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우 외(2003). 『교육과정이론』. 교육과학사.
pp. 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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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우리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볼 때 가장 표면에 두드러지는 것은, 사람은 대체로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여, 이것 이외에 따로 삶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물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 또는 직업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이유에서 또는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적어도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이 삶의 전형적인 형태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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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전형적인 형태의 삶은 남을 위하여 사는 삶, 즉 이타적 삶이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삶’이라는 말을 할 때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거의 누구나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는 삶은 이타적 삶이라는 말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이 더 많다든지 이타적인 행위보다는 이기적인 행위를 더 많이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관찰이고 보면, 위의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령 직업생활을 두고 생각해 보자. 예컨대 농사짓는 사람이 질 좋은 쌀이나 채소를 생산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먹기 위함이 아니요, 전자 제품 생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이 쓰기 위하여 우수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운수업에 종사하거나 헬스클럽을 경영하는 사람 또한 자신의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자신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직업생활을 하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한 대가로 봉급을 받거나 이윤을 남겨 그것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때로는 여가생활을 즐기지만, 이것은 그들의 직업생활과 동떨어진 또 하나의 삶이 아니라 직업생활과 연속선을 이루는, 보다 나은 직업생활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직업생활을 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이따금 뉴스에 보도되듯이, 예컨대 과일에 색소를 주사한다든지 질 나쁜 제품으로 과대 광고를 하여 폭리를 남기는 것과 같이, 거의 범죄적인 행위에 해당하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원래 살아야 할 이타적 삶을 잘못 사는 경우일 뿐, 그들의 그러한 행위가 그들의 삶의 지향성(즉, 이타적 삶)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가정생활 또한 이것과 다르지 않다. 가정생활이라는 것은 그 핵심에 있어서는 자녀를 양육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과 노인들을 부양하는 것을 뜻한다. 가정생활에서도 때로 사소한 이해관계나 감정문제로 불화와 반목이 생기는 경우가 전연 없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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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만, 이것이 가정에서의 삶이 본질상 이타적 삶이라는 것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이타적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삶에 성공한 경우에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가정생활이나 직업생활에서 가족 구성원이나 국민 전체의 삶을 위하여 위대한 (이타적) 업적을 이룬 사람은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만족과 긍지를 느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다. 그 중에서 출중한 사람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한다. 이 정도 삶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모범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도덕적인 면에서 남의 지탄을 받지 않고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을 원만하게 영위한 사람이라면 그는 잘 산 것이며 좋은 삶을 산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이 삶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까지 포함하여, 우리들 중에 그런 이타적 삶을 떠나서 그것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이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파악할 가능성은 전연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따금 교육의 의미에 관하여, ‘교육은 삶을 위한 준비’라고 말할 때, 교육이 준비시켜 주어야 하는 삶을 일단 그런 이타적 삶으로 생각하는 것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타적 삶이 삶의 의미를 파악하는 유일한 관점인가?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규정할 수는 없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손쉬운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타적 삶을 살 능력도 필요도 없게 된 노인, 또는 쉽게 말하여 ‘세상에서 쓸모없게 된’ 노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가령 평생을 이타적 삶을 살아 왔고 또 삶의 의미를 순전히 이타적 삶으로만 생각해 온 노인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제 그 노인은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일도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고 직업생활에서도 은퇴를 했다고 하자. 그 노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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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또는 무엇으로 ‘消日’해야 하는가)? 이따금 우리 주위에서 목격되는 바와 같이, 실지로 그와 비슷한 형편에 놓여 있는 노인들 중에는 스스로 ‘세상에서 쓸모없게 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라도 하듯이 이때까지 살아오던 이타적 삶을 계속하려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의 그 利他行은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일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여가 활동’밖에 없을 것이다. (이타적 삶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의 ‘여가 활동’은 그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것이 그 노인의 삶,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강제로 떠맡겨진 삶이다. 오로지 여가활동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삶 ― 실지로 그런 삶을 살아 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과연 그것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만약 예의 그 노인이 이타적 삶을 사는 한편 自利的 삶을 살아 왔고 그 결과로 자리적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고 생각해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타적 삶은 누구나 살아야 하는 삶인 만큼, 이타적 삶을 살지 않고 자리적 삶만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타적 삶을 ‘남을 위한 삶’이라고 풀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리적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라고 풀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을 위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利己的인 삶’과는 다르다. 이기적인 삶은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데 비하여 ‘自利的 삶’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삶을 뜻한다. 예의 그 노인은 이런 의미에서의 자리적 삶을 살 수 없다. 그가 살아야 할 자리적 삶은 다른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고 혼자서도 살 수 있는 삶, 그리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리적 삶은 한마디로 말하여 심성함양을 위한 삶이다. 여기서 심성함양이라는 것은 곧 교과를 공부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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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이면에 들어 있는 마음을 그 본래의 모습(즉, 마음의 본성)으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인 만큼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며, 그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앞의 노인의 경우에, 만약 그가 그 동안의 생애를 통하여 자리적 삶을 사는 방법을 연마해 왔다면, 세상에서 쓸모없게 된 지금 그는 학교의 교과를 통하여 배운 것과 동일한 종류의 지식을, 이타적 삶을 살 필요 때문에 방해를 받음이 없이, 보다 깊이 있게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리적 삶을 살 능력이 있다면 ‘세상에서 쓸모없게 되었다’는 현재 그의 처지는 결코 한탄할 것이 아니요 오히려 더 없는 축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교과공부는 자리적 삶을 사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요 종국에 가서는 이타적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리적 삶을 누리는 것을 至福으로 생각하게 되도록 하는 준비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하지만, 이타적 삶과 자리적 삶은 원칙상 서로 동떨어진 두 개의 삶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삶의 두 가지 측면이다. 앞의 가상적인 노인의 경우와 같이 극히 드문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말하여 우리는 누구나 이타적 삶과 자리적 삶을 동시에 살고 있다. 그 두 가지 삶을 ‘삶의 지향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삶의 의미를 파악하는 상이한 관점을 나타낸다는 뜻에서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살면서 그 삶의 의미를 이타적 삶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기도 하고 자리적 삶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삶의 의미를 그 두 가지 중의 어느 쪽으로 파악하는가에 따라 개인의 삶의 방식이 상당히 달라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타적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긴박한 현실로 닥쳐오고 있는 만큼, 우리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이타적 삶에 파묻혀 자리적 삶의 중요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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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누구나 다소간은 학교에 다니면서 교과를 공부했으면서도 일단 직업을 가지고 난 뒤에는 문학과 수학, 과학과 역사 등 이른바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 많은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직업 중에서 교직은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앞에서 이타적 삶의 의미를 직업생활과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교직을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은 그 때문이다. 교사는 정의상 교과 공부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며, 그런 만큼 스스로 자리적 삶을 살면서 학생들에게 자리적 삶의 가치를 전수해주는 사람이다. 여기서 ‘교사’는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모든 학교에서 교사로 임명된 사람을 주로 지칭하지만, 그 이외에도 학자와 예술가와 종교인에서 보듯이, 성격상 교사가 하는 일과 유사한 일을 하는 사람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물론, 교사도 다른 직업인들과 마찬가지로 이타적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자리적 삶으로 명백히 규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모범을 보이는 것을 직업상의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그는 자리적 삶을 삶의 주축으로 삼는 이상, 때로 이타적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데에 따라오는 영광이나 세상 사람들의 존경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교사 자신이 인정하건 않건 간에 오늘날 대부분의 교사는 바로 이런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자리적 삶에는 남을 이롭게 하는 측면, 즉 이타적 측면이 전연 없는가? 교사의 삶은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교사가 자리적 삶을 사는 것은 교사의 삶이 의미하는 교과공부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생각하여, 교사가 다른 사람에게 자리적 삶의 가치를 전수해주는 것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이익’은 이타적 삶을 사는 사람이 베푸는 이익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교사가 베푸는 이익은 자리적 삶이 그 삶을 사는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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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이 된다고 지각될 때에만 이익이 되는 그런 성격의 것이다. 결국, 교사의 자리적 삶에 이타적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교사 자신의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리적 삶에 들어 있는 이 이타적 측면은 교사가 가능한 한 충실하게 자리적 삶을 사는 것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물론, 자리적 삶은 교사의 삶에 전형적으로 나타나지만, 교사가 아닌 다른 직업인도 자리적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자리적 삶에 이타적 측면이 들어 있다는 이 점은 교사의 삶에만 들어맞는 것이 아니라 직업인의 자리적 삶에도 마찬가지로 들어맞는다. 노인이 손자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문학의 원시적 형태)는 ‘손 씻어라, 밥 먹어라’는 잔소리가 손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손자에게 이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