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성균 진사 벽진 이공 묘지명 병서(成均進士碧珍李公墓誌銘 並敍)
전(傳)에 “사람은 현명한 부형이 계시는 것을 즐거워한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국자생(國子生) 이공(李公)에게서 그 말을 믿겠구나. 공의 아버지 양촌공(楊村公)은 한강(寒岡)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선생의 일동(一動) 일정(一靜) 일언(一言) 일행(一行)의 모든 것을 결실을 맺어 자신의 몸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것으로써 공을 가르쳤다.
공은 총명하고 민첩한 재주로 아버지를 받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또 맛있는 음식을 해드렸다. 그리고 응하고 대답하고 나아가고 물러감에 반드시 아버지의 뜻보다 앞서 실행하면서 예의에 어긋남이 없게 하여, 한 가지도 자제로서의 허물을 저지르지 않았다.
선조를 받드는 여러 가지 예절에 있어서는 하나 하나 모든 것을 부모님께 품의하여 결정하였으며,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다하였다. 공은 사람을 대할 때 온통 화기(和氣)를 띠었다. 만약 질(質)을 버리고 문(文)을 숭상하는 사람이나 인(仁)을 흉내 내며 거짓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를 더럽힐 것같이 여겨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공이 독서함에 있어서는 낮을 다하고 밤이 새도록 하여 침식을 잊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공부한 것을 깊이 온축하고 문장으로 지어 널리 폈는데, 대책문에 더욱 뛰어났다. 나이 14세에 하과(夏科)에 수석을 차지하였고, 20여 세에 학궁(學宮 향교)의 유장(儒長)이 되는 일에 당면하게 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 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인년(1662, 현종 3)에 상소의 일로 서울에 가서는 마침 천연두에 걸렸는데, 이 때 비록 평소에 공은 경상(卿相)들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모두 공의 이름을 사모하여 약을 보내왔다. 갑진년(1664, 현종 5)에 양촌공이 병환이 들었고 어머니도 또한 불한질(不汗疾)로 돌아가셨다.
이에 공은 울부짖고 슬퍼하는 가운데 연이어 질병에 전염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일 뒤에 상례도 치르지 못한 채 죽었으니, 바로 12월 29일이다. 선영의 송월(松月) 임좌(壬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공의 휘는 두원(斗元)이고 자는 남로(南老)로 숭정(崇禎) 임신년(1632, 인조 10)에 성주(星州) 사월리(沙月里) 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아버지의 휘는 장립(長立)으로 양촌공이며, 어머니는 옥산 장씨(玉山張氏)로 용한(龍翰)의 따님이다. 조부의 휘는 인회(仁恢)이고 증조부의 휘는 충준(忠俊)으로 선무랑(宣務郞)을 지냈으며 고조부의 휘는 광(光)이고 호는 진조당(眞操堂)이다.
공의 부인은 야성 송씨(冶城宋氏)로 통덕랑을 지낸 시진(時振)의 따님이며 야계(倻溪) 선생 희규(希奎)의 5세손으로, 공의 묘소 왼쪽에 합장되었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경초(慶初),응초(應初),명초(命初)이며 딸은 노대운(盧大澐)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자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7대손 문걸(文杰)이 공의 주손 송간공(松澗公) 기현(紀玄)이 찬술한 가장(家狀)을 받들고 나에게 와서 공의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재주 있는 사람을 어찌하여 버리며 / 才何棄
인자한 사람을 어찌하여 요절케 하는가 / 仁何夭
하늘의 보답이 정해졌으니 / 天報定爾
후손에게 밝은 복이 있을 것이네 / 來許之昭
<끝>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
[原文]
成均進士碧珍李公墓誌銘 並序。
傳曰。人樂有賢父兄。余于國子生李公信然矣。公大人楊村公。登寒岡先生門。凡先生一動一靜一言一行。不惟結顆在身上。亦以敎公。公以聰敏之才。奉承不怠。溫凊滫瀡。應對進退。必先意而式禮莫愆。一未有子弟過。至奉先諸節。一一稟定。備盡誠敬。其接人也。渾是和氣。如遇遺質尙文假仁懷詐者。若凂不屑焉。其讀書也。窮曛達宵。至忘寢食。深蓄博發。尤優於對策。年十四 。居魁夏科。二十餘。當學宮儒長。辭以年少。庚子。中司馬。壬寅。因䟽擧旅京。適患痘。雖素昧卿宰。皆慕名賚藥。甲辰。楊村公寢疾。母夫人亦以不汗疾下世。公繼染於攀擗中。後先公三日而不勝喪。乃十二月二十九日也。葬先壠松月壬坐原 。公諱斗元 。字南老。崇禎壬申。生星州沙月里第。碧珍人。考諱長立。是楊村公。妣玉山張氏。龍翰女。祖諱仁恢。曾祖諱忠俊。宣務郞。高祖諱光。號眞操堂。配冶城宋公通德時振女。倻溪先生希奎五世孫。祔公墓左。有三男一女。男慶初,應初,命初。女盧大澐。孫曾蕃不錄。公七世孫文杰。奉公之胄孫松澗公紀玄所撰家狀。請公墓銘。銘曰。
才何棄。仁何夭。天報定爾。來許之昭。<끝>
ⓒ한국문집총간 |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