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긍익은 역사에 관심을 갖고 널리 사서를 섭렵했는데,
종래의 야사류가 너무 산만하여 체계를 잃은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태조 이래 각 왕대의 중요한 사건을
기사본말체적 방식에 의하여 편찬하되
견해나 비평을 가히지 않고 다만 여러 서책에서 관계기사를 초출(抄出)·기입하는 동시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는 새로운 역사책을 저술하려고 노력했고,
이것이 〈연려실기술〉로 집약되었다.
먼저 태조 이래의 역대 왕별로 왕실에 관한 내용을 간략히 서술하고
다시 재위기간중에 있었던 정치적 특기 사항을 싣고 있다.
그 다음 그때 활약했던 인물들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 원칙은
정승을 지낸 자,
문형(文衡)을 장악한 자,
특별한 공이 있는 자 등
여러 부류로 나누어 서술하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인물평을 한꺼번에 싣도록 했다.
이것이 원집(原集)이다.
또한 따로 역대 관직을 위시하여
각종 전례(典禮)·문예·천문·지리·변어(邊圉 : 대외관계) 및 역대 고전 등에 관한 것들을
크게 편목을 나누어 연혁을 기재하고 출처를 밝혔다.
이것이 별집(別集)이다.
별집은
단군조선 이래의 우리 문화사를 서술했다고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의 문화가 이전의 문화로부터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설명하려 했다.
문화나 제도에 관한 서술은
성격상 원집처럼 각 왕별로 쪼개어 서술할 수도 없고,
또한 조선시대에만 국한시킬 수도 없으므로
서술 체제를 원집과 달리한 것이다.
이는 〈동국문헌비고〉의 영향을 받은 분류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숙종 때의 일을 기록한 속집(續集)이 추후 찬술되었는데,
붕당사가 집중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정치적 사건에 대한 논평은
1세기 후에 저술된 〈당의통략 黨議通略〉과 매우 흡사하다.
편찬시기는
책의 첫머리에 이광사가 〈연려실기술〉이라 휘호하고
원교옹(圓嶠翁)이라고 쓴 것으로 볼 때
이긍익의 나이 42세 이전에 어느 정도 완성된 것 같다.
왜냐하면
이광사가 귀양살이 22년 만인 1776년(영조 52)에 신지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별집의 전사본(傳寫本)이
이긍익의 생존시부터 만들어져
그 수효가 많아 정본(定本)을 찾을 수 없다.
더구나 저자 자신이 의례(義例)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문에 여백을 두어 수시로 새로운 사료를 발견하는 대로 기입·보충하는 방침을
취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충하여 완본(完本)을 이루도록 희망했으므로,
전사본 중에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 않고
권질(卷帙)도 맞지 않은 것이 많다.
규장각에 원집 30책과 속집 19책으로 된 것과 별집 21책으로 된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고,
철종대까지 서술하고 있어 고종대 이후에 어떤 사람이 보충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균관대학교에 최한기장서인(崔漢綺藏書印)이 찍혀 있는 것으로
총 38권 23책(원집 32권, 속집 6권) 및 총 41권 26책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52책본(원집 33권, 별집 19책),
연세대학교에 45책본과 32책본이 있는데
모두 원집과 속집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는 〈연려기요 燃藜記要〉라는,
목차와 내용이 아주 다른 별집 이본(異本)이 있다.
1968년 1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해서 출간했다.
〈연려실기술〉은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역사서로서
당대의 역사의식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사건의 전개과정과 당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기사본말체라는
서술형태를 취하면서
당파적 편견을 배제하고
가급적 공정한 역사의식을 토대로 당시의 역사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기술하고자 한 사실에 대하여
저자의 견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인용서목을 첨가하고 있는 점은
실증을 통한 역사의 객관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근대 역사학의 정신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李肯翊
1736(영조 12) 서울~ 1806(순조 6).
조선 후기의 실학자.
가학(家學)인 양명학(陽明學)의 영향을 받아
실증적 역사서인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을 저술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장경(長卿), 호는 완산(完山)·연려실(燃藜室).
아버지는 광사(匡師)이고, 어머니는 윤씨이다.
'연려실'이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신선이 비단으로 만든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명한 서화가였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서실(書室) 벽에 손수 휘호해준 것을 그대로 호로 삼았다.
그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소론(少論)에 속했다.
그의 5대조인 경직(景稷)과 그 동생인 경석(景奭)은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었다.
특히 경석은 산림의 학자들을 대거 천거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이때 처음으로 요직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후 그가 천거한 송시열과 정적(政敵)이 되어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이긍익의 가문은 소론에 당적을 두고
노론과 정치적 각축을 벌였으며
증조부인 대성(大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소론의 대표자가 되었다.
조부인 진검(眞儉)은
노소당쟁의 절정이었던 신임사화에서 주모자가 되어
노론의 축출에 앞장섰으나,
영조의 즉위로 국면이 반전되어 처형되었다.
이때 처형된 소론의 잔여세력이 일으킨 1728년(영조 4)의 이인좌(李麟佐)의 난과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아버지 광사는 유배당했다가 죽었다.
이처럼 소론으로 일관한 가문에서
어린시절부터 불우한 일생을 보내야 했던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야사(野史) 정리에만 몰두하여
〈연려실기술〉의 저술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당시 주자학적 이념이 지배하던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소론의 선비들은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 광사는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이사하여
양명학의 거두인 정제두(鄭齊斗)에게서 배웠는데,
이긍익은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약 30년간에 걸쳐 저술된 〈연려실기술〉은
조선의 역사를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엮은 역사서로서
원집(原集) 33권,
별집(別集) 19권,
속집(續集) 7권으로 된 대저술이다.
이로써 강화학파(江華學派)가 역사학을 연구하는 실마리를 마련했다.
이 책의 의례(義例)에서
역사서술의 기본태도로 조직적인 체계, 편리한 열람, 충분한 자료수집,
조급한 서술의 금지,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수록의 5가지 기준을 들고 있는데,
이는 곧 객관적인 자기인식을 기반으로 한 사학을 주장한 것으로서
실학적 역사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역사인식은
객관성·공정성·체계성·인과성·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이는 뒤에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紀事本末體
역사 기술·편찬의 한 체재.
이 체재는 남송(南宋) 때의 원추(袁樞)가 편년체(編年體)인 〈자치통감 資治通鑑〉의 기사를
〈통감기사본말 通鑑紀事本末〉로 편찬하면서
하나의 역사 편찬·기술체재로 시작되었다.
이후 〈송사기사본말 宋史紀事本未〉·
〈원사기사본말 元史紀事本未〉·
〈명사기사본말 明史紀事本未〉·
〈좌전기사본말 左傳紀事本未〉·
〈서하기사본말 西夏紀事本未〉·
〈요사기사본말 遼史紀事本未〉·
〈삼번기사본말 三藩紀事本未〉·
〈금사기사본말 金史紀事本未〉의 9조(九朝) 기사본말 등
명·청대에 이 체재를 따른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
이 체재의 특징은
사건의 명칭을 제목으로 내걸고
그에 관련된 기사를 모두 모아 서술하여
사건의 전말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정치적인 사건을 기술하는 데에는 가장 효과적인 체재이다.
이는 기전체(紀傳體) 및 편년체와 더불어
동양의 3대 역사편찬 체재 가운데 하나로,
그 가운데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이다.
즉 먼저 나온 역사편찬 체제인 기전체와 편년체가 가진 단점,
즉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 분산되어 있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창안된 것이며,
역사에서 사건의 전말을 알고자 하는 새로운 역사인식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원추는 단순히 열람의 편의를 위해 이 형식을 썼지만,
청대 장학성(章學誠) 등은 상서(尙書)의 뜻을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이 형식을 중시했다.
우리나라에서 기사본말체로 편찬된 사서로는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燃黎室記述〉,
서문중(徐文重)의 〈조야기문 朝野記聞〉,
편찬자 미상의 〈조야집요 朝野輯要〉,
이원순(李源順)의 〈화해휘편 華海彙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