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 위의 거대한 망치 / 김영남
가을 하늘 아래 과수원에 세운 말뚝이란
'그래 바로 여기야, 이런 곳에서 우리도 저처럼......'
하는 사람들 감탄사 모양이다. 그런 감탄사를 곁에두면
쓰러진 울타리가 다시 얼어날 수 있겠고,
바람에 날아가는 빨래도
하얀 생명을 온전하게 건질 수 있겠다.
발정난 염소가 거기에 줄이 묶인다면
왔다 갔다 하던 흥분도 동그렇게 삭이겠다
흥분을 잘 삭이지 못했던 옆집 아저씨는
그런 감탄사를 뽑아 아예 휴대용 감탄사로
사용한 적 있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결국
휴대용 감탄사를 지나치게 남발하다 또 다른 감탄사에 맞아 쓰러졌다.
쓰러진 곳 웅성웅성하고 있는 것들 곁에 다가가 보면
쓰러진 것들을 놓고 서로 다른 감탄사 때문에 싸운다.
그러다가 그걸 탱크처럼 서로 수평으로 겨누게 되면
정말 큰 일을 일으키게 된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과수원 울타리를 지나
집마당을 지나 텃밭 해바라기 위에 앉는다.
흔들리는 감탄사 위에서도 고추잠자리는 저렇게 잠을 잘 잔다.
그러나 난 그 풍경으로 인해 평화롭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다.
일어나 능금나무 아래를 불안하게 서성이다가 선다 말뚝처럼,
그래. 푸른 하늘 아래 문득 세워보는 말뚝!
가을 하늘은 불안한 나도 불안하지 않게 말뚝 박는 거대한 망치다.
지금 내 머리도 푸른 하늘에 얻어맞아 멍멍하다.
사랑가 3 / 이경록
1
그대 나를 위해서 마침표라도 되어 다오, 아니, 쉼표가 되
어 다오. 쉼표가 되어 내가 긋는 사랑의 궤적, 그 위에 印으
로 찍어 다오. 아침에도 찍고, 저녁에도 찍어 다오. 내가 돌
아와 뜯어보는 阿火, 팔백 리 밖 사람아. 찍어 다오. 숨쉴
때마다, 그대 내 육신의 구석구석까지 찍어 다오.
내 생의 작문, 도막도막 구절, 그대 찍는 쉼표 앞에 놓이
게 되리라. 여기서도 쉼표, 저기 가도 쉼표, 이 세상은 쉼표,
시각마다 쉼표,
2
나는 마침내 한 개의 마침표가 되겠다. 그대여. 모든 그대
의 쉼표가 쉼표로써 끝나고, 어미 <……겠다>와 함께 종결로
올 때 나는 그 끝에 쓰러져 마침표가 되겠다. 끝없는 죽음,
그 白面을 나 혼자 만나겠다. 그대여.
마침표를 먼저 찍다 / 이대흠
세상살이의 시작이 막장이고 보니 난 어쩜 마침표를 먼저 찍은 문장 아닌지 .막장은, 마침표는 이전의 것을 보여주는 구멍이다 .그 캄캄한 공사장의 먼지, 이 무수한 마침표를 통해 본다 .오래된 짐승의 알처럼 둥근 마침표 .내 생의 처음이었던 어머니, 그 마침표. 그녀의 검은 눈동자 .한 세상의 아픔이 그득하여 그녀의 눈빛은 맑다 .파이프 메고 어두운 계단을 오르며 난간에만 빛이 웅성거림을 본다 .난간에 버려진 저 작은 쇳조각, 깨어진 돌멩이가 결국 하나의 사상임을 너무 늦게 알았다 .어두운 곳이라 난간이 길이다 .난간을 걷는 나의 生 .언제든 죽을 수 있으므로 고개 숙이지 않으리 .무겁다 . 무거운 것들이 적어 세상은 무거워졌다 .대부분 이 짐을 지지 않는다 .마침표를 찍자 여기부터가 시작이다.
동그라미 /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코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땅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물음표(?)에 대하여 / 복효근
오늘 아침 찌갯감
일본산 생명태 아가리 속에는
낚시바늘 하나 박혀있다
살기 위해 삼켰으나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었으리라
그래서 낚시바늘은 물음표를 닮았다
옷장 밖에선
먹이를 찾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있는 몸을 상징하듯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몸이 빠져나간 옷들은
물음표 하나씩 달고 있다
살게 한 것도 물음표였으나
죽게 한 것도 물음표라는 듯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다
콩나물의 물음표 / 김승희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 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의 금빛으로 터져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여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내 눈 속에 꼭 감은 네 눈 속에
쑥쑥 한시루의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빨리
검은 보자기 아래 -- 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였다
콩나물국, 끓이기 / 이동호
사내는 뚝배기 속으로
지휘봉을 가져간다
도에서 끓기 시작한 뚝배기 속의 음표들을
사내는 지휘하듯 휘휘 내젓는다
음계는 금세 높은음자리로 음역을 높인다
이 음악은 너무 뜨거워 맛보기가 힘들다
사내는 입술을 오므려 솔,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이 뚝배기 속으로 뛰어든다
음악소리가 완전히 익기까지는
시간을 조금 더 끓여야한다
사내는 잠시 식욕을 닫고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본다
창 밖 나뭇가지가 세상을 휘젓는다
공중 부양하는 수많은 손바닥들
손대기에도 너무 뜨거운 세상 때문이다
땅의 뚝배기 속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뭇잎이 몸을 굴린다
사내가 삶의 안쪽으로 몸을 돌린다
뚝배기가 심장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뚝배기를 식탁 쪽으로 옮긴다
사내는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에 숟가락을 끼운다
뜨겁게 김이 오르는 음표들을 입으로 분다
음표들이 낮은 음계에 도달한다
뒷모습이 콩나물인 사내가
음악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한 소절의 생이 고스란히 입안에서 씹힌다
창 밖 저녁노을이,
얼큰하다
괄호론 / 서덕민
괄호는 묶음의 형식이지만
비어있음의 형식이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잔득 묶고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괄호는 어쩌면
모호함의 형식일 수도 있다
가령 내 어머니가 그렇다. 그녀는
주로 미지수를 묶고 다니므로
무엇인가 들어 있다 할지라도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아니, 텅 비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괄호는
등호를 거리낌없이 뛰어넘어도
결코 균형이 무너지는 법이 없다
괄호가 사라진 자리에 어룽어룽한 자국.
어머니란 한 쪽 변에
잠시 여자를 비워둔 여자일까
미지수를 묶고 다니는 그녀
미간을 둥그렇게 찡그리며
눈물을 흘리면, 작고 예쁜 괄호가 생긴다
내가 앓아야 할
세상의 모든 아픔 앞에서
그녀의 눈가는 언제나 먼저 축축해지는 것이다
나도 별수없이 그녀의 괄호안에 묶이는 것일까
그렇게 그녀가 모두 묶어서
미리 중심을 잡고 있는 것 아닐까
괄호란 여자의 형식이다
어렵고 아픈 것들로 가득찬
텅 비어 있는 내 어머니의 형식이다
물새 발자국을 따라가다 / 손택수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