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숙모 부고(訃告)
종일 월 모임을 진행하여 피곤한 채 귀가했는데, 손아래 동생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짧은 안부 안부만 나누고 끊었는데 다시 또 전화가 들어왔다.
‘응 왜?’
“언니. 저 벌 터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대요. “
벌 터 아주머니란 촌수로 5촌 당숙모이시다. 우리 동네는 안 동네 원 달천이고, 그 댁은 달천강 옆 너른 벌판 옆에 있어서 '벌 터'라는 이름이 붙었나 싶다.
”어 그래? 저런..., 빈소는?
“청주래요”
“알았어 전화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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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고 난 후 감정과 계산이 복잡해졌다. 움직인다는 것은 몇몇 가지 뒤따르는 부담이 있지 않은가? 또한 공동체 관례상 애사는 부모·형제까지만 참석하기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기본 관례이고, 필요시에는 사도직 관계자들에게도 확장되고 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산에 추가되는 또 하나는 한 십오 년 사이에는 왕래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 찾아가도 서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다만 개인적 감사, 인정, 그리움 외에는.
그러나 5촌 당숙모는 가까운 촌수이고 무엇보다 지척에 사셨기에, 내 어린 시절부터 서로 많은 사연과 관계를 공유하신 분이다. 고마운 점이 한둘이 아녔다. 우리 가정의 대소사에 건너오셔서 늘 환한 얼굴과 다정한 말씀을 건네시며 궂은 일을 맡아 하셨다.
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할 희노애락을 겪으시며, 94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숙모의 둘째 딸은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 언니지만 초등 동창이고 사회에서 같은 곳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결혼식에 참석하곤 그 뒤로 못 본지 47년이 되었다. 돌아가신 당숙모를 뵈러 가면 다정했던 그분과 육촌 모두를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이다. 더구나 몸이 좀 고달플 따름이지 시간도 넉넉하다. 내 어머니도 병들어 돌아가시 전 같은 동네 지척에 살다 헤어진 그분의 이종 사촌들을 몹시 그리워하셨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던 애환을 나는 알고 있다.
가능하다면 만나 볼 수 있을 때, 내 팔다리로 비교적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때 만나야 한다. 이렇게 기특한 생각이 미치자 바쁘게 준비를 해 달려갔다. 고마우신 당숙모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살아 있는 육촌들을 모두 만났다. 눈물이 맺히도록 반가웠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서로 각자의 살아온 사연을 나누었다. 특히 선천적으로 특이 섬유 종 병을 몸에 지니고 살아 온 손 위 언니의 삶이 애닮프고 존경스러웠다.
이제 다시 또 만남이 거의 불가하겠기에, 오늘 참 좋은 분별과 처신을 한 것 같아 내 마음이 선선하다. 육촌들도 고마워했고 당숙모께서도 좋아하셨을 것 같다.
돌아와서 충주에 아직 살아 계신 유일한 87세가 되신 친 고모님께 보고 전화를 드렸다. “당신의 고종 사촌 오빠 부인, 우리 당숙모님 빈소에 다녀왔다”라고. 늘 고맙다는 매너 있는 우리 고모님은 오늘 더 매너 있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친척인데…. 정말 고맙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