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관계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관계에 대한 문서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 아르메니아인 수백명이 학살당하고 소련 해제이후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과 영토분쟁을 빚는데,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와 협력하여 아르메니아를 대응하고 있다.
근세
근세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 제국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발흥한 사파비 제국과 대치하던 관계였다. 오늘날에 아르메니아가 해당하는 지역은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 사이의 중간 지대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양국 사이의 무역이나 전쟁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은 각기 순니파 종주국과 시아파 종주국을 자처하였고, 특히 사파비 제국은 순니파 무슬림 탄압이 극심한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무슬림들이 서로 무역을 하기는 어려웠고, 순니파와 시아파 종파 갈등과 무관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양국 사이의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19세기
카자르 왕조의 아가 모하마드 칸이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고원 일대를 통일하였다. 카자르 왕조의 건국 세력은 사파비 왕조와 마찬가지로 아제르바이잔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가 모하마드 칸 사후 19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 방향으로 남하하여 조지아 동부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오늘날 아르메니아 영토에 해당하던 지역은 19세기 초반까지 아르메니아인 인구 비중은 소수에 불과하였고 인구 대다수가 아제르바이잔인 유목민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은 유목이 농경에 비해 생산성이 낮다는 판단 하에서 해당 지역 내 아르메니아인 인구를 초빙하여 정착시켰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아르메니아 고원 이주는 19세기 말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계기로 가속화되었다.
20세기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하고 소련이 들어섰으며, 캅카스 지역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인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비슷한 시기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신생 터키 공화국이 들어섰다.
20세기 후반 소련 해체 이전 1980년대 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대대적인 무력 충돌이 벌어졌으며, 소련 해체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전쟁 당시 아제르바이잔이 크게 밀리던 입장이었으나, 당시 터키 공화국 측에서 아제르바이잔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비록 아제르바이잔이 패배하였으나, 아제르바이잔의 월경지에 해당하는 나흐츠반 일대가 아르메니아군에게 장악당하는 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터키의 아제르바이잔 지원을 계기로 신생 아제르바이잔과 터키 사이의 관계는 무척 돈독해졌다.
21세기( 2020년대)
2020년 7월, 에르도안은 푸틴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한다.#이후 튀르키예는 자유 시리아군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에 군대를 파견하여 아르메니아와 교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 대지진 당시 구조대를 파견하였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러시아 제국과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붕괴한 후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제각기 다른 국가를 세우면서 일어난 전쟁. 터키(튀르키예)도 개입해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했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간의 전쟁이었으며 1918년에서 1920년까지 치러졌다. 주전장은 나흐츠반, 장게주르(슈니크 주), 나고르노카라바흐였다
전황
1918년 6월 4일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수도 포위를 앞두고 오스만 제국의 요구에 따라 바툼 협정을 체결한다. 아르메니아는 5월 28일 예레반 코앞의 마을인 사르다라바드에서 오스만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대승으로 유리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자평하였으나 여러 계파로 나뉜 민병대들의 생각은 각기 달랐다. 아르메니아는 예레반을 건사할 수 있었으나 안드라닉 오자냔의 민병대를 포함한 반군 일부는 수도 서쪽의 자신들의 고향을 전부 포기하는 이 협정을 비난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군벌화되어 예레반으로 합류하지 않는다.
1918년 7월 14일, 수천의 민병대를 거느린 군벌 수장 안드라닉 오자냔은 전선에서 피난해 나흐츠반을 활동 거점으로 삼는다. 이 세력은 오스만과 아제르바이잔의 연결통로를 끊는 요충지를 미끼로 삼아 영국,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싶어 하였으나 러시아는 적백내전 직전이었고 영국은 아직 바쿠와 메소포타미아에 볼일이 한참 많이 남아 있었기에 호응을 얻지 못했다.
오스만군은 나흐츠반에 아르메니아 민병대가 들어선 것을 확인하고 트랜스캅카스 철길을 따라 빠르게 토벌군을 증원한다. 나흐츠반은 정주하기에는 좋은 땅이었지만 소수의 군벌이 웅거하기에는 오스만 제국 방향으로 너무 지척이었기에 이들은 버티지 못하고 장게주르 고지대로 밀려난다.
장게주르로 밀려난 아르메니아 반군은 현지 타타르인과 쿠르드인 마을을 불태우고 다니며 무법지대를 형성한다. 또한 이미 패전 단계에 돌입한 오스만군이 이를 진압하지 못한 채 동년 10월 카라바흐에서 물러나면서 반군은 카라바흐 산악지역으로 유입된다. 이들은 1919년 1월 슈샤에 당도하였고 패전국 감독을 맡은 영국 캅카스전선 사령관 윌리엄 몽고메리 톰슨에게 여러 차례 제지를 받는다.
톰슨 사령관은 파리 강화 회의 타결까지 현상유지만을 담당하였지 병력을 마구 끌어다 쓸 수는 없는 입장이어서 슈샤에 설립된 임의의 지방정부에 대해 지역 사무만 보도록 하고 정치적 행위를 금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반군에게는 무력 행위 정지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은 듣지 않았고, 사령관은 평협 이전까지 임시로 카라바흐 총독을 임명하고 이 지역 반군을 알아서 해산시킬 것을 주문한다.
카라바흐 총독 호스로프 베이 술타노프(Khosrow bey Sultanov)는 포위망을 좁혀가며 봉쇄와 협상을 병행해 가며 이들의 복종을 받아내려 하였으나 1년여의 기간동안 작전은 완수되지 못했고, 1920년 4월 볼셰비키가 바쿠를 접수함으로써 카라바흐 총독 체제 또한 무너지고 이 지역의 분쟁은 다음 시대로 넘어간다.
소련의 개입
이후 당시 캅카스의 레닌이라는 별명이 있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가 멘셰비키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개입하여 이 지역들을 포함한 캅카스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전쟁은 종료되었다. 소련은 이 전쟁의 여파를 감안해 1921년 3월 16일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내의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사이의 경계 및 나히체반,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점유권을 각각 아제르바이잔 SSR, 아르메니아 SSR의 사법권으로 정했다. 그러나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르메니아 SSR의 영토가 되는 것을 반대한 아제르바이잔 SSR은 강하게 항의했고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까지 참석, 최종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 건은 부결되었다. 1923년 7월 7일 아제르바이잔 SSR에 귀속되도록 경계가 변경되었고 이 사건은 종식되었다.
* 이 중 카라바흐 지역에 대한 분쟁은 70여년 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과 100년 후의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재점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