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으로서는 참 고약한 상황에 직면했다.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계획에 찬물을 끼얹은 탓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에 대한 삼성의 지배력이 13.99%에 불과하다는 약점을 파고들었다. 삼성은 제일모직-삼성물산의 합병 배경으로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면에는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 유지 목적도 있다. 삼성전자에 대한 삼성 오너 일가와 계열사 등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은 17.65%에 불과하다. 현재는 계열사 지분이 순환출자 구조로 얽혀있어 경영권을 지키는 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새로운 공정거래법에 따라 순환출자를 완화해야 하고, 지분법 회계처리 기준인 삼성전자 지분 20%를 확보하려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불가피했다. 삼성은 이를 위해 지난 2년여 동안 제일모직을 지주회사로 만드는 계열사 재편 작업을 벌여왔고, 삼성물산과 합병해 마무리 수순에 들어서려 했다. 엘리엇은 이런 계획을 읽고 삼성물산 지분을 야금야금 사들이며 빈틈을 노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합병하지 못하면 삼성전자에 지배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제일모직은 삼성전자 지분이 없지만, 삼성물산은 특수관계인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4.06%의 지분을 갖고 있다. 특히 삼성물산은 삼성SDS의 2대 주주다. 실현 가능성이 있는 삼성전자-삼성SDS 합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 엘리엇의 의도대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무산되면 제일모직은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이는 데 적어도 8조원은 써야 한다. 제일모직의 지난해 영업이익이 2134억원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엘리엇은 치밀하게 접근했다. 지난 2~3월께 삼성물산의 지분 4.95%만을 사들여 주식대량보유공시제도인 이른바 ‘5% 룰’을 피한 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발표를 기다렸다. 이후 5월 26일 삼성이 합병을 발표하자 2.17%를 더 사들이며 단일 주주로는 두 번째로 많은 7.12%의 지분을 확보했다. 그리곤 곧바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안은 삼성물산의 가치를 과소평가 했을 뿐 아니라 합병조건 또한 공정하지 않다”고 합병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면서 삼성물산에 현물배당이 가능하도록 정관 변경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하는 등 ‘경영참여’를 공식화했다. 지난 6월 5일에는 국민연금과 삼성 계열사 등에 이번 합병이 주주에게 불합리한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어 반대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등 여론 몰이에도 나섰다. 이어 9일엔 주주총회 결의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는 등 법적 조치도 했다.
삼성의 약한 고리 파고든 엘리엇
엘리엇의 과거 행적을 보면 앞으로 진행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다. 합병을 앞둔 기업의 지분을 매입해 ‘합병 반대 천명→소액주주 운동→행정 소송→기업가치 부풀리기→차익실현’으로 이어지는 헤지펀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여러 헤지펀드에서도 엘리엇은 톱클래스로 꼽힌다. 엘리엇은 부실하거나 합병을 앞둔 기업의 지분을 상당량 사들이거나 기업 자체를 인수,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여 되파는 ‘바이아웃(buy-out)’ 투자전략을 주로 써왔다. 이 과정에서 온갖 소송을 불사한다든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잡음을 일으켜 주가를 띄우는 전략도 많이 보여줬다. 130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시작한 엘리엇이 연평균 14.6%의 수익률을 올리며 260억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게 된 비결도 여기에 있다. 엘리엇이 시세차익을 노리고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엘리엇이 아르헨티나 정부를 디폴트에 빠뜨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 2001년 1000억 달러 규모의 채무불이행 선언을 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채권단에 71~75%의 채무를 탕감해 달라는 내용의 채무조정을 요청했지만, 엘리엇은 이를 거절했다. 엘리엇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빚을 갚지 않는다며 2012년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엘리엇은 액면가 13억3000만 달러의 국채를 4800만 달러라는 헐값에 사들였으면서, 소송에서는 액면가 전액을 상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 법원은 지난 2014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16억 달러를 상환해야 한다며 엘리엇의 손을 들어줬다. 이 문제로 아르헨티나 정부는 디폴트에 빠졌다. 주가와 채권값이 폭락하고 국가위험지수는 15% 이상 오르는 등 큰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도 판결 바로 다음날 아르헨티나의 신용등급을 ‘CCC+’에서 ‘CCC-’로 2단계 강등시키고 신용등급 전망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엘리엇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전용기까지 압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제 사회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전국 생중계 방송에서 엘리엇을 ‘날강도’와 ‘부이트레(독수리)’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엘리엇은 날강도”
엘리엇은 지난 2011년에는 미국 듀폰이 유럽 비료 업체 다니스코를 인수하려 할 때도 적극적인 의견 개진으로 인수 가격을 끌어올렸다. 당시 다니스코의 주주였던 엘리엇은 이사회가 결정한 매각 가격이 지나치게 낮다며, 지분율을 10% 이상으로 끌어올린 뒤 매각가 인상을 요구했다. 2005년에는 미국 유통업체 샵코의 매각에 반대해 자신들의 샵코 지분 가격을 주당 24달러에서 29달러로 올려서 받아내기도 했다. 지난 2002년 삼성전자와도 부딪혔다. 당시 삼성전자가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없도록 정관 개정안을 상정해 주주총회에서 통과됐는데, 엘리엇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해 최종 승소했다.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지분을 확보한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 가운데, 분쟁은 장기전으로 흐를 조짐이다. 시장에서는 애당초 엘리엇이 삼성물산 주가를 단기간에 끌어올린 후 차익을 실현하고 돌아갈 것으로 봤다. 그러나 법원에 주주총회 결의 금지 가처분 소송을 내며 합병 결의에 제동을 건 것은 다소 의외의 행동이라는 평가다. 이미 주주명부 폐쇄일도 지났다. 엘리엇으로서는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경영 참여 목적으로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투자자는 자본시장법상 냉각 규정에 따라 주주명부 폐쇄일까지 지분을 추가로 확보할 수 없다. 엘리엇이 단순히 단기 차익만을 노렸다면 이전에 더 많은 지분을 확보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엘리엇이 해외에서의 소송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거나 임시 주총 표 대결에서 패한다고 해도, 아르헨티나 경우처럼 해외에서 소송,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 있어서다. 엘리엇은 이런식의 장기 소송에 익숙하다. 지배구조 재편을 마무리해야 하는 삼성으로서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장기 소송전에 능한 엘리엇
삼성과 엘리엇의 소송 무대가 국내에 국한된다면 삼성의 승산이 높은 편이다. 엘리엇은 현재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비율(1대0.35)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런데 삼성은 국내법에 따라 주가로 이 비율을 산정했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는 한 합병 결의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상황이 녹록하지는 않다. 엘리엇이 외국인 기관투자가와 소액주주 등을 규합해 1조 5000억원 이상의 주식매수청구권을 청구하거나 3분의 1 이상의 합병 반대표를 모을 수 있다. 엘리엇은 네덜란드 연기금을 우군으로 확보하는 등 26.5%의 지분을 가진 기타 외국인 투자자들을 상당수 포섭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은 외국인의 절반만 엘리엇에 동조해도 반대표 지분이 삼성물산의 우호 지분을 넘게 된다. 이에 따라 삼성물산도 자사주 899만557주 전량을 백기사인 KCC에 매각하는 등 ‘집토끼’ 잡기에 분주하다.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KCC에 매각하자 엘리엇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삼성물산과 이사진 및 관계자들의 우호지분 확보를 위한 불법적인 시도”라며 법적 대응을 선언하는 등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법무법인 폴라리스 김동현 변호사는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KCC에 매각함으로써 효력이 없던 주권의 의결권이 살아났다”며 “엘리엇이 단순히 자산가치만을 기준으로 부당함을 주장한다면 패소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삼성은 아울러 외국인 투자자의 의결권 자문을 해주는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와 물밑접촉을 벌이는 한편, 최치훈 대표이사와 김신 상사부문 사장이 직접 국민연금을 포함한 국내 주요 기관투자가, 외국인 주주들을 면담하며 설득작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합병 결의가 순조롭게 이뤄져도 그게 끝이 아닐 수 있다. 엘리엇이 국제 소송 카드를 검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물산의 자산은 29조5000억원으로 제일모직(9조5000억원)의 3배 수준이다. 외국에선 합병비율을 정할 때 주가는 물론 자산가치도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회사 측이 적은 비용으로 자회사를 통합하기 위해 주가를 조종할 여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국내법에 문제가 있다며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엘리엇이 애초부터 국제 소송을 준비하고 삼성물산을 공격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이와 관련해 엘리엇이 최근에 벌이고 있는 소송을 참고할 만하다. 엘리엇은 지난 2014년 동아시아은행의 지분을 확보했는데, 경영권에 위협을 느낀 홍콩 재벌 데이빗 리가 동아시아은행 지분을 미쓰이스미토모금융그룹에 매각하자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주가치를 희석시켰다’는 이유로 소송에 들어갔다. 김상조 경제 개혁연대 소장은 “엘리엇은 소송에서의 승소보다는 잡음을 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합병에서 삼성물산의 주가가 낮게 책정됐다는 측면에서 엘리엇이 불공정거래 의혹에 대한 조사를 요청하거나 주식예탁증서(GDR)가 상장된 영국 런던 법원에서 합병 비율의 불공정성과 산정방식의 문제점을 다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일모직은 6월 11일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합병 정정 신고서에서 영국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삼성물산의 GDR을 자진 상장 폐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삼성물산 측은 엘리엇과의 경영권 분쟁과는 무관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해외 투자자의 영국 등 해외 법원 소송에 영향을 주기 위한 조치라는 건 사실과 다르다”며 “5월 26일 이사회의 합병 의결 이후에 상장폐지가 되더라도 해외에서 소송 진행 여부에 대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해외 로펌의 자문 결과”라고 설명했다.
지배구조 취약했던 SK도 호되게 당해
삼성이 이처럼 골치 아픈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삼성은 오너 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에버랜드를 비롯한 핵심 계열사들을 제일모직에 잇따라 흡수시켰고, 조직개편 작업이 시작되면서 7만원이 넘던 삼성물산 주가도 5만원대로 떨어졌다. 특히 삼성물산 주가는 이상할 정도로 1년 동안이나 박스권에서 머물렀다. 기업의 가치만 놓고 보면 삼성물산의 주가는 10만원 이상이라는 것이 증권가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에 비해 제일모직 주가는 그룹 지배구조 개편 수혜주로 인식돼 고평가 된 면이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삼성물산은 제일모직 보다 연 매출 5배, 영업이익 3배, 자산총계 3배, 자본총계 2.5배나 되는 큰 회사다. 그럼에도 시가총액은 삼성물산 10조6000억원, 제일모직은 24조6000억원대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엘리엇은 이런 점을 들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이 1대 0.35인 점은 주주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삼성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주주가치를 훼손했다는 논리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구조다. 엘리엇이 경영참여 의지를 밝힌 이후 소액주주들도 엘리엇의 손을 들어주며 67만4619주의 의결권을 위임했다. 이는 삼성물산 전체 발행 주식(1억5621만7764주)의 0.43%에 지나지 않지만, 삼성이 명분싸움에서 엘리엇을 제압하기 어려운 요인이다. 국내 지배구조 자문기관인 서스틴 베스트도 지난 6월 9일 자산운용사 8곳과 자문사 등 기관투자가들에게 합병 반대 권고 의견서를 내기도 했다.
국내 대기업이 비슷한 형태로 외국계 투자자들에게 당한 사례는 이미 여러 차례 있다. 삼성물산은 11년 전 영국 연기금 펀드인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헤르메스는 삼성물산의 지분을 5.0%(777만2000주)까지 확보한 뒤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3.4%)이 무수익 자산이라며 매각을 요청하는가 하면 삼성카드 증자 불참, 삼성물산 우선주 소각 매입 등을 요구했다. 지난 2003년의 ‘소버린 사태’도 마찬가지다. 소버린자산운용은 당시 SK의 주식 14.99%를 매입해 2대 주주에 오른 뒤 계열사 청산, 경영진 교체,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했다. 당시 SK는 백기사를 물색하는 등 1조원 안팎의 자금을 쏟아 부어 경영권을 어렵게 지켜냈다. 소버린은 이 과정에서 배당수익을 포함해 총 8000억원 이상의 시세차익을 얻었다. 2006년에는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이 KT&G를 공격했다. 당시 아이칸은 스틸파트너스와 연합해 KT&G 주식 6.59%를 매입한 뒤 이사회에서 자회사 매각을 요구하는 등 경영 개입에 나섰다. KT&G는 국민연금의 도움을 받아 어렵서리 경영권을 지켰지만, 아이칸은 1500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리고 한국을 떠났다. 정용건 연금행동 집행위원장은 “삼성은 상속재산의 66%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상속세법을 피하기 위해 계열사 재편에 나섰으나, 오히려 헤지펀드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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