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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과 항일의병 유적을 찾는
~~~제2회 역사가 흐르는 길 순례에 참여하다<2>~~~
언 제 ; 2014년 10월 25일
어디를 ; 조양각,백학학원,거동사,입암전투 전적지, 충효재,양세묘소
맑고 화창한 가을 날씨에 백학학원과 애국지사 기념비가
있는 애국공원을 탐방후 이번 행사에 후원을 많이 한 거동사에 들러
부처님께 봉향드리는 분은 대웅전에, 나머지는 신도들이 대접하는 다과차를
마시면서 휴식후 주지스님의 고마운 인사와 함께 보현수련원으로 중식하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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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후 원내를 둘러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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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담으로 꾸며 놓은 찜질방도 탐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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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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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는 몇년이나 되었을까?
그늘나무 아래 휴식을 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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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과 하늘 단풍나무 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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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학교이었다는 고적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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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발상기념비 안내 표지석도~~
山南義陣(1906~1908)의 組織과 活動
산남의진(山南義陣)
산남인의 기개를 보여주었던 산남의진,
그 역사적 의미를 가득담은 '산남의진발상기념비'가 북구 죽장면 입암리
죽장고등학교 뒷편 언덕기슭에 자리잡고 있다.이 산남의진 발상기념비는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우리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투혼에 빛나는 의병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 놓은 것이다.그러나 이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비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산남정신의 발로요, 산남인의 기개를 보여 주었던 산남의진의 역사에 대해서 개괄적으로나마 살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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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산남의진이란
인근 영천시 자양면 출신의
정용기의병장에 의해 처음 결성된 후
우리 고장 흥해 출신의 최세윤의병장으로
이어지면서 포항, 즉 옛 영일군 일대를 중심으로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었던 구한말 제2단계 의병 운동을 대표하는 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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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이라 함은 경상북도 문경새재 즉, 조령 이남의 영남 지방을 이르고,
의진이라 함은 오직 구국 일념의 충성된 의기로 뜨겁게 뭉쳐진 의병 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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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기개있는 선비와 우국 지사들은분하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다투어 의병을 조직하고 더러는 자결하기도 하는 시국상황이
전개되던 무렵에 당시 삼남(경상, 전라, 충청) 도찰사 등을 역임한 시찰사
정환직이 고종 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라는 밀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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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있는
것이었다.이에 정환직은 사직한 후 아들 정용기와 함께 논의한 끝에, 아버지 정환직은
서울에서 군사를 모집, 가산을 정리하여 각종 무기를 마련하고, 특히 인천의 중국 상인들을
통하여 신식무기를 몰래 들여와 이를 석달 후까지 강릉으로 옮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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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단도 담고~~~
그리고 아들 정용기는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규합,
강릉으로 북상하되, 대구, 대전을 거치게 되면 반드시 왜병들의
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므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기로 하고, 도중에 이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는영덕지방의 신돌석 의진과도 합세하기로 했다.이런 작전
계획들을 수립한 후 정용기는 즉시 영천으로 내려와 평소에 뜻을 같이 하던 친구인
이한구, 정순기 등과 함께 인근 각처의 선비와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니,
순식간에 3천여 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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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이 바로 광무 10년,
즉 1906년 2월이었는데, 초대대장에는
정용기가 추대되고, 군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칭했다.
1906년 3월 초대 대장 정용기는 강릉으로 간 다음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돌진하게 되면, 경기지방의 의병도 호응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서울의 적도 충분히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3천여 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강릉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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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정돈식씨)형님도 설명을 붙이고~~~
산남의진의 행렬이 오늘날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 우각1리 마을 앞에
이르렀을 때, 대구 의진에서 보낸 급한 서한을 가져왔다는 자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장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이 지금 경주로 내려와 있으니 즉시 와서 만날 수 있도록
하라는 서한의 내용을 읽고 의병을 규합하고 북상하게 된 그 동안이 경과를 아버지에게
알리려는 급한 마음에서 지휘권을 임시로 이한구에게 맡기고 경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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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구시장을 역임한 문시장과 함께 기념촬영~~
그러나 그것은 당시 대구 진위대 경주 제8대대 분견대장 신석호란
자의 계략이었으며, 정용기는 관군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송치되고 말았다.
일시 삼남의진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이한구는 의병을 인솔하고 청송군 진보면까지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대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대장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일시 의병을 해산하고 대장의 출옥을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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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시원해 보이는 입암의 천수도 담고~~`
아들의 체포소식을 들은 정환직의 노력으로 그 해 8월 석방된 정용기는
상한 몸을 치료한 뒤, 그 해 11월부터 다시 흩어진 의병의 무리를 모으고,
군비를 다져 이듬해인 1907년 3월 다시 옛날의 군세를 회복하였다. 다시 뭉친
산남의진은 5월에 강름에서 정환직이 내려보내는 의병들과 합세하기로 하고, 신돌석
부대와 산남의신이 합세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던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으면서
다시 북상을 시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산남의진은 영천, 신령, 청송, 진보, 흥해 ,
청하 등 곳곳에서 일본군의 기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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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의 산과 하늘을 담고~~~
그러나 1907년 8월 영덕군 달산면 팔각산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부대의 일본군들과 산남의진은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사흘간이나 계속하다가 일단 후퇴한 산남의진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겨울채비를 한 후 9월 10일까지 재집결토록하고, 정용기 자신은 일본군의 기지를
습격하여 총과 탄약을 탈취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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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입암은 바위와 강물이~~~
마침 영천 수비대 소속의 상당수 일본군들이 옛 영일군 죽장면 창리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는 이세기, 우재용, 김일언 등
세 장령에게 각기 군사를 나누어 매복한 후 새벽에 적을 급습키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작전에 옮기기 위해 광천으로 가던 이세기의 의병들은 북구 죽장면 입암리 주막에서 소수의
일본군들이 식사를 하는 것을 탐지하고, 일본군이 극소수라는 판단하에 주막을 덮쳤으나,
주변에 매복해 있던 많은 무리의 적들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이에 다른 매복지로 가고
있던 많은 무리의 적들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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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재 전체 건물도~~~
이에 다른 매복지로 가고 있던 정용기,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의
의병들이 지원하였으나 예상외로 많은 일본군 병력과 5시간의 접전 끝에
산남의진은결국 피배하고 말았다.1907년 9월 1일의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를
위시하여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 도합 40여명의 의병이 일시에 순국하였으니 이
날의 전투를 산남의진입암지변이라 한다. 이 날의 전투로 산남의진의 인적물적 손실 뿐만
아니라, 당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의 가옥 수십동이 불타고 양민 수십명이 학살당하는 등
패전의 참화가 극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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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 자양면 검단리 본가에 머물러 있던 정환직이 이튿날 비보를 접하고
입암의 격전지로 달려가 시체들을 수습한 후 의진을 재결성하여 그해 9월 27일
정환직이 2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또 한번의 비장한 출발을 하게 된 산남의진은
헤이그 밀사파견으로 야기된 고종의 강제 폐위, 그리고 순종의 즉위에 이은 정미7조약에
따라 군대가 해산되자 이때 해산된 진위대 제3대대 경주 분견대 부위 이하 30여명의
훈련받은 군인들을 대거 합류시켜 전력을 증강시켰다.그 해 10월에는 곳곳에서 일본군의
주둔지를 급습해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니, 포항지역의 모든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산남의진
을 크게 두려워했으며, 이 때가 산남의진으로서는 가장 기세를 떨치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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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재 건물도~~~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을이 깊어지면서 사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여 부족한 군량미에 날씨마저 추워진데다 산남의진의 기세에
놀란 일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더는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2대 대장 정환직은 일단 의진을 해산하고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뒤 적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청하현에 잡입하였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영천감옥에 수감된 지 얼마 안되어 두 부하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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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정환직 대장의 순국이후 산남의진의 7백여 병력은 정환직의 조카이자
흥해 사람이었던 정순기의 지휘 아래 청송군 보현산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그후 정순기는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평소 정환직과 가까이 지내던 포항시
북구 흥해읍 곡강리 출신이 최세윤에게 사람을 보내 산남의진의 지휘를 간곡히 부탁
하였고 이를 수락하자, 1908년 3월 5일, 최세윤을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으로 추대해
새로이 출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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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군의 전력은 날로 증강되고,
의진은 무기롸 군량이 바닥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 되자, 최세윤 대장은 전략을 바꿔 전체 의병을
4개 대대로 편성하고 유격 게릴라 전술을 감행하여 흥해, 영양, 진보, 안동
등에서 크고 작은 전과를 거두었다.특히 이 무렵에 와서 포항지역이 산남의진의 주
활동 근거지가 되었고, 한말 의병운동사에 포항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놓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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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08년 7월 오늘날 경주시 양북면(옛 장기군 내남면)에서
체포된 최세윤 대장은 대구로 압송되어 3년에 걸친 고문과 회유를 견뎌내고
1911년 11월 대구재판소에서 10년형을 언도받아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8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1916년 8월 9일 11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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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최세윤 대장이 체포되면서부터 산남의진도 구심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산발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것마저도 한계상황에 다다랐다.
격전을 치룰 때마다 의병수의 30%이상 전사하는물리적 참상으로 전력의 피해가 컸고,
많은 지휘관과 군병들이 하나 둘 체포되어 살상을 당하자 남은 병력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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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산남의진은 1906년 2월 이 땅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명실공히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겠다는 성스러운 뜻을 품고 구국의
횃불을 든 지 4년여 만인 1909년 그 의로운 횃불을 민족의 가슴속에만
영원히 꺼지지 않게 밝혀 놓은 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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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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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문중의 기념촬영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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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사 입구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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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 몇해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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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남의진의 발상지가 입암이라니 고증이 된것인지? 단오공이 전사하신곳이기는 한데!
군평이라는지명은 의진의 군대가 훈련을 했기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는데!
산남의진에는 그 때 우리 대소가의 토골할배(휘 치석), 다산할배(휘 치우), 지일할배(휘 치화), 새미할배(휘 진소),께서 참여하셨으니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