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아이
이용희
엊그제 일이다.
나에게 두 번째 아이인 사진.동시집 ’나 는 할 수 있어‘를 낳았다. 배는 아프지 않았지만 머리는 많이 아팠다. 잉태의 꿈은 벌써 삼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태동이 시작 된지 일 년이다.
지난해에는 낙태를 했다. 이러 이러하게 생긴 아이를 낳아 세상에 선을 보이겠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지만 허락을 하지 않은 어느 기관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유증도 심해서 그리던 밑그림은 어느 구석에 쳐 박히고 번뜩이며 찾아내던 나만의 화각도 접었다. 하나 둘 저장해 두던 세포 하나하나가 아무런 의미도 못 찾고 그냥 스러지나 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이번 여름에 꿈꾸던 두 번째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나는 삼 년 전에 첫 아이를 낳았다. 칠 여년을 공들인 나의 밭에서 수확을 하게 된 것이다. 잠자코 주인의 눈치만 보고 있던 묘목들을 잡풀을 걷어내고 다듬어 세상에 내보였다. 그 때의 그 설레 임처럼 지금 두근거리는 마음은 꼭 같다.
첫 아이와 둘째 아이 중에 누가 더 예쁜지, 귀중한지, 사랑스러운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어린 아기에게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 하고 묻는 바보 같은 어른과 꼭 같을 것 같다.
참 예쁘다. 가슴에 안고 자고 싶을 만큼, 수도 없이 들여다보고 눈을 맞추었다.
“이 아기가 제 두 번째 아기예요.”
이리 저리 선을 보일 사람들을 생각한다. 잊히지 않은 인연의 소중함과 추억도 함께 실에 꿰어져 따라온다. 이 사람 저 사람들의 주소를 묻거나 안부를 물어 우체국을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한 아름 가슴에 안고 단체회원들의 눈을 맞추어가며 내어 주는 나의 손길에서 내 아이는 정을 떼고 달아난다.
출가시킨 아이는 그곳에서 정들이고 살라고 내 손을 툭툭 털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내 아이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여 지는지, 재롱은 부리는지, 마음은 흡족한지, 사랑은 받는지 자꾸 고개가 뒤로 쏠린다.
미련을 닫고 잊을 만하면 카톡이나 문자나 전화가 어미인 나를 깨운다. 그때마다 내 아이가 사랑받고 있다는 안도감에 두 다리를 죽 펴지만 아직 산후통은 남아있어 배를 살살 문질러본다. 예전 아이들을 출산했을 때도 그 가라앉지 않는 산후통을 잠재우기 위해 백일잔치를 했나보다.
출판기념회는 언제 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당연히 코로나로 인하여 생각할 수도 없는 형편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첫 작품집인 사진.수필집 ‘두 번 울던 날’이 탄생하였을 때는 이렇게 조용히 보내지 않았다. 대문에 금줄을 매듯 프랭카드도 걸고 호텔 연회장도 빌렸다. 출판기념회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친인척들에게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제 두 번째 내 아이인 ‘나 는 할 수 있어’를 세상에 내 놓으며 너무도 차분한 나를 돌아본다.
나는 첫째가 딸이다. 예전에는 딸이라면 ‘서운’이라고 이름을 지어 줄 정도로 딸을 반기지 않았던 때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첫 아이인가. 그때만 해도 연회장이나 식당은 생각지도 못했던 문화라서 집에서 차리는 돌상이다. 군청에서 아동복리지도원으로 근무를 하던 때라 퇴근 후의 시간은 별로 풍족하지도 않았을 때다. 그렇지만 온갖 전을 만들고 갖은 나물에 식혜와 잡채, 그리고 잔치라면 꼭 있어야 하는 떡과 소 갈비찜을 올려놓고 친인척들을 모셔서 잔치를 했다. 힘든 줄도 괴로운 줄도 모르던 그 때는 젊어서일까, 아니면 첫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아무튼 그 상차림과 손님접대가 무척이나 설레고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아이는 아들이다. 그 아이의 돌상이 생각난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니 첫 아이보다 더 성대하게 차려졌을 것이 번하지만 내 기억의 그림은 초라하다. 둘째아이의 첫 돌 상에는 어르신들도 많이 모시지 못했다. 어머니도 시부모님도 이미 자리를 함께 하실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신 뒤여서 자리는 많이 비었다. 그 자리를 채울 또 다른 인연들도 많았지만 상이 초라했다고 느끼는 것이 갈비찜 재료가 소갈비에서 돼지갈비로 변한 것이다. 나머지는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확실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부실했던 것이 틀림없다.
누구나 첫 경험을 지나야 둘 째 셋째가 이어지는 것은 분명하고 그렇기에 그 첫 경험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무엇이 더 귀하고 더 월등한가를 너머 처음이라는 그 단어는 신선하기만 하여서 신비하기까지 하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나의 첫 친구 이름을 시작으로 서문을 쓴다. 또한 나의 첫 사랑은 아직 내 곁에서 ‘골치 아픈 사람‘으로 남아있다. 헤어진 첫사랑이 잘 살면 아프다는 ’배‘도 아니고 못살면 아프다는 ’가슴‘도 아니어서 다행스럽기는 하다.
아직 쌓여있는 나의 둘째를 보내려고 친지의 이름들을 적으며 속삭인다.
“미안해, 큰 상 한 번 차려주지 못하고 이렇게 너를 선 보여서.”
지금 돼지 갈비로 상을 차려준 나의 둘째는 배 속에서 엄마의 배를 차며 뛰어 놀던 그 두 발로 세상 밖에 나가 잘 뛰어 놀고 있다. 이처럼 이번에 순산한 나의 두 번째 작품집도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사랑받고 살겠지 생각하니 번거로운 형식쯤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21.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