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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다 못한 입성이라도 맞춤 옷이 더 제격이 아닐까?
더군다나 나처럼 비대칭 불량 옷걸이를 가진 존재들에겐 기성복은 영 어딘가 엉성해 보인다.
산행도 그럴 것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도 하지만, 벼르고 벼르던 산행을, 아는 사람을 졸라서 자기가 원하는 산행을 하는 맛이란,
바로 몸에 맞는 명품을 걸치는 그런 유쾌함이 있을 것이다.
지난번 고대산, 지장산, 향로봉 연결 산행을 10여 시간에 걸쳐서 종주를 할 때 늑대 대장님에게 졸라서
오늘 삼악산 종주 산행을 하게 되었으니, 바로 ‘늑대표 명품 산행’이라 칭하면 과도한 언사인가?
그러나 삼악산 종주를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던 차에 늑대 대장이 쾌히 허락을 해 주었으니,
이보다 더한 광영이 어디 있으랴!
혼자선 산행코스도 잘 모를 뿐더러 쉬이 엄두를 내기도 어려운 산길이다.
오는 7월 정기 산행코스로 동기들을 안내해야 하는 입장이니 늑대 대장이 나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있는 셈이다.
2008년 5월 31일 토요일, 아침 7시 반, 청량리역 2층 대합실.
언제나 칼갈이 약속인 늑대 대장은 벌써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지방 출장을 10여일 다녀 오느라 지난 주말엔 산행을 못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몸이 조금은 찌뿌듯하다.
늘 그렇지만 늑대 대장님은 철야근무로 밤을 새고 배낭만 메고 나왔다는데도 야성이 넘친다.
피곤하다거나 힘들다거나 그런 부정적인 언사를 늑대로부터 들은 적이 없다.
늑대를 안지도 벌써 해수로 4년인데 그런 늑대의 넘치는 야성이 어쩌면 나에겐 향수처럼 다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소싯적 내 별명이 (잠시지만) 승냥이로 불린 적도 있으니,
늑대와 승냥이는 이웃 4촌쯤은 되는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늑대가 벙개를 잡으면 모두다 절래절래 고개를 내저으며 두려워하지만,
나에겐 짜릿한 희열과 기대로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늑대가 안내하는 산길엔 언제나 활력이 넘치고 품격과 향기가 있다.
이번 삼악산 종주 역시 내가 졸랐다.
서로 시간 부담이 적은 토요일을 잡는데 하필이면 카페 정산일 하루 전날이라 정식 공지는 생략하기로 하고
둘이서 오붓한 산행을 하기로 했다.
7시 57분발 경춘선 열차는 1시간 30분을 달려 9시 반에 우리를 강촌역에다 내려 놓는다.
그러나 산행 시작 전 우리의 입산 신고는 어김없이 거행된다.
강촌역 관내에 있는 가게에서 선채로 검은 콩 막걸리 한 병으로 입산 신고식을 치른다.
마눌님 장딴지(?)처럼 통통한 막걸리 통 주둥이에서 샘솟는 감로주의 양이 만만치 않다.
(이러고도 무사할랑가 몰것다.)
그렇게 사이 좋게 서로 권하며 잔을 나누니, 벌써 기분은 등선봉 정상이다.
북한강을 가로 지르는 강촌교를 건너니 바로 산으로 올라 붙는 산길이 나온다(10:15).
얼핏 보면 등산로 들머리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래서 반드시 선답자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처음부터 시작되는 오르막이 오늘의 산행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하는 것 같아 약간의 긴장감을 느낀다.
짜릿한 기대와 흥분이 어우러지는 긴장감이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통나무를 깎아 만든 벌통이 바위 밑에 놓여 있는데 벌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
아직 미처 분양이 되지 않은 삼악산 별장인가 보다.
어서 빨리 토종 가족이 입주하기를 학수고대 해본다.
주말이라고(주 5일제 이후엔 금요일이 주말이다) 전날 과음을 한 탓인지 어릴 때 앓았던 기관지염 때문에
지금도 과음한 다음날이면 한참을 캑캑거린다.
예외 없이 오늘도 오르막에서 볼썽 사납게 캑캑거리는데 늑대대장님께 죄송하다.
이 청정한 심산 공기 속에서 혼자 웬 굿을 하고 난리인가?
그러나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땀을 흘려 알코홀 기운이 빠진 후에야 잠잠해진다.
언제나 겪는 산행에서의 통과의례다.
주님도 섬겨야 하고, 또 산에도 올라야 하니 타고난 팔자인가 보다...
늑대 대장도 이미 여러 번 보아온 일이라 앞으론 신경 써서 잘 관리하라는 염려만 해준다.
오늘은 등선봉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오르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첫 번째 바위 능선이 나온다. 제 1봉이라고 이름 붙여 본다(10:40).
예가 409봉인가? 짐작만 해볼 뿐이다.
계속되는 암릉과 오르막이 이어진다.
산행기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이래서 등선봉 오르막의 잔인함을 얘기하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짜릿한 흥분까지 느껴진다.
가파른 오르막과 암릉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덜 지루한 것 같다.
바위는 특이하게도 매끌매끌한 규석암인데, 비가오면 슬립을 그대로 먹는 위험한 구간이 될 것 같다.
산은 늘 조심하고 또 집중해야 하거늘, 이런 암산은 특히 더욱 그렇다.
제 2봉을 통과하고(10:55) 제 3봉을 또 통과하니(11:08), 하강 자일이 길게 내려뜨려져 있다.
조심조심 내려가 다시 솟구쳐 오른 야속한 암릉을 한 30분 가량 치고 오르니,
드디어 해발 632.2m 등선봉 정상이다(11:34).
한번도 쉬지 않고 올랐는데도 1시간 20분이 걸린 셈이다.
지금껏 바람 한 점 없더니 정상에 오르자 그제서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정상에 오르느라 수고했다고 신령님께서 베푸시는 아량인가 보다.
전망도 좋겠다, 처음 오른 등선봉 정상에서 기념 촬영을 마치고 도시락을 편다.
늘 행동식을 강조하는 대장님 덕분에 김밥을 주식으로, 떡과 건포도를 안주로 버적버적 얼려온 냉막걸리를 마시며
갈증과 더위를 식힌다.
오늘은 산행객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가끔씩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분들이 그냥 지나치기에 바쁘다.
이곳까지 오르기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중년은 되었음직한 젊은(?) 남정네 두 분이 지나가다가, 뒤따라 가시는 분께서 땀에 흠뻑 젖은 지친 표정으로
우리가 마시는 곡차를 바라보면서 계속 흘끔거리신다.
산에서야 주님(!)보다 더 반갑고 위대한 분이 어디 계시랴?
그 순간 판단에, 허기진 노숙자(?)가 음식을 보고 그리워하는 그런 간절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땐 그랬다.
그냥 보낼 순 없다는 생각에, “한잔 하고 가시지요?”
지나치는 나그네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던진다.
“네, 그래도 되겠습니까?”
배낭 메고 앞서 가시던 노숙자(?)께서 먼저 되돌아서서 달려 오신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합석하여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함께 나눈다.
눈치 빠른 두 분께선 딱 한잔만 하겠다고 하시지만, 사람이 어디 손님을 그리 야박하게 대접할 수 있단 말인가?
끝까지 함께 잔을 나누고 먹거리도 함께 맛본다.
두 분은 얼마 전 이곳으로 부대 배치를 받았는데, 인근에 있는 산을 오르기로 약속하고,
오늘 처음으로 삼악산을 등산하는 길이라고 하시는데,
춘천에 있는 2군단 사령부에 근무하시는 인사참모 박xx 대령님과 군수참모 박xx 대령님이시다.
어수룩한 노숙자(?)로 뵜더니만 전선에서 요직을 책임지고 계신 동량이 아니신가?
이래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할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작년 연말에 입대한 막내가 203 특공여단에 차출 당하여 이제 작대기 두 개 달고 빡빡 기고 있다는 얘기를 했더니
막내의 소속 부대에다 격려 전화를 넣어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면서 연락처를 적는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인연이 어디 있는가?
산이 맺어 주는 인연은 참으로 오묘하기만 하다.
좌우도 상하도, 산에선 어떤 장벽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러나 너무 무리한 압력(?)은 행사하지 말 것을 조심스럽게 당부해 보는데,
다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연말이면 야전 연대장으로 부임할 계획이라는 두 분에게 기념 촬영까지 해드린 후,
우리가 올라오던 길로 하산하시는 두 분에게 귀한 생수까지 들려 배웅하고 우리도 배낭을 챙겨 출발하니(12:35),
1시간 동안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등선봉에서 머무른 셈이다.
심기 일전하여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치고 오르니 두 번째 정상인 청운봉이다(13:15).
해발 546m,
산명을 알리는 표지석도 없는데 누군가 나무에 매달린 리본에다 청운봉이라 적어서 이곳이 정상임을 알리고 있다.
잠시 주변 전망만 조망하고 바로 출발하여 한참을 내려 갔다 다시 올라 치니 전망대 바위가 나온다(13:25).
계속 30여분 오르막을 올라 치니 삼악산 정상, 용화봉이다(13:50).
해발 654m인데, 삼악산 최고봉이고, 의암호를 내려다 보는 조망이 압권이다.
사람들이 깔닥 고개를 악을 쓰며 힘겹게 오르다가도 이곳에서 강물을 바라보면 산행 중의 모든 피로가
거짓말처럼 가신다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등선봉과 청운봉, 용화봉, 3개의 봉우리를 합하여 삼악산이라 부르는데,
보통은 험한 등선봉과 청운봉은 생략하고, 정상인 용화봉만 올랐다가 흥국사나 상원사로 하산하는 코스를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곡차는 없어서 남은 먹거리만 나누는데,
개구쟁이를 데리고 오신 이모 같아 뵈는 젊은 엄마에게 기념촬영을 해주면서 우리 카페에 들어와
사진도 감상하고 회원가입도 하라고 명함을 건네는 늑대 대장의 작업 솜씨가 선수(?)인 나보다 훨씬~ 탁월하다!
정솔빈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개구쟁이는 유난히 붙임성 있게 굴어서 함께 손도 잡아주면서,
하산 길에는 우리가 하산주를 나누는 자리를 찾아 주기를 청한다.
그렇게 정상에서 25분을 머무르고 다시 출발(14:15), 망경대 능선 길로 하산을 시작한다.
직진하면 의암댐이 있는 상원사 코스이지만, 등선폭포 계곡이 좋고 또 음식점에서 강촌역까지
승용차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우측으로 하산 길을 택한 것이다.
헌데, 늑대의 마수는 대체 어디까지 뻗쳐 있단 말인가?
앞서 가는 물방울 무늬의 실크 햍(hat)을 쓴 탤런트 같은 낭자에게 시비(!)를 걸더니 이내 야자다.
알고 보니 옛날 산을 같이 타던 산지기(닉네임:첼리)인데, 암벽까지 즐긴다는 무시무시(?)한 처자다.
늑대 대장 덕분에 꼽사리로 탤런트 누이와 함께 기념 촬영도 하고 먼저 하산 길을 잡는다.
연이어 이어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시원하고 선녀탕엔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수심이 투명하다.
나뭇꾼이 들어 가면 금방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화답할 듯싶다.
대장이 잘 아는 등선 식당 정재경 사장님을 찾아서 승용차 지원을 부탁하고 메기 매운탕을 시킨다(15:15).
나는 바로 앞에 있는 금선사 약수가 유명하다기에 받아가기로 하고 계단을 오르는데 여간 가파른 것이 아니다.
그 가파른 절벽에다 세운 암자도 대단하지만, 그 높은 절벽 위에서 샘솟는 암반수가
이렇게 중생의 갈증과 더위까지 어루만져 주시니, 불심의 자비 행은 대체 어디까지 뻗쳐 있단 말인가?
메기 매운탕을 안주로 하산주에 푹 젖어 본다.
폭포 아래 계곡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잔을 나누고 흘린 땀을 씻으니 예가 바로 신선이 노니는 선경(仙境)이 아니랴!
하산하던 솔빈맘이 우리를 보자 춘향이가 몽룡을 만난 듯 반긴다.
내려 오면서 집집마다 들르며 우리를 찾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개구쟁이가 엄마를 더 못살게 굴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하산주를 같이 나누며 오늘의 인연에 감사해 한다.
낭군님은 거제도에서 근무를 하시고 산도 별로 안 좋아해서, 승용차로 솔빈이를 데리고 다니며
이렇게 문화여행도 하고 가끔은 주변 산에도 함께 오른다고 하는데,
오늘은 춘천에서 마임극을 예약해 놓았다고 한다.
대단한 감성 교육을 하고 있는 지혜로운 젊은 엄마다.
그래서 솔빈이가 저렇게 문무(?)를 겸비했는가 보다.
말이나 행동에 스스럼이 없다.
어찌나 귀여운지 나는 그만 즉석에서 솔빈이에게 ‘큰 아빠’를 선언하고 솔빈이도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한데,
솔빈맘도 썩 괜찮은 표정이다.
자고로 결연식엔 정표가 있어야 하느니, 나는 솔빈이가 썩 맘에 들어 하는 목검에다 거금(?)을 투자한다.
내가 ‘칼’이라고 했더니, 영리한 개구쟁이는 ‘검’이라고 주의를 준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솔빈이는 벌써 우리 앞에서 검술 시범을 보이는데,
뽑기~ 겨누기~ 찌르기~ 베기~ 거두기~의 기본 자세가 범상치 않다.
가끔씩 T.V에서 최민수 삼촌이 곧잘 자랑하는 검도 솜씨를 눈 여겨 본 것일까?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조카를 삼악산 신령님께서 점지(!)해 주신 것 같다.
솔빈맘은 산행을 아주 좋아한다는데, 2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걷는 것을 즐긴다니,
극기 산행이 전공인 늑대와 딱~ 궁합이 어울리는 체질이니, 아마도 오늘은 늑대 대장이 제대로 수지(!)를 맞춘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5시간에 이르는 삼악산 종주를 끝내고 산이 맺어 주는 오묘한 인연의 향기에 취하여,
아슬아슬한 상경기차 시간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주님(?)을 섬기고 또 섬겼으니,
참으로 산이 맺어 주는 인연의 깊이는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이렇게, 늑대가 선물하는 또 하나의 귀하디 귀한 ‘명품’ 하나를 나는 내 기억의 창고 속에다 소중하게 갈무리 한다.
바로 이것이, 누구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늑대표, 삼악산 명품 산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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