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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조선국 가선대부 경상도 관찰사 허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許公神道碑銘 幷序)
내가 해국(海國)에서 나와 돌아와 보니 동년배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우리 허공(許公)만이 처음의 뜻을 바꾸지 않고 있었는데, 겨우 13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나로 하여금 길이 끝없는 슬픔을 품게 하였다.
지금 그의 두 아들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아아, 공의 행적은 비명을 짓는 법도에 부응하고 또한 의리로 볼 때 사양할 수야 없지만, 돌아보건대 내가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허씨(許氏)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비(妃)의 성(姓)에서 나왔다. 비조(鼻祖)의 휘(諱)는 선문(宣文)이니,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안정하고 공암(孔巖)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마침내 대대로 양천(陽川) 사람이 되었다.
그 후 8대가 지나도록 벼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다가 공(珙)에 이르러 지위가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명상(名相)이 되었다. 이분으로부터 관(冠), 백(伯), 경(絅), 금(錦)으로 전해져서 모두 경재(卿宰)가 되었는데,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에서는 금(錦)이 더욱 드러났다.
이분의 아들 기(愭)는 벼슬이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에 이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충무위 호군(忠武衛護軍) 증 병조 참판 휘 추(樞)를 낳았다. 증조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증 승정원 도승지 휘 창(菖)이다.
조부는 금화사 별제(禁火司別提) 증 이조 참판 휘 담(聃)이고, 부친은 군자감 부봉사(軍資監副奉事) 증 이조 참판 휘 한(澣)이다. 외조부는 창녕 성씨(昌寧成氏)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성희(成熹)이다. 정덕(正德) 정축년(1517, 중종 12) 12월 29일이 공의 초도(初度)이다.
휘는 엽(曄)이고 자는 태휘(太輝)이니, 초당(草堂)은 그의 별호(別號)이다. 가정(嘉靖) 임진년(1532)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상기(喪期)를 마칠 때까지 시묘를 살았다. 경자년(1540)에 진사시에 선발되고 병오년(1546, 명종 1)에 갑과(甲科)에 급제하였으며 계축년(1553)에 대각(臺閣)에 올랐다.
당시 윤춘년(尹春年)이 왕대비의 재종제(再從弟)로서 요직에 있으며 권세를 부렸는데, 공에게는 중내형(重內兄)이 된다. 그가 일찍이 이감(李戡)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조(銓曹)와 정부(政府)에 매우 힘껏 청탁한 적이 있었는데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감이 공에게 앙심을 품고 함께 탄핵할 자료를 수집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마침 공의 선려(先廬)에 화재가 발생하여 공이 대부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제사 받들 집이 없는 것을 염려해 가산을 다 털어 집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윤춘년은 함께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공을 탐관오리로 둔갑시키고는 곁의 사람들을 부추겨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정사년(1557, 명종 12)에 모친상의 상기를 마쳤다. 당시 사람들이 김여부(金汝孚)와 김홍도(金弘度)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간계를 부려 모함한다고 의심하였으므로 공이 김여부를 꾸짖었는데, 김여부가 노하여 김홍도는 유배되고 공은 외직(外職)을 청하여 은천(銀川)의 군수(郡守)로 나갔다.
김여부는 얼마 후 축출되었다. 기미년(1559)에 서해(西海)에서 도적이 봉기하자 조정의 의론이 모름지기 무신 수령이라야 난을 진압할 수 있다고 해서, 공은 소환되어 중승(中丞 사헌부 집의)이 되었다. 그러나 대사헌과 의론이 합치되지 않아서 대사헌은 체차되고, 공은 파직되었다가 바로 서용되었다. 경신년(1560)에 공조 참의로 승진하였다.
임술년(1562) 가을에 근시(近侍)의 직임으로 들어갔다. 야대(夜對)에서 아뢰기를,
“국가는 인재에 힘입어 유지되는데, 인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인심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고 인심이 바르지 않은 것은 실로 성인(聖人)의 도(道)가 밝혀지지 않은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신이 근래 성균관 대사성을 맡았을 때 감히 신뢰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참으로 그 유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종께서 치세(治世)를 이루려는 의지가 굳건하였을 때 조광조(趙光祖)가 특별히 남다른 은혜를 입고 감격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기를 도모하였으니, 거의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을 요순 시대의 백성처럼 만들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참소하는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갑자기 큰 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때부터 인심이 크게 무너져서 구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신원(伸冤)하라는 명을 내려 풍습이 바로 변하게 하신다면 인심이 바르게 되고 국가가 편안해질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 있었던 일이니 어찌 감히 경솔하게 논의하겠는가.”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반복하여 극력 개진하고, 또 아뢰기를,
“예컨대 근세에 허자(許磁)는 인선(人選)을 주관하면서 관절(關節)하는 사람을 등용하지 않다가 비방이 쌓여 먼 곳으로 폄출되었고, 구수담(具壽聃)은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바른말을 하다가 사사(賜死)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저 사형을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복주(覆奏)를 하는 법인데, 유독 대신(大臣)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으니, 신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람이 뇌물을 받았다가 한번 내사(內司)에 투옥되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할 뿐 변명할 길이 없으니, 이것 역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뭇 소인들이 앞다투어 노한 목소리로 공박하여 면직되었다.
계해년(1563, 명종 18) 6월에 서용되어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8월에 이량(李樑)이 이감으로 하여금 선류(善類)들을 일망타진하게 하였는데, 공에게도 화가 미쳐서 공은 부임한 지 13일 만에 파직되었다. 이윽고 이량이 유배되고 선류들이 모두 다시 서용되었으나, 윤원형 등이 공이 야대에서 한 말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현직(顯職)에 서용하지 말라고 청하였다.
융경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상께 아뢰기를,
“윤원형과 이기(李芑)가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기망(欺罔)하고 명망 있는 선비들을 모두 잡아다 반역의 죄명을 더하였으니, 혹 풀려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한 구덩이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지금 만일 그들의 죄를 바로잡아 그 원통함을 풀어 준다면 화합을 이룰 수 있고 재앙이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이 지은 글을 거두어 모아 완미(玩味)해 보니 또한 스승이 될 만하였습니다.
지금 이황(李滉)이 병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집에 있기는 하지만 성상께서 공경을 다하고 예를 극진히 하면 필시 감히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명종께서 불렀던 이항(李恒)과 조식(曺植)도 노쇠하지만 성의를 가지고 부른다면 역시 나올 것입니다.
옛날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태어났지만 송(宋)나라에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천고의 유감입니다. 남송(南宋)의 이종(理宗)은 그 도(道)를 숭상할 줄은 알았지만 참으로 위대한지는 알지 못했으니, 또한 무슨 유익함이 있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상이 이황에게 소명(召命)을 내렸는데, 두 차례 소명을 내리기에 이르러 조정으로 나아왔다. 또 아뢰기를,
“선조(先朝)에 서얼 이중호(李仲虎)와 장륜(張崙)이 있었는데,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추종하였습니다.
지금 박형(朴泂)은 《소학》을 가르침으로 삼아 그 문도가 항상 수백 명에 이릅니다. 천거되어 동몽훈도(童蒙訓導)에 보임되었는데, 고시(考試)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殿)을 받았습니다만 그럼에도 오히려 심력을 다하여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이중호와 장륜의 전례에 따라 녹질(祿秩)을 주소서.”하였는데, 상께서 그대로 따랐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책봉 태자 진하사(冊封太子進賀使)의 부사(副使)로 충원되어 북경에 갔다가 《독서록(讀書錄)》을 구해 와서 상께 올리니, 인쇄하여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기사년(1569)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아뢰기를, “근습(近習 근신(近臣)이라는 명칭은 말세에 나오는 말인데, 근래 국가의 재앙은 대부분 외척(外戚)과 후궁(後宮)으로 말미암아 첩경(捷徑)이 되고 있으니, 이것이 가장 근심스럽습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하는 임금을 사랑하여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경계하는데 정도(正道)를 어지럽히고 해치는 자들은 도리어 잘못이라고 말을 하니, 이 역시 마땅히 살펴 유념해야 합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양이(兩李: 이황과 이항)와 조식에 대해서는 한(漢)나라 조정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해마다 요미(料米)를 지급하고 장리(長吏)가 계절에 따라 존문(存問)하며 봄가을로 양고기와 술을 보내고, 관찰사가 제생(諸生)에게 유시하여 이들에게 찾아가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도리를 배우게 한다면,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성상의 의도를 알아서 인심(人心)이 선량해지고 풍화(風化)가 이루어질 것입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개(金鎧)가 정광필(鄭光弼)과 이행(李荇)을 가리켜 비슷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으니, 시비(是非)를 현혹하고 어지럽힌 점이 지극합니다. 두 사람은 심정(沈貞)과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한편으로는 시기를 받고 한편으로는 영합되어 거의 나라를 망칠 뻔하였습니다.
중종께서 점차 깨달으신 덕분에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깊이 살펴서 통렬히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조에서는 향약(鄕約)을 시행하면 먼 곳의 백성이 오가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만, 무릇 조령(詔令)이 내려지면 선포하는 데 따라 용동(聳動)하는 법이니, 어찌 심산궁곡(深山窮谷)을 핑계로 계도하는 정책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그러나 상이 수용하지 않아 향약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공이 전형(銓衡)에 참여한 3년 동안 근례(近例)를 배제하여 없애고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자, 낭관(郎官)들이 근심하여 좨주(祭酒)에 의망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사간에 제수되었을 때 공은 전응기(田應麒)가 원죄(冤罪)를 썼다고 주장하다가 동료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뒤에 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 의리상 차마 국문(鞫問)하지 못하여 소장(疏狀)을 올려 사직하고 또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이때부터 감오(感悟)한 사람이 많아져서 전응기에 대한 사론(死論)이 마침내 감면되었다.
처음에 온 나라가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의 위훈(僞勳)을 삭탈하기를 청할 때 공은 다른 한 사람을 탄핵하려 의논하였는데, 이 때문에 1년 가까이 서반직(西班職)에 있게 되었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 6)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아뢰기를,
“《주례(周禮)》에 궁중(宮中)의 동정(動靜)은 총재(冢宰)가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종척(宗戚)을 인견(引見)하셨을 때 승정원에서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하니, 상이 노기를 띠고 말하였다. 뒤에 연방(延訪)에서 다시 상에게 간(諫)하기를, “강직한 사람을 싫어하고 유순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하였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을 말하는가?”하면서 옥음(玉音)이 매우 엄중해지니, 좌우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으나 공은 조목조목 나열하여 아뢰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은 아홉 번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항상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인재 양성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선(善)을 부지(扶持)하고 과실을 막았으며, 폐지되고 실추된 예(禮)를 다시 일으키고 풍교(風敎)와 처벌을 엄격히 하였다. 《대학》, 《중용》, 《근사록(近思錄)》을 통독하게 하고 《예기(禮記)》 〈유행편(儒行篇)〉을 옮겨 적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벽에 붙여 놓았다.
또 사학(四學)에 두루 벼슬하여 모두 국학(國學)과 같이 다스리니, 놀라고 괴이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에 진정되어 긍지를 가지고 분발하는 자가 많았다. 평소 선정(先正)의 서원에 유념하여 경영하고 보호하기를 마치 집안일처럼 할 뿐만이 아니었다.
을해년(1575, 선조8)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당시 주인을 시해한 종이 있어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는데, 공이 위관(委官)을 추고(推考)해야 한다고 청하자 정언(正言) 조원(趙瑗)이 아뢰기를 “군주가 대신(大臣)을 경시하는 조짐을 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들이 많아져서 시비가 서로 엇갈려 나왔으므로 대사헌과 공이 모두 체차되었다. 기묘년(1579) 5월 경상도 관찰사 자리가 비어서 상이 삼공(三公)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다섯 사람을 천거하니 상이 공을 발탁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비답(批答)이 나오자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였다. 공은 교화(敎化)를 급선무로 여겼는데, 김사재(金思齋 김정국(金正國))가 편찬한 《경민편(警民編)》에 ‘군상(君上)’ 한 조항이 빠졌기 때문에 이를 보충한 다음 인쇄하여 여항(閭巷)에 수천 본(本)을 반포하였다.
또 큰 고을로 하여금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조판하여 인쇄하게 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문묘(文廟)에 알현(謁見)하고 제생(諸生)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한 뒤에 반드시 학문하는 방법을 써서 보였다.
사송(詞訟)은 명백하게 판결하고 연수(淵藪)를 찾아 척결하였으며 또 구습(舊習)을 아울러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유언비어가 크게 일어났으나 개의치 않았다. 9월에 풍한(風寒) 증상 때문에 사직소를 올렸는데 윤허하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더욱 면려하였다.
이듬해 봄 재차 사직소를 올리고 체차되어 돌아올 때 일선현(一善縣 선산(善山))에 이르러 병이 마침내 심해졌는데, 2월 4일 상주(尙州)의 공관(公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아무 달 아무 날을 잡아 아무 고을 아무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탄식하며 아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영결하는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국학(國學) 및 도봉서원(道峯書院)과 심곡서원(深谷書院)의 원생(院生)이 모두 와서 치제(致祭)하였으니, 공이 도학(道學)을 보위(保衛)한 공(功)과 덕(德)을 흠모한 풍모는 속일 수 없다 하겠다.
공은 기우(氣宇)가 조숙하여 7, 8세에 효우(孝友)가 남달랐으며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번거로이 권면하고 독려하지 않아도 우뚝이 날로 진취(進就)하였다. 일찍이 《송사(宋史)》를 읽다가 진문룡(陳文龍)이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이것이 모두 절의(節義)와 문장이니, 어찌 나를 핍박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부분에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하고는, 마침내 그 구절에 표시하여 정곡(正鵠)으로 삼은 다음 더욱 스스로 분발하고 격려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오기 전에 학문이 어둡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조예를 논해 보면 볼만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정자와 주자 이후에는 학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수립한 바가 도리어 한당(漢唐)보다 못하니, 이는 아마도 자득(自得)과 문견(聞見)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식(羅湜) 공에게 질문하니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 이언적)이 인종에게 권면하여 강(講)했던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펴 보이므로, 그 부분을 찾아 읽어 보니 홀연히 찾아갈 만한 지름길이 보이는 듯하였다. 또 진천(鎭川) 이여(李畬) 선생이 수학(數學)에 정통(精通)하고 더욱이 《주역》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다시 나아가 수업을 받았다.
뒤에 화담(花潭)에서 문강공(文康公 서경덕(徐敬德))을 사사(師事)하였는데, 병이 위중해지자 〈원이기(原理氣)〉 등 여섯 편을 구점(口占)하여 공에게 남겨 주었으니, 공은 매번 문강공에게서 수업을 마치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겼다.
공은 처음에는 문사(文詞)에 능하였는데 이때부터 모두 버리고 어진 이를 존중하고 선비를 아끼기를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할 뿐만이 아니었다. 종성 부사(鍾城府使)와 함께 같은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웃에 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 강론하여 비평하니, 따르는 선비들이 반드시 학문하는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나 정치의 득실과 인물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일찍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종가(宗家)를 향해 두 번 절하고 물러나 금서(琴書)로 가득한 방에서 외물(外物)의 유혹을 모두 물리친 채 고금의 격언(格言)을 벽에 걸어 두고 바라보며 성찰하였는데, 몸이 피곤하면 눈을 감고 잠명(箴銘) 몇 편을 암송하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산수(山水)를 매우 좋아하여 화창한 시절 좋은 경치를 만나면 친구들을 데리고 교외로 나가서 흥이 다한 뒤에야 돌아왔다. 사람과 사귈 때는 경계를 두지 않아서 자리에 늘 손님이 가득하였는데, 나물 반찬에 거친 밥이라도 반드시 대접하였다.
어릴 적에 바둑을 매우 즐겼는데, 어른이 이에 대해 언급하니 얼굴을 붉히고 땀을 흘리며 부끄러워하고는 종신토록 다시는 바둑돌을 잡지 않았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나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모친을 봉양하였고 외조부인 판관공(判官公)을 부모처럼 섬겼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녹봉을 받으면 문득 아우와 조카에게 나누어 주었고, 혼취(婚娶)와 상장(喪葬)이 있으면 힘을 다해 돕고 보호하여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 주기까지 하였다. 유희춘(柳希春) 공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을 때 여러 차례 계속 방한구(防寒具)를 보내 주니, 항상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늘 인휼(仁恤)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개 공은 풍도(風度)가 엄정하고 심원(深遠)하였다. 만년에는 다시 화락(和樂)하고 평이(平易)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니, 혹시라도 나쁜 말로 비복(婢僕)을 꾸짖은 적이 없었다. 명종과 선조 두 조정에 벼슬하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고, 나고 들 때 수고로움을 다하여 대체(大體)를 지키는 데 힘쓰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세 고을의 지방관으로 부임해서는 처자(妻子)가 감히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못하였고, 30년 동안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문정(門庭)이 포의(布衣) 시절과 똑같았다. 아, 은덕(恩德)을 베풀고 선(善)을 행하여 이미 쌓여 풍부하게 되었으니, 이치로 볼 때 마땅히 큰 복을 누려 대질(大耋)에 올랐어야 한다.
그러나 명성과 지위가 이미 걸맞지 않은 데다 또 그 수명마저 인색하였으니, 하늘의 보시(報施)가 어찌 이리도 어긋나고 말았던가. 오호라, 슬프도다. 공의 이력은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 예조ㆍ공조ㆍ병조ㆍ이조의 좌랑(佐郞), 이조 정랑, 공조ㆍ예조ㆍ병조ㆍ이조ㆍ형조의 참의(參議)와 참지(參知), 사헌부의 장령(掌令)ㆍ집의(執義), 사간원의 정언(正言)ㆍ대사간, 홍문관(弘文館)의 부수찬(副修撰)ㆍ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부교리(副校理)ㆍ부제학(副提學),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 의정부의 검상(檢詳)ㆍ사인(舍人), 독서당(讀書堂) 사가독서(賜暇讀書),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 군자감(軍資監)ㆍ내자시(內資寺)ㆍ사도시(司䆃寺)ㆍ군기시(軍器寺)ㆍ내섬시(內贍寺)의 정(正), 성균관의 전적(典籍)ㆍ직강(直講)ㆍ사예(司藝)ㆍ대사성,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승정원의 동부승지ㆍ우부승지ㆍ좌부승지ㆍ우승지, 배천 군수(白川郡守), 삼척 부사(三陟府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경상도 관찰사이다.
공의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니, 서평군(西平君) 한숙창(韓叔昌)의 딸이고,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에 선수(宣授)된 좌의정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의 후손이다. 자질이 현명하고 사리에 통하여 예(禮)에 맞게 공을 섬기고 효우에 독실하였다.
일찍이 형제들과 재산을 나눌 때 가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보면 인색하게 굴지 않고 내주었으니, 시어머니가 성품이 엄격하였는데도 “나의 훌륭한 며느리이다.”라고 하며 자주 칭찬하였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시어머니에 대한 말이 나오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후부인(後夫人)은 강릉 김씨(江陵金氏)이니, 예조 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이고, 신라의 종성(宗姓) 명원군왕(溟源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공은 자녀 여섯을 두었다. 전부인 소생의 아들 성(筬)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내시부 교관(內侍府敎官)이 되었다.
사위 박순원(朴順元)은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이고, 우성전(禹聖傳)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정(禮賓寺正)이 되었다. 후부인 소생의 아들 봉(篈)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는데, 형과 함께 모두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여 가업을 잘 계승하였다. 균(筠)은 어리다. 사위 김성립(金成立)은 유학(幼學)이다.
교관은 유수(留守) 이헌국(李憲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고, 계실(繼室)은 병사(兵使) 남언순(南彦純)의 딸로 2남 3녀를 낳았다. 사인은 전 군수 이우빈(李禹賓)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별제는 1남을 낳았고, 김성립은 1녀를 낳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혹 인에 뜻을 두지만 / 士或志仁
또한 학문을 즐기는 경우는 드무니 / 亦鮮嗜學
인에 뜻을 두고 학문을 즐기면 / 于志于嗜
자신도 모르게 덕(德)이 닦이리라 / 厥修罔覺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 魯無君子
공이 어디서 이러한 덕을 취했으랴 / 公焉取斯
잘 유지하여 변하지 않았으니 / 克持弗渝
충성과 신의를 기반으로 하였네 / 忠信以基
조정에서 경륜을 발휘하고 / 載揚王庭
근신의 반열에 발탁되어 / 騫于邇列
전형과 경연에 참여하고 / 銓衡帷幄
왕의 이목과 후설이 되었네 / 耳目喉舌
역린을 범하되 강직하고 간절하게 하여 / 犯逆堅懇
성충이 내심 돌아서게 하였는데 / 聖衷內回
변호하여 막으려 했던 일들이 끝내 좌절된 것은 / 辨遏挫敲
사람들의 시기심이 쌓였기 때문이라네 / 衆口積猜
여러 차례 배척되었으나 / 屢遭斥犇
스스로 돌이켜보매 더욱 정직했으니 / 反而益縮
아홉 번 성균관 대사성이 되매 / 九典胄敎
처음에 놀라던 이들이 마침내 심복하였네 / 始駭乃服
임금께서 영남 지역을 진념하여 / 王軫嶺表
가서 어루만져 다스리라 하시니 / 其往撫循
공은 그 덕의를 잘 받들어 / 公承德意
각고의 노력으로 구습을 일신하였네 / 刻厲作新
오직 모재와 회재의 도(道)를 / 惟慕惟晦
모범으로 삼아 준수하였는데 / 是範是守
곤궁한 백성들은 서로 즐거워하고 / 顚連胥悅
경박한 사람들은 다투어 비난하였네 / 浮躁競詬
병들어도 직임을 그만두지 않고 / 惟疾弗輟
성실히 하여 그치지 않았으니 / 惟誠弗窮
스스로 애석한 점이야 없겠지만 / 惟弗自惜
이제 세상을 떠났으니 공을 어이하리오 / 奈何乎公
누가 배우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 孰曰未學
누가 그 인만 하리오 / 孰如其仁
이는 공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 非公之慊
내가 공을 그 경지에 비기는 것일세 / 我儗其倫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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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許公神道碑銘幷序
自余出海歸。見輩流多凋落。獨吾許公能無變其初。纔十有三年而奄忽。使予長抱無涯之痛。今其二孤以家狀見屬。噫。公之跡應銘法。復義無以辭。顧忍言哉。謹按。許氏出金首露王妃姓。鼻祖諱宣文。佐麗祖定三韓。食采孔巖。遂世爲陽川人。歷八世簪組綿延。至珙位侍中爲名相。傳冠伯絅錦。皆卿宰。文章德業。錦尤著。愭。判奉常寺事。贈吏曹判書。是生公高祖折衝將軍忠武衛護軍。贈兵曹參判諱樞。曾祖。成均館典籍。贈承政院都承旨諱菖。祖。禁火司別提。贈吏曹參判諱聃。考。軍資監副奉事。贈吏曹參判諱澣。外祖。昌寧成氏敦寧府判官諱熹。正德丁丑十二月二十九日。公之初度也。諱曄。字太輝。草堂。其別號也。嘉靖壬辰。丁參判公憂。守墓沒喪。庚子。選進士。丙午。中甲科。癸丑。登臺。時尹春年以王大妃從祖弟。居要津用事。於公爲重內兄。嘗托薦李戡銓曹政府。屬甚力。終不遂。銜之。相與捃摭。無所得。屬公先廬火。公欲慰釋大夫人。且懼宗祀無所。悉家財營達。至是同在府。乃嫁以貪黷漁索。旁嗾劾罷之。丁巳。憂吉。時疑金汝孚金弘度立黨相傾。公責汝孚。汝孚怒。弘度逐而公求外。得銀川。汝孚尋敗。己未。西海盜起。朝議須武宰乃濟。召公還爲中丞。與僚長議不合。長遞而公罷。卽敍。庚申。超參水部。壬戌秋。入近侍夜對。言國家所賴以維持者人才也。人才不作。由人心不正。人心不正。實原于聖道不明。臣此忝掌成均。無敢信者。良以其來有自也。中廟銳意致治。趙光祖特蒙殊眷。感激圖報。庶幾堯舜君民。不幸讒口惎之。橫罹淫禍。自是。人心大壞。不可救。亟賜申雪。使風采立變。則人心正而國家安矣。上曰。事在先朝。安敢輕議。公復反覆極陳。且曰。如近世許磁主選。不用關節。積謗遠貶。具壽聃不顧其身。以至賜死。夫斷重辟。必覆奏。獨于大臣不然。臣未知其故也。又曰。人有臧獲一投內司。仰天太息。無路可辨。此亦不可不知。群小競怒。駁褫職。癸亥六月。敍拜直州。八月。李樑使戡網打及公。公上府十三日。罷。已而樑竄。皆復用。元衡等以公夜對所言不是。請母顯敍。隆慶丁卯。復知申。啓言元衡,芑欺罔先王,先后。盡取知名之士。加以叛逆之名。或有解者。驅納一穽。今若正其罪而釋其冤。則和可致而戾可消矣。又曰。先臣李彦迪所著書。收畜玩味。是亦師也。今有李滉謝病在家。致敬盡禮則必不敢不至。明廟所徵李恒曺植。年齡衰邁。招之以誠。亦將來矣。昔程朱生。宋不見用。此千古憾也。理宗知尊尙其道。而不知眞魏。亦何益之有。上召滉。至再造朝。又言先朝有庶孼李仲虎張崙。學行名世。學者多趨之。今朴泂小學爲敎。其徒常數百人。薦補童蒙訓導。以不就考試居殿。猶盡心不倦。請例虎崙畀祿。從之。戊辰。充進賀。封太子副使。購求讀書錄上之。命印頒。己巳。長玉堂。啓言近習之名。出於叔世。近者國禍。多由戚里與宮壼爲徑。最可憂也。又曰。人臣愛君。先事預戒。而醜正者反以爲過。亦宜省念。又曰。兩李與曺。依漢朝故事。歲給料。長吏以時存問。春秋致羊酒。方伯諭諸生往學孝悌忠信之道。則遠近咸知聖意所在。人心淑而風化達矣。又曰。金鎧指鄭光弼李荇爲一般人。其眩亂極矣。二人爲貞,安老一忌一合。幾致亡國。賴中廟漸悟。國不亡。所宜深察而痛斥之。又曰。禮曹以鄕約有遠民往來之難。凡詔令之下。莫不宣布聳動。豈有諉以深山窮谷而廢導迪之理。上不能用。鄕約遂不行。公參銓三載。擺去近例。棘棘不阿。郞官患之。謀擬祭酒。不成。授諫長。公冤田應麒之罪。見僚議二三病免。後除臬司。義不忍鞫。至控疏辭。又病免。由是人多悟者。竟減死論。初。擧國請削乙巳勳。公欲劾一異論者。由是居西幾一年。萬曆癸酉。復爲館長。啓言周禮宮中動靜。家宰無不與知。頃者引見宗戚。而政院不知。可乎。上有怒言。後於延訪。復斥上爲厭剛直好柔巽。言甚切至。上曰。何事。玉音甚厲。左右失色。公爲之陳列不已。公九領太學。常慨然以作人自任。扶善遏過。起廢隊。嚴敎罰通讀大學,中庸,近思錄。寫儒行篇貼東西齋壁。遍仕四學如國庠。驚怪乃定。多矜舊者。雅留意先正書院。經紀保護。不啻若家事。乙亥。復長院。時有弑主者下理。公請覈委官。正言趙瑗啓。以爲啓人君輕大臣之漸。於是和附者衆。是非互發。都憲與公俱遞。己卯五月。嶺南伯缺。上命三公議。乃擧五人。上擢公。公久屈。批出。中外相賀。公急敎化。以金思齋所撰警民編。闕君上一款。就補之。鋟布閭巷數千本。又令大郡。雕三綱二倫行實所至。謁文廟廩諸生。必書示爲學之方。剖柝詞訟。搜剔淵藪。且欲並祛舊習。有飛語大興。不恤也。九月。感風寒拜章辭。不許。感激愈力。明年春。再辭。至一善。病遂殆。二月四日。逝子尙州之公館。得其年某月某日。葬于某邑某原。公亡。識與不識。莫不爲之嘆惜。送者以百數。國學及道峯深谷兩院生咸來致祭。其衛道之功。嚮德之風。有不可誣云。公之器宇夙成。七八歲。孝友絶人。旣就傳。不煩勸飭。卓然日進。嘗讀宋史。至陳文龍爲虜所獲。指其腹曰。此皆節義文章。可相逼耶。廢書嘆曰。士當如是。遂標以爲正鵠。彌自激昂。一日。忽喟然曰。程朱未出。學非不晦。論人所到。多有可觀程朱以後。學非不明。其所樹立。反下漢唐。豈自得與聞見有異也與。因質之羅公湜。開晦齋李先生勸仁廟講心經附註。索而讀之。怳有蹊可尋。鎭川李先生畬精數學。尤邃於易。復進受。後事文康于花潭。疾革。口占原理氣等六篇遺公。公每以不卒業爲恨。其始。工於文詞。自是盡棄之。尊賢愛士。不啻飢渴。與鍾城令。學同門居比隣。相與講評無虛日。士有相從者。必詢爲學所就何如。如政治得失。人物臧否。未嘗出諸口。晨興。向宗家再拜。退而一室琴書。屛去外誘。古今格言。揭以觀省。體疲則閉眼誦箴銘數遍。夜分乃寢。以爲常。酷好泉石。遇時和景明。携知舊出郊。盡興而返。與人不設畦畛。坐上客常滿。有蔬糲。必共之。少耽圍碁。長者有言。面赤汗流。終身不再。蚤孤。色養無方。事判官公視父母。百口無間言。受俸。輒班諸弟姪。有昏娵喪葬。竭力助護。至解衣衣之。柳公希春謫鍾城。屢致禦寒具不絶。常語子弟曰。常存仁恤之心。必有及物之時。蓋其風標凝遠。晩更樂易。喜慍不形。或罔以惡言詈婢僕。立兩朝。勿欺爲主。出入盡瘁。務持大體。不矯小節。剖符三邑。妻子不敢干以私。位通顯三十年。門庭如布衣時。噫。種德爲善。旣積而豊。理宜享有丕祉躋于大耋。而名位已不稱。又復嗇其年。天之報施。何舛爾耶。嗚呼痛哉。公之履歷。長興庫直長,禮工兵吏曹佐郞吏曹正郞工禮兵吏刑參議參知司憲府掌令執義,司諫院正言,大司諫,弘文館副修撰,修撰,校理,副校理,副提學,侍講院弼善,議政府檢詳,舍人,讀書堂賜暇,濟用監副正,軍資監內資,司䆃,軍器內贍寺正,成均館典籍,直講,司藝,大司成,承文院判校,承政院同副,右副,左副,右承旨,白川郡守,三陟府使,慶州府尹,慶尙道觀察使。公之夫人。淸州韓氏。西平君叔昌女。宣授光祿寺少卿左議政襄節公之後。資明達。事公以禮。篤孝友。嘗與昆季釋産。見有所欲。輒與之無所吝。姑性嚴。亟稱之曰吾賢婦也。旣歿。語及必流涕。後夫人江陵金氏。禮曹參判光轍女。新羅宗姓溟源郡王周元之後。公之子六人。前男筬。生員內侍府敎官。壻朴順元典艦司別提。禹性傳。進士文科禮賓寺正。後男篈。生員文科議政府舍人。與兄皆好學而文。能嗣其家業。筠幼。壻金誠立。幼學。敎官娶留守李憲國女。無後。繼室。兵使南彦純女。生二男三女。舍人娶前郡守李禹賓女。生一男一女。別提生一男。誠立生一女。銘曰。
士或志仁。亦鮮嗜學。于志于嗜。厥修罔覺。魯無君子。公焉取斯。克持弗渝。忠信以基。載揚王庭。騫于邇列。銓衡帷幄。
耳目喉舌。犯逆堅懇。聖衷內回。辨遏挫敲。衆口積猜。屢遭斥犇。反而益縮。九典胄敎。始駭乃服。王軫嶺表。其往撫循。
公承德意。刻厲作新。惟慕惟晦。是範是守。顚連胥悅。浮躁競詬。惟疾弗輟。惟誠弗窮。惟弗自惜。奈何乎公。孰曰未學。
孰如其仁。非公之慊。我儗其倫。<끝>
穌齋先生文集卷之十 / 碑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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