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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동업할 때의 유의점과 계약서의 중요성
그러는 동안 내 인쇄소는 계속 번창했고 형편도 나날이 좋아졌다. 우리 신문은 한동안 그 지역에서 유일한 신문이었기 때문에 꽤 많은 수익이 났다. 나는 “처음 100파운드만 모으면 다음 100파운드를 모으기가 훨씬 쉽다”라는 말이 틀맂 않다는 걸 경험했다. 말 그대로 돈이 돈을 낳았다.
캐롤라이나 주에서 시작했던 동업이 성공을 거둬 자심감을 얻은 터라 몇 군데로 더 확장해 보기로 하고 평소 행실이 바로 직공 몇 명을 뽑아 각기 다른 주에 인쇄소를 차려주었다. 조건은 캐롤라이나 주 때와 같게 했다. 그들 대부분이 성공을 해서 6개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는 내게 활자를 사서 독립했다. 이를 터전으로 여러 가정이 기반을 잡고 살아갈 수 있었다. 동업 관계는 자칫하면 싸움으로 끝나기가 쉽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내 동업은 늘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서로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각자 해야 할 일과 서루에게 요구하는 일들을 계약서에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방법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분쟁의 소지가 전혀 없었다. 동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계약 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질투심과 미움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사럽을 하다가 신경 쓰이고 부담스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만 손해 본다는 기분이 들고 그러다 보면 우정에 금이 가고 관계가 깨지고 심지어는 소송까지 가는 등 안 좋은 결과를 맞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여러가지 이유로 펜실베니아 주에 자리에 잡은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한두 가지 있었다. 방위 제도와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 다시 말해 시민병과 대학이 없다는 점이 그랬다. 1743년에 나는 대학 설립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대학을 감독할 사람으로 피터스 목사를 염두에 두었다. 마침 피터스가 목사직을 그만둔 상태기도 해서 그에게 내 계획을 얘기해보았다. 하지만 피터스는 영주들의 일을 봐주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는지 내 제안을 거절했다. 그의 생각이 맞기는 했다. 그 뒤로 다른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이 계획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 그러다 다음 해인 1744년에 학술협회의 설립을 제안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내가 작성했던 제안서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내 기록들 속에 있을 것이다.
“공직을 구걸하지도 거절하지도 사임하지도 않겠다”
다음으로는 방위 문제를 얘기해보겠다. 스페인은 여러 해 동안 영국과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우리 주의 토머스 지사는 퀘이커 교도가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주의회를 설득해 군사 법안을 통과시키고 방위 규정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민간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연합체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 일을 추진하기 전에 먼저 <명백한 진리>라는 소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나는 우리의 무방비 상태를 정확하게 알렸고 방위를 위해서는 단결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며, 이를 위한 연합체 구성을 며칠 내에 제안하고 시민들의 서명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내 논문은 발표되자마자 놀랄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이 단체의 대표가 되었고 친구 몇 명과 함께 초안을 작성했으며, 앞서 말한 커다란 건물에서 시민 집회를 열기로 했다. 집회 장소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꽉 찼다. 대회장 곳곳에는 인쇄한 용지들과 펜과 잉크가 비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간단한 연설을 하고 나서 초안을 읽고 설명한 다음 서명 용지를 나누어 주었다. 모두들 열심히 서명해주었고,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었다.
집회가 끝난 뒤 서명 용지를 다 거둬보니 서명한 사람이 1, 200명이 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서명을 받았는데 서명한 사람이 1만 명이 넘었다. 이들은 짧은 시간 안에 무장하고 중대와 연대를 편성하고 지휘관을 선출하고 매주 한 번씩 모여 집총 훈련을 비롯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여자들은 그들끼리 모금을 해서 중대에 보낼 비단 군기를 만들고 여기에 내가 만든 여러 도안과 구호를 그려 넣었다.
필라델피아 연대를 구성하는 중대의 장교들은 나를 대령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사양하고 대신 로렌스 씨를 선출했다. 그는 인품이 훌륭하고 영향력도 있는 사람이어서 별 반대 없이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으로 나는 도시 외곽에 포대를 만들고 대포를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복권을 발행하자고 제안했다. 비용은 금세 마련되어 포대가 곧 설치되었고 총안(銃眼)의 방어벽도 통나무로 짠 뒤 흙을 채워 만들었다. 보스턴에서 구식 대표도 몇 문 사들였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국에 편지를 보내 몇 문만 더 보내달라고 하면서 동시에 영주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로렌스 대령, 윌리엄 앨런, 에이브럼 테일러 경과 함께 대포를 빌려오는 임무를 띠고 뉴욕의 클린턴 주지사를 찾아 갔다. 지사는 처음에는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그곳 의원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며 그 지방 풍습대로 마데이라주를 거나하게 들이키면서 차츰 태도가 누그러지더니 여섯 문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몇 찬을 더 마신 다음에는 열문으로 늘어났고 나중에는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열여덟 문으로 결정했다. 운반대가 달린 18파운드짜리 대포들은 상태가 훌륭했다. 우리는 신속하게 대포들을 운반해와서 포대에 설치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시민군들이 밤마다 포대에서 보초를 섰고, 나도 한 사람의 시민군으로 그들과 교대로 보초를 섰다.
나의 이런 활동을 지사와 의원들이 좋게 보았다. 그들은 나를 신뢰해서 시민병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법안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 의논했다. 나는 방위 문제에는 종교의 힘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시민들의 감화를 이루고 우리의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금식을 선포하자고 제안했다. 지사와 의원들은 내 제안에 찬성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는 금식이 처음이어서 비서관은 선언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매년 금식이 선포되는 뉴잉글랜드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나는 일반적인 형식에 맞추어 초안을 작성한 다음 독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은 지역을 고려해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두 가지 언어로 인쇄해서 각 지역에 배포했다. 이 일은 여러 종파의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시민군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화가 빨리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퀘이커 교도를 제외한 모든 종파의 사람들이 시민군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친구들은 내가 이런 일에 나섰다가 퀘이커 교도의 미움을 사서 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주의회의 신임을 잃을까 봐 걱정했다. 실제로 의원 몇 사람과 친분이 있는 젊은이 하나가 다음 선거에서 내 뒤를 이어 서기가 될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오더니 다음 선거에서는 내가 떨어지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마치 나를 위해 충고를 한다는 듯 쫓겨나느니 스스로 그만두는 게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공직을 구걸하지도 않고 공직이 맡겨지면 거절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공직자 얘기를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고 대답해주고는 덧붙였다.
“나는 그 원칙에 동의하며 거기에 한 가지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공직을 구걸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으며 또한 사임하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만일 내 서기직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한다면 그 직을 내게서 빼앗아가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내가 먼저 포기해서 언젠가 보복할 권리를 적대자들에게 잃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뒤로는 어떤 얘기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음 선거에서도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의회는 오랫동안 군비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는데, 그 문제에 대해 논쟁이 있을 때마다 주지사 편에 섰던 의원들과 내가 가까이 지내다 보니 일부 의원들이 보기에는 못마땅했을 것이고 내가 제 발로 나가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시민군 문제에 열의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내쫓을 수는 없었고 다른 트집거리를 잡을 수도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근거로 사람들이 나라의 방위 문제에 직접 나서서 도와주지는 않는다 해도 반대는 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침략 전쟁에는 반대하지만 방위 전쟁에는 분명하게 찬성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당시 이 문제에 대한 찬반양론의 글이 많이 쏟아져나왔는데, 그중에는 독실한 퀘이커 교도들이 방위 전쟁을 찬성하는 쓴 글들도 있었다. 이 글들 덕분에 많은 퀘이커 교도 청년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우리 소방대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계기로 나는 퀘이커 교도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당시 소방대의 조합에 60파운드의 공금이 있었는데, 포대 건설을 돕기 위해 이 돈으로 복권을 사들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조합 규칙에 따르면 제안이 있고 나서 다음번 모임까지 돈을 지출할 수가 없었다. 소방대원은 모두 서른 명이었는데 그중 스물두 명이 퀘이커 교도였고 다른 종파 사람은 여덟 명에 불과했다. 모임이 있던 날 우리 여덟 명은 제시간에 모였다. 우리는 퀘이커 교도들 중 그래도 몇 명은 우리 제안에 찬성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모임에 나타난 사람은 반대 의견을 가진 제임스 모리스 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이런 제안이 나왔다는 것이 무척 유감스럽다고 하면서 ‘친구들’(퀘이커 교도들은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친구들의 모임이라고 불렀다) 모두 이 안건에 반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불화가 생겨 결국에는 소방대가 해체되고 말 거라고 했다. 우리는 그럴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소수이고 ‘친구들’이 반대표를 던져 이 제안이 ‘무효’로 결정된다면, 협회의 관례에 따라 그 결정에 당연히 따라야하며 또 기꺼이 따를 거라고 했다. 드디어 투표할 시간이 되었다. 투표가 막 시작되려 하는데 모리스 씨가 규칙대로 지금 투표해도 상관은 없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몇 명 더 올 수도 있으니 좀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이 문제로 다들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식당 급사 한 명이 들어오더니 아래층에서 신사 두 분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알려주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보니 퀘이커 교도 대원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근처 술집에 여덟 명이 모여 있다면서 필요하다면 와서 찬성 쪽에 투표를 하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제안에 찬성했다는 게 알려지면 장로들과 친구들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도 있으니 자기들이 없어도 상관없으면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다수표를 확보한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약간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모리스 씨 말대로 한 시간만 더 기다려보자고 말했다. 모리스 씨는 아주 공정한 처사라며 반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반대하는 ‘친구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고, 모리스 씨는 몹시 당황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투표가 진행되었고 결과는 찬성 8, 반대 1이었다. 스물두 명의 퀘이커 교도 중 여덟 명은 우리 제안에 찬성 의사를 표현했고 열세 명은 투표 장ㅇ소에 나오지 않음으로써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결과를 보며 나는 방위 문제에 진정으로 반대한 퀘이커 교도의 비율은 21대 1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퀘이커 교도 모두 우리 소방대의 정식 회원들이었고 회원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으며 그날 회의에서 어떤 문제가 논의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퀘이커 교도로 살아왔으며 훌륭한 인품과 학식을 갖춘 로건 씨는 퀘이커 교도들에게 보내는 연설문에서 방어 전쟁을 찬성하는 의견을 여러 논거를 들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포대 건설을 위한 복권을 사라며 내 손에 60파운드를 쥐여주었고 혹시 복권이 당첨되면 그 돈도 모두 포대 건설에 쓰라고 했다. 그는 방위 문제를 얘기하다가 예전 자신이 모셨던 윌리엄 펜 경(1644-1718. 영국의 유명한 퀘이커 교도이며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창립자)에 얽힌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 윌리엄 펜 경의 비서로 일하던 로건 씨는 그와 함께 영국에서 왔다. 그때는 한창 전쟁 중이었는데, 그들이 탄 배를 적의 군함으로 보이는 배 한 척이 쫓아오고 있었다. 배의 선장은 방어 준비를 했다. 선장은 윌리엄 펜 경이나 그의 퀘이커 교도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선실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모두들 선장 말대로 했다. 하지만 제임스 로건만은 갑판에 남아서 총하나를 받아 들었다. 다행히 적함인 줄 알았던 배는 우리 편 군함으로 밝혀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로건 씨가 이 사실을 알리러 선실로 내려갔을 때 윌리엄 펜 경은 선장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친구들’의 원칙까지 어겨가며 갑판에 남아 배를 방어하는 일에 가담했다며 그를 호되게 나무랐다.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꾸지람을 듣자 로건 씨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대꾸했다.
“저는 주인님의 비서인데 어째서 아래로 내려오라고 명령하지 않으신 겁니까? 주인님도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는 제가 갑판에 남아서 같이 싸우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퀘이커 교도가 언제나 다수를 차지하는 주의회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군사 목적에 협조하라는 국왕의 지시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퀘이커교의 원칙 때문에 난처해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노골적으로 반대하자니 정부의 노여움을 살 테고 정부의 지시를 따르자니 퀘이커 교도 친구들의 원칙을 어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피해보려고 온갖 핑곗거리를 만들다가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되면 협조는 하되 군사 목적에는 협조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했다. 이때 가장 흔히 쓰이는 수법이 ‘국와으이 사용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돈을 내고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 지는 절대 묻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왕으로부터 직접 내려온 지시가 아닐 때는 이 방법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들이 고안되었다. 한번은 뉴잉글랜드 정부가 화약이 부족하다며(루이스버그 요새에서 쓸 화약이었다고 기억한다) 펜실베이니아 정부에 보조금을 청한 일이 있었다 토머스 지사가 의회에 지원을 촉구했지만 퀘이커 교도는 전쟁 물자인 화약을 사는 데 자금을 지원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뉴잉글랜드에 3천 파운드를 지원한다는 안을 통과시키고 지사에게 그 돈을 주면서 빵이나 밀가루나 통밀 혹은 ‘다른 곡물’들을 사라고 말했다. 이때 의원들 몇 명이 주의회를 계속 방해하기 위해서 토머스 지사에게 그가 요구했던 품목이 아니니 돈을 받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돈을 받겠습니다. 의회의 뜻을 아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곡물’이란 바로 화약을 말하는 겁니다.” 지사는 그 돈으로 화약을 샀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소방대 조합비로 복권을 사자는 안이 부결될까 봐 걱정하던 차에 이 일이 떠올라 나는 소방대 친구인 싱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부결되면 파이어 엔진(소방용 펌프)을 사겠다고 합시다. 그러면 퀘이커 교도들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집행위원을 뽑을 때 당신이 나를 추천하고 나는 당신을 추천한 다음 우리가 대포를 사는 겁니다.” 싱 씨가 대답했다. “이제 보니 의회에 오래 있으면서 많이 발전했군요. 그렇게 모호한 방식이라니, 통밀 또는 다른 곡물과 견줄 만한데요.”
퀘이커 교도들은 ‘모든 전쟁을 불가하다’라는 교리를 만들어 공표했는데, 이렇게 한번 공표하고 나면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쉽게 철회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그들을 보면서 던커 교도들이 더 신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종파가 처음 생겼을 때 나는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마이클 웰페어와 친분을 맺었다. 그는 다른 교파의 광신자들이 한번 들어보지도 못한 혐오스러운 원칙과 의식을 들먹이며 자신들을 비난한다고 억울해했다. 나는 새 종파가 생기면 으레 그런 것이니 더 이상 모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교리와 신앙 규범을 글로 써서 공표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마이클 웰페어는 이전에도 내부에서 그런 의견이 나왔지만 부결되었다며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우리가 처음 교단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주셔서 우리가 그때까지 진리라고 믿어왔던 교리가 사실은 진리가 아니며 또 진리가 아니라고 믿어왔던 교리가 사실은 진리일 수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밝은 빛을 주셔서 우리의 원칙이 개선되고 잘못이 줄어들었습니다. 즉 우리가 이 과정의 마지막에 이르렀는지, 영적 혹은 신학적 지식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만일 우리의 신앙 고백을 글로 써놓는다면 그것에 얽매여 더 이상의 발전을 할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후계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 커져서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이자 창시자인 우리가 정해놓은 교리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 절대 벗어나지 않으려 할 겁니다.”
이처럼 겸손한 종파는 아마 인류 역사를 통틀어 다시 없을 것이다. 모든 종파들이 자신들의 믿음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교리와 다른 것은 모두 틀렸다고 우기고 있다. 그들은 마치 안개 속을 여행하는 사람과 같다. 안개 속에 있으면 가까이에 있는 것만 또렷이 보일 뿐 조금이라도 앞이나 뒤나 양옆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은 모두 안개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 자신도 안개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런 당혹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최근 퀘이커 교도들 중에는 의원이나 장관 같은 공직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원칙을 어기느니 권력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