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 외솔
본관 : 경주 최씨
출생 : 1894년 10월 19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현 동동리(現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사망 : 1970년 3월 23일(수 75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부모 : 아버지 최병수(崔炳壽)
어머니 박순화
배우자 : 이장련
자녀 : 최영해
손자 : 최동식
학력 : 일신학교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졸업
교토제국대학 문학부학사[철학]
교토제국대학 대학원 수료[교육학]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144호
상훈 : 건국공로훈장 단장 수훈(1962년 수훈)
종교 : 개신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한글학자. 문학인으로 ,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았다.
최진립장군의 10대손이다. 큰아들 정음사 대표 최영해로 정음사에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고, 최영해 선생 큰아들이 고려대 화학과 최동식 교수이다.
1894년 10월 19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리(現 울산광역시 중구)에서 아버지 최병수(崔炳壽)와 어머니 박순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울산군 병영성 내부에 살았으며,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행촌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46-1번지에서 거주했다.
출생 이후 병영성 내부에서 살면서 일신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뒤 상경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생 시절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향년 39세)을 처음으로 만나 조선어학강습원에서 국어학 및 국어문법 등을 이수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를 거쳐 히로시마(廣島)에 있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한국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했다. 이때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향인 울산으로 귀향한 후 조선인 상권확보의 목적으로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에는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내려가 부산에 있는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하였으며 1922년에 교토(京都)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5년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다.
1926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맡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지면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제정 사업에 같은 주시경(周時經) 학파인 권덕규, 신명균(申明均), 심의린(沈宜麟), 정열모(鄭烈模)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로써 교육을 포함한 일본제국의 공적인 영역에서 주시경 학파의 형태주의 맞춤법이 표준이 되었다.
일본 제국의 이 사업은 주시경 학파가 주장하는 형태주의 맞춤법이 박승빈 학파가 주장하는 표음주의 맞춤법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사업에 참여하여 한글보급에 힘써 왔고, 미국인 학자 겸 선교사인 조지 매큔과 에드윈 라이샤워가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들 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검거, 구금되었고, 1943년 9월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었다. 그 뒤 공판에 회부되어 1945년 1월 16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상고까지 했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참고로 해당 판결문을 보면 창씨명이 쓰키나리 겐바이(月成鉉培)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성씨만 새로 만들었고 이름은 그대로 둔 채 한자 읽는 방식만 바꾼 것이다. 이후 8.15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광복 직후 최초 정치 여론조사에서 7위를 했다. 울산 출신이 이관술과 최현배 두 명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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