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를 돌아보고 성산포에 이르면 바로 성산일출봉이 시선을 잡는다. 깍아지른 듯한 해상절벽으로 이루어진 화산체이다. 흡사 제주도 동쪽 바다의 수문장같이 위엄있게 떡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다. 제주에 온 사람치고 성산일출봉을 지나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 관광객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발걸음도 빈번하다.
성산일출봉은 자연경관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지질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 2000년 7월 19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7월 2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어 2010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었다. 그 후 국제적인 명성은 더욱 높아져 2011년도 대한민국 자연생태관광 으뜸명소, 2012년 12월 한국관광기네스 12선에도 선정되었다.
↑우도 소원기원 돌탑길에서 본 성산 일출봉. 바다쪽으로는 파도에 침식이 되어 수직 해벽이 형성되었고 해안 쪽으로는 화산재가 퇴적되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성산일출(城山日出)은 영주10경(灜州十景) 중 제 1경으로 예로부터 이름이 높았다. 영주는 제주의 다른 이름이다. 영주(灜州)는 방장산, 봉래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신선이 살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설화에 의하면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중국을 떠난 서불 일행이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제주도라고 한다.
↑거침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불덩이를 토해내며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모습은 황홀하여 정신이 아득하다. 그 장엄한 광경을 보면 영주십경의 제일이 왜 성산일출인지 알 수 있다.
↑ 항공사진으로 본 성산일출봉. 화산이 폭발한 후 바닷물에 의한 침식이 계속되어 바다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상일출봉은 약 5,000년에 마지막 화산폭발이 있었다고 한다. 지하의 마그마가 지표로 솟아오르면서 바닷물이나 지하수를 만나면 강력한 폭발력으로 분출하는데 그 결과 형성된 화산을 수성화산체라고 한다. 일출봉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수성화산체이다. 360여 개의 오름 중 수성화산체는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귀하다. 일출봉은 지표로 분출된 용암이 점성이 강하여 급격한 경사를 이루었다. 멀리서 보면 성채와 같다고 하여 성산(城山)이라 불렀다.
↑ 성산일출봉이 단박에 이렇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조사에 의하연 세 번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점성이 강한 용암은 굳어서 바위를 만들었고 부드러운 화산재는 바위 위를 덮는 흙과 모래가 되었다. 이 화산재가 파도에 깎여 해안으로 밀려들면서 광치기해변과 섭지코지를 잇는 부드러운 해안을 만들었다. 왼쪽 상단의 돌출부가 섭지코지이다. 저 해안선을 따라 가면 서귀포에 닿는다. 해안에서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산 정상이 보이는데 여기가 한라산 백록담이다. 여기서 보면 제주도 전체가 하나의 산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출처-사진쟁이놀이터)
↑맞은편 오조리 포구에서 본 성산일출봉. 성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강인한 느낌을 준다. 과거에는 본섬의 해안인 이곳과 저 성산일출봉은 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오른쪽으로는 광치기해안, 그리고 왼쪽으로는 갑문교로 이어져 있다.
↑아래 주차장에서 본 성산일출봉 모습이다. 가까이서 보면 이외로 부드러운 모습이다. 잔디밭에는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서 해맞이축제나 문화예술 공연을 하여 일출봉을 찾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여 준다.
↑ 이 때는 겨울이었다. 제주는 난대림을 형성하고 있어 겨울에도 푸른 기운이 완전히 빠지지 않는다. 일출봉으로 가까이 갈수록 산세는 많이 수그러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닥에는 제주도에 지천으로 널린 현무암을 보도블럭으로 깔아 놓았다.
↑사람이 많이 다니면서 등산길과 하산길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막상 등정이 시작되면 경사가 쉽지 않다.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20분 정도 오르면 일출봉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중간에 있는 등경돌. 여기도 제주의 설문대할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설문대할망이 바느질을 할 적에 여기에 등불을 올려 놓았다 한다. 분출하는 용암이 그대로 굳어서 된 바윗돌이다. 영실의 오백장군 바위도 이와 같은 과정으로 형성되었다.
↑성산일출봉은 짧은 거리지만 오르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경사가 급하기 때문이다. 오르면서 숨이 가빠지면 한 번씩 뒤를 돌아보라. 광치기해변의 옥빛 바다와 그 뒤로 그림같이 펼쳐지는 오름이 가뿐 숨을 가라앉게 할 것이다. 오른쪽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다랑쉬오름이다. 다랑쉬오름 왼쪽으로 잘 살펴보면 용눈이오름도 볼 수 있다.
↑지미봉과 종달리해안이 보인다. 중앙에 보이는 다리가 갑문교이다. 길게 누은 방파제 끝에 성산포항이 있다.
↑광치기해변의 이름에는 제주 어민들의 슬픔이 담겨 있다. 풍랑을 만나 난파한 배와 조난 당한 어부들의 시신이 해류의 흐름에 따라 이곳으로 몰려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관치기해변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이 변하여 지금은 광치기해변 되었다고 한다. 광치기해변 중간 잘록한 부분을 터진목이라고 불렀으니 과거에는 여기가 이어진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란 빛깔을 띠는 부분은 유채꽃이 피어서 그렇다. 제주도는 1월 말이면 유채가 피고 2월이면 유채가 만발한다.
↑겨울에 본 일출봉 정상의 분화구. 직경 약 600m의 사발모양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여기서 농사도 짓고 얼마 전까지는 염소도 방목을 하였다.
↑여름에 본 일출봉 정상의 분화구(굼부리). 무더운 여름에도 여기에 오르면 더위를 잊는다. 저기 수평선에서 달려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땀을 식혀 준다. 저 아래 분화구에는 내려갈 수 없다. 자세히 보면 농사를 지은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지금도 가끔 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km에 이르는 화구벽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려오는 길은 모두 계단으로 되어 있다.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사실 등하산할 때 계단이 가장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단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 길이 패여 흙과 모래들이 유실되어 자연경관이 훼손되는데 이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언덕에서 본 일출봉의 응회구. 응회구는 마그마가 물을 만나 폭발하면서 생긴 화산 쇄설물이 급한 경사를 만든 것을 말한다.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것은 응회환이라고 한다. 응회구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화산 폭발이 얕은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깊은 곳에서 화산이 폭발하면 보통 경사가 완만한 응회환을 형성한다. 저 암석을 잘 살피면 몇 번 화산 폭발을 거처서 섬이 형성되었는지 알 수 있다. 몰론 응회암을 덮고 있던 가벼운 화산재는 흙과 모래가 되어 파도에 씻겨 나간다. 이 흙과 모래들이 해안으로 밀려가 퇴적되면서 육계가 형성되어 일출봉은 더 이상 외떨어진 바다의 섬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
↑산도 그렇지만 바다의 날씨도 변화가 무쌍하다. 모퉁이를 돌아나와 다시 일출봉을 보니 구름이 정상을 가리고 있다.
↑저 아래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곳이다. 태왁을 들고 저 바다에 나가 직접 해산물을 채취하여 저기서 판다. 그리고 물질하는 모습을 공연하기도 한다.
↑물질공연 시간이 되어 해녀들이 태왁을 들고 바다에 들 준비를 하고 있다. 이 해녀(잠녀)들은 연세가 80이 넘은 분들이 많다고 한다.
↑성산일출봉을 겉만 바라복 아름답다고만 말해서는 안된다. 일출봉 해안에는 이런 진지 동굴들이 만들어져 있다. 일본군이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방어 진지로 똟은 동굴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본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 제주도를 전장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상륙하는 미군들에게 타격을 주어서 미군 스스로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사전에 막으려는 전략이다. 결국 희생되는 것은 제주도민이 될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러나 결7호 작전은 실행 직전에 천황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폐기된다.
(출처-제주자연경관보존협회)
↑진지동굴 내부에서 본 바다. 결7호작전이 폐기된 것은 더 없이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이 닥치리라고는 제주도 사람들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으리라. 해방을 맞이하고 이어 무지막지한 좌우익 투쟁으로 수 만의 양민들이 까닭 모른 채 희생이 되어야 했다.
↑광치기해안에서 본 성산 일출봉. 얼핏 보아도 진지동굴이 대여섯개가 눈에 띈다. 모두 18개의 동굴을 파 놓았다고 한다. 일본군들은 저 진지동굴을 전라도지방의 광부들과 제주도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구축하였다. 저기에 어뢰를 실은 작은 배를 숨겨 놓았다가 미군 함정이 상륙을 시도하면 어뢰와 함께 함정으로 돌격하여 장렬하게 적과 함께 죽는 전술을 구사하려고 하였다. 그렇다고 일본군 수뇌들이 미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전술로 미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미리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포기하게 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고 하니 결국은 제주도를 방패로 하여 일본 본토를 살리겠다는 얕은 속셈으로 동굴을 판 셈이다.
↑광치기해변 터진목 부근에 서 있는 '제주 4·3 성산읍 지역 집단 학살터 표지석'. 이곳에는 2008년 노벨상 수상 작가인 프랑스 르 클레지오의 글이 새겨져 있다. 명예 제주도민인 르 클레지오는 이곳을 여행하고 프랑스에 돌아가 잡지에 '제주기행'이라는 글을 썼다. 그 글 가운데 이곳 광치기해변의 4·3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부분을 이 표지석에 옮겨 놓았다.
↑ 400여 명이 희생된 이 곳에 위령비가 서 있다. 400여 명의 이름들이 모두 이 검은 돌에 하얗게 새겨져 있다.
↑제주 4·3 성산읍 희생자 위령비. 할 말을 잊는다. 근대 시민사회 이후로 국가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시민들은 원칙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 국가만이 강제력을 가진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국민들에 의하여 항상 감시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국민들은 선거를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국가라는 집단에 위임한다. 국가의 권력은 그것을 위임한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의며 국가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민들의 권력 위임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그 권력을 맘대로 행사하는 집단이 있다. 이를 두고 국가권력을 사유화하였다고 하고 그런 권력을 우리는 독재권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재권력이 더구나 부패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면 그 결과는 돌이킬수 없게 된다. 제주 4·3은 한마디로 사유화된 권력이 얼마나 맹목적이며 잔인한 것인가를 보여준 사건이다.
(사진출처-경주사랑)
↑여기는 섭지코지이다. 섭지코지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협자연대(狹子煙臺)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연대는 제주도 해안에 설치한 일종의 군사 경계·통신 시설이다. 유사시에 연기를 피워 해안의 상태를 알린다. 제주도에는 모두 36개의 연대가 해안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협자는 좁은 곳이라는 뜻이다. 이 협자가 나중에 섭지가 되었다고 한다. 제주어에서 손자를 손지로 말하듯이 협자>협지>섭지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올인 하우스, 협자연대, 방두포등대 등이 보인다. 등대 앞 바다에 솟아 있는 바위가 선녀바위이다.
↑협자연대. 그런데 '협자(狹子)'는 좁은 곳이라는 뜻인데 원래부터 협자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제주말로 잎은 섶, 혹은 섭이라 하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협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섭지라는 말은 협자에서 온 말이 아니라 나뭇잎을 닮은 땅이라는 뜻에서 온 말일지 모른다. 실지로 섭지코지를 지도에서 보면 가지 끝에 붙어 있는 나뭇잎 모양과 비슷하다.
(출처-세상 속으로)
↑방두포등대로 오르는 길. 이 조그만 언덕도 엄연히 분화구가 있는 오름이다. 보는 것처럼 흙이 붉어서 붉은오름이다. 방두포는 섭지코지 입구에 있는 '신양' 마을의 옛이름이다. 신양마을이 방두포였다면 이 섭지코지도 원래는 일출봉처럼 본섬과 붙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세상 속으로)
↑ 이 붉은오름에서 보는 성산일출봉이 절경이었는데 지금은 '그라스하우스'라는 건물이 일출봉 아래를 가리고 있어서 경관이 망가졌다. 그라스하우스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물이다. 이 그라스하우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선호가 많이 갈린다.
↑오름을 내려서면 그 앞 바닷가에 서 있는 바위가 눈에 띈다. 이름하여 선녀바위. 여기에는 선녀를 사모한 용왕의 막내 아들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하여 돌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붉은오름을 내려서서 해변길을 따라 내려와야 비로소 일출봉은 그 완전한 자태를 드러낸다.
(출처-사진속 세상이야기)
↑붉은오름에서 협자연대를 바라 본 풍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