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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20:27-39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우리는 애굽을 떠났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을 했던 우리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애굽을 당차게 나왔습니다. 떠날 때에는 기적을 보기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놀랄만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큰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부인할 수 없는 사건들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관과는 완전 반대 방향인, 광야로 나왔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는 더욱 의기양양했습니다. 애굽에 비하면 광야는 쉬워보였고,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은 곧 다다를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겠다고 선포하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고백하고 그 길을 가기 시작했음에도, 우리의 노예근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불평, 불만하기 일쑤였고, 작은 것이라도 내 것에 집착했습니다. 받은 은혜가 크지만 감사하기보다 남탓하기 바빴습니다. 그리고 지척인 줄 알았던 가나안은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없고, 그래서 비교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광야를 계속 걸어갔습니다. 그 길은 노예에서 해방의 길이었지만, 동시에 죄에 대한 심판의 길이었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훈련의 길이었습니다.
그런 척박한 환경이 되어서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 우상 숭배, 세상의 가치관, 비교 의식들을 광야에 묻어버려야 했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애굽을 나온 것이 복이 맞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하나님 백성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주시는 만나는 감사했지만, 세상의 자극적인 음식과 문화를 즐기고 싶었습니다. 매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감사했지만, 눈 앞에 있는 형상에 내 열심으로 빌어서 성공과 안락을 보장받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광야시간은 예상보다 굉장히 오래 걸렸고, 우리의 그 죄악들은 마치 피부에 딱 붙어버린 숯검댕처럼 떨어지기 어려웠습니다. 그 긴 시간 하나님께서는 화 내시고,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침묵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참으셨고,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이 정도까지 오게 된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그 과정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나,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백성이나, 지금 우리나, 모두 단박에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긴 시간의 심판과 훈련, 인내와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 백성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도 정말 고생이십니다. 반복되는, 그러면서 끝까지 지독하게 죄를 짓는 인간들을 보시는데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심판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심판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새벽묵상으로 보는 에스겔서부터, 그 전에 보았던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복되는 심판 메시지를 끈질기게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애를 쓰시고 알려줬으면 최소한 성의라도 보였어야 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안타깝게도 죄악으로 가는 길에서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고 그 불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흩으시고 타국으로 끌려가는 심판까지 하시지만, 그렇다고 단박에 돌이키는 이스라엘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끌려간 후에도, 끌려간 나라에서도, 그들의 죄악은 끊이지 않았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죄악은 참으로 끈질겨서 떨어내고자 해도 내가 자석이고 죄악은 철인 마냥 들러붙습니다. 이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기도 하고, 죄악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 죄에서 자유하는 것이,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오늘의 경고는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끝없는 죄악과 장로들의 신탁 요청 거부(27-32)
(27-28)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 조상들이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물을 부어 드린지라
지금의 이스라엘 족속은 범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도 범죄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고생하며 맘껏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지금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상황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좋았던 자신의 조상들도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갔음에도, 높은 산과 무성한 나무를 보면 거기에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제사였습니다. 후에는 우상에게 제사를 했지만 처음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며 만든 산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겉으로만 보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일 뿐, 실제로는 이미 우상 숭배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넘쳤습니다. 높은 산마다, 무성한 나무마다 산당을 짓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그리고 드리는 제물도 정성을 다 했습니다. 돈이 들어가고 시간이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열심, 정성! 그것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혹은 내가 원하는 방법과 방식으로 열심과 정성을 다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연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좋아하는지 물어보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 사람이 이런 것을 원할 것이라고 자기가 생각하여 선물도 하고 잘 해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방법이라면, 그는 정말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열심을 내고 잘 해 줄수록 상대는 더 괴로워집니다. 그것이 사랑을 표현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원하시는 것을 다 표현하셨고, 아주 짧은 규칙과 단순한 질서를 주셨습니다. 성전은 한 군데이면 충분했고, 제물도 모든 사람들이 형편에 맞게 드릴 수 있는 것으로 간소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곳곳에 산당을 지었고, 과한 제물, 과한 열심을 드렸습니다. 연인은 2천원 짜리 붕어빵이 좋다는데, 그 말을 듣고도 10만원 짜리 호텔 케이크를 먹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친구가 자신의 연인에게 호텔 케이크를 먹였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사랑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는 해야 알아 준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호텔 케이크를 먹는 연인이 불행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먹기 싫은 것을 먹는 것은 안 먹는 것보다 곤욕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연인은 생각할 것입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오히려 열심인 자신의 모습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닐까?” 네! 맞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는 바로 자기중심성입니다. 연인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그 중심이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하는 행동은 모두 결국 이기심과 자기 사랑, 자기 연민으로 귀결됩니다. 그의 세상에는 연인도, 하나님도 안 계십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호텔 케이크로, 작은 산당으로 시작했을 뿐입니다. 나중에는 어마어마한 죄악으로 드러납니다.
(31-32) 너희가 또 너희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처음에는 작은 산당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죄악까지 저지릅니다. 그 중심에 자기가 있으니, 자녀도 버리게 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은 자신에게 합당한 복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다. 절대 네가 하고자 하는대로 되게 하지 않겠다.” 어느 것이 사랑입니까? 마음대로 하도록 두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니면 때려서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부드럽고 안락한 메시지만이 사랑의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이 심판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심판과 역사의 전환 예고(33-36)
(34-36)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여러 나라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여러 지방에서 모아내고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서 너희를 대면하여 심판하되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심판한 것 같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하나님께서는 계속 심판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심지어 흩어진 나라에서 모으신 후에도 심판을 예언하십니다. 여러 나라에서 나오게 하고 흩어진 여러 지방에서 모아내고 인도하신다고 하여서 당연히 회복의 메시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여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서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심판을 위해서 인도하고, 심판을 위해서 모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전에 주셨던 메시지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모으신다고 한 경우에는 대부분 회복의 메시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것이 더 사실에 가깝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많은 유다사람들이 페르시아의 키루스, 즉 고레스 왕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복귀한 사람들도 다윗시대 같은 강력한 왕국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핍박받으며, 근근히 민족성을 유지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잠시의 번영 외에는 대부분 세상적으로 약소 국가였습니다. 한번도 패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약속과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후 회복의 메시지는 전부 허황된 것이겠습니까? 이는 언약과 회복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으로도 보기 드물고, 패권국가가 되는 것보다 더 희귀한 확률로, 결국 혼합되어 사라져버린 다른 민족과 달리 각자의 자리에서 민족 중심으로 모인 그들만이 혈통과 문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광야의 삶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출애굽했고, 출애굽하자마자 대단한 왕국을 세울 줄 알았지만, 정작 광야를 지나가는 약소민족에 불과했던 출애굽 당시의 조상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그 긴 시간동안 광야에서 심판이자 거룩의 과정을 고스란히 견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애굽을 나왔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에서 나왔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다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회복이자 심판의 시작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범죄한 조상들을 묻었던 것처럼, 우리도 계속 우리의 죄를 묻어야 했습니다.
심판 과정을 통한 정화(37-39)
(37-39)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라 그렇게 하려거든 이 후에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단순히 평안과 안락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죄를 하나하나 제하여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못 하겠거든 나가라. 나를 믿는다고 하지 말아라. 나와 상관없이 살아라. 나와 함께 하는 길은 심판이 있고, 나와 함께 하는 길은 광야일 것이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그 길을 가시겠습니까? 내가 예상했던 길이 전혀 아닌데도 가시겠습니까? 우리의 죄악을 하나하나 발견해가며, 하나하나 광야에 묻어야 하는 아픔이 있는데,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심판이 회복이라면, 아픔이 자유라면, 지는 것이 승리라면, 그것을 믿고 가시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성경 전체에서 쏟아지는 심판의 메시지들. 넘치다 못해 사랑의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살벌한 메시지들. 전부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습니다. 아픔이 없이는 놓지 않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혼내시고 기다리시고 다시 혼내기를 반복하십니다. 이런 지겹도록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메시지들을, 그들만에 대한 심판으로 여기지 말고 오늘 나에 대한 메시지로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하나님께 받은 심판을 기억해봅시다. 전후 나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2. 하나님께서 내게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정성을 다시 돌아보며, 내 중심적으로 하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4. 오늘 나에게 조명하고 계신 죄악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자: 윤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