으로 충분히 아들을 거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 온 것에 대해서 마을의 적대감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아들들이 비슷한 행동을 취할까봐 걱정했을 것입니다.
자격 권리 병
큰 아들의 반응(25-29절)은 일종의 정당한 분개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곧 그가 자식으로서의 임무를 다했지만 그것이 사랑이나 아량으로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오히려 그가 이용당했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살이”했고 그것에 대해 적절한 감사의 표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받은 것보다는 그가 빼앗겼다고 느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심각한 자격 권리 병을 앓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주 자세하게 그의 동생의 행동을 나무랍니다. “그가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었다”(30절)고 얘기합니다. 작은 아들의 행위에 대한 소문이 결국 고향과 가족들에게 전해졌을까요? 아니면 큰아들이 단지 동생의 잘못을 상상하고 가장 심한 말로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큰 아들은 마음에서 동생을 “지워버리고” 이제 그를 단지 “아버지의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즉, 그는 아버지의 아들일지 모르지만 더 이상 제 동생은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들이지만 마음으로 아들이 아닐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아들의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자유로웠다고 믿어지는 사람이 실제로는 종처럼 느끼고 있었다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남아있던 사람이 자신은 전혀 아들처럼 느끼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 제3자로 느꼈다고 밝힙니다.
화해하기
이 감동적인 비유는 루카의 특징적인 강조점 2 가지를 밝혀줍니다. 죄인과 사회적 종교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환영과,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회개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 환영에 수반되는 기쁨과 축하입니다. 두 아들의 관대한 아버지는 그의 상속을 탕진한 작은 아들의 귀환을 환영하고, 아버지의 관대함을 항의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충실한 큰 아들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1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되찾은” (32절) 아들을 복권시킨 것이 큰 아들의 충실성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가족으로 복권된 작은 아들은 충실한 삶을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두 아들은 서로와의 화해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큰아들이 결국 동생과 화해하고 그를 환영하나요? 마음으로 용서하고 아버지와 같은 기쁨을 느끼나요? 아니면 최종적으로 동생이 느꼈던 것보다 더 이방인이 된 자신을 발견할까요? 이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어디에 있나요? 그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예수님께서 제시하지 않으신 결론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화입니다. 우리를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고, 우리자신의 삶과 우리들의 시대 안에서 해답을 찾도록 합니다. “제멋대로인 아들”의 이야기 또는 “헤픈 아버지” 또는 “성난 형”의 이야기는 그 안에서 우리자신과 우리의 동기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슬픔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관대한 아버지는 우리의 비열함, 천박함, 자신 없어함, 오만함에 자신의 사랑을 흩뿌립니다.
열린 마당
금년의 사순독서에서 저는 작은 보석과 같은 책, 한스 우르스 본 발타살 저 “사랑만이 믿을 수 있다”(이냐시오 출판사, 2004)를 읽었습니다. 책 마지막 부분에, 다음의 글이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의 표지를 알아차리고, 사랑을 믿으면, 사랑은 그를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열린 마당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환대를 할,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도,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를 기다리며 그곳에 이미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를 위해 있을 수 있고 실제 있는 사랑에 대해 죄인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 곁으로 데리고 와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사랑 없는 사람 안에서 사랑받는 아이를 보셨고, 그를 바라보시고, 이 사랑에 비추어 그에게 존엄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봉사직무
오늘의 제2독서(2 코린토 5,17-21)은 루카의 탕자의 비유를 아름답게 요약합니다. 바오로는 여러 범주로 하느님의 화해역사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역사와 자신의 사목을 두루 살핍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 그리고 이웃과 화해하고, 우리가 또 그리스도의 화해를 사회에 촉진시키면, 우리가 평화의 왕자의 대사라고 자임하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과 화해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드님을 솔선해서 보내신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망가진 세상, 상처받은 가족, 그리고 자주 분열되는 교회에 조화를 재건하는 솔선을 기대하십니다.
사순제4주일에 많은 용서를 받은 우리가 성체성사 안에서 거행하는 용서의 축제에 우리와 함께하는 모든 죄인들을 형제자매로 껴안게 하소서. 아버지께 향한 우리들의 사순 여정에 감사와 기쁨의 노래가 우리 마음의 사막과 우리의 복수, 천박, 그리고 경직된 마음의 사막에 울려 퍼지게 하소서. 하느님,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랑의 표지를 읽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화해와 평화의 길로 보내는 세상에 대해 우리가 기쁜 마음을 갖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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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로시카 신부님은 카나다 소금과 빛 가톨릭 미디어 재단과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CEO이며, 사회소통 로마성성 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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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제1독서: 여호수아기 5,9ㄱㄴ.10-12
그 무렵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제2독서: 코린토 2서 5,17-21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 루카복음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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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cal Reflection for 4th Sunday of Lent C by Father Thomas Rosica, CSB
Learning to Read Signs of Love
Chapter 15 of Luke's Gospel is often referred to as the "Lost and Found Collection" of the New Testament since it begins with the parable of lost sheep (vv 1-7), followed by the parable of lost coin (vv 8-10), reaching its crescendo in the parable of prodigal son (vv 11-32). The Prodigal Son story in today's Gospel is one of those rare gems that captivates the mind of every listener, then and now. The parable epitomizes Luke's gifts as a storyteller -- his ability to "paint" a scene with such vividness and sensitivity to human relationships that it can echo with each person's lived experience. At different times in our lives, most of us have played each of these roles: that of the doting, loving, apparently overindulgent parent; that of the younger son who experiences being brought low by sinfulness and pride, and desperately in need of mercy; the older son, who is responsible and above reproach, and who is frustrated by the generosity and leniency with which the weaknesses and sins of others are dealt with.
There is some of each of these characters in each one of us. Luke's unique and marvellous parable of the Prodigal Son was originally aimed at Jesus' respectable contemporaries who resented his fraternizing with tax collectors and other disreputable types. In his 1984 apostolic exhortation "Reconciliatio et Pænitentia" that followed the Synod on Reconciliation, Pope John Paul II wrote: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is above all the story of the inexpressible love of a Father-God -- who offers to his son when he comes back to him the gift of full reconciliation. [...] It therefore reminds us of the need for a profound transformation of hearts through the rediscovery of the Father's mercy and through victory over misunderstanding and over hostility among brothers and sisters."
Portraits of 3 characters
In the ancient Jewish world, the right of "primogeniture" (being the first-born male in a family) meant that the eldest son received a double share of his father's inheritance. Thus, the younger son would have received roughly one-third of the value of his father's property and possessions. But the very fact of asking for his inheritance (v 12) would have been a grave insult to his father, suggesting that his father was "taking too long to die," and that he had become impatient with waiting for the old man's death. The younger son obviously goes off to a pagan (Gentile) nation (v 13), since no self-respecting Jewish farmer would raise pigs -- an animal that was considered non-kosher. The son apparently traveled a long way, imagining that he would find in some other country the happiness and excitement he had apparently not found in his own land. The result was just the opposite: he is reduced to indentured slavery, is forced to tend unclean animals, and being ill-fed, he is slowly starving to death (v 17).
We are told that younger boy "squandered his property" (v 13). Once again, this is certainly a possible meaning of the Greek noun (ousia), but it also has the sense of "his very being, himself." Not only did the young man recklessly surrender his money and property but he surrendered himself as well: he "lost" who and what he was. We read that the younger son "came to himself" (v 17). Perhaps it is sufficient to say that the young man came to realize how foolish he had been and so "came to his senses." That is a prelude to repentance, even if not repentance itself.
The prodigal father
In one of the most poignant scenes of "an expectant father," the old owner of this plantation sees the son, even while the boy is a long way off, walking home slowly, awkwardly and ashamed of his state (v 20). It is the father who takes the first step, who chooses to go out and meet his wayward son en route, instead of waiting for him to come crawling home. The father's actions would have been considered highly inappropriate and a source of shame. The father's reaction is an overflowing of love, compassion and tenderness: he "falls on his son's neck," hugging and kissing him, and demands that the symbols of his freedom and of his status within the family -- the best robe, sandals, ring -- be restored to him, as if nothing had happened (v 22). This father would have been well within his rights to turn the son away, on the basis of his deeply insulting actions, and the shame he had caused his family. We can only imagine that village hostility would have been substantial upon the younger son's return. Village families would be afraid their own younger sons would get similar ideas!
The disease of entitlement
The reaction of the elder son (vv 25-29) is one of righteous indignation: His words quickly make it clear that, although he has done his filial duty, it has apparently not been out of any sense of love or generosity; instead, he feels that he has been imposed upon, has "slaved away" for years for his father without appropriate gestures of gratitude. He focuses, not on what he has been given, but on what he feels he has been deprived of. He suffers from the terrible disease of entitlement! The elder son is very concrete in condemning his brother's behavior, speaking of how he has "devoured your money with prostitutes" (v 30). Did rumors about the younger boy's actions eventually filter back to his hometown and family? Or is the elder son simply imagining the worst about his brother, and describing him in the harshest possible terms?
The elder son has "written off" his sibling in his heart, and now refers to him only as "this son of yours" -- he may be your son, but he is no longer my brother! It is, Jesus says, possible to seem to be a son without really being a son in one's heart, and that is what the elder brother reveals by his reaction. Isn't it interesting that the one who was believed to be free, reveals himself to have felt like a slave, and he who remained in the father's house reveals himself to have felt like an alien and an outsider, not to have felt like a son at all?
Working out reconciliation
This deeply moving parable highlights two of Luke's characteristic emphases: God's welcome of sinners and those considered socially and religiously unacceptable, and the rejoicing and celebration that are meant to accompany that welcome, that are meant to respond to the repentance that God invites. The generous father of both sons welcomes back the youth who squandered his inheritance but does not repudiate the older son who protests the father's prodigality yet remains faithful to him. "Son, you are always with me, and all that is mine is yours" (v 31). The restoration of the son who "was dead and has come to life." who "was lost and has been found" (v 32), does not invalidate the fidelity of the older son. The younger son, restored to the father's household, must make a new beginning in the life of fidelity. Reconciled to God, both sons must work out together their reconciliation with each other.
Does the elder son finally make peace with his brother and welcome him back? Does he find it in his heart to forgive, and to share in the father's rejoicing? Or does he, in the final accounting, find himself even more alienated than his younger brother had been? Where is the mother in this story? What was her response? We are left hoping for a conclusion that Jesus never provides. That's what the parables are all about: They invite us to enter into the story and to find the answers in our own lives and times. The parable of "The Wayward Son" or "The Prodigal Father" or the "Indignant Elder Brother" can cause much grief for us, as we see ourselves and our motives exposed for what they really are. The prodigal Father squanders his own love on our pettiness, our meanness, our diffidence, and our arrogance.
Open fields
For my Lenten reading this year, I came across the little gem of a book "Love Alone is Credible" by Hans Urs Von Balthasar (Ignatius Press, 2004). Toward the end of the book, these words jumped off the page: "Once a person learns to read the signs of love and thus to believe it, loves leads him into the open field wherein he himself can love. "If the prodigal son had not believed that the father's love was already there waiting for him, he would not have been able to make the journey home -- even if his father's love welcomes him in a way he never would have dreamed of. 'The decisive thing is that the sinner has heard of a love that could be, and really is, there for him; he is not the one who has to bring himself into line with God; God has always already seen in him the loveless sinner, a beloved child and has looked upon him and conferred dignity upon him in light of this love" (p. 103).
Ministry entrusted to us
Today's second reading from St. Paul (2 Corinthians 5:17-21) summarizes beautifully Luke's masterful Gospel parable of the Prodigal Son. Paul attempts to explain the meaning of God's reconciling action by a variety of different categories; his attention keeps moving rapidly back and forth from God's act to his own ministry as well. If we are reconciled with God, with ourselves and with others, and if we in turn foster Christ's reconciliation in society, we can make a convincing claim to be ambassadors of the Prince of Peace. Just as God took the initiative in sending his son to reconcile the world, so he expects us to take the initiative to restore harmony to a broken world, to wounded families, and an often-divided Church.
On this fourth Sunday of Lent, may we, who have been forgiven so much, embrace as brothers and sisters every sinner who joins us in the feast of forgiveness we celebrate in the Eucharistic liturgy. Along our Lenten journey on the road to the Father, may a song of gratitude and joy burst forth in the wilderness of our hearts and the deserts of our vengeance, meanness and hardness of hearts. May God teach us to read the signs of love in the world today, and gladden our hearts at the Word that sends us on our way in reconciliation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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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lian Father Thomas Rosica, chief executive officer of the Salt and Light Catholic Media Foundation and Television Network in Canada, is a consultor to the Pontifical Council for Social Commun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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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th Sunday of Lent (March 14, 2010)
Reading I: Jos 5:9a, 10-12
The LORD said to Joshua, “Today I have removed the reproach of Egypt from you.” While the Israelites were encamped at Gilgal on the plains of Jericho, they celebrated the Passover on the evening of the fourteenth of the month. On the day after the Passover, they ate of the produce of the land in the form of unleavened cakes and parched grain. On that same day after the Passover, on which they ate of the produce of the land, the manna ceased. No longer was there manna for the Israelites, who that year ate of the yield of the land of Canaan.
Reading II: 2 Cor 5:17-21
Brothers and sisters: Whoever is in Christ is a new creation: the old things have passed away; behold, new things have come. And all this is from God, who has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iven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namely, God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in Christ, not counting their trespasses against them and entrusting to us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 So we are ambassadors for Christ, as if God were appealing through us. We implore you on behalf of Christ, be reconciled to God. For our sake he made him to be sin who did not know sin, so that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
Gospel: Lk 15:1-3, 11-32
Tax collectors and sinners were all drawing near to listen to Jesus, but the Pharisees and scribes began to complain, saying, “This man welcomes sinners and eats with them.” So to them Jesus addressed this parable: “A man had two sons, and the younger son said to his father, ‘Father give me the share of your estate that should come to me.’ So the father divided the property between them. After a few days, the younger son collected all his belongings and set off to a distant country where he squandered his inheritance on a life of dissipation. When he had freely spent everything, a severe famine struck that country, and he found himself in dire need. So he hired himself out to one of the local citizens who sent him to his farm to tend the swine. And he longed to eat his fill of the pods on which the swine fed, but nobody gave him any. Coming to his senses he thought, ‘How many of my father’s hired workers have more than enough food to eat, but here am I, dying from hunger. I shall get up and go to my father and I shall say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no longer deserve to be called your son; treat me as you would treat one of your hired workers.”’ So he got up and went back to his father.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caught sight of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He ran to his son, embraced him and kissed him. His son said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no longer deserve to be called your son.’ But his father ordered his servants, ‘Quickly bring the finest robe and put it on him;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Take the fattened calf and slaughter it. Then let us celebrate with a feast, because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has come to life again; he was lost, and has been found.’ Then the celebration began. Now the older son had been out in the field and, on his way back, as he neared the house, he heard the sound of music and dancing. He called one of the servants and asked what this might mean. The servant said to him, ‘Your brother has returned and your father has slaughtered the fattened calf because he has him back safe and sound.’ He became angry, and when he refused to enter the house, his father came out and pleaded with him. He said to his father in reply, ‘Look, all these years I served you and not once did I disobey your orders; yet you never gave me even a young goat to feast on with my friends. But when your son returns who swallowed up your property with prostitutes, for him you slaughter the fattened calf.’ He said to him, ‘My son, you are here with me always; everything I have is yours. But now we must celebrate and rejoice, because your brother was dead and has come to life again; he was lost and has been f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