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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잘재잘이야기방★ 스크랩 나혜석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
엄지샘 추천 0 조회 3 09.11.30 18: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혜석(羅蕙錫, 1896. 4. 18 ~1949 서울)

 

 

1. 길 위에서의 죽음..

 

1949년 3월 14일 <대한민국 관보>는 한 행려병자의 사망을 실었다.

 

사망 석 달만이었다.

환자는 다른 사람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나이 53세

본적 미상

주소 미상

 

가진 것이라곤 헌옷 한 벌이 전부였다.

남긴 거라곤 이름 석 자뿐이었다.

 

나.혜.석.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대표적 신여성으로 수많은 '최초'를 남긴 여성.

 

나혜석, 그녀는 왜 길 위에서 홀로 죽어가야 했을까.

 

행려병자가 된 천재화가 나혜석.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숱한 화재를 뿌렸던 그녀.

그러나 정작 제대로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그녀는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세상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나혜석은 무엇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질타를 받아야 했을까... 

 

 

2. 사상 초유의 '이혼고백서' - "정조는 취미다"

 

1934년 8월 경성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의 반감과 불쾌감은 극도에 달했다.

한 잡지에 실린 글 때문이었다.

분노한 이들은 잡지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글인가?

 

고려대 중앙도서관에서 찾아봤다.

당대 대표적 월간지 <삼천리> 1934년 9월호에서 그 실체를 확인했다.

 

"흥미 위주, 대중 위주의 통속적 잡지입니다.

1934년 8월, 9월호에  나혜석이 '이혼고백서'를 실었습니다.

이 책이 세상을 발칵 뒤집히게 했습니다."

 

'이혼고백서'

이혼한 여자가 직접 적은 사상 초유의 이혼 경위서였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1934. 8월, 9월호 '이혼고백서'중에서    

 

그것은 조선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람들은

저자 나혜석이

추문때문에 이혼한 여성이라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여자가,

그야말로 외간 남자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저렇게 이혼백서를 써내고 발표하고 뭐 그랬나...

사회적 반감이 막 끓어올랐던 것 같습니다."

                                                                            - 나영균(80살, 조카)

 

그녀는 파격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신생활(新生活)에 대하여'

                                                   1935년 2월호 <삼천리>

 

당시 여성의 목숨과도 같은 정조를

선택의 문제로 치부한 일대 사건.

 

나혜석은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에 단골 소재가 되었다.

 

1979년 영화 '화조(火鳥)'

최고의 여배우 윤정희가 출연한 작품.

영화에서 나혜석은 바람끼 많은 여자로 파경을 맞이한다.

 

"당대 여성으로서 너무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극대화했습니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해서 돌을 맞아서 불행하게 갔다'라는 관점으로

흥미를 유발하여 사람들의 화재거리로 다루었습니다.

 

욕망에 휘둘린 '모던 걸'은 결국 파멸한다는 전제로,

부도덕한 여자, 음탕한 여자의 불행한 최후,

이것이 반 세기 이상 계속된 나혜석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나혜석보다 부도덕한 나혜석이라는 평가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 유지나 교수(동국대 연극영화학과)

 

서울시 대방동 <여성부 여성사 전시관>

각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근대 여성 선구자 15명을 선정해서 모시고 있다.

이곳에 나혜석이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녀 재판을 받는 듯 비난 받았던 그녀가 어떻게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까?

 

 

3. 여자유학생 - "여자라기보다 먼저 사람이다! "

 

1914년. 4월. 9일.

<매일신보>는 한 여자유학생의 기사를 싣고 있다.

선망받던 남보다 출중한 재주를 가졌던 나혜석.

당시는 남자도 유학 가기 힘든 시절이었다.

 

일본 도쿄 남쪽 사가미하라시.

당시도쿄에 있었던 100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대 <여자미술대학>

나혜석은 이곳을 다닌다.

 

근대 초기, 여성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곳은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이곳이 유일했다.

나혜석은 수원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곳에 진학한 것이다.

 

"이것이 1918년 3월 졸업생 앨범입니다.

있습니다. 이것이 나혜석씨입니다.

 

(당시 서양하 전공은) 보기 드문 경우였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아주 적은, 겨우 몇 사람밖에 안 되는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 자수, 조화... 그런 전공을 했습니다."

                                           -나이토 사치에(여자미술대학 역사자료 담당)

 

서양화과 고등사범과 나혜석.

수백 명의 졸업생중 유일한 조선 여성이었던 나혜석.

그녀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비록 미술대학이었지만 당시 대학생의 90%는

재봉과 자수 등 여성과 친숙한 전공을 선택했다.

 

서양화를 전공한 학생은 전체의 2~3%에 불과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혜석은 남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학적부입니다.

실기 성적도 매우 좋은 점수를 받았고

학과 성적도 상당히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3학년 때 평균이 90점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상당히 좋은 성적입니다."

                                             -나이토 사치에(여자미술대학 역사자료 담당)

 

동경여자유학생 모임.

나혜석의 이름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녀는 선각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대학 2학년이 되던 해,

나혜석은 조선유학생들의 잡지인 <학지광>에 글을 발표한다.

 

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상을 그린 현모양처의 실체를 비판한 글이었다.

나혜석은 현모양처의 이상형이 여성을 노예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현모양처가 가지는 허위의식을 만천하에 드러낸 겁니다.

그 허위를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여성에게만 요구하는 교육주의다,

그래서 '현모양처를 여성에게만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성도 말하자면 주체적인 존재,

사람으로 똑바로 서야 되겠다는 글이었습니다."

                                               - 서정자 교수(초당대 부총장, 국문학)

 

그녀는 여성이 시대의 선각자가 되어

스스로 실력을 키우고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여성의 권리를 운운하는 딸이 아버지는 못마땅했다.

 

"저는 혼자 살아요."

"이년아. 혼자 어떻게 사니."

"제가 벌어서 저 혼자 살지요."

                                  - 1935년 7월 <삼천리>, '나의 여교원시대'중에서

 

당시 나이 19살.

나혜석은 어떻게 그 나이에 여성의 권리를 의식했을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 나혜석의 생가터가 있다.

그녀는 수원에 이름난 가문 출신이었다.

 

"나혜석의 아버님 되시는 나기정(1863~1915)씨는

구한말에 사법관을 지내시고

그 다음 시흥군수를 거쳐 용인군수를 역임했습니다."

                                                               - 유동준 회장(나혜석 기념사업회)

 

수원의 유지로 지방 행정관을 하며 부유한 생활을 하던

나혜석의 아버지에겐 다른 여자가 있었다.

 

딸인 나혜석보다 불과 한 살 많았다.

나혜석은 딸벌 되는 첩때문에 평생 눈물짓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살았다.

 

그 첩은 아버지의 호적에도 버젓이 올랐다.

어지간한 조선 남자중에 첩을 한둘 두지않는 남자가 없던 시절이었다.

축첩은 나혜석의 어머니의 고통이자 모든 조선 여자들의 고통이었다.

 

그녀는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담아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나 알지만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축첩에 대해 말한다.

 

나혜석의 첫소설 <경희>.

 

"첩이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을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춘원 이광수도 단편소설로 등단했고

김동인이나 염상섭, 현진건이나 전영택이나 전부 여성 문제를 소설로 썼어요.

그런데 그들은 다 무얼 가지고 썼느냐

전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가지고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남녀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 서정자 교수

 

나혜석은 지식인으로서 조선 여성의 입장과 지위 대변에 앞장섰다.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예요."    

                                      - 소설 <경희>중에서

 

여주공립보통학교.

그녀는 아버지가 학비를 주지 않고 결혼을 강요하자

1년간 교사를 하면서 직접 학비를 낸다.

한 인간으로서 당당히 서기 위해 결코 배움을 포기치 않는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오냐, 사람이다."

                     - 소설 <경희>중에서    

 

1918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난 22세의 그녀에겐 할 일이 많았다.

글과 그림으로 자기 생각을 널리 알리기로 했다.

 

1921년 7월 개벽에 '개척자'

그녀는 자신을 척박한 조선 여성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개척자라 생각했다.

 

"나혜석은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 걸어가야 길이 생긴다.

처음에 걷는 사람은 참 힘들고 가시밭길을 가게 되니까 힘들고 어렵지만

누군가 걸어가면 또 따라오면 길이 생긴다."

                                                             - 윤범모 교수(경원대 미술대)

 

그녀는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 변화와 개혁의 물꼬를 트려 했다.

여자도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

그것이 나혜석의 꿈이었다.

 

"여자도 사람이다." -수원시 인계동 '나혜석 거리'

 

나혜석은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깨달은 선각자이자

그것을 직접 찾기 위해 나섰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고 험했다.

 

 

4. 결혼, 그리고 어머니가 된다는 것!~

 

서울시 중구 정동제일교회.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고딕풍으로 꾸며진 근대 초기 가장 인기있는 서양식 결혼식장이다.

 

1920년 4월 10일. 24세의 나혜석은 이곳에서 결혼을 한다.

신랑은 변호사 김우중이다.

 

나혜석은 결혼후에 더 작품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혼 5개월만에 임신을 하게 되고

나혜석은 그 생소한 몸의 변화에 당황하고 두려워한다.

 

그녀는 잡지 <동명>에 그때의 심경을 고백한다.

'母된 감상기'

그녀는 엄마가 되는 여자의 고통과 감성을 나누고자 하였다.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히 탕 하는 것 같이 들리었다."

 

"나는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뜨이려고 하는 때였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 '모(母)된 감상기', 1923. 1   

 

1921년 4월 28일. 25세.

열 달후 혹독한 신고식이 시작되었다.

 

"어머님 나 죽겠소,

여보 그대 나 살려주오,

내 심히 애걸하니

옆에 팔짱끼고 섰던 부군 "참으시오" 하는 말에

"이놈아 듣기 싫다" 내 악 쓰고 통곡하니

이 내 몸 어이타가 이다지 되었던고."              

                                                     - '모(母)된 감상기' 

 

나혜석은 아이 낳는 고통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어머니가 되는 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곧 젖먹이 키우는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잠을 못자는 고통이 가장 컸다.

 

"이러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기(幾) 개월간 계속 되더니

심신의 피곤은 인제 극도에 달하여

정신은 광증이 발하고

몸에는 종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

                                                - '모(母)된 감상기' 

 

극심한 고통속에서 나혜석은 모성은 본능이란 생각에 회의한다.

결국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까지 표현한다.

 

"엄마가 '자식을 악마로 느낀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여성이라면 언젠가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가 된 여성은

당연히 자식에게 모성애를 느낀다'고 말해오던 것에 대해서

 

전혀 그것이 아니라고,

모성애의 신화를 깨뜨린 것이, 

나혜석의 '모된 감상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 이상경 교수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남성들은 반발했다.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임신이란 것은 두려운 사실이요,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결혼 그 자체부터 부인하고 회피하기 전에는 임신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 백결생, <동명> 1923. 2. 4  

 

나혜석도 맞섰다.

 

"과연 마치 구름 속에 있는 양반에게서

'너희는 왜 흙을 밟고 다니느냐' 하는 비방을 받는 격이 되었다.

씨의 '임신이란 것은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라는 일구를 보면

씨가 능히 알지 못할 사실을 아는 체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

                                                        - '백선생에게 고함', <동명> 1923. 3. 18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임신에 대해서

한 번도 애를 가져보지 않은 '남자가 왈가불가 하는 것은 듣지 않겠다'라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나혜석은 이 글을 임신을 해본 여자들에게 말하는 거니까

남자인 너는 입 다물어라 이렇게 답변한 것입니다."

                                                                  - 김은실 교수 (이화여대 여성학과)

 

나혜석에게 자식은 무엇이었을까?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그녀의 손자 김성민씨는 집안의 오랜 앨범을 간직하고 있다.

80년이 넘은 사진, <나혜석의 사진첩>이었다.

 

신혼시절 사진부터 아이들 사진까지,

특히 공을 들인 건 아이들이었다.

나혜석은 아이들 성장과정을 일일히 사진으로 남기고 꼼꼼하게 메모를 적었다.

 

"이것이 가족 사진입니다.

이분이 미국에 계신 큰 고모님,

이분이 미국에 계신 큰 아버님,

이분이 저희 아버님,

3남 1녀인데,

한 분이 돌아가시고 세 분만 이렇게 남아 계시죠."

                                                                                 - 손자 김성민(55세)

 

아이를 키우면서 나혜석은 비로소 모성애에 눈을 뜬다.

 

"모성애로 인하여 얼마나 만족을 느꼈으며 행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과연 하나 기르고 둘 기르는 동안에

지금까지 애인에게서나 친구에게서 맛보지 못하는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삼천리>, 1934, 9.

 

그녀에게 모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보살펴주고 챙겨주면서 생겨나는 자연스런 감정이었다.

이후 나혜석은 화가로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일상에 최선을 다한다.

 

"나는 결코 가사를 범연히 하고 그림을 그려온 일은 없습니다.

내 몸에 비단옷을 입어본 일이 없었고 1분이라도 놀아본 일이 없습니다."

                                                                                    - <삼천리>, 1934, 8.

 

그러나 가사와 작품 활동을 동시에 하는 것은 큰 고통이 따랐다.

 

"다다미 위에서 차게 군 까닭인지

자궁에 염증이 생(生)하여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또한 매일 병원에 다니기에

이럭저럭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돌아오도록

두어 장 밖에 그리지 못하였다."

                                             - <조선일보> 1926. 5. 20

 

생에 전부였던 그림이 어느덧 고역이 되었다.

그래도 나혜석은 붓을 놓지 않았다.

매해 조선미전에 작품을 선보였고 어김없이 상을 탔다.

 

1926년 제 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천후궁(天后宮)'

마침내 특선의 영광을 안았다.

여류화가로선 최초였다.

 

그녀의 성공은 남편의 명예였다.

 

"남에게 존경받는 아내를 가진 자는 행복스럽다 했지."

"당신 한 턱 하오. 애는 내가 쓰고 좋기는 당신만 좋지."

"그러게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지."

                                                     - '화가로 어머니로'중에서  

 

나혜석은 허탈했다.

능력이 있어도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에 절망했다.

예술가로서의 한계에 더 고통이 밀려왔다.

 

"내게는 근일 고통이 되다시피 그림에 대한 번민이 생겨서

화필을 들고 우두커니 앉았다가 그만 두고 그만 두고 한 때가 많다.

나의 그림은 기교에만 조금씩 진보될 뿐이오

아무 정신적 진보가 없는 것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미워할 만치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 <조선일보> 1926. 5. 20.

 

화가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혜석은 길을 잃었다.

결혼후 나혜석의 모습은 요즘 직장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결혼과 직장 일 모두를 잘 하기 위해 애쓰는

이른바 '슈퍼우먼증후군'을 80년전 나혜석은 경험하고 있었다.

 

'슈퍼우먼증후군(Superwoman syndrome)'은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 할 때 겪는

신체적, 심리적 스트레스증후군이다.

 

하지만 철저한 가부장사회였던 식민지 조선에서 나혜석에게 돌파구가 필요했다.

 

 

5. 파리, 이브의 호기심 - 불륜 그리고 이혼..

 

1927년. 31세.

남편 김우영이 뜻 밖의 제의를 한다.

미국과 유럽 일주여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칠순 노모와 네 아이가 있었지만 나혜숙은 결행한다.

예술로써 자신이 행복해져야 가족도 행복해진다는 생각이었다.

 

부부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로 대륙을 건넜다.

그리고 모스크바, 바르사뱌를 거쳐

한 달 뒤 그토록 동경했던 파리에 도착한다. 

 

나혜숙에게 파리는 도시 전체가 교과서이자 캠퍼스였다.

도시 곳곳에 전시된 미술품들,

박물관에 대가들의 작품들은

화가 나혜석을 눈뜨게 하고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나혜석은 조셉 바라 7번지에 자주 들렀다.

당시 이곳엔 거장들이 운영하는 미술아카데미가 있었다.

 

"당시 이곳엔 페르낭 레제나 앙드레 로트 같은 거장들이

미술을 지도하는 아카데미들이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아카데미가 많았는데 특히 '랑송아카데미'가 대표적입니다."

                                             - 알렉산드라 샤르비에(미술사연구가)

 

1908년 창설된 랑송아카데미에서

나혜석은 야수파 화가 뒤셀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이곳에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단발하고 양복 입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책상에서 프랑스말의 단자(단어)를 외우고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의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 <삼천리>, 1932. 1 

 

         <무희> - 나혜석

 

 

                    <작약> -나혜석

 

                                      

                           <파리풍경> -나혜석

 

나혜석은 파리에서 일본 유학 시절 배울 수 없었던

서구 미술의 진수를 배웠고 그것을 작품화했다.

 

파리에서의 6개월.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을 거쳐 시카고, 로스앤젤리스, 샌프란시스코 등

주요 도시를 두루 돌아 부산항에 도착했다.

 

1년 반이었다.

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눈 뜨게 했다.

 

"이제야 정말 양화(洋畵)에 눈이 떠지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헛일을 한 듯 해요.

헛 그림을 그린 듯 후회납니다."

                                            - <삼천리> 1930. 5

 

귀국후 나혜석이 돌아간 곳은 부산 시집이었다.

대가족에게 돌아온 그녀에게 남편은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나는 이혼을 하겠소이다!"

"애야, 그게 무슨 소리냐. 어린 것들을 어쩌고 이혼이라니!~"

"서방질하는 것하고 어찌 살아요!"

 

불륜은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나혜석은 파리 유학생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최린(崔麟, 1878 ~1958)

3.1운동 33인 중에서 천도교 대표이자 선망받는 정치가였다.

 

최린은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취미와 감성이 비슷한 그에게서 나혜석은 지적 동반자 모습을 발견한다.

 

"과거지사(過去之事), 현 시사 (現 時事), 장래지사(將來之事)를

논하는 중에 공명되는 점이 많았고 서로 이해하게 되었사옵니다."

                                                          - '이혼고백서', 1934. 8

 

그것은 어느 순간 유혹이 되었다.

 

"결코 손을 대서는

아니된다고 한 과실에

손을 댄 것은

뱀의 유혹이었고

이브의 호기심이 아니었나...

 

"나는 확실히 유혹을 받았었고

나는 확실히 호기심을 가졌었다.

 

우리는 황무(荒蕪)한 형극의 길가에서

생각지 않은 장미화를 발견한 것이다.

방향과 밀봉(蜜蜂)중에 황홀하였던 것이다."

                            - '신생활에 들면서' 1935. 2

 

추문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남편에게 알려졌다.

변호사로 당대 저명인사였던 남편에게 그것은 모욕이었다.

 

나혜석은 남편에게 죄인이었다.

1934년 결혼 11년만에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다.

나혜석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디로 갈까.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이 홀로 된 몸 어디로 갈까..."

                                       -' 이혼고백서' 1934. 9

 

주부로서, 또 화가로서 자신을 뛰어넘고자 했던 나혜석.

파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댓가는 참으로 혹독했다.

그녀가 평생 일궈온 명예는 물론 자식과 가정까지 모두 잃게 된 나혜석.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운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며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 '이혼고백서' 1934. 9.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작품활동에 매진한다.

 

그때 그녀에게 빛이 된 건 파리였다.

클뤼니 중세 박물관.

고대 로마의 목욕탕을 개조해서 만든 이 미술관은

2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한 중세 미술의 보고였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물 때 박물관 정원에 

파리에서 가장 오랜 성당문이 전시되었다.

생 제르망 성당문.

 

나혜석은 이 문을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이 나혜석 대표작 <정원>이다.

 

                나혜석 <정원>                       실제 퀼리니 성당문(출처 : 오마이뉴스)

1931년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31년 제 12회 일본제국미술전람회 입선

 

나혜석이 파리생활을 하면서 완성한 이 작품은

1931년 조선미전과 일본제전에 동시 입상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다.

나혜석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는 면목이 섰고 내 일신의 생계가 생겼나이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퍽 행복스러웠사외다."

                                                      - '이혼고백서' 1934. 9

 

자신감을 찾은 그녀는 이듬해 금강산에 머물며 서른 점이 넘는 작품을 그린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머물던 집에 불이 나 작품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혜석은 다시 주저앉고 만다.

 

이혼후 그림은 그녀에게 자식이며 생명과도 같았다.

충격끝에 나혜석은 병을 얻는다.

붓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떨렸다.

점차 몸도 굳어갔다.

 

"걸음이 불편하고,

턱이 덜덜덜 떨리고,

그리고 뿔테안경을 썼는데 눈이, 개개풀린 눈이 확대되어 보였어요."

                                                                   - 나영균(조카, 80세)

 

파킨슨씨병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은 물론 입까지 돌아가버렸다.

사회생활이 쉽지 않았다.

 

시련은 연이어 다가왔다.

 

<나부>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작약>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조선미전에 입선한 작품에 대해 혹평이 쏟아졌다.

 

"이러한 것을 출품한 작자의 사상이 의문이요

출품을 하였더라도 그것을 진열하여 놓은 자의 심사를 모를 일이다.

우대를 한 것이냐? 모욕을 한 것이냐?

불미한 작품에 특선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 <매일신보> 1931. 6. 3

 


          나혜석 <등을 돌린 나부>                      <자화상(1926)>

 

그것은 조선의 남성들이 이혼녀에게 가한 따돌림이었다.

나혜석은 다시 펜을 들었다.

자신이 직접 이혼에 대해 밝히기로 한다.

나혜석은 이 글에서 결혼에서 이혼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정조에 대한 남성들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이혼을 막으려고 경성에 남편을 찾아간 날.

나혜석은 숙소에서 한 여자를 목격한다.

남편이 보란 듯이 기생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1934. 8월, 9월호 '이혼고백서'중에서    

 

"자기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기로 대표되는 여성이 처한 문제들을 드러내 보이고,

 

그 문제에 대해서

여성인 나는,

여성인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열망을 담은 것입니다."

                                     - 이상경 교수(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의도와 반대로 전개되었다.

<신가정> 1934년 10월호.

'이혼고백서'를 가장 격렬히 비난한 것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필요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입니다.

더우기나 당신은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느 여성들에게 나혜석은 정신병자로 비춰졌다.

'이혼고백서'이후 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 곁을 떠나갔다.

 

출중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자라서는 신여성으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이혼녀 나혜석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公憤)과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들을 잃은 나는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空漠)을 바라고 자실(自실)하여 할 뿐입니다."

                                                                        - '이혼고백서' 1934. 8

 

나혜석에겐 단 한 명의 동료도, 지지자도 없었다.

평생 여성의 인간다운 삶을 주장하였지만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당하고 이해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혜석은 세상을 향한 말을 멈추지 않는다.

 

1934년 9월. 34세.

경성에 희대의 소송사건이 일어났다.

 

피고 나혜석.

원고 최린.

 

추문의 두 당사자.

처권(妻權) 침해 위자료 청구 소송이었다.

 

나혜석은 정조를 유린 당했다며 최린에게 위자료를 청구한다.

그와의 추문으로 이혼을 당했으니 막대한 보상을 하라는 이유였다.

 

"여자가 감히

'바람피우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돈까지 받아내려고 한다' 이렇게 생각했겠죠.

 

그러나 사실은 그건 외형적인 것이고,

나혜석이 정말 그 안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남성들에 의해 자행되고 공범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강요,

정조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

거기서 그걸 통해 잃게 되는 여성들의 정신적인 자유의 억압, 

이런 문제를 나혜석은 제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김경일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그녀의 투쟁은 원천봉쇄 되었다.

최린의 압력으로

그녀의 기사들은 조간에서부터 석간까지

모두 삭제되고 자취를 감춘다.

 

나혜석은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엔 정조에 관한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했다.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신생활(新生活)에 대하여', 1935년 2월호 <삼천리>

 

"자기의 판단에 의해 가지고 '그것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사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지

그것을 규범이 여성들에게 '정조는 지켜져야 한다'

혹은 '정조는 지키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그런 사회적인 규범의 내용이 아니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 김은실 교수(이화여대 여성학과)

 

여성을 정조문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냉대와 고립으로 돌아왔다.

경성 진고개 조선관.

1935년 10월 24일 나혜석이 개인전을 열었지만 철저히 외면당하고 만다.

미술계는 물론 언론계 모두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6.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서울 종로 신교동.

이제 그녀는 갈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세상을 떠돌던 나혜석에게 오빠의 집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나혜석의 조카 나영균씨는 당시 고모의 모습을 기억한다.

 

"제 나이보다 10년 더 되었으니 90년 된 집이예요.

여기가 집안에서 뚝 떨어진 방인데

고모가 오시면 어머니가 여기다가 숨겨 놓으셨어요."

 

나혜석은 세상에 눈을 피해 이 방에서 몇 일씩 머물다 가곤 했다.

1941년 당시 45세였던 오빠 나경석(1890~1959)은

나혜석에게 일본 유학을 주선할 정도로

누구보다 동생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다.

 

오빠는 나혜석에게 간곡히 말한다.

 

"몇 년만 숨어지내면

이 시끄러운 소문이 가라앉게 되고

그러면 세상에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나혜석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고

내가 사는 그 방식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한다."

 

나혜석은 숨지 않았다.

계속 지인들을 만나며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며

승려도 일반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틈틈히 작품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때로 살아있다는 것이 괴롭고

때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란다.

살아 있기에

자살도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고

가끔 오욕스럽게 느껴지다가도

살아 있기에 다행스럽다는 기쁨을 맛보는 때도 있거든."

                                                         - '라훌라의 사모곡'중에서

 

치열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나혜석은 때를 기다렸다.

1947년 51세.

그녀는 경기 안양 경성보육원에 머물렸다.

 

당시 대학생으로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화가 박인경(80세)은

나혜석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는다.

 

"내가 그동안에 있으면서 글을 써 놓은 게 있는데

그것을 좀 정서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여전히 나혜석은 글을 쓰고 있었다.

 

"글씨가 힘이 없어요.

그래서 꼭꼭 눌러 쓰지도 못한 흐릿한 글씨였지요.

지나간 과거,

아주 화려했던 파리시절,

꿈 같은 이야기를 거기다가 써 놓으셨어요."

 

그녀는 가장 자유로웠던 날들을 추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은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가 있다 하면 우리는 안심이오.

 

아아! 아무려나 나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든지

진흙에 미끄러져 망신을 당하든지 나가볼 욕심이오."

                                                                  - <학지광>

 

그로부터 얼마후 나혜석은 사라졌다.

그녀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2년후

<대한민국 관보 1949. 3. 14> 부음을 통해서였다.

 

나이 53세

본적 미상

주소 미상

이름 나혜석

 

평생 자유를 찾아 헤매던 그녀는 결국 길 위에서 사망했다.

나혜석은 부자유의 시대에 한 인간으로 섰던 자유인이었다.

 

나혜석은 한 여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길 원했다.

그리고 그 욕망때문에 파멸했다.

 

올해는 나혜석이 죽은 지 60년.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외쳤던 여성의 고민은 여전하다.

 

 

  - 한국사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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