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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서라벌 포위와 광개토대왕의 삼국통일을 좌절시킨 후연
BC 290년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니 요동과 길림땅 2천리를 빼앗겼으며 BC 108년에
한무제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망한 이래 우리나라는 100회에 달하는 외침이 있었는데 말갈족
이나.... 여진족 또는 왜구가 300명 이상 무리를 지어 침입해온 것 까지 포함하면 970회에 이릅니다.
우리나라가 침략한 횟수는 54회니 고구려는 12년 한나라를 침공한 이래 37년 무휼이 낙락을
습격했고 105년 태조의 요동침략과 244년 동천왕은 2만으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을
공격했고 311년 미천왕때 서안평공격 및 385년 고국양왕이 4만으로 요동의 현도를
습격했고 광개토대왕은 395년에 거란을 습격하고 402년 숙군성을 공격했으며 404년과
407년 후연을 침략했고 598년 영양왕이 말갈기병 1만으로 요서를 침공하는등 26회에 이릅니다.
백제는 498년 탐라국을 정벌했고 동성왕때에 요서와 진평으로 진출했으며 신라는 208년 포상 8국을
격파했고 이사부는 512년 우산국을 정벌했으며 733년 발해 남부 함경남도지방을 침공했으나
눈으로 실패했고 819년 3만을 당에 파병해 운주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진압하는등 4회이니
삼국을 합치면 32회에 달하는데 부여, 동예, 옥저, 마한, 가야 등 침공은 같은 민족이라 제외합니다.
고려는 918년 유금필이 금강산 북쪽 여진족을 공격했으며 이후 평안도 땅을 침공해 평안북도 서부
강동 6주까지 차지했고 천년간 여진족이 살아온 함경도에는 1107년 윤관이 침략에 나서 9성을
쌓았다가 포기했으며 1274년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900척 전선애 15,000명이 가마쿠라 막부의
일본 규슈를 침공했고 1281년에는 다시 전선 900척에 27,000명이 규슈를 침략했으나 실패합니다.
원나라 요청으로 1354년 최영의 2천 출병과 1356년 공민왕은 유인우로 하여금 쌍성을 공격해
찾았고 1357년 인당은 서안평을 공격했으며 1370년 1월 이성계는 1만 5천으로 졸본의
오녀산성을 침공했고 그해 10월에는 지용수와 이성계등이 요동의 동녕총관부를 공격
했으며 우왕때인 1388년에는 이성계와 조민수가 5만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치러
가다가 회군했고 1389년 공양왕때는 박위가 100척으로 대마도를 침략하는등 14회에 달합니다.
조선은 1396년 태조때 김사형이 전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공격했고 1419년 세종때 이종무가 다시
대마도를 침공했으며 1416년 조연이 천년간 함경도에서 살아온 여진족을 공격해 파아손
을 몰아내고 경원도호부를 설치한 이래 1433년에서 1443년에 걸쳐 김종서와 이천이
함경북도로 진출해 6진을 설치하고 이종무가 평안북도 동북 지방에 4군을 설치
했으며 1619년 강홍립이 1만5천을 이끌고 후금을 향했고 1658년 나선정벌등 7회 입니다.
삼국시대 32회 + 고려 14회 + 조선 7회에 월남전까지 합치면 모두 54회에 달하는데.... 2차대전후 프랑스는
옛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1946년 베트남을 침공해 8년간에 걸친 전쟁 끝에 디엔비엔푸가 함락당하니
1954년에 제네바협정을 맺었으나 남북 베트남 통일 총선거는 공산당 호치민이 대통령이 되는걸 막으려는
미국의 입김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때 프랑스가 세운 괴뢰 정부인 월남이 거부하니 베트콩이 생겨납니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서는 하노이를 폭격해 월남전쟁이 발발하는데 한국군은 5만명이
파병되니 연인원 313,000먕 중에 5,1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부상했으며 고엽제환자 134,000
명이 발생했는데 소총은 물론이고 매일 전쟁수당을 미군으로 부터 달러로 받았으니 후에왕궁
박물관에 한국군은“Puppet Army”로 표기해 두었으니 미군의 부용국으로 “괴뢰군”이라는 뜻일까요?
이상이 우리나라가 다른나라를 침략한 사례이고 반대로 침략을 받은 것은 100회에 달하는데
말갈이나 여진족에 왜구등이 300명이상 무리를 지어 침입해온 것 까지 포함하면
더 많으니 ‘우리나라 역사’님은 970회에 이른다는데 그중에 일본이 714회라고 합니다.
1) 신라시대 왜구(삼국사기) 20회, 2) 고려시대 왜구(고려사) 515회, 3) 조선시대 왜구
(조선왕조실록) 178회 4) 일제 침략(1905∼1945) 1회, 합계 714회 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陵碑)에 396년 병신년 기사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인데 한국, 일본, 중국 및 북한 학자들의 해석
은 여러가지로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396년에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로 해석됩니다.
다르게는 “백잔․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아직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그리고 왜(倭)는
신묘년(391)부터 무엄하게 건너왔기 때문에 왕께서 백잔과 왜는 공파하고 신라는 신민으로 삼았다.”
인데 재일교포 이진희씨는 아예 일본 참모부에 의해 비문이 조작되었다는 설을 제시했지만
중국의 왕건군은 실제로 비와 여러 탁본을 조사하고는 탁본을 위해 회칠한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399년 신라 사신이 말하기를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고 성들은 파괴되었으며 노객은 천민이 되었
으니 왕에 의탁하려 명을 청한다”고 하니... 광개토대왕이 구원을 허락하는데 “400년에
5만의 보기(步騎)를 파견하니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 까지 왜군이 가득한데 관군이
이르자 왜인이 퇴각하는지라 추격해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김해 분산성) 에 이르니 항복하였다.”
이때 400년에 왜군과 협력한 김해 금관가야도 사실상 멸망했으니 후퇴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는데.... 532년 신라 법흥왕때 이사부의 침공을 받고 항복하는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이름을 쓰지만 잔존세력으로 보며 근거지도 동래 복천동 고분 일대가 아닐까 하고
짐작되는데 삼국사기에 보면 왜군이 신라를 침략한건 20회이고 서라벌까지 이른 것은 5회 입니다.
고구려군 5만이 신라와 가야를 장악했으니 이제 "고구려에 의한 한반도 통일" 이 이루어 질 순간에
고구려군은 황급히 철수해서 북쪽으로 돌아갑니다. 400년 정월 광개토대왕이 후연에 조공
했으나 2월에는 후연의 모용희가 3만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해서 5천
포로와 700리 땅을 차지한 것인데 광개토대왕은 병력이 없으니 두 성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때는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이니 5년전인 395년 후연의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 에게 8만을
주어 북위로 진격시키니 탁발규는 유인전술로 후퇴하다가 11월 참합피에서 기습해 후연군을
격파하자 이듬해 모용수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위를 정벌하던중 서전에서 승리했으나 참합피
에서 병이 깊어져 죽으니 모용보가 황제에 오르는데 북위는 396년 9월부터 후연으로 진격합니다.
397년 10월 북위에 수도 중산을 뺏긴 선비족의 후연 은 반란까지 일어나자 요하의 용성으로 후퇴하니
영토와 인구가 30% 미만으로 쪼그라 든채 북위와 공방전 을 벌이던중 고구려군이 남진했다는
소식에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후연에서 다시 반란으로 황제 모용성이
죽자... 신성과 남소성은 적의 방비가 굳은지라 대신 402년에 우회해서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404년에 두 성을 수복(?)하고 요하 연군을 공격했으며 405년에는 요동성을 포위한
후연군을 격파하고 406년에는 목저성을 공격해온 후연군을 물리쳤으며 407년에는 5만
대군을 동원해 대거 후연(혹은 백제?)을 공격했는데 이 해에 한인(漢人) 풍발이 모반을
일으켜 국왕 모용희를 죽이고 고구려인의 후예인 고운(高雲)이 왕위에 올리니 북연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인이 왕에 오른지라 광개토대왕이 동족이 왕이 되었으니 전쟁을 그치고 우호관계를
시작했다고 말하는데 그 할아버지는 50여년전 전연의 침입으로 수도 환도성이 함락돼 인질로 끌려간
사람으로 고운은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모용운이 되었으니 모용씨 황족이라 한인들이 바지사장
으로 내세웠다가 2년후 모용운을 살해하고 풍발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지만 436년 북위에 망합니다.
후연왕 고운(高雲)의 얘기를 했는데 고구려와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는 악연이니 전연(前燕)은
342년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을 함락시키자 고국원왕은 단기(單騎)로 달아나니
모용황은 궁궐을 불사르고 도성을 파괴한후 미천왕릉(美川王陵)을 발굴해 시신과 왕모(王母)와
왕비에 도성 백성 5만명과 노획한 보물을 끌고가니 고구려는 수도를 동황성(東黃城 강계)으로 옮깁니다!
전연은 모용한의 계책으로 왕우에게 1만 5천 소수 병력을 평탄한 북로로 보내고 4만의 주력은 모용황
왕이 직접 지휘해 험한 남로로 공격하니 고구려는 적의 대군이 북로로 온다고 여겨 정예군을
북도에 파견해 적을 쳐부수고 환도성으로 귀환하는 중인데, 남도에서는 아불화도가가 분전
했으나 모용선비 선우량의 저돌적인 공격에다가 좌장사 한수에게 아불화도가가 죽으니 패배합니다.
모용선비는 환도성(국내성)을 함락한후 왕비와 태후 주씨에 미천왕 시신에 5만에 달하는
국내성 주민까지 끌고가니 발걸음이 느린 저들을 두고 오늘날 우리는 북도에서 돌아온
고구려군이 효성이 깊은 왕이 태후와 미천왕의 시신을 염려해서 추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끌려가는 5만여명 포로라도 찾아오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간이요, 하물며 저 5만은 수도의 주민들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인데? 북도에서
군대가 너무 늦게 귀환했거나 아니면 피로로 인해 당장 추격에 나설수 없었거나 ....
그도아니면 험한 남로이니 산길로 접어들면 대군이라 하더래도 선두에는
소수만 설수 있는지라 적이 곳곳에서 매복해 기습하면 낭패를 당할까 염려한 것일까요?
전연이 공격해온 저 전쟁의 원인을 살피건대 요하의 모용 선비 세력이 너무 커지자 동진의 평주
자사 최비 는 고구려에 협공을 제안하니 미천왕은 319년 단선비, 우문선비 와 함께 모용 선비
의 수도 극성을 포위했는데.... "반간계" 에 걸려 우문선비를 의심한 고구려군이 후퇴해버리자
배신당해 홀로 남은 우문 선비를 격퇴한 모용 선비 는 동진의 평주 까지 거두어 세력이 커집니다.
337년 모용 선비의 모용황이 전연 을 건국하자 다음해인 338년 흉노 별종 갈족인 석호의
후조가 고구려 요동반도에 30만석 군량미 를 실어다 주며 후조 + 고구려 + 단선비 가
모용 선비를 협공 하자고 제안하고 극성을 포위했으나... 화공으로 후조군을 물리친
모용선비 는 4년후 보복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을 함락시켰던 것입니다!
고구려 수도 는 그 전에도 함락된 적이 있으니 244년 고구려 동천왕은 2만 병력으로 비류수
에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 과 대진해 서전에서는 6천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추격
하다가 역습을 당해 대패하니 불과 1천명만 고구려로 도망쳤는데... 관구검은 추격해 환도성
(국내성)을 점령하니 왕이 낙랑으로 도망치는지라 관구검은 숙신까지 진격해 기공비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서울 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1700년 전에는 수도의 비중이 지금 보다
훨씬 커서 나라의 절반 이라 일컬어지는데... 수도가 함락되고 도성 백성의 대부분인
5만명이 포로가 되어 연나라로 끌려갔으니 고구려 나라가 망한거나 진배없는지라!!!
고국원왕 은 343년 2월 왕세자를 연나라에 보내 1,000여 가지의 보물을 바치면서 항복합니다.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해 미천왕의 시신을 겨우 돌려받으면서 정동
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되는데 전연은 항복의 진정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345년에
남소성공격하자 왕은 인내하면서 구원군을 보내지 않으니 성은 함락되었고 이후 왕비를 돌려
받았으며 모후 주씨는 10여년이 흐른 355년 모용준 때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로 돌아오게 됩니다.
수도와 백성을 잃은 고국원왕은 전연에는 저자세를 취하는 한편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백제를 치다가 369
년 치양에서 패하고 371년 태자 근구수의 역습을 받아 평양에서 전사하니 위기에 빠지는데.... 다행인
건 전 해인 370년에 고구려와 원수지간인 모용선비족의 전연이 저족이 장안에 세운 전진에 망한 것입니다.
아들 소수림왕은 전연이 망한후 황족으로 섭정 격인 태부(태재) 모용평이 망명해 오자 묶어서 전진
에 바치니 우호관계를 맺어 한숨을 돌렸으며 전진은 중 순도(順道)를 파견해 불상과 경문
(經文)등을 보내주니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고 왕은 태학을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
하며 세력을 회복해 375년 백제 수곡성을 빼앗고 다음해 전진에 조공하니 중 아도를 보내줍니다.
다시 고구려에 불운이 닥치니 전연을 멸하고 383년 화북을 통일한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이 100만 대군
을 이끌고 남하하자 동진(東晉)의 사현(謝玄)이 비수대전 (淝水大戰)에서 전진군을 대파하니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서 달아나는데, 이때 종군한 선비족 모용수(慕容垂)는 북쪽으로 돌아가 384년 화북의 업(鄴)에서
후연(後燕)을 건국하니 385년 고국양왕은 요동군과 현도군을 취했으나 다음해 모용농에게 다시 뺏깁니다.
391년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선대 두 왕이 국력을 기른 덕분에 4만 대군을 동원해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는다며 백제를 침략해 백제 및 왜군과 싸우던중 비수대전(淝水大戰)
결과 건국된 후연(後燕)의 모용보로 부터 396년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 에 책봉되니
평화를 유지하는데 397년 후연은 북위의 침공으로 중산을 뺏기고 수도를 북쪽 용성
으로 옮겼다가 고구려군이 남하하자 400년에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과 남소성을 뺘앗게됩니다.
전연이 망한 덕분에 고구려는 일어설수 있었는데... 전진의 부견 이 383년 비수대전에서 동진의 사현
에게 참패하지만 않았더라면 나라를 유지했을테니 신하인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할수가 없고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관계를 이용해 남진시킨 5만 대군으로 가야와 신라를 아우른후
북쪽과 동쪽, 남쪽에서 백제를 도모했더라면 고구려에 의한 3국 통일이 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백제의 침공에 시달리던 풍전등화 같은 나라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에 갔다가 실패하고 이번에는
왜국에까지 원군을 청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귀국한후 3번째로 당나라로 갔으니... 당태종과
밀약하기를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한다고 약속했으니
평양을 함께 함락했으나 통일 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까지라! 이를 어찌하리오!
342년 고국원왕이 전연(前燕)에서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된건 부득이한 일인 반면 광개토
대왕이 396년 후연(後燕)의 모용보로 부터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 에 책봉된건 5호 16국
시대에 후연이 가장 강한 나라인 탓도 있지만 조부를 죽인 백제를 침략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데... 전연도 배후의 고구려를 제압해야 전진과 싸울수 있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배후에 적국이 있으면 다른 나라와 전쟁하기는 어려우니 독일과 소련, 소련과 일본은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며 일본의 전국시대에 가이국 다케다 신겐과 스루가국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가미국 호조
우지야스는 원수지간이었으나 복합 결혼으로 3국동맹을 체결한후 배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신겐은 북쪽 시나노로, 요시모토는 서쪽 오와리로 우지야스는 동쪽 무사시노로 출진하지요?
태왕의 아들 장수왕 은 백제왕과 경쟁이라도 하듯 북위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
왕에 책봉되고 남조인 동진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급되는데.... 이는 한성의 백제를 침략해 멸망시키기 위해
배후를 안정시켜야 하니 불가피한 일이라 봅니다만 이후 영류왕 까지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양왕의 경우는 좀 다른 것이 수나라에서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다음해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조공을 바쳐 시간을 번 다음 598년 말갈기병 1만기를 인솔해 요하 영주를 습격하자
문제가 30만 대군을 보내니...“요동(遼東) 분토(糞土)에 있는 신(臣) 원" 운운하는 사죄사를
보내 용서를 받고 다음 기회를 노리니 612년 양제의 113만 대군을 살수대첩으로 물리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