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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은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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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짓는우리들세상┃ 스크랩 `빵의 황제` 김영모
양치기 추천 0 조회 15 09.08.22 13: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빵의 황제' 김영모

  • 입력 : 2009.08.21 16:40

"배 곯던 시절, 곰보빵은 바라만 봐도 행복했었죠"
"제 맘에 안드는 빵은 버립니다… 손님 한 분이라도 저를 불신할까봐"
어릴적 친척집 떠돌며 눈칫밥… 헤어진 엄마 보려고 빵집 취직
그렇게 싸움질 하다가도 빵 만들 때면 온순해져
자신 이름 건 동네빵집을 업계 최고 브랜드로 키워
"최악의 상황을 개선하라" 군대에서 읽은 책 한권이 제 밑바닥 인생을 바꿨죠
지금 제 관심은 두가지… 한국적인 소재 개발과 1000년을 이어갈 빵집

'빵의 황제(皇帝)'는 기자를 놔두고 가게로 향했다. 빵과 과자가 수북이 쌓인 매장을 살핀 뒤 직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더니 다시 고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 뒤에야 그가 "많이 기다렸죠?"라며 다가왔다.

'김영모 과자점' 타워팰리스점은 30평쯤 됐다. 최고 부촌(富村)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그곳을 들락거렸다. 파도가 치는 듯, 모래시계가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타워팰리스 사람들의 전용 빵집'이란 표현이 생각났다.

그의 제품을 향한 인기가 기능 한국인 제과제빵 부문 1호, 대한민국 제과제빵 명장(名匠) 6호라는 그 수식어 때문일까. 그 순간 '눈물과 함께 빵을 먹는 자가 아니고는 생(生)의 맛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남을 즐겁게 해주는 인물에겐 전형(典型)이 있다. 정작 자기 삶이 고달픈 것이다. '김영모 과자점' 주인 김영모(金永模·56)가 그런 케이스다. 그의 빵과 과자는 달다. 그의 삶은 스물아홉 되던 해 독립할 때까지 지독히 썼다.

그래서일까. 명성을 더 이용했다면 그는 지금 훨씬 두툼한 돈방석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미련한 장인은 27년 동안 가게를 4개로 넓혔을 뿐이다. 원조(元祖)라 할 서초동 본점도 12평밖에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빵과 과자가 가득 쌓여 있는 매장에 서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것 같은 풍경이다. 손님들이 워낙 많아 부자(父子)는 잠시 뜸해진 틈을 타 포즈를 취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김영모는 "돈 때문에 빵을 만드는 게 아니라서…"라고 했다. '강북이 우습게 보여 강남에서만 빵을 파느냐'고 살짝 비틀어봤지만 그는 웃기만 했다. "동부이촌동, 은평 뉴타운, 상암동을 살피는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인생 전편(前篇)

김영모는 1953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를 낳자마자 헤어졌다. 어머니는 몇살 위 형을 데리고 재가(再嫁)했다. 아버지는 김영모를 작은아버지에게 맡겼다. 그의 가계(家系)를 파악하려면 집중이 필요하다.

미혼이던 작은아버지는 그를 고모에게 넘겼다. 그는 한 살 위인 사촌형과 함께 고모의 젖을 빨며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고모와 사촌형이 사라졌다. 작은아버지의 학대 때문이었다.

우는 그에게 작은아버지는 날벼락같은 말을 했다. "이 천치 같은 놈아, 그 사람은 네 엄마가 아니야." 그러더니 그를 흠씬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김영모는 다시 작은어머니에게 넘어갔다.

1년 뒤 술에 잔뜩 찌든 작은아버지가 김영모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광주의 한 양옥집 앞이었다.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그를 젊은 여성과 남자 아이 둘, 여자 아이 하나가 쳐다봤다. 아버지와 결혼한 새어머니였다.

부부는 김영모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싸우다 지치면 그들은 김영모에게 화풀이를 했다. 구박덩어리는 아버지에게 맞고 새어머니에게 박대당했다. 하루는 두들겨맞고 마당에 쓰러진 그를 막내 삼촌이 일으켜세웠다.

영모와 함께 집안의 군식구였던 막내 삼촌은 그를 철로(鐵路)에 노끈으로 꽁꽁 묶었다. "사람대접 못 받고 사느니 차라리 함께 죽자!" 달려오는 기차가 보일 무렵 김영모는 외쳤다. "빨리 풀어줘요, 나 못 죽어요!"

찰나에 맛본 생과 사였다. 그때 그는 "반드시 성공해서 이런 수모를 겪지 않겠다"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6개월 뒤 그는 가출했다. 해남에 사는 작은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광주에서 이틀을 걸었다. 그는 작은어머니 집 앞에서 탈진해 쓰러졌다. 작은아버지는 그런 그를 때리고 광에 가뒀다. 겨우 밥 한술 뜬 그에게 작은어머니가 말했다. "외가에 가면 네 엄마를 볼 수 있을 텐데…."

외할아버지 집을 찾았을 때도 김영모는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거지가 왔으니 밥이나 한끼 먹여 보내라." 소년이 말했다. "여기가 제 외갓집이라는데요?" 집안 식구들이 놀라 뛰어나왔다.

1주일을 꼬박 앓은 그를 외가에서는 측은히 여겼다. 태어나 처음 받는 후한 대접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농사일을 맡기려 했다. 1년 뒤 누군가 소년에게 귀띔했다. "내일 네 어머니가 오신다더라."

소년은 어머니가 자기를 데리러 온 줄 알았다. 생모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서야 방으로 찾아온 어머니는 아들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는 다음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재혼을 한 거였답니다. 숨겨둔 아들이 또 있다고 어떻게 말했겠어요. 그때는 원망했지요.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 농사일 배워 뒤를 이으라는 외할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는 어머니가 산다는 경북 왜관으로 갔다. 중학교 2학년 때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대신 이모의 품으로 다시 넘어갔다.

희망의 발견

뒤틀릴 대로 뒤틀릴 때마다 그에게 환영(幻影)이 보였다. 광주에서 바라보던 새하얀 설탕으로 뒤덮인 도넛과 곰보빵이었다. 눈칫밥만 먹었던 그였다. 바라만 봐도 행복했던 빵은 그에게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밥도 못 먹고 학교에 갔습니다. 수업이 끝나도 마땅히 갈 데가 없었지요. 매일 빵집 윈도 앞에서 물끄러미 빵을 바라보는 게 일이었어요. 불쌍해 보였는지 운 좋은 날이면 부스러기를 얻어먹기도 했고요."

―그 빵집 이름이 기억납니까.

"맛나당이라는 집이었어요."

―어렸을 때 먹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 빵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된 건가요.

"당시는 빵집에 취직만 하면 먹여주고 재워줬어요. 빵집이 어머니가 사는 집 맞은 편에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봤습니까.

"막상 일을 하다 보니 창피하더군요. 물 지게 지고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우물까지 다녀와야 하는 것도 그렇고. 6개월 만에 맛나당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어디로 갔나요.

"대구의 금강당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빵 공장에서 밤새 만든 빵을 아침이 되면 자전거들이 가게로 배달했지요."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됐군요.

"빵은 실컷 만들었지만 먹을 수는 없었지요. 하나라도 훔쳐먹다 들키면 코피가 나도록 맞지요. 한번은 크림빵이 너무 먹고 싶어 훔쳐서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눈물이 나더군요."

―외로웠습니까.

"명절(名節) 때가 제일 괴로웠지요. 다들 고향 가는데 혼자 공장에 남았으니까요. 모든 불을 다 끄고 연탄 불씨만 남은 공장에서요."

―뭘로 그 시절을 견뎠습니까.

"제가 대구고 1학년 때 중퇴했어요. 혼자 살다 보니 술·담배를 일찍 배웠습니다. 많이 싸우기도 했고요."

―골격을 보니 주먹이 굉장히 큽니다.

"사람이 악에 받치면 무조건 이기려 합니다. 깡패조직에서 일하자는 권유를 받은 적도 있어요. 친구와 싸우다 소년원에서 3개월을 보낸 적도 있어요. 합의서 써줄 어른이나 가족이 있었으면 그리되진 않았을겁니다."

―소년원에서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왜관에 살던 형이 석 달 후 찾아와 저를 꺼내줬지요. 형은 자기만 어머니를 따라가게 돼 제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참 이상한 게 그렇게 싸움질을 하다가도 빵을 만들 때면 제가 순해지는 거예요."

―한번 나쁜 경험을 하면 더 망가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렇게 살아서는 앞날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소 후 적금도 들고 열심히 일했지요. 1년 만기 적금 50만원을 찾을 때 청천벽력같은 일이 또 생겼습니다."

―뭡니까.

"제빵회사에 일하면 보건소에서 보건증을 받아야 해요. 제가 안 좋은 병에 걸렸다는 겁니다. 공장에서 쫓겨났지요. 50만원을 들고 여인숙에서 살다 보니 다시 술과 담배를 입에 대게 됐어요. 이불에 피를 토한 날, 처음으로 왜관에 사는 어머니께 연락했어요. 살려달라고, 아프다고."

―어머니가 왔습니까.

"산송장 같은 저를 한참 보더니 구미의 영명사라는 절로 데려갔습니다. 주지 스님이 맹인(盲人)이었는데 침술에 능했어요. 석달간 치료받고 살아났지요. 사람이 평생 귀인(貴人)을 세 번 만난다고 하잖아요. 그 스님이 바로 그랬어요."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하다 귀에 화상을 입었다. 얼음을 장식하다가 불구가 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들은 노련한 아버지를 보며 웃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전환

몸을 추스른 김영모는 대구로 돌아왔다. 하지만 '안 좋은 병에 걸린 녀석'이라는 소문이 퍼져 일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그는 운 좋게도 대형 제과점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됐다.

빵 종류만 80가지였던 그곳에서 신바람 나게 일했다. 직원들이 퇴근하면 혼자 남아 버터로 장미꽃을 짜는 연습에 몰두했다. 운명은 즐거워하는 김영모를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군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군대에 가기 싫었습니까.

"3년이면 친구들은 전부 공장장급이 될 텐데 저는 다시 밑바닥부터 기술을 배워야 하잖아요. 권명욱이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가보니 정말 그렇던가요.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책 한권이 제 인생을 바꿨지요. 표지도 없고 군데군데 뜯어져 제목이 뭔지도 알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무슨 내용인데요.

"작가의 이야기였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막노동판을 전전했지요. 삼류 영화 단역배우도 해보고 세일즈맨으로 연명하던 어느 날, 그는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기로 했습니다."

―죽지는 않았겠지요.

"막상 죽으려 하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는 겁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최악은 아니지 않은가'하는. 작가는 그때 얻은 깨달음을 이렇게 정리했어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최악의 경우를 그대로 받아들여라, 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는 겁니다. 알고 보니 카네기 전집 중 한권이었어요. '행복론―걱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그때부터 진짜 행복해졌나요.

"쇠약했던 몸이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해졌고 친구들이 보내준 제빵책으로 공부도 했습니다. 3년 동안 읽은 책이 200권이 넘었습니다."

―제대 후 다시 빵집에 취직했습니까.

"서울에 와서 군에 가기 전에는 서소문에 있던 보물섬과 무교동 보리수 제과점에서 일했어요. 보물섬은 영화배우 하명중씨가 운영하던 곳이었지요. 제대해서는 삼선교 나폴레옹 제과와 보리수 제과점에서 일했습니다."

―기술은 어떻게 배웁니까.

"기술자들이 원래 자기 솜씨를 감추잖아요. 제빵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재료 배합비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아요. 저도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어요. 공장장들 앞에서 그렇게 배운 기술을 발휘하면 때리기도 합니다."

―왜 때립니까.

"1977년쯤인가, 공장장이 불만을 품고 결근했어요. '내가 없는데 일이 되나 보자' 하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제가 눈으로 익힌 배합비대로 빵을 만들었어요. 공장장이 만든 것과 구별이 안 갈 정도였어요. 다음 날 펄펄 뛰는 공장장에게 몇 시간을 맞았습니다. 저는 그런 게 다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 기술은 다 공개합니다."

―말처럼 쉬운 건 아닐 텐데요.

"1980년대 초에 한 제과기술자가 일본에서 마들렌 만드는 법을 배워왔어요. 버터와 계란이 많이 들어가 촉촉한 맛이 나고 입안에서 살살 녹지요. 소문이 나니 다른 제과점들에서도 만들었는데 그 기술자가 노하우를 끝내 감췄어요."

―그 기술자만 떼돈을 벌었나요?

"그는 혼자 돈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다른 곳에서 엉터리 마들렌을 맛본 소비자들이 '소문과 달리 맛이 없네'하고 마들렌 자체를 외면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혼자만 기술을 공개하면 뒷말이 있을 텐데.

"제 가게 바로 옆집에야 기술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연수요청이 오면 노트 뭉치를 들고 가요. 1980년대부터 1년에 서너 번씩 해외연수 다니며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저는 기술공개가 부메랑 효과를 낸다고 봅니다."

―부메랑 효과라뇨.

"기술이 돌고 돌면서 더 풍부해져 제게 돌아오지 않겠어요? 그럼 제겐 다시 자극이 되지요."

성공

보리수 제과점으로 옮길 즈음 김영모에게는 좋은 일이 잇달아 생겼다. 경북 안동 출신 아내를 만났다. 아들도 둘이나 얻었다. 열심히 일해 모은 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내 빵집'을 만들겠다는 꿈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다.

그는 끼니를 밖에서 해결했다. 술, 담배도 끊었다. 아내는 친정에서 보낸 쌀과 된장으로 연명했다. 로션 하나 바르지 않았다. 부부는 1주일에 한 번, 일요일 아침만 같이 먹었다. 반찬은 된장국과 김치뿐이었다.

자린고비 생활의 결실이 1982년 영글었다. 6평 빵집이었다. 자기 이름 붙은 간판이 올라갈 때 부부는 울었다. 그곳에서 김영모는 하루 네 차례 빵을 구웠다. 남들이 하루 한 번 빵을 구울 때였다.

―자기 이름 붙은 간판이 생소하던 때였지요.

"김충복 선생 외에는 없었습니다. 개업 전에 보리수 제과점 박철웅 사장님께 의논했어요. 박 사장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젠가 돈을 벌면 게을러질 거다. 자네 이름을 걸면 부단히 공부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요."

―장사가 잘 됐나요.

"강남에 막 주택가가 형성되던 시기였어요. 제 가게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대형 N제과만 있었습니다. 3개월쯤 지나니 빵이 굽는 즉시 팔렸어요. N제과는 한 달 뒤 문을 닫았지요."

―무풍지대를 달리는 기분이었겠군요.

"가게 낸 지 8개월 만에 맞은편에 제가 3년 동안 일했던 제과점이 들어온 겁니다. 그분들이 자주 전화를 걸어왔어요. 격려 전화인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정보를 염탐한 겁니다.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찾아가 사정이라도 해보지 그랬습니까.

"가게를 팔고 자기들 간판으로 바꿔달라더군요. 그러면 매장을 넓혀주겠다고. 제 이름이 제 분신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건 저를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싸워 이겼습니까.

"6개월 동안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어요. 그 뒤에야 손님들이 돌아왔습니다. 3년 뒤 그 제과점이 없어졌지만 인간적인 배신감으로 상처받았습니다. 그 경험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이 장사하는 곳은 입지가 좋아도 안 갑니다."

―빵을 만들 때 원칙이 있습니까.

"개업 한 달 만에 갓 구운 소보로빵을 모두 버린 적이 있어요. 소보로빵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균일하고 예쁜 소보로가 얹혀져야 하는 데 그렇지 못했어요. 집사람이 울며 말렸지만요. 단팥빵 200개를 버린 적도 있어요. 누군가 팥 앙금의 당도를 잘못 계산했던 거예요."

―크리스마스 대목에 케이크 400상자를 버린 적도 있지요.

"1993년 12월 23일 독일에서 돌아와 보니 케이크에서 냄새가 났어요. 겉에 바르는 버터크림이 냄새를 흡수합니다. 잘 식혀 보관해야 하는데 따뜻한 채로 지하실에 놔둔 겁니다. 그냥 팔아도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손님 한 분이라도 알았다면 저를 얼마나 불신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았나요?

"1996년 서초방송 케이블 TV에서 '서초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이냐'는 조사를 했어요. 구민들이 '김영모 과자점'을 1위로 뽑았습니다. 그때 많은 걸 깨달았어요. 아침식탁에, 아이들 간식 시간에, 가족 모임에 제가 만든 빵이 오릅니다. 저는 빵을 파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건강을 책임지게 되는 거지요."

―신제품도 많이 만듭니까.

"하루에 하나씩은 나온다고 봐야죠. 상품화되는 건 10% 정도지만요. 저는 매장에서 손님들이 '이런 빵이 있었으면…'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놓은 빵 중에 대표작이 뭡니까.

"나이 든 분들 중에 빵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1993년 프랑스 연수 때 16세기 르네상스식 빵을 만드는 가게에 간 적이 있어요. 70대 주인이 척 보기에도 고집불통인데 사정사정해 천연발효법을 배웠지요. 2000년에 천연발효법 레시피를 완성했습니다."

―빵이나 과자를 하루에 몇 종류나 만듭니까.

"종류별로 다 만든다면 600가지는 될 겁니다."

―왜 가게가 강남에만 있습니까.

"저는 직영점만 합니다. 본점을 서초동에서 시작하다 보니 멀리 떨어진 곳은 제품 관리가 어려운 측면이 있지요. 반포에 9월쯤 새 가게가 생깁니다. 강북도 눈여겨보지만 조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빵의 CEO학(學)

김영모 과자점은 실전(實戰) 경영학의 실험장이다. 그의 가게에서는 전화번호만 대면 구매 리스트가 주르르 뜬다. 그 취향을 보고 직원들은 고객들에게 제품을 추천하기도 한다. 20년 전부터 실행해온 것이다.

시식회(試食會)도 많이 한다. 시식회라고 야박하게 잘라 내는 게 아니고 두툼하게 썰어낸다. 배불리 먹다 그냥 가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시식회를 제품에 대한 손님들의 반응을 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창업 희망자들이 제일 선호하는 게 제과점이라더군요.

"후배들이 문의하러 자주 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요. '왜 빵을 만들려고 하느냐'고요. 십중팔구 돈 벌겠다고 하지요. 그럴 때마다 '사업할 준비가 덜 된 것 같다'고 말해줍니다."

―사업으로 돈 버는 게 나쁩니까?

"기능인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게 목표여야 합니다. 돈을 먼저 생각하는 건 망하는 길로 들어서는 겁니다. 때론 손해 보더라도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지요. 저는 아직도 돈 벌겠다고 제품을 만든 적이 없어요."

―저 같으면 돈부터 왕창 벌고 싶을 텐데.

"유통기한이 3개월 남은 재료를 직원이 싼값에 사온 적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전부 반품시켰어요. 그 기간 내에 다 팔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질이 떨어지니까요. 좋은 제품을 만들려면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강남에서 오래 있었으면 차라리 부동산 투자를 하시지.

"부동산 투자는 안 해요. 주식에도 손을 안 댑니다. 적금만 듭니다. 새 점포 낼 때 현금이 3분의 2가 안 되면 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직접 빵을 만듭니까.

"매일 만들지는 않지만 두 가지는 꼭 합니다. 직원 교육과 실수한 부분을 수정해주는 일이지요."

―해외연수는 지금도 다닙니까.

"선진기술을 배워야 고객 트렌드를 알 수 있지요. 요즘에는 소재 개발에 목적을 두고 1년에 2~3번 다닙니다."

―빵의 선진국은 프랑스와 일본이겠지요.

"일본은 초창기에 다녔지만 지금은 안 갑니다. 일본제품을 배워 일본을 이길 수는 없잖아요. 일본에서도 프랑스 다녀온 기술자를 최고로 치고요."

―빵도 소재를 개발하나요.

"요즘 우리밀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저희는 5~6년 전부터 유기농 밀 재배농가와 계약을 했어요. 지금 제 관심은 두 가집니다. 한국적인 소재개발과 10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빵집 만드는 거요."

―어떻게 빵집이 1000년을 이어갑니까.

"유럽이나 일본에는 200~300년 된 제과점이 수두룩해요. 우리만 그런 사례가 없죠."

인터뷰 시작 때부터 제빵사 차림을 한 20대 청년이 김영모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다 방학을 틈타 귀국한 둘째 아들 영훈(28)이다. 그는 자기 뒤를 잇겠다고 나선 아들이 자랑스러운 듯했다.

"저는 아이들 공부 못한다고 꾸지람해본 적은 없어요. 약속 안 지키거나 거짓말할 때, 버릇없이 행동할 때는 가만히 놔두지 않아요. 이 녀석도 공부는 하기 싫고 빵을 만들겠다고 해 시킨 겁니다."

영훈은 아버지보다 한 술 더 떠 중학교만 졸업한 뒤 프랑스 리옹제과전문기술학교를 마쳤다. 지금은 최고 제빵제과 과정을 밟고 있다. 2003년 국제기능올림픽 제과분야에서 동메달을 한국인 최초로 획득했다.

아내(최윤경·51)는 포장과 디스플레이 전문가가 됐다. 큰아들은 영국에서 호텔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작은 과자점에 가족 모두의 땀이 배어있었던 것이다. 그 땀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로수(甘露水)보다 더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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