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대산읍 화곡리(花谷里)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에 속한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개화리(開花里)의 ‘화’자와 반곡리(盤谷里)의 ‘곡’자를 따서 화곡리(花谷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반곡리, 개화동 등 관련 지명이 확인된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대산면에 소속된 반곡리와 개화리 두 지역을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하면서 화곡리가 만들어졌다. 행정 구역의 변화 없이 이어져 오다가 1991년 대산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서산군 대산읍 화곡리가 되었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되면서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북쪽에는 삼길산(三吉山)이 바다 바로 옆에 솟아 있고, 남쪽에는 화곡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대호방조제로 생긴 대호지가 위치해 있고, 대호방조제를 통해 당진군 석문면과 이어져 있다. 북쪽의 삼길산 주변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탄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현황
화곡리는 대산읍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2010년 12월 기준으로 면적은 12.03㎢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770세대에 1,946명(남자 1,030명, 여자 91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중 화곡2리에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1,332명이 살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현대오일뱅크 사원 아파트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대호방조제 건설 이전의 화곡리는 삼길산 밑의 반곡리에서 이루어지는 농업과 삼길포의 실치잡이가 주요 산업이었다. 현재는 같은 화곡리 내에서도 남쪽과 북쪽의 경제적 기반이 판이하다. 남쪽은 화곡저수지 주변의 논농사와 특산물인 포도 재배를 통한 농작물 수입이 기반인 반면, 북쪽은 삼길포항을 중심으로 관광객 대상의 요식업 등의 서비스업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다. 화곡리의 주요 관광 자원으로는 삼길포항과 삼길산, 그리고 삼길산에 있는 해월사 등이다. 삼길포항에서는 매년 6월 삼길포 우럭 축제가 열린다. 삼길포에서 잡히는 우럭과 삼길포를 대표하는 선상 횟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삼길포 우럭 축제는 서산의 대표적인 먹거리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삼길산은 삼길포항의 뒤에 위치해 있는데, 이 산에 대하여 『서산군지(瑞山郡誌)』[1927]에는 “풍경이 매우 뛰어나서 봄바람 불고 가을 달이 밝을 때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라는 기록을 인용하여 놓았다. 이로 보아 삼길산은 예로부터 그 경치가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이민영 편, 『서산군지』(중앙인쇄소, 1927)
『한국지명유래집』충청편(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0)
『2011 통계로 보는 서산시 모습』(서산시, 2011)
대산읍 주민센터(http://ds.seosan.go.kr/)
화곡리 비석군[花谷里碑石群]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1리에 있는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세워진 4기의 비석.위치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1리 마을회관 앞에서 동쪽으로 화곡리 비석군이 세워져 있다.
형태
1. 첨사박후윤묵영세불망비(僉使朴侯允黙永世不忘碑)는 귀접이 양식으로, 1884년(고종 21)에 건립되었다. 전체 높이는 128㎝, 비신은 높이 112㎝, 너비 53㎝, 두께 16㎝이다.
2. 첨사김후완식영세불망비(僉使金侯完植永世不忘碑)는 1878년(고종 15)에 건립되었다. 기단부에 안상과 복연화문이 양각되어 있고 비좌가 있다. 이수와 비신은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으며, 이수 전면과 후면에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쟁투하는 모습이 반원형을 이루며 양각되어 있다. 비신에 김완식의 공적을 4연시로 기록하였다. 전체 높이는 205㎝, 비신은 높이 150㎝, 너비 61㎝, 두께 17㎝이다.
3. 행첨절제사김후윤옥영세불망비(行僉節制使金侯胤鈺永世不忘碑)는 1880년(고종 17)에 건립되었다. 이수 뒷면에는 물고기 무늬가 있고, 앞면에는 삼각형, 사각형이 연이은 모양의 기하문이 양각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95㎝, 너비 39㎝, 두께 15㎝이다.
4. 대정십일년□□(大正十一年□□) 비석은 방형으로, 1922년에 건립되었다. 비신의 일부가 땅에 묻혀 있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일본인 와다나베가 저수지를 만들고 바다를 막아 개척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비신은 높이 39㎝, 너비 88㎝, 두께 23㎝이다.
현황
화곡리 비석군에는 원래 개항기의 비석들만 있었는데, 이곳에 일제 강점기 때 세운 비석을 추가하여 현재 4기의 비석이 한 곳에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대산읍의 지역 역사를 복원하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대산읍에서 벌인 개간·개척 사업의 현황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곡리청자가마터[花谷里靑磁窯址]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2리 산수골에 있는 고려 시대 청자 가마터.
위치
화곡리 청자 가마터는 충청남도 최서북단에 위치한 대산반도의 북쪽 끝자락인 대산읍 화곡리 산수골 일대에서 확인된 유적이다. 서산시 대산읍의 독곶과 대호방조제를 잇는 국도 29호선의 중간 부분 정도에 유적이 위치하는데, 서쪽을 향해 ‘Y’자 형태로 갈라지는 화곡리 산수골 계곡의 곡간 능선부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산수골보다는 생수골로 알려져 있는 지역으로, 동주(東走)하는 능선의 남향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주변으로 삼길포항, 선소(船所), 봉화봉, 평신진(平薪鎭) 등과 같이 조선 후기의 조운 또는 군사적 요새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교통상의 이점을 활용한 고려 시대 청자 요업이 화곡리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사례가 없으며, 『서산시지』와 『문화유적분포지도』에 간략한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현황
화곡리 청자 가마터에 대하여 정식 학술 조사가 진행된 바 없어 구체적인 유적 현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지표 조사와 문화 유적 분포 지도를 통해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지역에 다량의 청자편, 가마 벽체편, 요도구들이 산재되어 있음이 알려져 왔다. 또한 주민의 전언에 따르면, 인근 삼길포항 앞바다에서 이루어진 어업 중에 양질의 청자가 인양되는 경우가 빈번하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화곡리 청자 가마터에 대한 청자 파편 도굴도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 내에서는 비교적 양질의 청자 완, 발, 접시편 등 일상생활 기명이 주로 확인된다. 한편, 화곡리 청자 가마터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산중학교 박물관에는 교내 학생 및 주민들로부터 기증받은 다량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들 중 청자 및 요도구들은 바로 화곡리 청자 가마터 생산품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의의와 평가
고려 시대의 경우 대체로 수로를 통해 생산품의 운송이 용이한 지역을 중심으로 청자 제작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전라도 강진과 부안은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청자 제작지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충청도 지역은 고려 시대 청자 제작 양상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화곡리 청자 가마터와 같이 수로 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한 충청 지역의 가마터가 확인됨에 따라 고려 시대 도자사 및 수공업사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서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1998)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이은우, 『서산의 지명사』(서산시, 2005)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5-3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