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도사(都事) 정공(丁公)의 묘표
『정환(丁煥) : 1497년(연산군 3)~1540년(중종 35)』
광주(光州) 이 사군 상길(李使君 尙吉)이 일찍이 군(郡)을 다스린 성적이 제일이어서 통정(通政)의 품계가 더해졌다. 그의 현조(賢祖)인 정군(丁君)은 휘가 환(煥)이고 자는 용회(用晦)인데, 중묘(中廟)를 섬기면서 효우(孝友), 문학(文學), 정직(正直), 강방(剛方)하기로 가정(嘉靖) 연간에 명성이 있었다.
그는 나이 20세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32세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고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로 졸관(卒官)하였는데, 그때 나이 44세였고, 작고한 날짜는 이해인 경자년 3월 26일이었다. 그로부터 61년 뒤인 경자년(1601. 선조 34) 5월에 내가 부절(符節)을 갖고 광주(光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사군이 나에게 공의 행장(行狀)을 보여 주고 또 말하기를,
“우리 외조(外祖)를 이 도(道)에 장사지냈고 내가 인읍(鄰邑)에서 고을살이를 하면서 묘도(墓道)에 현각(顯刻)을 하지 않으면 후손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작고하신 지 만 60년이 되었는데, 선생이 또 여기 오셨으니, 어찌 기다림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선생은 나를 위하여 기록해 주십시오.” 하므로, 내가 글을 잘하지 못하는 것으로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삼가 공의 문인인 정군 염(丁君焰)이 찬한 행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바이다.
정씨(丁氏)의 선대는 창원(昌原)에서 나왔는데, 그 처음에 광순(光純)이란 분이 있어 신라에 벼슬하여 대상(大相)이 되었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는 휘 한우(旱雨)가 효우(孝友)를 힘써 행한 때문에 조정에 천거되어 풍저창 부승(豐儲倉副丞)에 제수되었고, 이분은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휘 휘(暉)를 낳았으며, 주부는 사산 감역관(四山監役官) 휘 세명(世明)을 낳았는데, 감역관을 장사지낼 때에 모재(慕齋) 김 선생 안국(金先生安國)이 묘지(墓誌)를 썼다. 감역관이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에게 장가들어 홍치(弘治) 정사년 모월 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막 나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여러 아이들과 놀 적에도 우뚝하게 무리에서 뛰어났다. 이미 자라서 공부를 할 적에는 읽고 해석하는 것만을 일삼지 않고 옛 시문(詩文)을 좋아하였으며, 일정한 법식을 탐탁치 않게 여기었다. 조정에 벼슬함에 미쳐서는 몸을 다스리고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안과 밖의 한계가 엄격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적인 일을 청탁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경사(京師)에 조회 가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서는 털끝만큼도 사사로이 한 것이 없었으므로, 사신 일행들이 더욱 공경하였다.
공은 성품이 장중하고 엄하고 강직하여 뜻을 보아서 사람을 사귀었고, 남의 비위(非違) 사실을 보았을 적에는 비록 그와 좋은 사이일지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 아우인 사인공(舍人公)과 같이 있을 때의 경우는 종일토록 즐거워하며 조금도 간격이 있음을 볼 수가 없었다.
무술년에는 영남(嶺南)의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모부인(母夫人)이 경구(京口)에서 작고하자, 공이 오랫동안 모부인을 친히 모시지 못하여 약과 음식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는 것으로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질병을 얻어 기년(朞年) 만에 작고하였다. 장지(葬地)는 선영의 뒤인 모좌 모향(某坐某向)의 언덕에 있다.
공은 충주 박씨(忠州朴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큰딸은 직장(直長) 정사회(鄭思晦)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진사 이희선(李喜善)에게 시집갔다. 이희선은 네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 상철(尙哲)은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바로 광주 사군(光州使君)이며, 상적(尙迪)과 상급(尙伋)이 그 아우들이다. <끝>
백사집 제3권 / 묘표(墓表)
------------------------------------------------------------------------------------------------------------------------------------------------------
[原文]
故都事丁公墓表
光州李使君尙吉。嘗以治郡第一。增秩通政。有賢祖曰丁君。諱煥。字用晦。事中廟。以孝友文學正直剛方。有名嘉靖間。年二十。中司馬。三十二。登第。歷成均館典籍,刑曹佐郞。卒官慶尙道都事。春秋四十四。是歲庚子三月二十六日也。其後六十一年庚子五月。余駐節光州。李使君授余以公行狀。且言曰。吾祖之葬於此道。而吾爲宰於鄰邑。墓道不顯。無以詔後。甲子一周。而子又來斯。豈非有待歟。子爲我誌之。余以不文辭不獲。則謹取公門人丁君焰所撰行狀而爲之說曰。丁氏之先。出於昌原。其始有光純者。仕新羅爲大相。入國朝。有諱旱雨。以惇行孝友。薦於朝。授職豊儲倉副丞。生諱暉。典牲署主簿。生諱世明。四山監役官。監役之葬。慕齋金先生安國誌其墓。娶司議金壽亨女。以弘治丁巳某月日生公。生而穎秀。與羣兒遊。嶄然出等夷。旣長就學。不以誦說爲事。好古詩文。不屑於程式。及仕於朝。治身莅事。內外斬斬。人不敢干以私。嘗爲朝京書狀官。不以絲毫有所私。一行加敬。性莊重嚴毅。視志而交。見人非違。雖同好。不少饒。至與其弟舍人公居。怡怡終日。未嘗見崖岸。歲戊戌。佐宣嶺南。母夫人卒於京口。公以久闕定省。藥餌無所及。摧慟成疾。朞年而卒。葬在先兆之之後某坐某向之原。公娶忠州朴氏女。生二女。長適直長鄭思晦。次適進士李喜善。生四子。長曰尙哲。早歿。其次光州使君。曰尙迪,尙伋。其弟也。<끝>
白沙先生集卷之三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