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베개
송원 홍 재 석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먹는 것 못지않게 잠을 자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좋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을 만든다. 지나간 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잠자는 시간을 소중이 여기고 숙면(熟眠)으로 기분 좋은 상쾌함을 즐겨라. 잠이 보약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네 인생의 3분의1은 잠으로 보낸다고 한다. 날로 일하고 쌓이는 피로와 스트레스는 하루를 넘기지 말라고 했다. 몸의 피로를 풀고 마음을 쉬는 깊은 잠은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의 방도다. 보통사람들은 7시간 이상을 자야만 면역력이 높아짐으로 무병장수하리라. 간밤에 잠을 못잔 찡그린 얼굴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식욕과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들은 아기들의 숙면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한다.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바라는 소원의 말은, 먹고 자고 먹고 자며 초승달이 둥근달이 되듯이 자라달라고 정화수 떠놓고 기원했다. 한편 둥글납작한 두상(頭相)이 되도록 좁쌀베개를 만들어 베어주었다. 좀 더 크면 수수쌀 베개도 해주고 유소년이 되면 메밀베개를 만들어준다. 이는 명석하고 총기 있는 두뇌발달을 위함이 아닐는지……
메밀은 마디풀과의 한해살이 풀이다. 늦여름에 파종하면 초가을에 흰 꽃이 다닥다닥 붙어 핀다. 세모진 열매는 가루로 만들어 메밀묵이나 국수로 겨울철 별미의 재료가 된다. 잎과 줄기는 가축의 사료로 먹이고 메밀껍질은 베개 속에 넣어서 이용한다. 이같이 가정에서 손쉽게 만든 것이 메밀베개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자고나면 머리가 가벼워진다.
나의 추억에는 남달리 어머니의 정성으로 서당공부를 시작한 다섯 살 때부터 매년마다 새로운 메밀베개를 만들어주신 지난날이 생각난다. 고사 성어에도 머리는 차게 하고 발은 따뜻하게 하라는 두한족열(頭寒足熱)은, 숙면의 방도로 건강에 좋은 가르침이다. 그래서 사랑방 목침이 생기지 않았을까.
우리 집 채소밭의 봄에는 삼베길쌈용 삼(大麻)을 심고 수확하고 나면 후작으로 절반은 늦여름에 무와 배추를 씨 들인다. 남은 밭은 매년 메밀을 갈았다. 그래서 겨울이면 메밀묵과 무구덩이에서 꺼낸 배추뿌리 깎아먹던 추억과 함께, 메밀베개 생각이 새롭다. 겨울에는 옥양목홑청이고 여름에는 삼베홑청의 메밀베개는 시원함이 더더욱 좋았다.
아마도 이같이 챙겨주신 어머니 은덕에 내가 오늘날까지 이나마 건강한 것이리라고 여긴다. 현명하신 처사가 아닌가 싶고 그 고마움에 회환이 쌓인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즈음도 베개에 머리만 대면 이내 잠이 들고 숙면한다.
사람들의 잠자는 자세도 다양하지만 잠도 단잠, 선잠, 새우잠, 이승잠, 말뚝잠, 멍석잠, 개잠, 토끼잠 등의 붙어진 이름도 많다. 가장 편안한 큰 대자 단잠은 머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잠을 잘 때 오장육부는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지만 뇌(腦)는 쉬어야만 한단다. 그래야만 선악을 판단하는 뇌와, 옳고 그름의 지성의 뇌, 사랑과 증오를 하는 감성의 뇌, 용기와 지혜를 행하는 행동의 뇌는 우리들의 머리를 명석하게 해준다. 재발 불면으로 사람구실을 못하는 치매증 같은 아무런 생각 없는 무뇌 인간은 되지 말자.
나의 경험에 의하면 많은 종류의 소재로 만든 여러 가지 베개가 있다. 장수베개로 이름난 국화꽃의 국침(菊枕) 보다도 메밀베개가 더 숙면에 좋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시집올 때 아내가 원앙새를 수놓고 둘이 함께 베는 긴 원앙침(鴛鴦枕)의 메밀베개는 장모님의 정성마저 담겨있었다. 부부애의 인정이 더없는 단잠을 자게 하였으리라.
옛말에 고침단명(高枕短命)이라 했으니 베개를 높이 베면 오래 살지 못한단다. 베개의 높이는 자기의 주먹과 손바닥을 포개놓은 높이가 제격이다.
또한 홀로 외로이 긴긴밤을 쓸쓸하게 지내는 남자를 고침한등(孤枕寒燈)이라한다. 반면에 외로운 잠자리의 여인은 고침단금(孤枕單衾)이라 했다. 이것을 보면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단잠이 가장 행복하리라. 부부간의 각방은 절대로 쓰지 말라. 그 어떤 베개보다도 낭군님 팔베개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사랑받는 베개가 최고란다.
나는 지난년말에 개최한 고향 곶감축제에 10여 일간 가서 있을 때 침구를 가지고 갔다가 사정상 두고 왔다. 가기 전에 말벗이 새로 나온 폭삭하고 가벼운 핑크색 융단이불을 사다 주었다. 나는 메밀베개를 사려고 난생 처음으로 벗과 함께 시장 이불가게를 가서 놀랬다. 각양각색의 화려한 금침이 쌓여있고, 내 마음대로 골라 살수가 있었다. 80-9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침구를 만들며 메밀껍질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단잠을 자려면 먼저 치심(治心)을 가져야 한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고요한 마음과 제백사(除百事)로 잡념이 없어야 하리라. 오늘 밥도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 가슴에 안기듯이 포근한 심정으로 잠을 청해야만 메밀베개와 숙면을 마음껏 가지며 단꿈을 이루리라.
2013. 1. 3 메밀베개를 다시 사고서
첫댓글 계사년 새해를 맞아 산수를 넘고 처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문우님들 새해에는 더국 다복하시고 건승 하세요
작년년말에 소설까지 등단하게되여 더욱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설작가로 등단하심을 축하 드립니다. 메밀베게 잘 읽고 옛사람들의 지혜에 경이로움 마저 느껴집니다.
메밀은 체온 이상의 열이 오르지 않아서 베게 속으로는 최고라는 교수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좋은 작품입니다. 우수한 수필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찬 새벽의 별꽃>카페에 소개하겠습니다. 감히 한 말씀 덧붙이겠습니다. 메밀베개와 숙면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작품 안에서 충분히 담아내셨으니 제목은 <메밀베개>로 하심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선택은 작가의 몫이겠지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렇게하지요 더 껄끔할것 같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