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 성당은 1886년의 한불 조약으로 박해의 시기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직후인 1891년 11월 9일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고, 103위 성인 중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비롯하여 44위의 순교자가 성인품에 오른 신앙의 못자리인 서소문의 순교 성지에 서울에서 두 번째, 전국에서 아홉 번째 본당으로 설정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온 선열들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서소문 밖 형장이 기억하는 첫 인물은 만천(蔓川) 이승훈이다. '덩굴이 무성한 시냇물'이라는 다소 풍류적인 호를 갖고 있던 그가 태어난 곳은 서소문과 이웃한 반석골, 곧 지금의 중림동(中林洞)이다. 자신의 호와 같이 덩굴이 우거져 무성한 시내를 앞에 둔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훗날 조선 교회의 베드로로서, 본명이 의미하는 반석(盤石)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명문가에 태어나 이미 24세에 벼슬길에 나서 환히 열린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가 환난(患難)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 되면서 부터이다. 광암 이벽이 주도했던 이 모임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접하고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교회사상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것이 1784년의 일이다.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전교에 힘쓰던 그는 1801년 신유박해의 서슬로 최필공,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 여섯 명의 당당한 태도와 굳센 신념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성당 오르는 길 입구 성가정상
성당 오르는 길 입구 성가정상
중림동 약현성당
1886년(고종 23)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 서울에서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자 1887년에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여 강당을 짓고 교리를 교육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이 완공되었다. 이 강당이 자리잡은 언덕이 서소문(西小門) 밖 약현(藥峴)이었으므로 여기서 약현 성당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또 성당 근처에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의 집이 있었고, 신유박해(辛酉迫害)·기해박해(己亥迫害)·병인박해(丙寅迫害) 때 44명의 천주교도들이 이곳과 가까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므로 이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1891년에 착공하였는데 당시 주임신부인 두세(Doucet:한국명 丁加彌)가 공사를 감독하였고 이듬해 성당을 준공하였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1892년에 준공되었으며, 벽돌 구조로 건평 120평, 면적 1,309㎡이다. 고딕·로마네스크 양식의 지상 1층 건물로 프랑스 신부 코스트(Coste:한국명 高宜善)가 설계하였다.