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원문 및 사진 출전: 페이스북 김형민님
별 같고 구슬 같았던 선배를 기리며
.
과거를 더듬다 보면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한글이 없었다면, 즉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싶고, 뭐 하나 해 준 것 없는 나라 찾겠다고 자기와 자기 가족의 일생을 갈아넣었던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내가 무슨 말을 쓰고 있을지 모르겠고, 6.25 때 목숨 걸고 대한민국 지킨 이들 덕에 김정은 대장 동지 만세 부르며 그 초상화 앞에서 질질 짜는 코미디의 주인공을 면하지 않았겠는가.
.
아울러 6월항쟁 이후 대학에 들어가 거의 무제한으로 자유로운 캠퍼스를 누린 88학번으로서 87년 이전, 유신과 전두환의 맹렬한 독수(毒手)에 맞서서 필사적으로, 정말로 눈물겹게 싸웠던 선배들에게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
그 과거가 아름답기만 했겠으며, 그들의 오늘에 어찌 비판의 여지가 없겠는가. 하지만 기사 하나 잘못 썼다고 신문기자들이 정보기관에 붙들려가 초주검이 되고, 외무부 고급 관료들조차 선글라스 낀 국가 깡패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했던 시대, 대학 안에 전경들이 대학생보다 더 눈에 많이 띄던 즈음, 데모하는 학생들을 잡아다가 어디 섬 같은 곳에 가둬두고 순화교육을 시키겠다(이게 학원안정법)는 스산한 계획이 수립되던 즈음, 대한민국 젊음들이 보여 주었던 용기는 불가사의 그 이상이다.
.
오늘 점심 함께 한 81학번 선배는 입학 두 달 후 학생회관에서 누군가 가져다 놓은 유인물을 동아리방마다 뿌리다가 잡혀가 성북경찰서 지하실에 ‘매달렸다.’ 흔히 통닭구이라고 부르는 고문. 영화 <1987>에서 고문 경관 박희순이 자기 동료들에게 당하던 그 고문이다. 그리고는 밤새 두들겨 맞았다.
.
나이 만 열 아홉도 안됐을 나이에 평생 트라우마가 남을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러고도 나와서는 데모를 했다. 그렇게 새파란 학생들을 험하게 두들겨 팬 것은 그만큼 무서운 줄 알라는 협박이었을 테지만, 그렇게 당할 것을 알고도, 자칫하면 인생 망치고 몸 망가질 줄 능히 헤아리고도 그들은 경찰 그득한 캠퍼스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고, 그 몇 분 시위를 견디기 위해 밧줄에 매달렸다.
.
1983년 11월 11일 레이건 대통령 방한 전날이었고 써클연합제가 종료되는 날이었다. 오후 1시 반경, 고려대 민주광장에 첫눈처럼 유인물이 휘날렸다. ‘학원민주화투쟁선언문’ 학생들이 뛰쳐나왔고 전경들도 달려들었다.
.
함성과 구호가 난무하는 가운데 쩌렁쩌렁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신방과 81학번 안성주였다. 민주광장을 굽어보는 홍보관 건물 맨 위층에서 그녀는 유인물을 내던지며 카랑카랑한 구호로 허공을 갈랐다. 그 모습이 사진에 찍혀 역사에 남는다. 손톱보다 작은 얼굴이지만 그 얼굴에 기세가 보인다. 결기가 묻어난다. 각오가 빛난다.
당시 신문 구석에 (이것도 기자의 용기가 필요했겠지만) 단신으로 난 기사에 따르면 안성주는 무려 “학생회관 교양관 홍보관 등 세 곳에서 2시간 동안, 1천여명의 학생을 상대로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구속된다.
.
상상해 본다. 많아 봐야 스물 셋의 젊은이. 그 새파란 청춘이 일생을 던지듯 유인물을 뿌리며 스크럼 짠 학생들과 살기 띤 전경들 사이로 뛰어다니며 독재 타도를 부르짖다가 끝내 저 풍성한 머리채 우악스런 손에 잡혀 끌려가는 모습을.
.
성북경찰서가 그녀의 구속을 발표한 건 11월 16일이었다. 11월 11일부터 16일까지 그녀 역시 통닭구이가 돼 매달렸고 두들겨 맞았다. 평생 못 잊을 매였다.
.
그녀의 페이스북 기록을 옮겨 둔다. “전두환 시절에 나는 감옥엘 들어갔고 고문을 받았던 트라우마가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내게 잠재돼 있다. 전두환 시절에 나는 그의 대통령 취임 몇 주년 기념특사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 무슨 아이러니?! 수치스러웠다.
.
전두환 시절에 결혼을 했고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아 이번엔 남편이 감옥에 갔다. 혼인신고도 못한 상황에서 결혼사진을 들고가 사실혼임을 증명하고 간신히 솜 누비옷과 털양말을 넣어주었다.
.
부랴부랴 혼인신고를 하면서 본격적인 옥바라지?! 전두환 시절에 아기를 가졌는데 사과 하나 사먹을 단돈 천원이 없었다. 그래서 방송사 선배들을 찾아가 알바 자리를 부탁했다.
.
그러다 시작한 프리랜서 방송작가. 전두환 시절에 프로그램 말미에 책 소개를 하다가 '민중'이란 단어를 썼다고 녹화가 중단되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바로 그 프로그램 제작에서 짤렸다..... 전두환 시절에 임신한 몸으로 광화문 거리에 엎드려 눈물, 콧물 흘리며 구토를 해댔다.”
.
안성주에게 전두환이란 세 음절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녀는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방송 영역에서도 싸워야 했다. 독립제작사 대표로서 그녀는 갑질투성이의 방송사들의 외주 정책과 드잡이했고 ‘을’의 대변자로 ‘갑’들과 맞장을 떠야 했다. 을은 아니지만 명확한 갑이라 하기에도 면구스러운 처지로 방송가에서 밥을 먹고 있는 처지인 나로서, 안성주는 존경스럽지만 또 동시에 안쓰럽기도 한 방송 선배였다. 언젠가 전화가 걸려 왔었다.
.
“형민아. 이번에 XXX 프로그램의 외주 PD들이 남아공에서 사고나서 죽은 거 알지? 그 PD들 사고 수습하는데 XXX가 너무 미지근해. 좀 도와 줄 수 있겠니? 네 담벼락에 포스팅 좀 해 줬으면 좋겠다.”
.
솔직히 내가 갑으로 모시는 회사였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고, 나는 순순히 그러마고 했다. 그런데 안성주 선배는 이런 말을 덧붙여 왔다. “혹시 힘든 건 아니지? 어려우면 거절해도 돼. 네 입장도 있을 텐데.” 그때 나는 엄청나게 호기를 부렸다.
.
“힘들긴요! 당연히 해야지요. 말도 안돼요! 포스팅 열 번이라도 할게요.”
.
물론 내가 갑으로 모시는 회사였으면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성주 선배는 갑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어도 그 모두와 야무지게 맞설 줄 알았고, 자기 일도 아닌 일에 소매를 걷어부칠 줄 알았고, 남이 당한 아픔에 발 동동 구르기 바쁜 사람이었다.
.
그런 사람이 오늘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고 구슬프다. 전두환 같은 악마는 무려 아흔을 넘기도록 호의호식하고 살다가 제 집 화장실에서 뒈졌는데, 어째서 그에 맞서 싸웠던, 그리고 방송 일 내내 또 다른 벽과 부조리에 그침없이 맞섰던 용감하고 정직한 천사는 이리도 빨리 날개를 거두는 것인가.
.
2년 전의 봄날, 76학번 여자 선배 한 명이 돌아갔다. 그날 안성주 선배는 이런 글을 남겼다. 그 글을 읽다가 문득 눈물짓는다. 이건 본인 스스로에게 보내는 만사 같아서......
.
“모진 세상 살아내느라 애쓰셨소. 이제는 세상에 대한 분노 다 내려놓으시고, 세상 인연 다 끊어내시고, 그저 훨훨 날아오르시구료. 뒤돌아보지 마소. 다음 생은 덜 힘들고 조금 더 편안한 별에 나시구려.
.
참 사는 게 징했어, 그치?! 난 알지. 선배가 사실은 무지 여린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참아내기 어려웠고 그래서 악다구니도 썼다는 걸. 이제 웃으며 떠나는 거지?! 선배! 스스로에게 토닥토닥...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싶어. 그래도 한바탕 열심히, 잘 살다간다고. 참 많이 애쓰셨소. 많이 아쉽지만... 부디 잘 가시구려.”
.
성주 선배는 별 성(星)자와 구슬 주(珠)자를 썼다. 우리 과거 시커먼 하늘 한 켠에서 시퍼렇게 빛 발하던 별 하나, 온 세상을 다 담은 듯 푸르르던 구슬 하나가 우리 곁을 떠났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이 가장 빛났던 순간의 사진, 홍보관 위의 그녀 모습을 보니 울컥 목이 멘다. 잘 가십시오. 평안히 가셔요. 한바탕 열심히 잘 살다 가십니다. 참 많이 애쓰셨습니다. 많이 아쉽지만 부디...... 잘 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