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 개발로 약진하는 기룡마을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기룡 지도자 오 석 일
동도교 이주민촌 마을
이 마을은 전주에서 정읍방향으로 18km지점쯤 구성산 아래 위치한 마을로써 1924년 강원도 지리학자인 최담과 그의 매형인 장병욱 씨 등 2세대가 외롭게 살고 있었던 곳으로 1949년에 동도교인 18세대가 종교 따라 이주 정착하여 자갈과 잡초로 우거진 이곳에 취락을 형성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날이 갈수록 생계문제가 심각해지자 황폐한 땅을 개간하여 호밀과 옥수수를 재배하여 죽으로 연명하면서 노인과 어린이들은 산에서 땔감이나 약초 등을 채취하여 이 마을에서 약 3km떨어진 원평 시장에 내다팔고 젊은 남녀들은 남의 집 고용살이가 대부분이었고 몇몇 젊은이들은 작업단을 조직하여 집단 품팔이로 겨우 식생활을 유지해 나가며 살아온 가난하기 그지없는 마을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새마을금고 육성
새마을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자 이 마을의 지도자 오석일씨는 가난에 묶여 있던 이곳 주민들에게 "허리끈을 졸라매고 전 마을이 대동단결하여 우리도 잘 살기위한 새마을운동을 전개해보자"고 만나는 주민마다 설득하고 마을에서 좀 잘사는 가정을 찾아 낙후된 마을을 개발하는데 힘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 73년 봄에는 새마을연수원에 입교하여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이수하고 돌아와 그곳에서 배우고 익힌 새마을정신을 토대로 잘살기 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볼 것을 결심한 지도자는 전 주민을 대상으로 새마을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새마을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업자금이 필요하므로 마을의 몇몇 유지들과 더불어 자금조달의 필요성을 마을주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세히 설명하면서 새마을기금 조성과 새마을금고를 설치 운영하는데 주안을 두고 밤과 낮이 없이 열심히 주민설득에 나섰으나 마을주미들은 "우선 먹고 살기에도 어려운 실정인데 마을금고가 웬말이냐?"며 주민들의 외면으로 중단을 할까 하는 위기에 처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하여 주민들을 설득하고 애원하여 산에서 채취한 땔감과 약초판돈, 품팔이와 작업단에서 번 품삯 중에서 한푼 두푼 거두어 새마을사업 기금과 새마을금고 자금을 조금씩 적립하기에 이르렀다. 고난과 시련을 극복한 결과 어느 정도 새마을금고의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단합된 주민의 힘을 이용하여 새마을사업을 추진 할 수 있는 기반의 원동력을 만들었다.
오지 낙후마을의 대 역사
새마을금고를 만든 것에 자신을 얻은 오 지도자는 수시로 전 주민들에게 새마을교육 시 익힌 새마을의 지도이념을 인식시키기 위한 정신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처음으로 정부에서 지원된 양회 400대를 인수하여 새마을운동이 주민에 혜택을 주는 것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주기 위하여 가가호호의 환경개선에 착수하여 담장개량 장독대개량 사업 등에 주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마을 공동사업으로 안길확장 진입로 개설 등의 사업을 전개하여 낮에는 물론 밤까지 횃불을 밝혀 들고 낙후된 마을의 오명을 씻기 위해 마을의 대역사를 시작했다. 4차의 주민총회를 거친 치밀한 사업계획과 부녀자 청소년 장년층을 3개조의 공동 작업반으로 편성하여 집안 가꾸기 사업에서부터 마을권 사업으로 추진하였고 마을안길 확장 작업장의 모습은 마치 전쟁으로 폐허화 된 것처럼 파 해쳐졌다. 하루하루 마을의 모습이 달라지자 이에 흥미를 느낀 주민들은 자진해서 새마을사업장에 나오게 되었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철통같이 굳게 단결된 이 마을 주민들은 "새마을은 공휴일이 없다"라는 목표 아래 활기찬 모습으로 새마을사업 추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새마을운동에 몸이 단련되고 생활화됨에 따라 사업의 능률이 올라 모든 사업이 항상 계획보다 앞당겨서 완결되었다. 1973년 특별지원금 150만원으로 소하천 250m의 석축공사도 끝냈으며 1874년 특별지원금 100만원으로는 상전 0.8ha를 조성하였다. 이처럼 엄청난 새마을사업을 완성한 이 마을은 급기야 1974년도 말에 기초마을에서 지랍마을로 마을수준이 일약 승급되는 영광도 뒤따랐다.
또한 이 마을 주민들의 노고와 지도자의 지혜가 널리 부각 되자 전국도처에서 선진마을 시찰단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1975년 8월 8일엔 우수새마을 시찰차 국무총리일행이 다녀가 양회 700대와 위로금 20만원을 하사하고 주민들의 노고를 치하하였으며 이 하사품과 하사금으로는 50평 규모의 공동작업장을 건립하고 TV 1대를 구입 전 주민들의 위로에 크게 기여도 하였다.
이에 보람을 느낀 주민들은 새마을에 대하여 자신과 용기가 충천하여졌고 전 주민들의 총화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더 한층 굳건하여 졌다. 이처럼 하나로 뭉쳐진 이 마을 주민들은 더욱 잘살아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새마을사업을 추진하여 간이급수시설 마을회관 공동목욕탕 등 복지 새마을사업 분야에 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각종 소득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13.2ha의 과수단지 조성과 0.8ha의 양묘장 설치 1.0ha의 엽연초 재배 5.0ha의 양어장 시설 4.3ha의 상전 조성은 물론 축산증식으로 양계 15,000수 양돈 255두 비육우 130두 유우 80두를 대량 사육하고 있으며, 그간 새마을사업 추진의 원동력이 된 새마을금고 육성사업도 총 자산이 1,900만원으로 증식되었고 대출에 있어서도 영농자금 30% 축산자금 20% 학자금 10% 주택자금 10% 기타 사업자금 30% 등 건전하게 운영하고 있으며 79년도 말엔 2,000만원이 초과 달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역경의 고난을 이긴 보람
총 56가구에 324명의 주민이 새마을정신을 신앙으로 삼고 지난 8년 동안 새마을운동을 지속한 결과 농경지 50.7ha로 호당 0.9ha에 78년 말 호당소득 390만원의 소득을 달성한 소득원이 다양한 부자마을이 되었고 1979년도 호당소득 전망은 주곡에서 1억 900만원 잠업에서 1,000만원 과수에서 2,300만원, 양어에서 4,200만원, 축산에서 3,200만원, 엽연초에서 300만 원 등으로 호당소득 468만원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되며 70년대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지도자를 정점으로 중단하지 않고 끈질긴 노력과 슬기로 가난을 추방하고 30년만인 금년(1979년) 여름철에는 노인 경로대잔치를 베풀었다. 환희에 찬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30년간의 경과보고와 10년간의 새마을사업 실적 평가분석에 이어 80년도 새마을사업 추진계획에 따른 마을 숙원사업을 책정하였으며 취락이후 30년간을 고난과 역경 속에서 묵묵히 살아온 노인들을 위로하고 전 주민의 총화를 재 다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이 마을은 70년도 호당소득이 불과 20만원 이었던 것이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마지막 해였던 76년도에 145만원으로 7.2배 뛰고 제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마지막 해인 81년도에는 무려 728만원으로 껑충 뛸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70년도에 비교해 본다면 상상도 못하는 고도성장으로서 무려 36.4배나 될 것이다.
다가 온 복지농촌의 푸른 꿈
이처럼 가난과 고난의 역경을 슬기롭게 딛고 일어선 집념과 의지로부터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 마을은 30년 전에 형성된 구 주택을 철거하여 그곳에 축산단지를 조성하고 마을 앞에 새로운 취락구조를 개선, 주거지와 축산단지를 완전 분리시켜 위생 문화 복지농촌을 건설하여 80년대 자영마을 시범교육장으로 육성 활용할 계획을 서두르고 있으며 오늘의 풍요로운 소득원 개발을 지난날의 체험을 교훈삼아 근검 협동으로 80년대 자영마을 육성에 기수가 될 것을 재확인 하면서 복지농촌의 푸른 꿈을 다듬어 가고 있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1979 내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