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崔沆)은 자가 내융(內融)이고, 평장사 최언위(崔彦撝)의 손자이다.
성종(成宗) 때에 나이 20세로 갑과(甲科)에 급제하니, 왕이 그의 재능을 가상히 여겨 발탁하여 우습유 지제고(右拾遺 知制誥)를 제수하였다. 거듭 승진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목종 때에 두 차례나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는데, 선발한 급제자들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 많으니 왕이 더욱 신뢰하고 소중히 여겼으며, 정치의 대소에 관계없이 반드시 그와 함께 의논하였다. 〈이후〉 이부시랑 중추원사(吏部侍郞 中樞院使)로 전임되었다.
왕이 병석에 눕게 되자 김치양(金致陽)이 반역을 꾀하므로, 최항이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대책을 세워 현종(顯宗)을 맞아 즉위시켰다. 현종은 최항에게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翰林學士承旨 左散騎常侍)를 제수하였고, 곧이어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군왕이 3로(三老)를 아버지 같이 섬기고 5경(五更)을 형같이 섬기는 것은, 어진 이에게 의지하여 자신의 덕을 닦기 위함이다. 짐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그 교훈을 듣지 못했다. 따라서 옛날의 법식을 우러러 따름으로써 그에 걸맞은 사람을 얻으려고 생각하였다. 구관(具官) 최항은 식견이 밝고 재주가 뛰어나 참으로 동료들 가운데 빼어나니,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하여 과인의 스승으로 삼을만하다.”라고 하였다.
초기에 성종은 팔관회(八關會)의 잡기(雜伎)들이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번거롭고 소란하다고 하여 모조리 폐지해버렸다. 단지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여 분향한 후 구정(毬庭)으로 돌아와서 문무관의 하례를 받는 것으로 행사를 마쳤다. 이때 와서 최항이 팔관회를 다시 설치하자고 요청하였다.
〈현종〉 3년(1012)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감수국사(吏部尙書 叅知政事 監修國史)로 승진하였고, 7년(1016)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11년(1020)에는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청하현개국자(檢校太傅 守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淸河縣開國子)가 되었고, 식읍(食邑) 500호를 하사하였으며, 수정공신(守正功臣)의 칭호를 더해 주었다.
최항은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나이 70도 안 되어 표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하였다. 왕이 여러 차례 기용하려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지나쳐 황룡사(黃龍寺) 탑을 수리할 것을 요청하였고, 몸소 감독하며 농사일에 바쁜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자신의 집에도 불경과 불상을 모셔두고 승려처럼 살았고, 마침내 집을 희사하여 사원으로 삼았다.
〈현종〉 15년(1024)에 병이 위독해지자, 왕이 친히 찾아가 문병하였다. 아들 최유부(崔有孚)에게 비서성 교서랑(秘書省 校書郞)을 제수하였고, 사위 이작충(李作忠)에게는 장복(章服)을 내려주어 그[최항]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최항이 죽자, 왕이 크게 애도하며 절의(節義)라는 시호를 내렸고, 부의로 명주 300필, 베 500필, 쌀과 보리 각 1,000석을 내렸으니, 최유부는 아버지의 유언을 이유로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최항은 총명하고 침착했으며, 과묵하면서도 판단을 잘 내렸다. 대대로 유학을 가업으로 삼았으며, 청렴과 검소로 가문을 유지하였다. 오래 동안 권력을 잡았으나 물건 하나도 남으로부터 빼앗는 일이 없었고, 진귀한 물건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집안 여자들은 화장하지 않았다. 한 달을 단위로 봉록을 청구하였기 때문에, 집에는 쌀 한 섬의 여유도 없었다.
뒤에 현종(顯宗)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덕종(德宗) 2년(1033) 정광(正匡)으로 추증되었으며, 정종(靖宗)은 시중(侍中)으로 올려 추증하였다. 최항의 제삿날이 되면 유사(有司)로 하여금 현화사(玄化寺)에서 도량(道場)을 열고 명복을 빌게 하였다.
문종 14년(1060)에 최유부가 사재경(司宰卿)을 지내다가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로 가게 되자, 내사문하(內史門下)에서 아뢰기를, “그의 부친 최항은 선왕 때에 깨끗한 절개와 올바른 도리로써 나라를 바로잡고 구원하였습니다. 국가에서는 그의 공적을 추념하여 예전에 현화사에 재물을 시납하여 기일재(忌日齋)의 비용을 대었고, 해마다 최유부로 하여금 사원에 가서 향을 피우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아우인 최영부(崔永孚)가 이미 천안(天安) 수령으로 나가 있는데, 지금 최유부까지 서도(西都)의 부유수로 나가게 되면, 기제사 때 성묘[上塚] 의식이 빠져버려 결국 그의 공적을 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청컨대 최유부를 3품직에 임명하여 지방에 보임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따랐고, 문종 21년(1067)에 또 다시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中書令)으로 올려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