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상은 1917년 영주시 가흥동 남산들 제방 공사 중에 발견되어 영주초등학교 앞 도로 중아에 모셔졌다가, 다시 영주도서관 내에 세워진 벼도의 보호각에 보관되어 있다,
불상과 광배(불상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머리나 등 뒤에 표현한 장식)는 같은 돌로 되어 있고,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239cm, 불상높이 188cm이다.
당당한 체구에 코에서 입가로 새겨진 팔자형과 넓고 당당한 어깨, 강직한 얼굴 등에서 남성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왼쪽 겨드랑이에 옷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고 옷자락은 지그재그형을 그리며 팔 위에 걸쳐져 있다.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로 추정된다.
불상을 볼때 이 작품이 진품인지를 어떤지역에 있는 조각가가 누구인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포인트는 귀하고 코 입술인데
코가 입술이 두떱게 조각이 되어 있고 옷주름이 우리나라에는 딱 두곳에만 있는데 광배도 잘 남아져 있고 해서 보물로 지정된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어떤 지역을 가볼때 불심이 높은 지역에 가면 항상 깨지지 않은 불상 형태를 보면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떠나 얼마나 불심이
많았는지를 알수 있다고 한다.
과거에 문화재를 만들었는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데 이 불상을 볼때 정성을 많이 들였을것으로 추정된다고 본다
(주변이 시끄러워서 스님의 말씀을 다 못담았다)
이 불상은 길쭉한 배 모양의 광배(光背)를 등에 지고 당당하게 서 있는 보살상(菩薩像)으로 투박하면서도 박력이 있다. 약 4.5등신에 불과할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비례를 지닌 체구와 높은 부조로 조각된 머리가 강조되어 있다. 세부 조각선(彫刻線)이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다. 보물 지정 명칭은 석조여래이지만,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이라고 판단된다. 보관은 얇은 띠 위로 3개의 꽃송이가 위로 솟은 삼면보관(三面寶冠)이며, 보관과 이마 사이에는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린 모습이 보인다.
양감이 풍부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통통하게 묘사됐으나, 후대에 눈동자를 쪼아내어 본 모습을 잃었다. 굵고 짧은 목에 흐릿하게 삼도(三道)의 흔적이 있으며 넓고 둥근 어깨는 당당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경향은 두툼한 팔, 다리와 손발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 전체적으로 무겁고 둔탁하면서도 박력 있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신체는 양감이 없이 평면적으로 표현되었고, 넓적다리 윗부분을 제외하면 신체의 굴곡이나 입체감이 전혀 없다.
일반적인 보살상은 상반신이 나형(裸形)이고 신체에 목걸이와 영락 장식을 가득 걸치는데에 비해 이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은 불상처럼 대의를 입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왼쪽 겨드랑이로 내려뜨린 띠 매듭 표현은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하여 금동약사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등 신라 중대의 불상조각에서 간혹 나타난다.이는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이 불상의 대의를 입은 보살상으로 불(佛)과 보살의 외적 특징이 혼동된 채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광배에는 불상의 신체를 따라 양각으로 띠를 돌리고 그 위에 작은 꽃무늬를 새겼으며 둘레에는 위로 치솟는 불꽃무늬로 세심하게 장식을 했다. 광배의 형태와 그 위에 새겨진 문양 구성은 신라 하대인 9세기 조각에서 볼 수 있다.
조각수법은 투박하지만, 건장한 체구와 당당한 힘이 있는 보살상의 양식적 특징과 소박하게 장식된 광배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또한 양감에 충실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등과 유사성이 있어서 지역적인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자엄스님의 설명과 문화재청의 설명에서 따옴
석조여래입상 옆에 5층석탑이 있었는데 탑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만 스님의 말씀으로는
탑 형태로 보았을때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