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사람들의 한없이 느리고 정체된 삶은 60여 년 고립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8월20일 토요일 맑음]
목·금·일요일 문 닫는 평양공항
중국 瀋陽(심양)에서 북한의 고려항공을 타고 어렵게 평양에 들어간다. 비행기는 작았고, 기내의 짐 싣는 선반은 여닫이문이 달리지 않은 개방형이었다.
女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승객들에게 「고려항공」이라는 글씨가 들어 있는 부채를 나누어 줬다. 기내에 냉방이 되는 것 같긴 한데 꽤 더웠다.
수백 번도 넘게 비행기를 타보았지만 기내에서 더위를 식히라고 부채를 선물로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류 절약을 위함일까, 아니면 비행기가 낡아 냉방 장치가 시원치 않은 까닭일까….
한 시간 반 남짓의 비행 끝에 평양공항에 도착했다. 평양시 순안구역에 있어서 옛 이름이 「순안공항」이었다고 한다. 좁고 한산했다.
북한 유일의 항공사인 고려항공 소속 비행기가 15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일행이 내릴 때 공항에는 네댓 대의 비행기밖에 없었다.
평양에서 비행기로 연결돼 있는 곳은 단 세 곳. 중국의 北京과 瀋陽 그리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이 세 도시로만 평양의 하늘은 열려 있었다. 평양~北京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평양~瀋陽은 화요일과 토요일, 블라디보스토크는 월요일과 토요일, 이렇게 단 두 차례씩 운항을 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평양공항은 목·금·일요일 3일 동안은 문을 닫아 놓고 있는 셈이 된다. 인구 2000만 명인 국가의 유일한 국제공항이 세계 250여 개국 중 단 두 나라하고만 운항하고 있는 셈이다.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아 비교적 손쉽게 입국수속을 마쳤다. 우리 일행 11명은 각자의 휴대폰 11개를 모두 공항 관계자에게 맡기고 나서 평양시내로 들어갔다.
작년에 발생한 용천역 폭발사고가 북한 지도부에 커다란 충격을 준 것 같다는 누군가의 설명이 있었다. 용천 대폭발 참사의 배후세력이 북한 내부 「불순분자들」의 소행으로 밝혀져 가면서 그때까지 조금씩 보급되어 가고 있던 휴대폰을 당국에서 일제히 회수한 뒤 휴대폰 소지는 지금까지 전면금지되고 있다 했다.
그때까지 조금씩 확대되어 가고 있던 휴대폰 보급은 북한에게 좋은 변화의 방향이었다. 용천에 아무리 큰 사고가 났다하더라도 그것을 조건반사적으로 회수하는 방식 대신, 인내심 있게 북한 사회를 안정적으로 체계화하고 조직화하려는 노력을 강구하고 경주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또는 통치)이자 행정능력이 아니었을까.
휴대폰 소지 전면금지라는 손쉬운 선택을 하고 만 이곳 관계자의 안목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공항에서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20~30km 정도 되는 거리는 왕복 4차선 도로지만 한적한 시골길 같다. 오가는 차량들이 드문드문 보일 따름이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진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꽤 있는 편이었다. 대부분은 걸어서 오가고, 일부는 자전거로 이동하고 있었다.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짐을 지고 가거나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꽤 큰 짐을 자전거에 싣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커다란 통나무를 앞뒤 두서너 명의 사람들이 어깨 위에 얹어서 지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더디고 느린 사회
북한은 체제 홍보 플래카드의 나라다.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거리에 계몽적인 내용의 홍보물이 넘쳐난다. |
공항에서 평양시내로 이어지는 길가의 가로수는 풍성했다. 주로 미루나무(포플러)가 주종을 이루었다. 삼중 사중으로 겹겹이 들어선 포플러 가로수 길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 강진군에도 저렇게 울창한 가로수길을 가져보고 싶었다. 10m도 넘게 높이 자란 포플러들이 만들어 주는 녹음의 그늘 밑을 북한의 인민들은 물 흐르듯이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3박4일 내내 느낀 것이지만 평양시내 일원에는 오직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버스도 별로 없고, 승용차도 별로 없고, 소나 말도 전혀 볼 수 없고, 심지어 강아지조차 한 마리 보질 못했다. 평양에는 사람만 살고 있는 것 같다.
북한 사회에 대한 첫인상은 그래서인지 매우 느리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걸어다니거나 간간이 버스나 트럭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자전거는 사정이 나은 사람들의 차지이다. 그러다 보니 평양 주변의 넓디넓은 도로들은 한적하다 못해 한산해 보이고, 거리에 걸어다니는 인민들은 목가적이거나 전원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더디고 느린 사회가 북한이다.
평양시내 관광을 다니는 우리 일행들도 평양사람들처럼 느리고 한가로워졌다. 『휴대폰이 없으니 세상 좋다』는 어느 분의 말에 우리 모두는 웃음을 터뜨렸다.
첨단문명의 기구로부터 해방된 데 대한 기쁨이다. 한국에서 휴대폰은 신체의 일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휴대폰이 없으니 이렇게 자유스러울 수 없다. 전화를 할 수도 없고 전화가 걸려오지도 않는다. 완벽한 자유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연락이 닿지 않는다.
지금 우리들은 평양에 고립돼 있고, 완벽하게 세상과 두절돼 있다. 평양의 사람들은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평양인들의 이 더디고 停滯的(정체적)인 삶은 그 고립의 결과다.
샤워를 못 하는 호텔
점심시간 무렵의 평양거리. 영광식당 등 음식점들이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꽤 모였다. |
대동강변에 있는 아름다운 섬 양각도. 그 섬 위에 세워진 북한 최고층 빌딩인 양각도 호텔이 우리 일행이 머물게 되는 숙소다.
내가 묵게 될 객실은 32-23, 즉 32층 23호다. 양각도 호텔은 47층의 웅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8대나 설치되어 있어 32층까지도 순식간에 도달한다.
내 방에 들어가니 냉방이 너무 잘 되어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방에 들어서자 마자 내가 한 일은 에어컨을 끄는 일이었다. 「넉넉한 살림이 아닐 텐데, 유류 절약을 위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의 변기는 「게베리트」 제품이고, 세면기기는 「프리드리히 그로헤」 그리고 「토토」… 객실內의 비품들은 대부분 수준급의 외제들이다. 고속 엘리베이터도 제작회사 표시는 없었지만 좋은 제품으로 느껴졌다.
문제는 관리였다. 세수를 하려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자 고급 외제 세면대 밑으로 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그래서 아예 샤워를 하려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보니 이번엔 샤워기가 보이질 않는다. 「이런… 어떻게 머리를 감아야 한담…」 2005년에 사는 우리가 세면대에다 얼굴을 들이밀고 머리를 감을 순 없잖은가. 최고급 호텔에 들어가서 샤워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런 수준으로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지.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프런트에 얘기해서 나는 결국 방을 바꿨다.
새로 배정받은 방은 30층 22호. 들어가보니 이 객실은 전구 하나가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방 안이 너무 어둡다. 총 4개의 전구가 방 안에 설치되어 있지만 촉수가 약한 데다가 3개만 들어오니 더욱 어둡다.
밤에 읽을 요량으로 소설책을 두 권 가져갔는데 어두워서 읽을 수 없었다. 다시 2층의 프런트로 내려가서 전구를 새 것으로 끼워 달라고 요구했다.
20여 분이 지나자 여성 두 명이 방에 들어와 새 전구로 갈아 주었다. 왜 혼자 오질 않고 두 명이 함께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날 객실 청소하러 올 때도 한 명이 오지 않고 두 명의 여성 고용원들이 들어와서 시트를 갈아 주고 청소를 했다.
세면대 옆 세면용 화장지 상자도 스테인리스 신제품이었지만 그 속은 텅 비어있었다. 그러니까 객실에도 화장실에도 대변용 화장지가 아닌 세면용 크리넥스는 제공돼 있지 않았다. 이 크리넥스 통은 23일 아침 호텔을 나올 때까지 채워지지 않고 끝까지 텅 빈 채로였다.
불일치에서 오는 모순들
오늘 하루를 평양에서 지내면서 느낀 소감은 「현저한 불일치에서 오는 어떤 모순」이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의 부조화랄까, 기반시설과 관리수준 간의 격차랄까, 사회적 인프라와 경영 콘텐츠와의 불일치랄까, 이런 것이 현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같은 불일치의 두드러짐이 나로 하여금 마치 목에 무언가 큰 것이 걸려 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어쨌든 지금 나는 오랜 禁斷(금단)의 평양에 있다. 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에 와 있는 거다. 음력 칠월 열엿새 보름달이 맑고 깨끗한 평양의 밤하늘 위에 두둥실 떠 있어 이곳에서의 첫날 밤을 더욱 착잡한 감동과 설렘으로 지새우게 한다.
[ 8월21일 일요일 맑음]
양각도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
평양의 대중교통 수단은 주로 전차와 버스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차량들이 너무 낡았다. 오늘만 해도 멈춰 서버린 버스를 20~30명씩의 남녀 인민들이 뒤에서 밀고 있는 장면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
평양시내의 「살림집(아파트)」들은 거의 초고층들이다. 20~30층 언저리들이다. 그 모든 살림집들의 외관이 첫눈에도 퍽 오래되고 낡았다. 서울시내에 그런 아파트가 있다면 지나가다가 몇 번씩 이상한 눈으로 되돌아보곤 하게 될 정도로. 최근 몇 년 사이에 북한 경제사정이 호전되어 가면서 평양시내 아파트들은 대규모적으로 외관을 수선 중이다.
많은 아파트들이 「리모델링」되고 있었다. 물론 국가에서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리모델링이란 말을 쓰기엔 좀 뭣하다. 수많은 인부들이 달라붙어 망치로 벽돌을 털어내고 있는 식의 모습을 보고 그걸 리모델링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다.
어쨌든, 좀더 낫게 수리하고 있는 모습들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되고 있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일행 중 평양을 두어 차례 이상 찾은 분들의 얘기에 따르면, 올 때마다 평양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해지고 인민들의 표정 또한 밝아지고 있다 했다.
오늘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던 민화협 정덕기 부위원장이 다른 긴급한 사정이 생겼다며 다음날로 일정을 바꾸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된 만찬시간 불과 한 시간 전에 통보해 왔다.
지난 6월엔 인천공항까지 갔다가 북측에 사정이 생겨 평양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하릴없이 강진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해가 잘 되질 않는다.
그런 의전적인 문제에 별로 예민하지 않는 편인 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언짢거나 기분 나쁘진 않다. 다만, 북한 사회의 관리 능력이랄까 운영 수준이 왜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절망 비슷한 안타까움이 있을 따름이다.
변경된 일정 때문에 자유시간이 생기자 우리들 중 세 사람은 늦은 오후에 호텔에 딸려 있는 양각도 골프장을 찾았다. 평양에 골프장이 있다니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호기심으로 골프장을 찾았다.
골프장 잔디도 그렇고, 클럽하우스도 그렇고, 골프장의 규모도 그저 그랬다. 그러나 평양시내에 골프장이 있다는 사실과 「따 보」, 「올 보기」 등 남측 용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여성 캐디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반갑다.
순박한 북한 캐디
평양거리의 체제홍보 구호. |
캐디 아가씨들은 어쩌면 그리도 순박하고 예쁜지 저절로 호감이 갔다. 우리 일행과 함께한 캐디 안내원은 화장도 별로 하지 않은 「홍동무」와 「김동무」라는 20代 처녀들이었다.
일행 중 한 분이 『김동무는 엉덩이가 예뻐서 아이를 많이 낳겠다!』라는 농담을 했을 때 보였던 그 캐디의 반응을 잊을 수 없다. 『아이구머니나!』 하며 얼굴을 붉히며 자지러질 듯 놀라더니 그만 옆의 숲 속으로 몸을 숨겨 버리는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북녘은 그런 식의 無垢(무구)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국內 골프장의 반질반질하고 똘똘하고 당차게 말대꾸하는 캐디들과는 너무나 다른 장면이었다.
북한에 돈이 없다는 것은 약점이자 장점이다. 오늘 북한의 고통은 달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은 많으면 사람을 황폐화한다. 돈은 경쟁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고, 끝없는 경쟁은 인간을 道具化(도구화)한다. 돈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돈도 벌고 인간성도 지키는 「윈-윈 방식」은 지상에 없다.
북녘의 사람들은 순박하고 겸손하고 꾸밈없이 친절했다. 북녘 사람들이 겸손하고 티없이 친절하다는 것은 양각도 호텔 프런트 근무자들의 어투에서도 잘 나타난다. 나는 날마다 구내전화 9번을 돌려 여성 안내원을 찾았다. 「오전 5시에 깨워 달라」, 「6시에 깨워 달라」는 「모닝콜」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예쁜 목소리의 여자안내원이 그 다음날 내가 부탁한 바로 그 시각에 전화를 해서 나를 깨우는데 이렇게 얘기를 한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일어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이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담고 있는 훈훈한 인간미를 나는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윽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호텔에 근무하는 안내원이 새벽에 모닝콜을 하면서 미안해하다니, 즐거웠다.
주체사상탑에서 생각한 「사람 中心」
평양시내 관광에 나섰다. 주체탑·만경대·개선문·혁명기념관 등 가볼 만한 곳은 대충 다 둘러보았다. 주체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주체탑은 높이가 무려 170m에 이르는 거대한 석축물이어서 맨 아래 기단의 돌들만 해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노련해 보이는 여성 안내원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던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힘들었던지 주체탑의 기단 돌 위에 걸터앉았다.
그 순간, 우리를 안내하던 북측 관계자 한 사람이 『거, 일어나시라요! 거기는 앉으면 안 됩니다!』 하는 것이다.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 이상의 헤프닝으로 이어지거나 분위기가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속은 안타까웠고 우스웠다.
바로 주체탑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것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라고 적혀 있는 바로 그 밑에서 사람이 돌멩이 위에 앉아서는 안 된다니…. 피곤한 사람이 앉을 수도 없는 바위가 이 사람의 세계에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일까. 바깥 세상 사람들이 북녘의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북녘의 사람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대동강변에 있는 그 유명한 옥류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하루에 수천 명에서 1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다녀간다는 북한 최고 최대의 음식점이 옥류관이다. 소문대로 옥류관의 냉면은 일품이었다. 면발이 그만이었다.
옥류관은 건물도 웅장하고 거대했다. 북한 건축물들의 특징은 우선 그 크기의 거대함에 있는 것 같다. 옥류관 앞마당의 크기 또한 수천 평에 이르는 것으로 보일만큼 드넓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그 드넓은 마당이 온통 새빨간 고추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옥류관에서 1년 동안 사용할 고추들을 말리고 있다는 것이다. 전원적이고 조선적이고 한폭의 한가로운 농촌 풍경 그대로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그 장관을 이루는 붉은 고추들의 바다를 사진에 담아두기 위해 셔터를 눌러 대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게는 그 광경이 어색하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옥류관이라면 서울의 어떤 식당에 해당될까? 조선호텔일까, 아니라면 삼청각이랄까. 어쨌든 수도 평양의 최고급 음식점 앞마당이 온통 고추 말리는 데 사용되고 있다니. 조선호텔 앞마당을 고추 말리는 데 사용할 수 있을까. 호텔 앞마당을 고추 말리는 데 사용해도 되겠다는 생각과 판단을 할 경영감각의 경영자와 지배인이 과연 서울에도 있을 수 있을까….
[8월22일 월요일 하늘은 계속 맑음]
大路에서 하는 보건체조
아리랑 공연의 장면들. 김혁을 따라 배우자는 카드섹션 |
오전 7시가 조금 지나서 평양시내를 자동차로 지나가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보았다. 도심의 왕복 4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2차선 길을 차지한 청년들 20여 명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둘러서서 인민 보건체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체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대로변도 아닌 대로상에서의 보건체조는 이채로웠다.
북조선의 수도 평양의 평일 오전 7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인민들이 집단체조를 한다. 평양거리엔 자동차라는 것이 그렇게도 드물었다.
우리는 우리(전남 남북교류협의회)가 지원하고 있는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평남 강서군 청산리를 찾아갔다. 평양에서 남포까지 이어지는 왕복 10차선의 「청년영웅거리」라고 명명된 시원스런 고속도로를 지나게 되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시절 지어 낸 거라 했다. 그러니까 金日成이 별세한 1994년부터 가뭄 등의 재해까지 겹치면서 북한 경제가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았던 1998~1999년까지의 5~6년 남짓의 시절, 전국의 청년들이 포대와 지게에다 흙을 실어 나르고 삽질을 하고 망치질을 해서 완성한 도로가 길이 42km에 이르는 「청년영웅거리」라 했다.
아리랑 공연 직전 자신들의 소속학교 이름을 카드섹션으로 선보이고 있는 평양의 9개 중학교 학생 2만 명. |
청년들의 애국심이 빚어 낸 광활한 도로를 보면서 숙연한 마음이 든다. 추종하는 이념과 체제가 무엇이든 자기를 던져 희생하는 젊은이들의 애국심은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원스런 거리에 왜 이렇게 차량이 보이질 않는 것인가. 이용 차량이 사실상 전무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 넓은 도로는 무엇을 위한 길인가. 차량이 다니라는 길일까, 바람이 다니라는 길일까. 나의 좁은 자본주의적 합리주의로는 선뜻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 지극히 북한적이고 평양적이다. 지독하게 非경제적이고 非효율적이다.
이토록 쓰임새가 없을 도로라면 투자할 우선 순위를 다른 용처로 돌렸어야 하거나, 그토록 거대한 예산이 투자된 대역사 끝의 성과물이었다면 도로를 가득 메울 차량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도록 경제행위가 이루어졌어야 마땅할 일이 아니겠는가. 광활한 기반시설과 한산한 활용 수준이라는 이 「현저한 불일치」가 북한의 암울한 현주소이자 문패인 것 같다.
『돼지사료로 먹일 겁니다』
청산리에 도착해 보니 북한 인민들의 어려움이 좀더 실감 있게 다가온다. 4세대가 살고 있다는 연립주택형 살림집들은 모두가 TV 안테나를 밖에 내걸고 있었지만, 창틀부터 노후할 대로 노후했다. 한 가정의 창틀에는 수십 개나 쌓아 놓은 옥수수들이 異國(이국)의 노란 풍경화처럼 보였다.
연립주택의 1층 나무로 된 공동 출입문은 절반쯤이 떨어져 나가 버린 데다가 남아 있는 절반도 비틀어져 있어서 이미 문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다.
담도 없는 연립주택의 마당에 들어서니 다섯 살 된 꼬마아이가 용변을 보고 있다. 용변을 다 마치자 40代 가량의 아이 엄마가 두 겹으로 접은 노란색 양면지 같은 것으로 아이의 뒤를 한 번 쓰윽 닦아 주고 그 종이는 손으로 구겨서 옆에 던져 버린다. 아이는 일어서서 옥수수밭에 잠자리를 잡으러 나갔다.
아이 엄마와 잠시 몇 마디 얘기를 나눴다. 옆에 담배 한두 보루와 좌판대가 보이고 자전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평양 어딘가에 나가 담배 파는 행상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왼쪽 손목에는 시계를 차고 있다. 그녀는 두어 개의 덕석 위에 가득 널린 노란 옥수수 알갱이들을 손으로 고르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던 일행이 순진하게도 『이 옥수수들을 어디다 쓰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던 북녘 여인이 대답한다.
『돼지사료로 먹일 것입니다』
민화협의 안내원 동무 한 사람이 우리에게 북한을 「정치 강국」이라고 했던 표현이 순간 뇌리를 스치며 나를 강타했다. 돼지사료라니. 어쩌면 저렇게 순발력 있게 둘러댈 수 있을까? 자칫 자존심 상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을 던진 우리에게도 「잘못」이 없지 않았지만, 40代 여인의 대답은 야속한 「기습」이었다.
도대체 돼지 한 마리 보이질 않는데, 무슨 돼지사료란 말인가. 무슨 대답이 이렇단 말인가. 저 연립주택의 2층에 애지중지 쌓아 놓은 옥수수들도 그럼 돼지사료란 말인가. 정치의식의 반복적 학습 효과가 이루어 낸 순간적 「걸작」에 나는 어떤 심연 같은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동포에 대한 「연민적 아픔」
개선문 앞 도로 한복판에 선 필자. 차량 통행이 거의 없다. |
어디에서나 어린아이들은 사랑스럽다. 용변을 보고 몸과 마음이 가뿐해진 꼬마와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소년은 옥수수 밭에서 잠자리 잡기에 정신이 없다. 강서인민학교 4학년 3반 리금송 소년은 불과 몇 분 사이에 잠자리를 세 마리나 잡아 이웃집 꼬마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리금송 소년에 따르면, 자기 반은 학생이 34명이고, 4학년은 3반까지 있다고 했다.
오전에 학교 갔다가 조금 전에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서 아주 예뻐 보이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 같다』고 했더니 소년은 환하게 웃었다. 소년의 웃는 모습이 티없이 맑고 아름답다.
『내가 어디에서 온 줄 아느냐』, 『난 서울에서 왔다. 서울 들어 봤느냐』 하고 물었더니 소년은 들어봤다고 했다.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소년은 웃고 있다. 그것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우리의 저 밑 원형질은 동질이라는 느낌과 비슷한 안도감이었다. 일행들 중에서 우리 두 명이 대열에서 이탈한 것을 뒤늦게 발견한 북측 안내원이 우리를 급하게 불러들인다.
소년과 헤어지면서, 『다음에 또 보자. 잘 있어라』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소년이 또렷한 목소리로 『잘 가십시오』 했다. 정말 또다시 볼 수 있을까. 그 소년은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번 訪北이 좀 길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3박4일의 평양 체류 일정은 너무 짧다. 북한 사회를 알기에도 짧고 내 감정과 감동을 수습하고 정리해 보기에도 너무 짧다. 이번 訪北은 나의 첫 번째 북한 「여행」이다. 그런데 벌써 내일이면 떠난다. 저녁에 북한의 리명복 참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첫 번째 방문이어서 여러 가지 감회가 있다』고 했더니 리참사는 내게 『뭐 나쁜 생각 없지요?』라는 다짐조의 반문을 한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쁜 생각 같은 거 없다. 다만 나는 지금 북쪽 사회와 북녘 동포에 대한 「연민적 아픔」을 느끼고 있다』
그랬다. 북한 체류 3박4일간 일관되게 나의 감정을 지배했던 것은 「연민적 아픔」이었다. 왜 우리 조국의 절반 부분은 이렇게도 낙후되어 있을까, 왜 이다지도 폐쇄되어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겨레일까, 좀더 잘 살고 좀더 상식적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좀 잘 살고 있기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회이기를 기대하고 희망하면서 찾았던 북녘 땅과 북녘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을 때 나는 「연민적 아픔」을 느꼈다.
아리랑 공연 유감
오후 8시 우리 일행은 15만 명을 수용한다는 「5월1일 경기장」(옛날의 능라도경기장)에서 열린 엄청난 규모의 아리랑 예술공연과 대집단 체조를 관람했다.
평양의 중학생들(중·고등학생들) 2만 명이 두 시간 동안 벌이는 카드섹션과 인조 잔디 구장에서 연인원 6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펼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과 교예(서커스)는 일원적 지배체제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장엄함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매스게임과 교예공연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얘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장대한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제1장 「두만강을 넘어」부터 마지막 장 「통일 강성 조국의 그날」까지로 이어지는 공연뿐 아니라, 1층·2층·3층으로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 펼쳐 보이는 상모(돌리기)놀이 등 그 모든 것들이 양과 질에 있어서 찬탄과 경악 그 이상의 충격과 감동이었다. 압권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 같은 거대 공연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 저런 일에 저렇게 많은 세월과 저렇게 많은 인원과 저렇게 많은 비용과 정성을 쏟아 부어 왔구나!」 이런 종류의, 이해할 수는 있되 지지할 수는 없는, 거부감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시각 그 지점에서 나는 북한의 저력과 희망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저토록 웅대한 규모와 일사불란한 효율성을 총연출하고 운영할 수 있는 북한의 세계적 기량과 노하우를 호텔경영과 관광사업, 외화벌이와 투자유치 쪽으로 집중할 수 있다면 북한에도 희망이 있겠구나」 하는 낙관적 근거 같은 거였다.
북한의 잘 닦인 도로들과 대형 건축물들 그리고 높은 교육 수준의 인민들도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게 할 미래의 인프라가 될 것이리라. 제대로 탄력 있게 활용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마지막 날 밤의 아리랑 공연 관람이 3일 동안 내내 마음을 어둡게 하던 내 「연민적 아픔」을 어느 정도 위무해 주는 것 같다.
한 사회과학도의 북한 위기 분석
북한의 낙후에 대해서 사회과학도인 나는 자문자답을 거듭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세 가지다.
첫째, 북한의 낙후는 외화, 즉 달러와 유로화의 부족에 있다.
평양의 학생소년궁전 옥상에는 「우리는 행복해요.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거대 홍보문구가 걸려 있다. 북한은 지금 대외결제수단의 절대부족으로 고립이 심화되고 있고, 돈의 부족으로 건설사업과 복지사업을 비롯한 많은 일에 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북한이 이 낙후를 벗어나려면 외국 돈을 공격적으로 벌어들여야만 한다.
둘째, 경영 감각과 경영 센스 또는 경영 노하우의 전반적 후진성에 있다. 양각도호텔의 경우만 하더라도 구조와 시설은 상당한 수준이지만 그것의 운영은 한심한 수준인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8월23일 평양을 떠나 北京을 향하던 고려항공 기내에서 나는 女승무원을 호출하기 위해서 머리맡의 선반에 부착되어 있는 「안내원 호출」 버튼을 다섯 차례 이상이나 눌러 댔지만, 끝내 승무원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서비스 훈련, 경영감각, 이런 것이 아직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비행기 운항에 걸맞은 경영(또는 관리와 운영) 감각과 노하우와 의식이 뒷받침되고 있질 않았다.
앞에서도 잠시 지적했지만, 이 「현저한 불일치」가 최악의 아킬레스건이다. 북한은 (한국을 비롯한) 서구의 세련되고 정교한 경영감각과 기법(글로벌 스탠더드)을 벤치마킹하고 습득·도입하려는 결단이 너무 늦어져 가고 있음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국유제에 있다. 무언가 이익을 남기려는 사업 부문에 국가가 나서는 것은 자살이고 재앙이라는 것이 21세기 이 세계의 상식이고 현대 경영학의 ABC다. 그런데 북한은 모든 것을 국가가 관장한다. 북한에는 개인 자가용이 단 한 대도 없다.
全세계 250여 개 국가 중에서 개인 자가용을 단 한 대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북한이 유일하다. 공산주의에 대해서 승리한 것은 민주주의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시장이었다. 시장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다.
북한 최대의 음식점으로 유명한 옥류관 건물 앞마당에 널려 있는 고추의 붉은 바다가 이채롭다. |
북한 개혁·개방의 「필요惡」
그런 의미에서 시장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에게 인간적인 것을 적용하고 제도화해야 인간사회는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활발화한다. 사람에게 非사람적인 제도를 강제하게 되면 역기능적 폐해만이 속출하게 된다. 그것이 상식이다. 이것이 지금의 세상사람들에게는 동서를 막론하고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런데 북한은 이것을 그렇게도 철저히 외면하고 부정하고 있다.
철저한 국가소유제도는 북한을 低발전의 늪으로 철저히 빠져들게 할 뿐이다. 개인소유제도(사유제)와 시장소유제도는 북한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필수」이다. 「필요善」까지일진 모르겠지만, 「필요惡」인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평양시내 곳곳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던 문구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현을 아무런 저항감 없이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金日成은 위대한 전적을 가진 북한의 지도자였다. 功過(공과)가 엄연히 따로 존재하고 있기도 하지만.
「先軍(선군) 정치노선은 사회주의 혁명건설의 만능의 寶劍(보검)」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북한의 특수적 정치지형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가끔은 아주 창의적인 「정치학 방법론」이라는 감탄까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 사회를 지탱해 주고 해석해 주는 「부분적 진리」를 넘어서서 그 「경전」과 「교리」만이 통용되어야 하는 「유일 진리」라며 신성화한다면, 북한은 아직 멀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평양에서는 「서기 2005년」이라는 말 대신 「주체 94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고, 한 측면에서는 좋은 발상과 방식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아직 「昭和(소화)」니 「平成(평성)」이니 하는 자기들만의 연호를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소화」라는 연호가 일본을 전일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있는 데 반하여, 북한의 주체 연호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북한 지도층의 강박관념
개선문 전망대에 오른 필자. 아름다운 대동강이 뒤로 보이고 강 가운데로 북한 최고층(47층)인 양각도 호텔이 우뚝 서 있다. |
나는 북한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급격하게 변경을 가져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의 북한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북한 사회가 이동해 가지 않으면 북한의 장래가 결코 밝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엘리트들은 「개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한다. 「이미 개혁·개방을 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추가 개방이란 말이냐」 이런 식의 심리상태와 대꾸를 갖고 있다.
「북한 사회가 충분히 잘 개방되어 있는 데 무엇을 더 어떻게 개방하라고 참견들이냐」 하는 식의 태도다. 이들의 뇌리에는 「체제안정」이라는 고정관념과 강박관념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북한의 지도층은 개방과 안정이 「역관계」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는 게 틀림없다. 북한 사회를 과도하게 개방하면 내부의 안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인식체계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인식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짧은 시간의 관점, 단기적으로 볼 때는 그것은 역관계일 수 있다. 문을 열면 내부 환경은 어떤 형태로든 간에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방과 안정은 단기적인 역관계다. 그런데 그렇게만 본다면 그것은 너무 근시안이다.
한 나라의 지도층이 근시안적이면 국가체제는 장기적 위험에 처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장기적으로 볼 때, 개방과 안정은 정관계(또는 비례관계)다. 개방을 통해서 북한 사회의 체질을 음성에서 양성으로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의 체력을 증강하는 길이야말로 북한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가장 검증된 첩경이기 때문이다.
[8월23일 화요일 맑음 선선한 기후]
우울과 무기력
짧은 체류를 마치고 이제 평양을 떠난다. 조만간 다시 만나자고 서로 언약했지만, 그 「다시」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주체성 있게 약속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재량이 북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 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사람이 중심이고 모든 결정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이곳에서 사람이 이처럼 무력해져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일행이 평양공항에서의 탑승절차를 밟으며 사라질 때까지 그동안 우리를 친형제처럼 잘 대해 준 리명복 참사와 리철 참사가 손을 흔들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일행 중 한 분이 섭섭함을 애써 감추려고 무뚝뚝하게 『빨리들 돌아가지, 왜 저렇게 서서 배웅하고 있는 거야. 에이 참, 그것도 그동안 정들었다고 마음이 찡하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조용했다.
평양공항 대합실에서 북한에 주재하고 있다는 중국대사관 무관 두 명과 잠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 중 좀더 젊은 무관은 서울에 두 번이나 다녀온 적이 있다는데, 유창하게 우리말을 구사하였다.
젊은 무관은 내게 『북한 쪽 관계자들이 북한 주민들을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게 허락하더냐?』하고 물었다.
자기들도 북한의 일반 주민들을 접촉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면서 중국 무관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북쪽이 당신네들하고는 크게 다른 사회이지만 당신들은 함께 통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니까 지금 당신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꾸준히 교류해야 할 것」이라는 취지의 조언을 했다.
두 명의 무관들은 친절했다. 그들의 조언 역시 고맙고 옳은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뭔지 모르게 자존심이 짓밟힌 것 같은 심정이었다. 「왜 내 조국의 한 부분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오전 8시40분에 떠난 고려항공은 한 시간 반쯤 뒤에 우리를 北京에 실어다 놓았다. 北京에 도착하니 비로소 휴대폰이 개통된다. 이제야 바깥세계와 연결되는 것이다. 아, 중국에 돌아오니 다시 세상과 연결되는구나.
이번 북한 여행을 하면서 내가 얻은 가외의 소득은 우리 남한과 남쪽 사람들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동시대 한국인들이 좀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마디 苦言的(고언적)으로 부기해 두고 싶다.
우리 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무례·오만했고, 이해심이 부족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이 우리들에게 좀더 깊이 이해되었으면 했다.
평양공항에서 북한의 젊은 여성과 먼저 탑승절차를 밟겠다고 언쟁을 벌이던 모습, 북한의 젊은 여성들에게 성적 희롱에 가까운 낯뜨거운 농담을 마구 던지는 모습, 북측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이 뻔한 상대 비하적 언사와 태도를 보이는 모습… 등은 혹시 우리가 아직도 「요란한 빈 수레」의 수준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과 의문을 갖게 했다.
나 역시 한국인이기에 예외이진 못하겠지만, 한국이 북한인의 마음을 얻고 세계인들과 진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선 우리들이 좀더 친절하고, 겸손하고,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해준 여행이었다.
對北 지원은 南北을 이롭게 하는 접근
끝으로, 남측이 북측을 도와주는 對北협력사업과 남북교류사업은 단기적으로 보자면 북한을 도와주는 것이지만, 길게 보면 그것은 바로 우리 한국을 도와주는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반드시 통일은 될 것이다. 그러나 저 낙후상태의 북한인 채로 우리와 통일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커다란 부담이 될 수 있다.
북한 사회가 목가적 느림의 수준으로부터 상당한 속도감을 붙이고, 비교적 탄탄한 기반시설 위에 합리적 경영 노하우를 접속시키고, 우리와 대등한 수준과 국력에서 하나의 연방과 같은 형태로 통합되어지는 방식이 최상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오늘의 對北지원사업은 궁극적으로 남과 북을 함께 이롭게 하는, 어쩌면 유일한 방식이라는 데 대한 국민적 인식을 요청하고 싶다. 이번 訪北은 이것을 경험적으로 깨닫는 여행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