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 동북방 기슭에 자리잡은 이 절터는 절의 이름이 뜻하듯이 왕실의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한 원찰이었다. 이곳에서는 왕복(王福), 또는 황복(皇福)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편이 발굴되었고 또 이곳에 남아있는 탑과 탑 속에서 나온 유물에 의하여 황복사(皇福寺)임이 분명해졌다.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21세 또는 29세에 출가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경주지역에서 큰스님이 출가 장소가 알려진 곳은 이곳뿐이다. 의상대사가 황복사에 있을 때에는 여러 가지 신이(神異)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황복사에 있을 때에 제자들과 탑돌이를 하였는데 매양 발자국이 허공에 떴으며, 층계를 밟고 오르지 않으므로 그 탑에는 돌층대를 만들지 않았으며, 제자들도 섬돌 위를 석자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이때에 의상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본다면 필연코 괴변으로 여길 터이니 세상에 이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의상전교(義湘傳敎)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의상이 층계를 밟지 않고 올라갔다는 탑은 목탑이라는 사실이다. 석탑은 올라갈 수가 없는 탑이기 때문이다. 즉 의상과 그의 제자들은 목탑에서 예불을 올렸고 현재의 삼층석탑은 성덕왕(聖德王) 때인 706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도 두 가지의 가설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의상이 예불을 올렸던 목탑을 헐고 삼층석탑을 건립하였을 경우와 목탑을 그대로 둔 채 따로 삼층석탑을 세웠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목탑은 없어졌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발굴을 통하여 목탑 유구(遺構)의 출현 여부에 따라 확실한 경위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삼층석탑이 서있는 동쪽이 금당터인데 현재 금당터는 흙에 묻혀 있어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동향한 절터임은 확실하며 금당이 앞에 있고 탑이 금당의 뒷편에 있는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신라시대 가람배치의 기본이었던 일탑삼금당 또는 통일 후의 쌍탑일금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정연하게 배치되던 정형에서는 벗어난 방식이지만 산을 이용해서 지세에 맞게 건축한 양식으로 통일 초기에 유행하던 것이다. 나원리 절터나 고선사터도 이와 같은 정형에서 벗어난 가람배치 방식의 절이었다고 한다.
1943년에 이 삼층석탑은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 때 사리장치가 출토되었다. 특히 금동 사리함 외벽에 사리함기(舍利函記)가 새겨져 있어 이 석탑이 신문왕과 효소왕을 위하여 706년에 세워졌으며 그 내용은 알천과 같이 오래도록 기원한다는 것이다. 또도 이 탑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나왔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702년에 번역된 조탑경(造塔經)으로 706년에 신라에 수입되어 실행되었다는 것은 당의 문화가 신라에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수입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원리 오층석탑에서도 다라니경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나원리 오층석탑도 702년 이후에 조성된 탑임을 알 수 있다.
석탑의 양식적 편년은 감은사탑-고선사탑-나원리탑-황복사탑으로 이어지는데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은 거의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다만 고선사탑에는 감은사탑에서 볼 수 없는 문비(門扉)가 1층 몸돌에 새겨져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1층몸돌 이하는 판석을 조립하여 면석을 만들었고 2층 이상은 통돌로 만들어졌으나 황복사탑은 기단부만 판석을 조립하였고 1층몸돌 이상은 통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소 시대가 떨어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탑에서 모두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순금불상이 출토되어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순금불상은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왕실의 원찰에 봉안되는 불상의 양식은 당대 최고의 유행을 반영하였을 것이므로 통일 후에도 당분간은 시무외여원인의 불상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외함의 글씨체가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서체와 같기 때문에 불국사 석가탑의 무구정광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삼층석탑의 남쪽에는 귀부 2기가 서있는데 귀갑문(龜甲門) 가운데에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 임금왕자는 왕사로 책봉된 스님의 비문에 새기던 글씨이다. 또 그곳에서 비편이 출토되었는데 이 비편의 서체도 무장사터의 아미타조상 사적비와 인각사 일연선사 비문의 서체와 마찬가지로 왕희지체(王羲之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