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복, 내가 챙기기
이런 옛말이 있다.
“사람은 제 먹을 복 타고난다.”
정말 그럴까?
우린 살면서 힘든 날들이 행복한 날보다 더 많다. 아니, 행복한 날도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날이 더 많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린 늘 부족함 없이 살아간다. 물론 욕심을 내면야, 늘 부족할 수 있다.
생각해 봐라. 우린 최소한 삼시세끼 밥은 먹을 수 있다. 배고프지 않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고 따뜻하게 옷을 입을 수 있고,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는 집이 있지 않은가? 전세든 월세든 비바람을 막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린 최소한의 의식주를 갖추고 산다.
눈을 들어 넓게 세상을 보면, 하루 한 끼 식사도 못 하는 사람, 비바람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전쟁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다. 제 뜻 아닌데도 특정 미치광이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불행한 삶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 있다. 국민소득이 가장 낮은 나라의 국민은 행복 지수가 국민소득이 아주 높은 나라의 국민보다 더 높다. 그냥 높은 게 아니라, 몇 배 더 높다. 우리는 여기서 왜라는 의문을 품는다. 어째서 그들은 뭐가 찢어지게 가난한데도 그렇게 행복 지수가 높을까?
정답은 비교하지 않는 만족의 차원이다. 비교(比較)는 대조(對照)를 낳는다. 불만족은 불행을 낳는다. 대조는 둘 이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대조하면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고를 견주게 된다. 그러다 보면 더 나은 사람 앞에서는 늘 나는 불행하다. 누구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쪼그라드는 경향이 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으쓱하는 경향이 있다. 둘 다 못난 사람들의 심정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주지 않듯, 나보다 못난 사람에게 내가 뭘 주지 않는다. 그냥 깔보고 비굴해지는 사실 밖에 없다. 비교는 동질성의 같음이라면, 대조는 이질성의 차이이다. 차이는 누구나 있다. 그런데 그 차이를 누구의 잘난 면에 견주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늘 나는 가난하고 불행하다.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은 늘 있기 때문이다.
“너는 너야. 나는 나야.”
우린 나라는 존재를 우뚝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있어서 세상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없으면 행복은 없다. 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존재이다. 내 삶은 내가 산다.
“동기간이 많다 한들 어느 동기 동행하며, 일가친척 많다 한들 어느 일가 대신 갈까.”
<회심곡>과 <상여가>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공감하는 면이 많다. 누구도 내 삶을 또는 내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복(福)이란 글자를 떠올릴 수 있다. 복 많은 사람, 복 받은 사람, 복 타고난 사람, 복 없는 사람 등의 말을 우리는 늘 달고 다닌다. 그렇다면 복이라 무엇일까?
복(福) 자를 깨트려 보자. 글자를 깨트린다고 해서 파자(破字)라 하는데, 한자가 뜻글자이기 때문이다. 복(福) 자는 시(示)+일(一)+구(口)+전(田)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보일 시(示)는 하늘이나 신에게 보이며 기원하는 제단(祭壇)이고, 한 일(一)은 알맞게 주어진 하나의 분량이고, 입 구(口)는 사람이 먹는 입이며, 밭 전(田)은 생활의 토대 곧, 땅에서 곡식이 나온다는 뜻이다. 이를 종합하면, 복은 땅이 허락한 분량만큼, 입으로 먹을 정도로 곡식이 채워진 상태에 대해, 이를 고맙다고 신에게 제사하며 사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내 먹을 양식 있으니, 이보다 더 풍요로울 수 있겠는가. 더 챙기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타고난 복에 따라 즐겁게 살 일이다. 내 복 챙기기는 내 가진 만큼 즐겁게 사는 일이다. 지금 순간을 즐겨라. (이학주,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장. 2026.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