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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8일(일요일 오전 10시 30분) 팔정도 무차법회 선원장 미산스님 법문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8월달 매우 덥고 후덥지근합니다. 여러분들 휴가 다녀오셨나요? 가신 분도 계시고, 안 가신 분도 계시고, 방콕하셨던 분들도 계시고, 다양하게 이 더위를 지혜롭게 잘 극복하시리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난 주에 한 주 동안 일본에 가서 여러분들 덕분에 잘 쉬었다 왔습니다. 혜담 스님이 좋은 데가 있다고 자리를 잡아주셔서 가서 일주일 동안 잘 쉬면서 ‘휴식이 이렇게 중요하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번 휴가 기간 동안에는 책도 읽고 또 생각도 정리를 하고 왔습니다.
23일부터 30일까지는 템플스테이를 홍보하기 위한 종단의 큰 행사가 있어서 제가 총무원장 스님, 포교원장 스님과 함께 7박 8일 동안 호주 시드니에 가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호주 대학하고 또 다른 곳에서 한국 선불교와 선예술에 대해서 대한 강연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영어를 안 해서 녹이 많이 슬었더라구요. 그래서 휴가기간 동안에 좀 준비를 해야 하겠다 생각해서 영어로 된 책을 몇권 가지고 갔어요.
그 중에 하나가 달라이 라마 스님 <종교를 넘어서(Beyond Religion)>이라는 책이었구요, 또 다른 하나는 제가 현지 책방에 가서 구입한 건데 에리히 프롬의 <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인데요, <사랑의 기술> 아마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을 것 같아요. 그게 눈에 띄어서 영어책 두 권을 독파를 하고 났더니 이제 입에서 조금 영어가 놀더라구요. 그래서 일주일 후에 호주에 가면 그래도 영어를 실수하지 않고 할 수 있겠다 라는 자신감이 생겼는데, 지금까지 해 보니까 휴가 가서 책보는 것 또 생각을 정리하는 게 가장 좋은 휴가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에는 발표할 강연 글을 정리해서 어제 저녁까지 해서 보내주고 준비를 다 끝내놨습니다. 물론 영어번역은 다른 분보고 하라고 그랬어요. 그 번역까지 다 하려고 하니까 쉽지 않더라구요. 번역을 해 오면 제가 보고 또 제 식으로 소화를 해서 한국 선불교 그리고 선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호주 분들한테 좀 해주려고 합니다.
하여튼 여러분들, 우리 대중 스님들, 법사단 스님들 또 여러 전법장, 법등장 여러 우리 법우님들의 덕분으로 저도 좋은 휴식을 취하고 나서 또 새로운 기분으로 오늘 일요법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괜찮죠? 그런데 지난번 일요법회 때 제가 영상법문을 하고 갔는데 확인을 해보고 잘 됐는지 안 됐는지 확인을 꼭 해야 했는데 그걸 못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 마이크를 사용하지 말고 탁상마이크만 사용했어야 되는데, 그래야 녹음이 잘 된답니다. 잘 들립니까? 뒤에 까지? 그런데 무선마이크를 함께 사용해서 웅웅 거렸답니다. 제 불찰이죠? 그래서 다음부터는 이런 잘못을 안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이 쾌적하게 음을 들을 수 없어서 다시 녹음한 것만 우리 사이트에 올려놨다고 합니다. 제가 영상법문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우리가 지금 참사람 수행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공덕행과 보시행이 뭐냐 이 문제를 <육조단경>을 중심으로 해서 정리를 해서 영상법문 해 놓았습니다. 다시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8월달은 첫째 주에 자애명상과 함께하는 법회를 했어야 되는데 종사르 켄체 린포체님 오셔서 초청법회를 했구요, 두 번째 주는 영상법문 실패를 했지만 했고 세 번째 주는 사실 찬불가와 함께하는 법회인데요, 양해를 구해야 될 게요, 우리 지금 지휘자님이 찬불가를 지도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 과정이랍니다. 그리고 또 연주자를 구해야 되고 그래서 새로운 지휘자님께서 준비가 될 때까지 당분간은 찬불가 법회를 잠정적으로 쉬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조속한 시일 내로 다시 찬불가 법회를 할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하고 우리 합창단에서도 각별히 좀 노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차법회를 하기로 했어요. 특히 8월달에 들어와서 지금 무차법회를 한 번도 안했기 때문에 무차법회,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여러분들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의문 사항이나 또 같이 공유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묻고 답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우리 상도선원에 일요법회 팔정도 온가족 법회의 특징은 이렇게 다양하게 매주 특색을 가지고 법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무차법회를 하고 아마 다음 주에는 혜담 스님, 지금 일본 가서 유학하고 계시는 혜담스님이 특별 법회를 여러분들께 해드릴 겁니다. 오늘은 무차법회로 진행을 합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질문1] 스님, ‘수행하는데 선지식과 좋은 도반이 전부다.’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좋은 도반이라는 게 어떤 도반을 얘기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예, 그래요. 우리가 ‘수행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선지식과 도반이다.’ 이렇게 절집에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사실입니다. 선지식하고 도반하고 누가 더 중요하겠습니까? 선지식이 더 중요합니까? 도반이 더 중요합니까? 선지식이요? 걸려들었어요.(웃음)
부처님 초기경전 <쌍윳따 니까야>에 보면 아난다가 부처님한테 말씀을 드려요. 사실 아난다는 오랫동안 부처님을 시중들어 왔기 때문에 다문제일(多聞第一)이거든요. 법문을 가장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을 선지식으로 모시고 늘 옆에서 법문 듣고 공부를 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입적하시고 난 다음에 그 결과는 어떻게 됐냐? 오백비구가 모여서 합송을 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정리해야 되는데 아난다는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가는지 아세요? 아라한이 아니에요. 깨우치지 못했어요. 그렇게 법문을 많이 들었는데도. 부처님 바로 옆에서 그 법문을 다 외우고 있는데도. 얼마나 분심(억울해서 화나는 마음)이 났겠어요. 그래서 일주일간 잠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하게됩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 하도 잠이 오니까 서서 정진을 하다가 피곤해서 자리에 잠깐 누우려고 할 때 등이 바닥에 닿으면서 확 깨친 거예요. 그래서 아라한이 돼서 오백대중 중에 한 사람으로 들어가거든요. 이게 역사서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실화니까 기록이 돼 있었겠죠.
이런 아난다가 오랜만에 도반하고 수행에 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눴어요. 그리고 자기가 그 도반을 통해서 뭔가 깨달은 게 있어요. 그래서 자랑 삼아서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부처님, 아무개하고 수행토론을 하다가 부처님 말씀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도반이 공부의 반을 시켜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아난아, 도반이 공부의 반을 시켜주는 게 아니라 도반이 공부의 전체를 시켜준다. 공부 전체를 도반이 시켜준다.”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이 말이 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실제 여러분들이 제대로 공부를 쭉 하시다 보면 도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수 있어요. 그리고 도반이 실질적으로 공부를 시켜주는 걸 저는 옆에서 많이 보고 있거든요.
간화선 프로그램 할 때도 여러 케이스를 봤어요. 한 케이스는요, 서로 학교 동기지간인데 함께 열심히 수행하다가 한 분이 먼저 체험을 하고 나갈 때 아직 체험이 되지 않아 남아서 수행하고 있는 분을 보고 “야 친구야, 하니까 되더라, 너도 꼭 해 봐라.” 그 말 듣고 자신감을 얻어서 했더니 체험이 된 거에요. 선지식이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해도,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해도,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줘도 그 말이 귀에 안 들어 왔어요. 그런데 도반이 그 말을 딱 해주는 순간 두 가지 마음이 작용한 겁니다. 한 가지는 ‘쟤가 하는데 내가 못해?’ 또 한 가지는 ‘그래, 저 애가 했는데 내가 못하면 말이 안되지.’ 이런 선의의 경쟁심과 분심이죠. 이게 들어가니까 금방 공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도반은 서로 눈높이가 비슷합니다. 여기서 똑같은 이야기를 선지식이 하더라도 자기 깜냥으로 그만큼만 받아들이거든요. 먼저 받아들여서 체험한 도반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 선지식이 한 이야기를 못 알아들어도 도반이 한 이야기는 금방 알아들어요. 그래서 이게 전환이 됩니다. 그래서 좋은 도반을 사귀라고 하는 게 우리 불교를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모토가 돼 있어요.
‘좋은 도반을 사귀어라.’ <행복경> 첫 구절에도 행복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좋은 도반 만나는 거예요. ‘좋은 도반 가까이 하고 나쁜 도반 멀리하는 거’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그 <행복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아니, 나쁜 사람들도 우리가 교화를 해서 좋게 만들어야 되는데, 왜 부처님은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을 구별해서 나쁜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냐?” 이런 의심이 날 수 밖에 없잖아요. 부처님같이 마음이 평등하고 모든 존재를 다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이끌어 주시는 분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런 의문이 들잖아요. 제가 그런 질문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말씀은 맥락을 잘 이해해야 돼요. 부처님께서 나쁜 벗을 멀리하고 좋은 벗을 가까이 하라고 했을 때 이 말은 공부를 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보살들 중 이미 한 경계 탁 넘어서 제도할 수 있는 자기 힘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나쁜 도반들을 좋은 도반으로 만들 수가 있죠. 그런데 아직 그런 힘이 없는 사람들은 금방 나쁜 쪽으로 동화돼 버립니다. 그래서 아직 공부 도중에 있는 사람은 좋은 도반하고 같이 수행하는 것이 최상의 복이고 행복이지요.
상도선원은 좋은 도반끼리 함께 공부하도록 지금 각 지역별로 조직을 하고 있습니다. 조직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활성화되진 않습니다. 그런데 지역별로 신도를 조직을 해서 조직 관리를 잘하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런 조직을 원치 않았습니다. 처음에 이 선원을 설립하여 운영을 하다 보니까, 좋은 도반들끼리 만나서 자꾸 공부를 해야 되는데 그런 분위기가 잘 조성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금년 초에 이러한 지역별 조직을 시작해 봤어요. 그 결과 지금은 제가 이렇게 관찰해 보니까 여러 그룹들이 생기기 시작해요. 자발적인 그룹들이에요. 사찰에서 이거 해라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모여서 공부를 하더라구요. 심리치료 관계 공부도 하고 또 경전을 독송하고 토론하고 이런 공부모임들이 여기 저기 지금 생겨나고 있어요. 그건 무슨 의미냐면 좋은 도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거든요. 공부하는 좋은 도반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다보면요 굉장히 중요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좋은 도반들이 모여서 그냥 좋은 이야기만 하고 좋은 면만을 서로 교류하는 것, 이건 사실 공부의 반밖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도반들이 모여서 서로 나쁜 이야기도 해주고 지적도 해주고, 또 그걸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또 자기를 비춰보고 이러한 역동적인 일들이 있을 때, 여기에 진짜 공부가 이루어집니다. 순탄하게 좋은 일만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있다 그러면 이건 ‘순경계’라고 그래요. 공부하는 사람들이 본분 상에서 보면 사실상 순경계는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본성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는 동기부여가 약합니다. 그렇다면 역경계는 뭐냐? 자기의 에고를 자꾸 건드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에고를 건드려줄 때 공부가 제대로 되려면 빨리 그것을 알아차려서 ‘아 이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지금은 저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있지만 나도 똑같이 저사람에게 비난을 할 수 있고, 했었고 또 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비난이 나한테 돌아오는 구나’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면, 이 역경계가 오히려 훨씬 더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역경계를 통해서 공부가 더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순경계 때는 공부가 잘 안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늘 아침에 교육수행체계정립위원회 회의를 7시부터 약 한 시간 반 동안 했어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불교에 관심이 생기고 불교를 알고 싶은 마음에 이곳저곳 공부하기 좋은 사찰을 찾다가 상도선원이 공부하기에 좋은 사찰이라고 해서 처음 와 봤는데, 몇 번 다니면서 공양간에서 봉사도 좀 해보았는데 상도선원에 다니는 사람들을 좀 면밀히 살펴보니까, 절에 십년, 십오년 다녔다 하고 현재 상도선원도 열심히 다닌다는데 그릇들이 겨우 저 정도 밖에 안된다면 불교를 배워서 뭐하나, 상도선원도 다닐 필요가 없구나 하고서 조금 다니다가 마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다 놓치고 마는 겁니다. 그냥 왔다가 그런 모습만 보고 가 버리면 언제까지도 공부를 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맙니다. 같이 있으면서 역경계, 순경계를 전부 자기 입장에서 공부의 주제로 삼고 계속 공부가 진행 되면 결국 서로가 좋은 도반이 되는 겁니다.
좋은 도반이라고 하는게 나한테 항상 순응해 주고 좋은 말만 해 주고 늘 나를 보살펴 주고 그러면 좋은 도반이긴 하죠. 그런데 그런 측면의 좋은 도반이 갖고 있는 한계는 뭐냐? 나한테 자극은 못 줍니다. 역경계를 만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더 단단해지고 더 확고해 지는데 그다지 도움이 안 됩니다. ‘어떤 경계라도 나는 공부의 주제로 삼겠다’라고 하는 이런 태도를 가지면 도반이 진짜 공부를 다 시켜준다고 단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이 태도가 분명히 정해지지 않으면, 도반이 공부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하고 싸움만 합니다. 티격태격 싸움만 하다가 결국 상도선원을 떠납니다. “아이고, 상도선원에 가보면 수행했다는 사람들이 다들 이기적이고 자기 상만 많고...”라고 평하면서 불평불만만 갖다가 결국 상도선원을 떠나버려요. 왜? 원인을 전부 밖에 두기 때문에.
그런데 진짜 공부하는 사람은 원인을, 제 일의 원인을 자기한테 두기 때문에 안으로 딱 돌이켜서 회광반조(回光返照)하기 때문에 역경계든 순경계든 전부 내 마음을 밝히는, 본래 이 본성을 밝히는 도구로 삼습니다. 이럴 때만이 도반이 공부를 100% 시켜준다고 하는 겁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돼요. 그냥 무조건 도반이 공부시켜 준다고요? 택도 없는 소리에요. 내가 어떤 태도로 도반과의 관계 속에서 역경계와 순경계를 공부입장에서 소화해 내느냐?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요점이 있어요. 그랬을 때 도반이 100% 공부를 시켜줍니다. 역경계 순경계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순·역경계를 늘 자유자재하게 공부의 주제로 삼는 것이 요점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해 드립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질문2] 두 가지 질문 드리겠는데요. 참선하고 수행하고 똑같은 건지, 차이가 난다면 어떻게 차이가 나는 건지. 서옹스님께서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하는 게 참선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두 가지 차이점에 대해서 좀 알고 싶구요. 두 번째 질문은 제 주변에 옛날부터 문제가 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거기에 그냥 쓸데없이 너무 메달리고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것이 저에게 상당히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 생각과 마음을 통제하고 평상심을 찾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있는지 두 가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2] 예, 감사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아주 간단한 겁니다. 수행하고 참선은... 아, 수행이 아니라 명상하고 참선이요? 명상과 참선의 차이? 이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더 큰 범주를 이야기 할게요. 불교에 있어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큰 범주인데요. 영어로는 이것을 프랙티스(practice)라고 번역을 하더라구요. 그런데 이 수행의 본래 산스크리트어나 빨리어 원어는 ‘바와나’라는 말이에요. ‘바와나’는 컬티베이션 프랙티스(cultivation practice) 즉 '계발한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논밭을 잘 계발해서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같이 우리 심전 마음 밭을 잘 계발해서 아주 의미있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하나의 일련의 행위들을 포괄적으로 수행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불교에서는 수행법이라 합니다. 수행법은 오래전부터 부처님 당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개발이 됐었어요. 부처님 당시 때 가장 크게 유행했던 방법은 호흡관법이나 사념처관법(四念處觀法)이었어요. 관법위주의 수행이 주를 이루었죠. 부처님이 입적하시고 나서 부파불교 시대 때에도 이 관법들이 성행을 하다가 5, 6세기 쯤 돼서 중국에 와서 중국의 독특한 문화와 같이 습합하면서 조사선 간화선이라는 참선 방법들이 생기기 시작해요.
이것을 서양 사람들이 불교를 받아들여서 여러 가지 수행법을 해보고 나서 자기네들 언어로 이것을 한번 어떻게 해 봐야 되는데 딱 맞는 언어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카톨릭 쪽에서 쓰고 있었던 메디테이션(meditation) 이라는 단어를 갖다가 써 봤는데 한계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들 나름대로 그러면 앞에다가 수식어를 붙여가지고 이 수행법 특징을 드러내는 게 좋겠다 해서 앞에다가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화두 참선 간화선 같은 것은 간화 메디테이션(meditation) 화두 메디테이션(meditation) 화두선 간화선 아니면 티벳 관법이면 티베탄 메디테이션(tibetan meditation) 티벳 명상 또 이것이 묵조선이면 사일런트 메디테이션(silent meditation) 이런 식으로 해서 앞에다 수식어를 붙여서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라는 단어를 일반화된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그러한 책들이 우리 말로 번역되면서 명상이라고 번역이 된 거에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참선과 명상을 구분하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명상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된다’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도 계셔요. 그리고 한 7, 8년 전엔가 현대불교 신문에서 저한테 참선의 독특한 면을 명상이라는 단어가 들어와서 혼란스럽게 하고 있고 이상하게 왜곡 하니까 스님이 그걸 구분해서 그게 아니라고 기고를 해주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반대의견을 이야기 했어요, 기자한테.
"그건 아니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이 명상이라는 말이 지금 보통명사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이걸 이미 받아들여야지, 이미 많은 책들이 번역이 돼 있어서 불교 쪽에서 오히려 더 명상이라는 말을 잘 쓰게 되면 불교 입장에서 많은 것들을 통합할 수가 있는데 이 번역어가 서양의 메디테이션(meditation)을 번역했다고 해서 이걸 버리게 되면 오히려 우리의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역으로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나한테 대담할 수 있는 기회를 줘라. 그러면 이 쪽 전문가들하고 대담을 해서 이 쪽의 반대의견을 개진을 하겠다."해서 그 다음 해에 같은 현대불교 신문에서 최훈동 정신과 의사하고 저하고 그 다음에 서울대 권준수 교수, 이분은 뇌 연구가인데 뇌를 연구해서, 명상하고 연결해서 세계적인 논문을 많이 쓰신 분이에요. 셋이 대담을 하는데서 제가 그것을 정리해서 이야기를 했죠.
특히 명상이라고 하는 단어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쓰여질 때 제가 불교 문헌에서 살펴보니까 한용운 스님의 시에 나오더라구요. ‘명상’이라는 시가 있어요. 1920, 30년에 쓰신 시 같아요. 그래서 그 때 이미 우리의 용어로 정착이 돼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써서 다양화하고 그 의미를 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이걸 버리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좋은 것을 축소시키고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했죠. 지금도 그 주장은 변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참선하고 어떻게 차별을 하느냐, 참선도 수행이라고 하는 범주 속에 들어갔을 때는 여러 가지 수행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그냥 서양사람들은 젠 메디테이션(zen meditation)이라고 하는 거에요. 선 메디테이션 선수행인거죠. 선명상인거죠. 그런데 이 방법이 굉장히 달라요, 이 참선은. 특히 참선이라고 했을 때는 화두를 가지고 하는 참선이 있구요. 화두를 들지 않고 바로 마음을 돌이켜서 회광반조해서 본성자리를 비추어 보는 묵조적인 방법이 있어요. 간화적인 방법과 묵조적인 방법 이 두 가지를 다 참선이라고 합니다. 아니면 그냥 즉해서 조사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에 알아차려서 깨달아 가지고 그 자리를 삶 속에서 쓰는 조사선적인 방법이 있어요. 이걸 전부 참선이라고 합니다. 이게 방법이 굉장히 특이하죠. 중국에서 개발이 된 방법들이에요. 그걸 참선이라고 해요. 그 참선도 수행이라고 하는 범주 안에 듭니다. 그 참선수행법도 자체 내에서는 독특한 입장을 가지고 있고 선사들에 따라서 언어개념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는 여러 가지 테크닉들이 있죠. 그런 것들도 전부 이 범주 속에 다 들어갈 수 밖에 없죠. 제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렇기 때문에 참선하고 명상을 딱 구분해서 차이를 두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를 하면 수행이라는 범주 안에 여러 가지 수행 방법들이 있는데 참선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서양에서 이걸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라고 하는 보통명사를 만들어서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명상이라고 번역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수식어를 붙여서 그 명상의 수행의 특징을 규정해 주면 되는 것이지 이걸 가지고 명상과 참선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좀...
물론 왜 그 말이 나오는지 알아요. 명상이라고 해서 너무 차원이 낮은 쪽에 초점이 맞춰져서 그냥 가만히 앉으면 편안해지고 순간적으로 행복해지고 이것이 수행의 목적인양 해서 명상을 하는 이런 부류의 명상법들이 있습니다. 그걸 가장 본질적인 걸 추구하는 참선과 분리해서 차별화하려고 하는 그런 의도 때문에 명상과 참선이 다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거든요. 그 의도에는 저도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지금 많이 통용되고 있는 각종 문헌에 나와 있는 이 명상이라고 하는 단어를 너무 좁게 이해하면, 그리고 이것을 특수명사처럼 이해를 하면 많은 오해가 더욱 증폭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구요.
두 번째 질문은요. 지금 말씀하신 대로 어떤 문제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충분히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두 개를 잘 구분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지금 여기서 바로 통제할 수 없는 거라면 억지로 거기에 침잠해 들어가서 빨려 들어가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일인지 알면서도 그냥 거기에 빠져드는 경우들이 꽤 많거든요. 이랬을 때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이 질문이죠? 그랬을 때는요, 첫 번째 조건이, ‘이것은 내가 통제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을 명료히 하는 거에요. 우리 주변에 그런 게 너무 많거든요. 그 분류(catagory) 속에 딱 넣어 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계속 그 쪽으로 생각과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넘어가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예요. 언제? 지금 여기서. 바로 지금 여기서 알아차려야 돼요. 알아차렸을 때 이제 이걸 객관화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여기서부터 의도가 들어가요. 의지가 들어가요. 어떻게 하느냐, 상상을 하세요.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어요. 물이 졸졸졸 흘러가고 있을 때 이 감정과 생각을 그냥 똑 떼어 가지고 흘려 보내세요. 처음에는 상상기법을 쓰면 유용해요. 이게 잘 안 떨어지거든요. 본래 이 마음의 행위가 흘려 보내려고 해도 잘 안 돼요. 그런데 자꾸 흘려 보내려는 상상을 하면서 실제적으로 그렇게 해보면 이것이 어느 순간 뚝 떨어져서 솩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완전히 안 없어지더라도 그 세력이 힘이 약화되는, 빠져드는 이것의 속도가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것을 반복해서 하세요.
그런데 이 때 중요한 것은 뭐냐? 그 빠져있는 상태에 대해서 자책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또 멍청이처럼 또 빠져있지?’ 이 생각을 하게 되면 자기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또 그 생각이 또 다른 부정적 에너지를 불러와요. 그래서 이 악순환 고리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있는 그대로 상태를 그냥 인정하는 거에요. 빠져 있든, 빠져 있지 않았든 지금 알아차림을 했으니까 그리고 흘려보내려고 하는 의도를 냈으니까 그냥 알아차림 하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자꾸 알아차리고 흘려보내고 알아차리고 흘려보내고 이걸 하시면 이제 효과가 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양념을 섞으면 굉장히 효과적이에요. 더 쉽게 되요. 그 양념이 뭐냐? 입꼬리를 올려서 미소 짓는 거에요. 심각해지면 더 심각한 데로 빠집니다. 그런데 웃으면서 ‘또 여기에 빠져있네? 아이고~ 귀여운 것.’ 이렇게 하면 아주 편안하게 그것으로부터 그 사이클로부터 탁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면 어느 날 완전히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한번 해보세요.
질문 3] 제가 지금 입시기도를 하고 있는데요. 아까 말씀하신 역경계에 접촉빈도나, 절 말고 다른 모임에 가면 집에 가면 자꾸 머릿 속에서 그런 것들이, 망상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다 차단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맞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부딪치면서 그러면서 또 기도를 하는 게 맞는 건지 그게 궁금하거든요.
답변3] 아주 실질적인 질문인데요. 입시기도를 하다보면 사실은 그 중간에 많은 역경계들이 나타납니다. 특히 역경계들은 지금 입시를 준비하는 아들, 딸이 자녀들이 공부를 열심히 잘하면 그게 순경계에요. 그런데 그것도 경계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잘 하는 것도 경계에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면, 공부를 잘 안하고 딴전 피우고 성적도 잘 안 올라가고 그러면 일단 불안해지잖아요. 그러면 주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우, 저 엄마는 과외를 저걸 시키니까 성적이 올라간다고 하네?’ 그럼 그 쪽으로 마음이 쑥 딸려 가거든요. 그러면서 경계에 마음이 순식간에 딸려 가, 그래서 그 경계를 차단하기 위해서 이제 누구도 안 만나고, 누구도 안 만나고 하신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경계 차단하기 위해서 안 만나는 것이 도를 넘치면 안 돼요. 그냥 이게 자연스러워야 돼요. 의도를 가지고 ‘저 엄마는 절대로 안 만나야 돼. 꼴보기 싫어 죽겠어.’ 그러면 내 마음에서 이미 거기에 대해서 크게 반응을 한 거에요. 그래서 이게 또 하나의 또 다른 번뇌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내 기도에 열중하다보면 그런 경계들이 점점 적어져요. 그런데 ‘아, 이 엄마도 안 만나고 저것도 안하고...’ 이렇게 생각을 지으면 이것에 대한 대상이 또 생긴 거에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러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 기도에 더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구요. 만약 이렇게 했는데도 경계가 나타나면 그 때는 있는 그대로 보는 이 수행의 원리를 탁 적용을 하는 거에요. 내가 그 마음이 탁 생기면, 비교하는 마음이 생겼다,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이 생기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야 돼. 여기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쏘지 말고 ‘오, 그래. 당연하지.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 수 밖에 없어.’ 알아차리고 다시 기도에, 본래 자기가 하고 있는 기도에 순간적으로 돌아 와 이걸 자꾸 반복을 하다 보면 그런 마음들이 자꾸 나는 횟수가 작아져요. 그럼 기도가 제대로 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기도의 힘이 수험생한테 금방 영향을 미칩니다. 네, 그렇게 하셔요.
질문4] 제사에 대해서 좀 질문 드리고 싶은데요, 지금 전통 유교식 그런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선원장스님 : 유교식 제사요?) 네, 그렇게 지내고 있고 그렇게 한 게 요즘 다 하듯이 형제들이 집안이 흩어져 살다보니까 모이는 것도 쉽지 않고, 준비하는 것도 사실 힘들고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 년에 모아서 한 번에 지내면 어떻겠느냐, 명절 때 돌아가면서 지내니까 반나절씩 걸리는데 그러지 말고 한 집에서 다 제사 모셔 가지고 한꺼번에 지내자, 그런 얘기도 있고 하여튼 얘기는 있는데 아직 바뀌지는 않는 것 같구요, 아마 조만간 제사 형태들이 친구들이나 물어보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러면 부처님은 이런 조상들에 대해서 제사를 올리고 하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계시는지 우리가 불교식으로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한 건지 그런 의미라든지 형식에 대해서 좀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답변4] 예. 사실 이 제사 문제가 참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우리 산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죽은 분들하고 관련돼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여러 가지 신비한, 그러니까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러한 영역들이 같이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제사를 지내다가 안 지내면 우리 조상들이 노하셔서 우리 가족들한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해꼬지 하지 않을까 이런 불안한 마음이 항상 있거든요. 그래서 아까 모아서 한꺼번에 지내지 하는 사람들도 마음 한 켠에는 이러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불안감이 있는 거에요. 그죠? 그래서 특히 이장할 때 저한테 와서 항상 묻습니다. 이장할 때 “스님, 이렇게 이장을 해도 되나요?” “돼요. 반야심경 한 편 하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디가서 물어보니까 안 된다고 그러던데요. 방위도 정하고 날짜도 정하고...” 나 그런 거 모르니까 그냥 반야심경하는 마음으로 가서 하라고 이렇게 일러줬는데 이게 아주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는 앞을 내다보고 있죠. 거사님 말씀 하신대로 이 한 세대가 바뀌는 시점에서 이 제사 문화가 많이 바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디지털 영단을 하자고 제안을 한 거에요. 그런데 지금까지 안 되고 있어요. 디지털 영단 지금 프로그램 만들고 있는데 아직도 충분히 비용이 안 돌아가니까 안되고 있거든요. 금년 안에는 어떤 식으로든 제가 하려고 해요. 그러면 이 디지털 영단을 하면 어떤 이점이 있느냐하면 이점은요, 제사에 관심 없는 사람도 제사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어요. 특히 20대, 30대 이 사람들한테 나중에 나 죽으면 제사 지내라? 벌써 부모님 본인들이 너무 잘 아십니다. ‘나 죽으면 이것들 제사 절대 안 지낼거야, 내가 죽기 전에 다 처리해 놓고 갈거야’ 하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절이나 납골당 등에 예약해놓고 너희들 신경 안쓰게 다 하고 갈거니까 걱정 말아라.”하면서 미리 정리하는 분도 꽤 많아요. 그런데 무조건 그럴 게 아니라 제사 의미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에서 지내는 제사의 의미는 조상님을 매개체로 하여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부처님 법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지고 살도록 하는 그런 방편이 거기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좀 제대로 안목이 있어서 49재 법문들을 보면 염불 자체가 전부 심지법문(心地法門)이에요. 영가를 위해서 하는 법문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딱 들으면 “와! 이거 진짜 내 이야기네?”하는 법문들로 다 구성돼 있어요.
예를 들어서 아미타불재하방 착득심두절망망(阿彌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茫茫) 념도념궁무념처 육문상방자금광(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 우리가 제사지낼 때 장엄염불에 나오는 겁니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이 어디에 계시는고? ‘착득심두절망망(着得心頭切茫茫)’, 마음을 집중해서 몰입해서 계속 ‘아미타불이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계속 추구해 보니까 ‘념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그 생각이 계속 지속이 되다가 생각이 탁 없어지는 그 무념의 상태에서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로다’ 즉, 안이비설신의 이 육문에서 자금광(紫金光) 자색금 광명이 좍 온 법계로 퍼지더라. 이것이 법문이거든요. 아미타불이 서방정토가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안이비설신의 이 육근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몸 속에 바로 자신 속에 아미타불이 늘 상주해서 자색 광명을 내뿜고 있다는 사실을 회광반조가 잘 안되기 때문에 여태 모르고 산 거에요.
그런데 회광반조가 되니까 바로 자성미타 스스로 자기 성품이 아미타라고 하는 것이 탁 자각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게 염불을 하는 사람과 염불을 듣는 사람이 자각을 하고 그 다음에 영가가 그 염불 듣도록 청해서 온 영가가 그 순간 자각을 했다 그러면 그 순간 이 삼천대천세계가 진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 지내고 나면 꿈에 해몽을 하기도 하고 제사 지내고 나면 좋은 일이 자꾸 생기기도 합니다. 왜? 제사 지내는 행위를 통해서 내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졌거든요. 삶의 이치를 알게 됐거든요. 그러니까 좋아질 수 밖에 없죠. 좋은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지. 그런데 제사를 그냥 의무감에 억지로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아이고, 조상님들 잘 모셔야지 내가 복 받는다고 그랬어.” 이런 자세로 제사를 한 두 번 지내다 보면, 복을 받을려고 그랬는데 복도 안줘요. 제사를 지냈는데도 나쁜 일만 자꾸 더 많이 생겨요. 그러면 “에이, 이놈의 제사 안 지내도 돼겠네”해 가지고 제사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제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불교에서 제사라는 말은 유교하고 똑같이 쓰는데요, 유교의 제사하고 불교의 제사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릅니다. 불교에서 제 자는요, 이게 맑힌다는 의미가 굉장히 많아요. 내 마음을 정화해서 맑히는 거에요.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정화되고 맑아져요. 영가는 자동적으로 맑아지고요. 그 파동에 가장 민감한 존재가 영가에요. 영가는 파동으로 존재합니다. 파동으로 모든 걸 감지하거든요. 그래서 영가한테 뭘 차려놓으면 와서 우리처럼 입으로 드시는 게 아니라 파동으로 감지해서 흠향을 합니다. 그래서 영가들은 간다르바라고 그래요. 간다는 향기라는 뜻이거든요. 향기로서 제사음식을 드셔요. 제사를 통해서 제사 지내는 스님과 제사 지내는 사람, 이 사람들이 전부 마음이 정화되고 맑아졌을 때 가장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게 제사에요. 그래서 제사도 하나의 큰 수행이지 따로 어떤 의례의식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제사를 쉽게 이해하고 쉽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렇게 디지털 문화를 도입해서 젊은 분들도 제사를 직접 가서 못 지내거나 해외에서 유학중에 있어도 할아버지 제사다 그러면 연락해서 “야, 할아버지 제사인데 절에 가서 지금 제사 지내고 있으니까 너도 향이라도 하나 거기서 꼽고 절 삼배해라.” 그러면 누구든 쉽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영리하고 영악스럽거든요. 그래서 하긴 하면서도 ‘아, 이게 뭘까?’ 하고 궁금해서 뭔가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럴 때 거기다 좋은 법문과 해설을 실어 놓거나 하면 거기서 ‘아, 불교가 이런 거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되고 불교에 호기심도 갖게 되고 그 다음에 그걸 통해서 제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가 이제 그와 같은 관점으로 조상들 제사를 모셔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젊은이들이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사가 좀 그런 방식으로 바뀌어져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 어쩔 수 없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장례의식과 함께 종교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 시대에 맞게 잘 가공해서 그 핵심을 드러내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금방 형식화 되고 금방 형태화 됩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것을 하나의 미신처럼 생각하고 싫증을 느끼고 떠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에요. 어떤 사람들은 ‘제사 안 지내면 큰일난다’하는 두려움에 가득 차서 있을 것인데 이런 것이 바로 미신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에이, 이거 지내나 안 지내나 똑같아’ 하면서 또 다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질문 하신 것의 중요한 포인트는 “이렇게 지금 변해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불교의 제사의식의 의미가 뭐고 이걸 어떻게 우리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재구성해서 혁신을 할 것인가?”하는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계신거죠? 상도선원이 지금 하나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동참을 별로 않지만 저는 고집이 있어서 동참을 안 하더라도 합니다. 분명히 좋은 변화와 결과가 있을 것이니까. 저는 이와 같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질문5] 안녕하십니까? 제가 지난 주에 동국대학교 선센터에서 간화선 집중수행 마치고 왔는데요. 좋은 느낌도 많이 받고 좋은 도반을 옆에 둬 가지고 제가 가서 수행을 마치고 왔는데요, (선원장스님 : 가족이 가장 좋은 도반이에요.) 그래서 앞으로 제가 다른 화두를 들어서 수행을 해야 될지 스님 하시는 자애미소명상 그 부분을 해야 될지 궁금해서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5] 예,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먼저 박수 한번 쳐 주세요. 예... 동국대 국제선센터에서 수불 스님한테 지도를 받아서 일주일 동안 간화선수행을 잘 하고 오셨네요. 그런데 간화선 수행을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불 스님이 개발하신 방법은 짧은 시간 동안에 어떻게 화두를 강하게 들어서 일단은 그 화두 맛을 보게 하는거 하는 그런 방법이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에 사실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굉장히 많이 헤맵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아주 일관성 있게 대답하십니다. 지금까지 저는 제가 직접 해보기도 하고 우리 스님들도 많이 보내고 우리 불자들도 우리 상도 식구들도 여러분이 하셨거든요. 지금과 같이 똑같은 질문을 많이 받게 되는데 화두가 뭐에요? 의심이거든요. 의정이고 의단이에요. 수불스님께서도 일관성 있게 하시는 대답이 이제 자연스럽게 화두가 올라오면, 그냥 확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면 이건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화두인 거예요. 이것은 잡아서 끝까지 밀고 나가서 지금 터트렸듯이 다시 터트려 버려야 돼요.
그리고 난 다음에 죽 유지되는 어떤 마음상태가 있으면, 즉 어떤 마음상태가 유지되면 그 경지에서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간화선 조사선의 가장 큰 볼륨은 뭐냐? 본성을 보는 거거든요. 견성하는 거거든요. 본성을 본다는 이야기는 본래 청정무구한 그 번뇌 망상이 다 사라져서 지혜와 자비로 충만된 본래 우리 마음자리 부처님 마음자리 보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하여 감을 잡거나 조금 봤거나 확연하게 봤다 할지라도 그 다음에 또 생각이 개입을 해버려요. ‘내가 그걸 본거야? 안 본거야?’하면서 그 다음에 또 하는 생각이 있는데 ‘아, 화두 들어야지.’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딱 걸리면 그때는 다시 의정에 걸렸던 화두를 들지 않으면 뭔가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의정이 제대로 한 번 툭 터진 상태라면 이젠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빨리 자유로워지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이제 의심과 의정을 위한 화두를 들지 않아도 그 마음이 늘 현전합니다. 맑고 밝은 마음이 늘 현전해요. 그럼 그걸 그대로 보고 쓰고 각찰하여 깨어있어서 분명하게 보면 그 자리가 바로 화두 자체에요. 거기서는 이제 처음에 의정을 일으키려고 들었던 화두를 또 다시 들려고 하면 그게 망상이 돼버려. 그냥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깨어서 보는 순간 이게 진짜 화두가 돼요. 이제 거기에는 화두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어. 그냥 본성이 늘 드러나서 삶 속에서 현현하고 그게 확연한데, 그게 잘 알아차려지지 않고 확연하지 않았을 때는 다른 화두가 자연스레 떠오를 수가 있어요. 이땐 그걸 잡아서 똑같은 방법으로 밀어붙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또 터트리라는 거죠.
아니면 그 상태를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깨어있어서 각찰(覺察)을 각(覺)은 깨어있다는 말이에요. 찰(察)은 분명하게 보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각찰하다보면 아까 질문하신 분처럼 뭔가에 내가 쑥 빠져서 그것을 꽉 잡고 있는 게 보일 수가 있어요. 이때는 각찰만 가지고는 안 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방하착을 해야 돼. 의도를 딱 넣어가지고 그냥 싹 흘려버려야 돼. 놓아버려야 돼. (좌종채를 손에 드시며) 이것을 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여기다가 놔야지 하는 의도만 딱 들어가고 그냥 놓으면 됩니다. 놓을 수 있죠? 그렇게 그냥 놔 버리면 되는 걸 “스님 이걸 어떻게 놓죠?”라고 물어봅니다. 어떻게? 이렇게? 저렇게? 그런거 없어요. 그냥 놔 버리면 되요.
그래서 각찰하고 잡고 있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냥 놔버려야 돼. 자꾸 놓고 놓다보면 마음이 편안하게 쉬어져요. 이걸 휴헐이라고 합니다. 능엄경에 가장 큰 핵심 주제가 뭔지 아세요? 대휴헐입니다. 크게 쉬는 거에요. 우리가 뭔가 머리로 계속 헤아리고 뭐 이거다 저거다 끊임없이 사량분별하기 때문에 이 본성으로부터 십만팔척이 멀어져서 본래 부처님 마음을 우리가 확인을 못하는 거거든요. 간화선 통해서 일단은 확인을 했으면 그게 조금 봤든, 확실히 봤든, 감만 잡았든, 어떤 경우든지 간에 딱 그걸 믿고 그냥 흘려보내야 돼. 각찰하고 흘려보내야 돼요. 이게 자유롭게 되면요 임제 사료간(四料簡)이라고 했어요.
나중에 내가 <진심직설>에 대해서 강의를 하려고 하는데 <진심직설>을 보면 열 가지 무심공부라고 나옵니다. 간화선의 극치가 사실 무심공부에요. 그러니까 화두를 들어서 의정이 터져 탁 그 자리가 밝혀지면 그때부터는 진짜 무심공부가 시작되는 거예요. 지금여기 공부가 시작되는 거에요. 일주일 만에 뭐 어떻게 해서 공부 끝났다? 내가 뭘 했다? 이 했다라는 사량(분별생각)이 붙으면 안 돼. 이제부터 거기서부터 무심공부 시작입니다.
무심공부 열 가지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각찰과 휴헐 방하착이에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공부에요. 일주일 간화선 집중수행 후에는 이제 화두는 진짜 자연으로 떠오르는 화두만 들어야 해요. 지금은 의심이라고 하는 또 다른 화두를 잡으려고 하고 거기서 잘못하면 또 다른 병통이 생겨요. 이걸 그렇게 여러번 이야기를 해도 공부를 한 사람들이 처음엔 잘 받아들이질 못해요. 저도 그랬어요. 저도 더 센 화두를 들어 가지고 계속 공부를 지어가야 되지 않느냐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자동 화두가 딱 떠오르게 되면 그 때 잡아야 되요. 화두는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의문이거든요. 억지로 의심하고 의문을 일으키면 그건 자동화두가 아니에요. 화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동국대 선센타에서 진행하는 간화선 집중수행은 일단 일주일 동안 인위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냥 딱 화두를 줘놓고 화두 일념이 전체가 되도록 몰아붙여서 일단 그 자리에 계합하도록 만들게 하시는 테크닉이거든요. 그걸 하셨으면 다음에는 진짜 이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경지들을 있는 그대로 깨어서 보고 행여 잡고 있는 것이 있으면 방하착 해서 마음의 헐떡임으로부터 쉬도록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셔야 돼요. 아셨죠? 먼저 마음의 헐떡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 쉬고 또 쉬는 공부를 하라는 겁니다. 그걸 하다가 그게 잘 안 될 때는 또 여러 가지 방법들이 여덟 가지 방법들이 또 시설(준비)돼 있어요. 그건 질문하신 분께서 나중에 어떤 경계가 변할 때 다시 저한테 질문을 하시면 그 때 가르쳐 드릴게요. 예. 자, 한 분만 더 받을까요?
질문6] 너무 수준높은 질문을 많이 하셔서 제가 질문하기가 약간 졸이는 느낌이 드는 데요. 그래도 자신있게 하고 싶어요. (그럼요.) 어디서도 질문할 수도 없구요. 제가 뭘 하다가 멈추는 걸 싫어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지금 절에 나온 지가 일 년 반을 넘어가는데 7월하고 8월에 신심이 물러나는건지 조금 지쳤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선원에 오는 시간에 자꾸 지각을 하거나 쳐졌어요. 스님께서도 지금까지 죽 도를 닦으셨고 지금도 여전히 공부를 하시고 가르치시고 계시지만 분명히 어려운 시절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조금 물러날 때 어떤 생각을 한다든지 누구에게 얘기를 듣는다든지 좀 어떤 방법이 저한테 도움이 될까, 저한테는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불교를 접한 지 오래 안됐지만 너무나 매력적으로 불교를 생각하고 있고요, 서서히 하다보니 뭔가 보이는 듯해서 우리 가족들도 전부 절에 오는 걸 제가 원을 삼고 있거든요. 나름대로 잘 해서 이제 딸도 잘 따라오고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제가 조금 잘 안되고 있어요. 그래서 7월달에는 분명히 지각이고 30분이 넘어도 안 오는 것 보다는 선원에 오는 것이 내가 공부를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좀 부끄럽지만 늦게라도 왔거든요. 그럴 때 스님께서 저한테 조금 편하고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있으면 좀 알려주시구요,
그리고 저는 오늘 절에 오면서 스님 계셔서 하는 말은 아니구요, 스님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다. 왜 그러냐 하면 저는 수미재를 가끔 생각하면서 잘 걸어다녀요. 제가 글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구요. 그래서 수미재에서 책을 보면서 많이 운적도 있어요. 『스님들의 어머니』라는 책을 보구요, 울고 나서 한번은 ‘아, 저건 안 봐야지.’ 그리고 다시 왔는데 다시 보고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스님들의 어머니』는 내가 자식을 키우지만 뭔가 다른 부분이 많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귀감이 되고 좋은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을 하는데 올 여름은 생각같이 공부가 잘 안되고 있어서 스님의 좋은 조언을 좀 부탁드립니다.
답변6] 예, 감사합니다. 박수 한번 크게 쳐 주세요. 공부 수행을 하다보면요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들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이 경험은 다 공유하는 경험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어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이 와서 상담을 하고 갔는데 슬럼프에 빠져서 굉장히 힘들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공부하다가 슬럼프에 빠져보지 않는 사람은 공부에 대해서 말을 하지 말아야 돼요. 수행을 하다가 슬럼프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수행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못나서 내가 힘이 없어서 잘못하고 있어서 슬럼프에 빠지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잘하는 사람도 쭉 하다보면 어떤 기운이 달라져요. 그래서 여기서 이쪽으로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하면서 여기 쑥 힘이 빠지면서 방황을 합니다.
이 방황 자체가 부정적이고 나쁜 게 아니라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이 부정적인 호르몬을 만들어 내고 부정적인 분위기가 생각을 감정을 만들어 내요. 이런 상황에 오래 빠져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실 빠지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여기서 잘 헤어 나오면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힘이 생깁니다. 근육이 생겨요. 마음의 근육이.
대나무는 마디가 있기 때문에 죽죽 자라거든요. 마디는 뭐에요? 사실은 어떻게 보면 흠결이거든요. 우리 삶도 수행도 중간 중간에 이런 슬럼프가 있을 때 마디가 생깁니다. ‘아, 내가 이런 이런 시행착오를 했지’ ‘이렇게 마음에 내가 조금 게으른 생각을 했지?’하면서 반성을 하게 되거든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왜 7, 8월에 내가 이렇게 힘이 빠지고 절에 오는데 좀 게을러졌는지 원인이 분명히 있을 거에요. 그 원인 파악을 해서 그것을 수정을 하고 교정을 하면 이걸 바탕으로 해서 훨씬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 현재 상태를 부정적으로 보지 마시고 그럴수록 더 나오셔서 책을 보시고 법문을 더 잘 듣고 ‘아, 내가 좀 정진이 부족하구나’ 하면 아침 저녁으로 기도 정진 수행하던 것을 다시 한 번 쭉 점검하고 심기일전해 보세요. 아시겠죠? 잘하고 계시는 거예요. 박수 한번 크게 쳐 드릴께요. 짝짝짝짝.
[출처] 2013. 8. 18. 일요일 무차법회 선원장 미산스님 법문 (상도선원) |작성자 상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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