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마부(馬夫), 펄벅과 농부(農夫), 잇사(一茶)와 파리 (2)
펄벅과 농부(農夫)
사람이 동물을 다루는 것을 보고 니체와 펄벅(Pearl Buck)은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펄벅이 1960년 늦가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1960년 11월 1일부터 9박 10일간의 일정으로 내한하였는데 대구, 경주, 부산으로 이어지는 4일간은 여행을 하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강연을 하였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로 펄벅의 농부와 소달구지, 까치밥과 홍시에 대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그녀는 자연과 동물을 배려할 줄 아는 경주 사람들 아니,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엿보았던 것이었다.
그 녀가 늦가을에 군용 지프를 개조한 차를 타고, 경주로 가는 길이었다. 해질 무렵, 노랗게 물든 들판 여기저기에서 추수하던 농부들은 하루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차가 경주시 안강(安康) 지역을 지날 무렵, 볏단(볏가리)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농부도 지게에 볏단을 짊어지고 소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펄벅은 동행하는 통역을 통해 농부에게 왜 소달구지에 짐을 싣지 않고 힘들게 가느냐고 물었다. 농부의 대답은 소나 자기나 하루 종일 일해서 힘든 것은 마찬가지니까 짐을 나누어서 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 대답을 듣고서 그녀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왜냐하면, 펄벅의 생각으로는 농부가 힘들게 지게에 볏짐을 나누어서 지고 갈 것이 아니라, 달구지에 짐을 싣고, 농부도 타고 가면, 아주 편할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소의 피곤함을 배려하는 농부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정황은 우리네 농촌에서는 흔히 있는 것이었고, 농부들에게는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하게 여기고, 함께 살아가는 식구처럼 생각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생경한 정경이어서 그녀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펄벅은 그때의 감동을 “저 모습 하나로 한국에서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다 보았다. 농부가 소의 짐을 거들어주는 마음으로 보면서 한국의 위대함을 충분히 느꼈다.”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펄벅은 우리나라와의 소중한 인연을 남겨놓고 있다. 펄벅은 1964년 펄벅재단(Pearl S. Buck International)을 세웠다. 평생 모은 돈일 수도 있는 700만 달러를 희사해 미국에서 펄벅재단을 만들고 이듬해 한국을 시작으로 일본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태국, 베트남에 차례로 지부를 설립해 혼혈 고아들을 보살폈다.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柳一韓)의 중국계 미국인 아내 호미리(胡美利)와 친분이 있던 펄 벅이 소설의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버려진 미국계 사생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만든 것이다. 1967년 6월에는 경기도 부천시 심곡동에 보육원(고아원) 소사희망원을 세웠다. 소사희망원은 유일한 회장으로부터 유한양행 소사공장 터에 약 3만 평의 부지를 기증받아 세운 것이다. 2006년 부천문화재단은 펄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부지 일부를 매입하고 소사희망원 건물 한 동을 복원하여 펄벅기념관을 세웠다.
[202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