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 10. 07
1969.1.31 위장간첩 이수근 체포
개그맨 이수근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TV를 보시다가 무심코 한 마디 하셨다. “이수근 이수근 하니까 난 그 이수근이 생각이 나서.....” ‘그 이수근’이란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탈출한 북한 중앙 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었다.
그에게는 ‘위장간첩’이라는 별칭이 아호처럼 따라붙는다. 위장간첩 이수근.....그의 탈출은 영화와 같았다.
정전 회담을 취재차 판문점에 왔던 그는 한국측 인사에게 귀순 의사를 밝혔고 이에 미군 장교가 갖다 댄 차에 날쌔게 올라탄 후 북한측의 차단봉을 뚫고, 아차 하는 순간 분계선을 넘는다.
인민군은 총을 쏘며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20초 정도에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그의 탈출극을 막을 수 없었다. 북한의 고위 언론인으로서 남한에 ‘귀순’한 것은 특별한 예였기에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정착했다.
그런데 서울에 온지 2년만에 이수근은 가발을 쓰고 수염을 붙이고 가짜 여권으로 서울을 또 한 번 탈출한 것이다. | |
중앙정보부는 그가 김포공항을 빠져나간 것을 까맣게 모르다가 그가 한국을 떠난 것을 알고 발칵 뒤집어진다.
이때부터 한국 영국 미국 정보기관이 총동원되는 일대 첩보전이 펼쳐진다.
이수근의 행적이 알려진 것은 홍콩에서였다. 눈에 불을 켜고 공항을 지키던 한국 영사관 직원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외교관 체면 따위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육탄전을 벌인다. 당연히 홍콩 경찰이 출동했고 쌍방이 다 체포된다.
외교관들은 풀려났지만 이수근을 잡아서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여기서 CIA가 개입한다.
영국 정보기관의 협조를 얻어 캄보디아행을 원하는 이수근을 베트남 경유 비행기에 태운 것이다.
월남에 사단 병력을 파견하고 있던 한국에게 월남은 앞마당과 같았다. 한국의 베트남 주재 공사가 월남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어이 각하. 비행기 00편 좀 공항에 잡아 둬 주시오.”라고 부탁할 정도. 둘은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절친이었다.
베트남 패망 이후 마지막 헬리콥터를 타지 못해 공산 베트남에 남아야 했고 그 뒤 북한까지 가세한 전향 공작을 ‘뿌리쳤다’고 유명한 이대용 공사는 비행기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아 있던 이수근을 체포한다.
이수근은 발길질을 하며 저항했지만 군인 출신의 이대용 공사의 실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1969년 1월 31일. 그렇게 체포된 이수근은 한국으로 압송됐고 몇 달 뒤 매우 신속하게 사형을 당한다.
이근안 경감이 말한 바대로 사람 하나 간첩 만드는 ‘예술’이 횡행하던 시절, 그는 완벽한 자백을 곁들인 간첩이 됐고 그 이름 석 자는 간교하고 비열한 ‘위장간첩’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그 근거는 그럴 수 없을 만큼 엉성했다.
신문과 방송을 장식한 ‘위장간첩’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귀순할 시 이수근을 쫓던 북한군의 총구가 이수근이 탄 차량이 아닌 공중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하 그랬구나. 중앙정보부의 세심한 관찰력에 사람들이 찬탄을 금치 못했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차 안에는 미군 장교도 함께 타고 있었고, 그를 조준사격했다가는 바로 총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판이었다.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총구는 경고 사격 느낌으로 하늘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또 중앙정보부는 귀순 후 뻔질나게 전국을 돌며 행해진 이수근의 강연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그가 김일성에 대한 욕설과 비판을 피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의 배려를 한 꺼풀 벗기고 보면 간단한 반론이 존재한다.
위장간첩이라면 일부러라도 김일성에 대한 더 욕설을 퍼부었을 것 아니냐는 것이다.
총알 피해 가며 귀순한 위장간첩이 고작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를 체포했던 이대용 공사나 조사 책임자 등은 그가 간첩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들에 따르면 북한의 유일 체제에서는 지겨워서 못 살고, 남한조차도 그 자유분방함을 담아내지 못했던 리버럴리스트였다.
귀순 원인이 복잡한 여자문제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 그를 물어 보는 질문에 대해서 이 위장간첩이 꺼낸 대답은 실로 가관이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뇨?” 글쎄 그는 공화국에서 살기는 좀 힘든 로맨티스트가 아니었을까.
서울을 탈출했던 그가 가고 싶어했던 것은 ‘제3국’일 가능성이 컸다.
북한으로 가려면 홍콩에서 내려서 육로로 중공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었는데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북한이 싫어 도망나왔고 남한으로부터도 불신받았던 이 양쪽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이방인은 또한 자신도 양쪽 모두를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수령님 만세에 여념이 없던 북한과 기껏 자수해 왔더니 툭하면 총 들이대고 협박하던 남한을 깡그리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대용 공사가 김형욱 정보부장으로부터 들었다는 얘기는 당시의 자유대한이 어떤 나라였는지, 그리고 왜 이수근이 남한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단면으로 드러내 준다.
“이수근이가(이미) 2중 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李공사가 더 잘 알지 않소. 그렇다고 이수근을 살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몇 사람 밖에 안 되니 절대로 보안에 붙여야 합니다.”
또한 이수근이 한국에서 수집한 정보를 베트남 기술자인 처조카 배경옥 편에 소련을 통하여 북한으로 보내려고 꾀하였다는 간첩으로 몰아 남도 북도 싫어했던 이수근은 196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이수근이 간첩으로 몰린 이 사건은 2008년 12월에 무죄, 즉 이수근을 간첩으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또한 배경옥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